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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치료

<오쇼> 웃음에 대해

작성자작약|작성시간12.06.06|조회수43 목록 댓글 0

웃음은 종교의 근본이다.

 

심각성은 결코 종교성이 아니며, 종교적이 될 수도 없다

 

심각성은 자신의 에고에서 나오는 것이며 병의 근원이다.

 

웃음은 에고가 사라진 상태다.

 

 

 

 

그렇다.

 

그대가 웃을 때와 종교적인 사람이 웃을 때는 차이가 있다.

 

그대는 언제나 남들에 대해서 웃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그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인간 존재의 우스꽝스러움에 대해서 웃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삶의 축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심각한 사람은 불구자이다.

 

그는 스스로 장애물을 만든다.

 

그는 춤출 수 없다.

 

그는 노래부를 수 없다.

 

그는 축제와는 멀어진다.

 

축제의 차원은 그의 삶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그는 사막처럼 된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하나의 사막이라면 그대는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가장할 수 있지만

 

사실 그대는 종교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떤 종파에 소속된 사람은 될 수 있을지언정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다.

 

기독교인, 힌두교인, 불교인, 자이나교인, 이슬람교도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종교적이 될 수는 없다.

 

그대는 어떤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대는 이론을 믿는다.

 

이론에 너무 많이 집착하는 사람은 심각해진다.

 

짐을 벗은 사람은, 어떤 이론의 짐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비로소 웃기 시작한다.

 

존재의 놀이는 실로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웃음밖에 없다.

 

웃음만이 유일한 기도, 감사가 될 수 있다.

 

 

중국에는 '웃는 부처'라고 부르는 위대한 신비가 포대화상이 있다.

 

포대화상은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신비가 중의 하나이다.

 

그는 한 마디의 가르침도 준 적이 없다.

 

다만 깨달음을 얻자 그는 웃기 시작했다.

 

누군가 "당신은 왜 그렇게 웃는가?" 라고 물으면 그는 더 크게 웃곤 했다.

 

포대화상은 웃으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곤 했다.

 

자연히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계속해서 웃었다.

 

그의 웃음은 아주 전염성이 강했다.

 

군중 속의 어떤 사람이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그때 다른 누군가도 웃고, 그리하여 군중 전체가 웃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웃었는가? 저마다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이 사람은 미쳤으니까 웃지만 우리는 왜 웃는가?"

 

모든 사람이 웃으면서 약간씩 걱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무어라고 생각할 것인가? 웃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웃고 있다니."

 

하지만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기다리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까지 그토록 전체적으로, 강렬한 웃음을 웃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웃음은 어찌나 강렬했던지 웃음 뒤에는 그들의 모든 감각이 훨씬 예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눈은 더 잘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마치 무거운 짐을 벗은 것처럼 가벼워졌다.

 

사람들은 포대화상에게 또 오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러면 그는 웃으면서 다른 마을로 떠나곤 했다.

 

깨달음을 얻은 뒤 거의 45년 동안 그는 오직 한 가지만을 했는데, 그것은 바로 웃음이었다.

 

웃음이 그의 메시지, 그의 복음, 그의 경전이었다.

 

중국에서 포대화상만큼 존경받는 인물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거의 모든 집에 포대화상의 상이 있다.

 

포대화상은 웃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토록 존재 깊은 곳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웃음을 듣는 사람의 존재를 자극하여 웃음의 공명 현상을 일으켰던 것이다.

 

 

포대화상은 특별하다.

 

세계에서 포대화상만큼 많은 사람들을 웃게 만든 인간도 없다.

 

그것도 전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리고 나아가 모든 사람이 그 웃음에 의해서 에너지를 받고,

 

그 웃음에 의해서 정화되었다.

 

이제까지 전혀 느껴보지 못한 존재의 행복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존재 깊은 곳에서 무언인가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종을 치기 시작했다.

 

이 포대화상은 매우 중요하다.

 

지구상에 포대화상같은 사람이 존재했던 적은 매우 드물다.

 

실로 불행한 일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포대화상 같아야 한다.

 

더 많은 절과 교회들이 웃음과 춤과 노래로 흘러넘쳐야 한다.

 

심각성을 잃는다면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사실 심각성을 잃으면 더욱 건강해지고 전체적으로 된다.

 

하지만 웃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웃음을 잃는 순간 갑자기 그대는 그대 존재의 축제 분위기를 잃게 된다.

 

그대는 색채가 없어지고, 단조로와지고, 어떤 의미에선 죽은 인간이 된다.

 

그때 그대의 에너지는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포대화상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포대화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차원의 축제 분위기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대가 온갖 이론, 개념 정의, 이데올로기, 신학, 철학들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있다면

 

그대는 이 포대화상이 무엇인지, 그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포대화상은 그대를 바라보면서 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포대화상은 한 인간이 그토록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이없어서 웃을 것이다.

 

그대는 마치 요리책을 사려고 하면서 음식을 요리하는 일을 잊은 사람과 같다.

 

그대는 음식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이런저런 논쟁을 일삼는다.

 

하지만 언제나 배가 고프다.

 

언제나 죽을 지경이다.

 

그리고 그대는 사람이 책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었다.

 

지금까지 세상이 그렇게 해왔다.

 

사람들은 종교가 토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었다.

 

종교는 그대의 몸 속에서 소화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피 속을 돌고 돌아야 하며, 그대의 뼈와 골수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에 대해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생각이라는 것은 존재의 가장 피상적인 부분이다.

 

그대는 그것을 몸 안에 흡수해야 한다!

 

하지만 한 줄기의 빛, 하나의 진리가 탄생할 때마다 돌연 학자들이 모인다.

 

지식인들, 교수들, 철학자들, 이론가들이. 그리고 그들은 그 진리에 달려들어 씨름을 한다.

 

그들은 그것을 죽은 이론과 경전으로 틀을 만든다.

 

그래서 살아남는 것은 종이조각뿐이다.

 

진짜 장미는 사라진다.

 

 

한번은 내가 기독교를 믿는 한 친구의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의 성경책을 살펴본 적이 있다.

 

성경책 갈피 사이에 장미꽃잎이 있었다.

 

아마도 친구가 장미꽃잎을 따서 그 속에 담아 두었던 모양이었다.

 

성경책 갈피 사이에서 장미꽃잎은 바싹 바르고, 죽고, 짓눌려져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친구는 목욕탕에 있다가 뛰쳐나와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 무엇 때문에 웃는가?"

 

나는 말했다.

 

"이 장미에게 일어난 것과 똑같은 일이 진리에게 일어났다.

 

너의 성경책 속에서 장미는 죽었다.

 

이제 그것은 과거의 어느날 살아있던 것에 대한 하나의 기억,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장미는 사라졌다.

 

모든 생명력은 가버렸다.

 

그것은 종이꽃이나 플라스틱꽃처럼 죽었다.

 

그것에게 과거는 있지만 미래는 없다. 과거는 존재하지만 아무런 가능성도 갖고 있지 않다.

 

똑같은 현상이 진리에게 일어났다.

 

경전의 모든 페이지들 속에서 진리는 죽고 말았다."

 

 

진리가 깨달아질 때 그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침묵이다.

 

그것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서는 표현될 수 없다.

 

그때 머지않아 사람들이 와서 그것을 언어화하고, 그것에 체계를 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 체계화 과정 속에서 진리는 죽는다.

 

'웃는 부처' 포대화상은 일반적인 종교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그의 전 생애는 끝없는 웃음의 연속이었다.

 

포대화상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가 잠을 자던 중에도 이따금씩 웃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커다란 아랫배를 갖고 있었는데 잠 속에서도 그 배가 흔들리곤 했다.

 

사람들이 포대화상에게 묻곤 했다.

 

"심지어 자면서까지 웃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웃음은 그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이 그의 웃음을 자극했다.

 

그렇게 되면 깨어 있든 잠자고 있든 삶 전체가 하나의 희극으로 다가온다.

 

그대는 삶을 하나의 비극으로 바꾸었다.

 

그대의 삶을 비극적인 혼란 상태로 만들었다.

 

웃을 때조차도 그대는 웃지 않는다.

 

그대의 웃음까지도 가장되고, 강요되고, 조작되고, 통제된 웃음이다.

 

그 웃음은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뱃속에서 나오는 웃음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표면에만 살짝 칠해진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웃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유 때문에 웃는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작은 사무실에서 사장이 몇번이나 말한 적이 있는 상투적인 우스갯소리를 또 꺼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 모두는 그 이야기가 지겨웠다.

 

하지만 사장은 어디까지나 사장이다.

 

그리고 사장이 우스갯소리를 할 때는 그대는 무조건 웃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의무이다. 그런데 그때 타이피스트인 한 여사원만이 웃지 않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똑바로 앉아 있었다.

 

사장이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왜 자네는 웃지 않는 거지?"

 

타이피스트는 말했다.

 

"저는 이번 달에 사표를 내거든요."

 

 

그렇다면 웃을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웃음의 이유를 갖고 있다.

 

웃음조차도 사무적인 것이다.

 

모든 웃음은 경제적, 정치적이다.

 

웃음조차도 단순하지 않다.

 

순수성이 온통 상실되었다.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순수하게, 단순하게, 어린아이처럼 웃을 수 없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순수하게 웃을 수 없다면 그대는 그대의 순결함, 그대의 순수성, 그대의 순진무구함을 잃은 것이다.

 

 

어린아이를 보라.

 

그의 웃음을 보라.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웃음을.

 

아이가 태어나서 첫번째로 배워야 할 사회적 행위는 미소짓는 일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그 능력을 갖고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미소는 첫번째 사회 행위이다.

 

미소를 지음으로써 아이는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른 일들은 나중에 배울 수도 있다.

 

아이가 웃을 때 그것이 세상에서의 그의 첫번째 존재의 불꽃이다.

 

아이가 웃는 것을 볼 때 어머니는 더없이 행복해진다.

 

그 웃음은 건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 웃음은 지성을 나타낸다.

 

그 웃음은 아이가 우둔하지 않음을, 백치가 아님을 나타낸다.

 

그 웃음은 아이가 생존해 있음을, 행복함을 나타낸다.

 

그 웃음에 어머니는 더없이 행복해진다.

 

웃음은 인간의 첫번째 사회적 행위이며, 언제까지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행위로 남는다.

 

인간은 전 생애를 통해 계속해서 웃는다.

 

그대가 만일 어떤 종류의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가 그 상황을 수용할 능력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수용은 그대를 성장시켜 줄 것이다.

 

나는 울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웃을 수 없다면 그대는 울 수도 없다.

 

웃음과 울음은 함께 존재한다.

 

그 둘은 진실하고 진정한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눈물이 메말라 버린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눈은 광채를, 깊이를 잃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은 수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릴 수 없기 때문이다.

 

눈물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없는 것이다.

 

웃음이 반쪽 웃음이라면 울음 역시 반쪽 울음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잘 울고 웃을 수 있다면 그대는 살아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웃을 수 없으며 울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심각해질 수 있다.

 

가서 시체를 보라.

 

죽은 사람은 그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기술적으로 심각해질 수 있다.

 

오직 산 사람만이 웃고 울며 눈물 흘릴 수 있다.

 

웃음과 울음은 그대 내면 존재의 무드이며, 분위기다.

 

하지만 서서히 사람들은 그것을 상실한다.

 

처음에 자연스러웠던 것이 점차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대를 웃음으로 몰아넣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누군가 그대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혀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웃는다.

 

그래서 세상에는 그토록 많은 유머가 존재하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유머들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깊은 불행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슬픈 처지를 잊기 위해 유머를 창조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훨씬 오래 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토록 많은 불행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고통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억압받고 살해당했다.

 

그 비참함을 잊기 위해 그들은 유머 감각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구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재미있고, 가장 심오한 농담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무언가 우리를 웃게 만드는 것이 있을 때만 웃는다.

 

농담을 들으면 그대는 웃는데, 그것은 농담이 그대 안에 어떤 흥분된 기분을 만들기 때문이다.

 

농담의 메카니즘은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진행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꾼다는 것이다.

 

그 전환이 너무나 갑작스럽고 극적이기 때문에 그대는 미처 상상할 수 없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흥분이 커지면서 그대는 어떤 결말을 기대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대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결말이 나타난다.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무언가 아주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이, 그대의 기대에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 나타난다.

 

농담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다.

 

농담이 논리적이라면 웃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농담이 이야기되고 있는 동안에 이미 그대는 결론에 도달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삼단논법, 단순한 산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농담에는 전혀 웃음이 없다.

 

농담은 돌연 한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그것은 그대의 상상을 뛰어넘는, 그대가 추측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변화다.

 

놀라운 비약, 일종의 양자 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그대를 간지럽히는 방법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농담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그대가 종교인이 될까봐 겁나기 때문이다.

 

그대는 심각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따금 그대를 간지럽혀야 한다.

 

그래서 그대가 종교인이 되려는 성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거듭거듭 그대를 지상으로 되돌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심각해지려는, 자꾸만 심각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심각성은 암세포와 같은 것이다.

 

 

그대는 '웃는 부처' 포대화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웃음은 건강을 준다.

 

이제는 의학계에서조차 그것을 말한다.

 

웃음은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한 가장 효능있는 약이라고.

 

만일 그대가 아플 때 웃을 수 있다면 그대는 머지않아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웃지 못한다면 비록 지금은 그대가 건강할지라도 머지않아 그대는 건강을 잃고 병들 것이다.

 

웃음은 그대의 내면의 원천으로부터 그대 존재의 표면으로 어떤 에너지를 가져다 준다.

 

하나의 에너지가 그림자처럼 웃음을 따른다.

 

이것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진정으로 웃을 때 그 한순간 그대는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간다.

 

사념이 멈춘다.

 

웃으면서 동시에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완전히 정반대의 현상이다.

 

웃든지 생각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그대가 진정으로 웃는다면 사념이 멈춘다.

 

만일 그대가 계속 머리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웃음은 그냥 그저그런 웃음일 것이다.

 

웃음 뒤에 꼬리가 남을 것이다.

 

반쪽 웃음이 될 것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웃을 때 갑자기 사념이 사라진다.

 

무심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선의 방법이라면 웃음은 그러한 경지를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 중의 하나다.

 

내가 아는 한 춤과 웃음이 최상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접근하기 쉬운 문이다.

 

만일 그대가 완전히 몰입해서 춤을 춘다면 사념이 멈춘다.

 

그대는 빙글빙글 춤을 춘다.

 

하나의 회오리바람처럼 회전한다.

 

모든 장애물들, 모든 구분선이 사라진다.

 

그때 그대는 그대의 육체가 어디서 끝나고 존재가 어디서 시작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대는 존재계로 녹아들어가고 존재계 전체가 그대 속으로 녹아든다.

 

거기 경계선이 사라진다.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춤을 추고 있다면,

 

춤을 인위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춤이 그대를 이끌어가도록 허용한다면,

 

춤에 그대를 완전히 내맡길 수 있다면 그 순간 사념이 정지한다.

 

똑같은 현상이 웃음에도 일어난다.

 

만일 그대가 웃음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면 사념이 멈춘다.

 

일단 한 순간 무심의 상태를 맛보았다면 그대 스스로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웃음은 무심의 상태로 향해 가는 좋은 서곡이다.

 

 

'웃는 부처' 포대화상은 자신을 선사라고 칭하거나 자기 주위에 제자들을 모으려는 욕망을 전혀 갖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그는 주위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사탕과 과일과 빵이 가득 담긴 포대를 등에 짊어지고서 거리를 걸었다

고 한다.

 

그 아이들은 때로 정말로 어린아이들이기도 했고, 때로는 젋은 어린아이들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늙은 어린아이들이기도

했다.

 

나이든 사람들, 포대화상 자신보다 더 나이든 사람들, 그들 역시 포대화상에게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사실 포대화상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순진무구한 상태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면 포대화상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나누어주곤 했다.

 

장난감, 과자, 사탕... 이것을 통해서 그는 무언가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포대화상이라는 한 종교적인 사람이 그대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삶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그것은 장난감에 불과하다.

 

삶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그것은 사탕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맛보라.

 

그러나 그것에 사로잡히진 말라.

 

그 속에는 아무런 영양분도 없다.

 

그 속에는 아무런 진리도 없다.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만으로 살 수는 없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예수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사람이 사탕만으로 살 수 있는가?

 

최소한 빵은 그 속에 자양분을 갖고 있다.

 

사탕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결국 해가 될 뿐이다.

 

어린아이와 나이먹은 사람들에게...

 

그는 언제나 모든 사람을 어린아이처럼 다루었다.

 

그는 그들에게 장난감을 주곤 했다.

 

실로 암시적이다.

 

세상이 단지 하나의 장난감과 같은 것임을 일깨워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대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그 삶은 아무런 실체가 없다.

 

그것은 하나의 허구, 덧없는 꿈이다.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

 

그대가 명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대는 주위에게 준다.

 

나누어 갖는다.

 

쌓아두지 않는다.

 

소유하지 않고 구두쇠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그대가 무엇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대는 이곳에 없었지만 세상은 이곳에 있었다.

 

어느 날 그대는 이곳에 없을 것이지만 세상은 여전히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대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대가 "내가 주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대가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있는가?

 

만일 그대가 명상적이라면 그대의 전 생애는 하나의 나누어 갖는 일이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줄 것이다.

 

그대의 사랑, 그대의 이해, 그대의 자비...

 

그대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줄 것이다.

 

그대의 에너지, 몸, 마음, 영혼, 무엇이든지.

 

그리고 그대는 그것을 즐길 것이다.

 

어떤 것을 나누어 갖는 것만큼 더 큰 즐거움은 없다.

 

그대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어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선물을 주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이다.

 

그대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줄 때...

 

그것은 아마도 가치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가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준다는 행위 그 자체가 그대에게 큰 만족을 준다.

 

자신의 전 생애가 하나의 선물인 사람을 생각해 보라!

 

매 순간이 나눔인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는 천국에서 산다.

 

거기 그 이상의 천국이 없다.

 

그것이 포대화상의 가르침이었다.

 

 

나누어 주라!

 

그것말고 어떤 것을 또 말할 수 있는가?

 

그밖의 어떤 것을 가르칠 수 있는가?

 

선에서는 진리는 말로 표현될 수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몸짓이나 행동으로는 표현할 수 있다.

 

말할 수는 없지만 보여줄 수는 있다.

 

집착하지 말라. 하지만 여기에 남으라.

 

왜냐하면 여기밖에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이 유일한 세계다.

 

다른 세계는 없다.

 

절과 수도원과 히말라야의 동굴에 앉아 있는 수도승들은 현실 도피자다.

 

집착을 버려라!

 

하지만 달아날 필요가 없다.

 

집착을 버려라,

 

하지만 여기에 있으라.

 

세상 속에 있으라,

 

하지만 세상의 소유물이 되지는 말라.

 

군중 속에 있으라,

 

하지만 홀로 남아 있으라.

 

수천 가지의 일을 하라.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

 

하지만 그 행위자가 되진 말라.

 

에고를 키우지 말라.

 

그것이 전부다.

 

세속에 남아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은 없다.

 

세속에 있으라,

 

하지만 초월적으로 존재하라.

 

그것이 바로 기술이다.

 

두 극 사이에서, 두 반대되는 극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삶의 기술이다.

 

그것은 면도날처럼 매우 비좁은 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균형을 잃는 순간 그대는 진리를 잃을 것이다.

 

이 세상 속에, 지금 여기에 남아 있으라.

 

그리고 그대의 길을 계속 걸어가라.

 

그대의 존재의 깊은 웃음을 계속 표현하라.

 

신에게로 가는 그대의 길을 춤추면서 가라.

 

 

노래부르면서 신에게로의 길을 가라.

 

 

 

-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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