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타지식

[스크랩] 약초꾼 허씨와 화개 사람들(2)

작성자우리민족333|작성시간12.05.01|조회수23 목록 댓글 0

허씨하고 산에 가려고 늘 별렀으나 서로 바빠서 해를 넘기고 말았다.

겨우내 고향에 가  있던 허씨가

고로쇠 물이 나기 시작한 정월 대보름에 화개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벚꽃이 피고 질 때까지

틈을 내지 못하고 서로 우두망찰하였다.

꽃이 진 벚나무에 새순이 돋고 북적대던 상춘객이 줄면서

골 안이 잠잠해지자 우리는 그새 미루어 왔던 숙제를 풀기로 하였다.

내일 새벽에 허씨가 칠불사를 거쳐 토끼봉까지 오르며

산나물을 캐러 간다고 하기에 따라 가기로 하였다.

하숙집 주인에게 도시락을 주문하였다.

그녀는 지난가을에 잡아 두었던 알밴 은어를 굽고

그 알로 담은 젓을 반찬으로 한 별미

도시락을 챙겨 주었다.


칠불사 입구에서 길도 아닌 풀숲으로 마구 질러 들었는데,

아마도 그들만이 다니는 길 같았다.

희미한 길이 우거진 수풀 사이로 아슬아슬 이어졌다.

성큼성큼 내 딛는 허씨의 발자국을 뒤따르며

나는 불안한 마음을 지그시 눌러야만 했다.

숨 고르게 걷는 그를 뒤 따르는 나는 산자락에서부터

숨이 차고 입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했다.


한참을 오르다가 바위 밑 그늘막에 이르러서야

쉬면서 지친 숨을 달래게 되었다.

꼿꼿하게 앉은 채 양손에 모아 쥔 지겟작대기는 그와 한 몸 같았다.

문득 내 발치로 달려드는 독사에 놀라서 펄쩍 뛰며 일어나자,

봄 뱀은 독도 없는 게 아무에게나 달려든다고

혀끝을 차면서 작대기를 내 뻗어

천천히 뱀의 머리를 풀숲 쪽으로 돌려놓았다.

방정맞은 내 행동이 민망해서

"뱀도 돈이 될 텐데 왜 그냥 버리느냐"고 무색한 핀잔을 하자,

“나는 약초만 캐지 땅꾼은 아니라네,"

라면서 아직도 멈칫대는 뱀을 숲으로 이끌어 주었다.

앉은 자리 둘레를 쑤석여 더덕 몇 뿌리를 캐 담았다.

남은 더덕을 마저 캐자고 아는 체를 하였으나

남은 것들은 캐기에 아직 어리다며 그냥 갈 길을 서둘렀다.

속물근성을 보인 내 언행이 참 부끄러웠다.


한참을 더 걸어서 산 등에 올랐다.

내 산행 이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어느새 토끼봉 마루가 코앞에 나타나고 지리산 주능선 연봉들이 줄지어 드러났다.

산행거리와 시간을 가늠하였지만 도무지 셈이 되지 않았다.


가시나무가 우거진 덤부렁에서 짐을 풀었다.

산 등에서 남향으로 어슷하게 비켜선,

시골집 텃밭만한 양지가 두릅나무로 빼곡하였다.

막 돋아난 새순에서 퍼져나는 두릅 향이 봄볕에 녹아나

온 둘레에 넘쳐흘렀다.

그 향기에 홀려 나는 잠시 넋이 나갔다.

허씨는 두릅을 따는 것이 오늘의 일인 냥

쉬지 않고 가지 끝에 달린 새순을 솎아서 따 냈다.

가시 돋친 나무를 아기 다루듯이 조심하는 그의 손길이 부드럽고 정다웠다.

그가 점심상을 차렸다.

보리 섞은 잡곡밥에다가 된장 고추장에 껍질 깐 더덕과 생 두릅을 버무려 놓았다.

주춤거리며 맛을 보았더니 내 도시락은 여벌이었다.

산채의 향기가 은어의 비린내를 저만치 밀쳐버렸다.


토끼봉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가에서

더덕을 조금 더 캐 담고서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내내 그의 맨발과 고무신이

이태리제 내 등산화를 초라하고 부끄럽게 하였다. 

 

 

 

           

첫산행 뒤로 한주가 흐르자 날이 더워지면서 숲은 나날이 검푸르게 살아났다.

봄이 한창이었다.

도청에 신청한 사업 허가서류는 담당 책상 속에서 잠을 자는지

소식이 감감한 채 진전이 없어서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하릴없이 빈둥대다 낮부터 심심풀이로 동네 사람들과 고스톱을 쳤다.

술내기 밥 사기 정도일 줄 알았던 놀이판이 밤이 늦도록 이어지며

노름판이 되었고, 나하고 차 농사를 하는 정씨가 큰돈을 잃고 있었다.

돈을 잃은 나보다도 옆에서 구경을 하는 허씨가 더 안절부절 못하였다.

머리를 식히려고 잠시 밖으로 나오니 그믐달이 감나무 끝에 걸려있다.

‘그믐달’을 쓴 작가가 누구였더라..., 지끈거리는 머리로는 통 기억나지 않았다.

그 글에서 저 달은 노름꾼이 오줌을 누면서 바라보는 달이라더니 내가 꼭 그 꼴이 되고 말았다.

달을 보고 후회하고 있는데 허씨가 따라나왔다.

놀이패 가운데 양봉하는 김씨가 소문난 타자이고,

기술을 쓰는 것 같으니 이제 그만하고 낮에 어디를 같이 가자고 했다.

핑계가 없어서 질질 끌려온 판이라 잘됐다 싶어서 노름판에서 빠졌다.


늦잠에서 깨어나 벌써 채비하고 기다리는 허씨 뒤를 따랐다.

국사암을 뒤로 돌아 경사가 급한 계곡 길로 들었다.

인적이 별로 닿지 않은 그들만의 길이었다.

너덜지대 돌무더기를 밟고 바위를 타고 넘느라 무척 힘들었다.

번번이 그가 내미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크고 작은 바위를 타고 넘어 산등에 올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는 벌써 삼신 봉으로 가는 등줄기의 중간 참에 와 있었다.

축지법을 쓴 것도 아닌데 두세 시간은 걸려야 할 거리를 한 시간 만에 질러 와 있었다.


그는 충주댐 바닥으로 수몰된 월악산 아랫마을에서 자랐으며 약초채집은 가업이었다 했다.

그는 산에서 결혼하였고 자식들을 낳고 키워서인지

산에만 오면 근심 걱정이 없어진다 했다. 산삼을 캐봤느냐고 하니까,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여," 라며 빙긋 웃었다.


볕이 좋은 바위 위에 나를 남겨둔 채 허씨는 혼자 바위 남쪽의 벼랑을 타고 내려갔다.

보조 팔이 되었다 다리가 되면서

위태로운 자세의 균형을 잡아주는 작대기가 신기하기만 하였다.

버둥대던 벼랑턱 바위틈 앞에서 편하게 자리를 잡더니 조심스레 무엇을 꺼내었는데, 꿀이었다.

말로만 듣던 산 꿀, 석 청이라고도 하고 석 밀이라고 하는 귀한 것이었다.

객지 밥이란 아무리 잘 먹어도 집에서만은 못한 법인데,

일에 신경을 쓰느라 심신이 지친데다,

술을 자주 마시는 내 건강이 걱정이라면서 한 덩이를 떼어주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어리뚝하고 있자니까,

밀랍 채 씹어서 꿀만 짜 먹고 찌기는 뱉어내라며 시범을 보여주었다.

석 청의 향기와 단맛이 목젖을 타고 속까지 퍼지며 싸하게 위벽을 적셔주더니

드디어는 얼얼해지는 게 마치 독한 술 몇 잔을 걸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가짜 꿀 장사에게 돈 잃고 쓰린 속이 단박에 풀렸다.

떼어 온 꿀이 그와 내가 먹기에 딱 맞았다.

더 없느냐고 물었더니, 벌이 먹어야 할 큰 덩어리는

그대로 두었다면서 싱긋 웃고 말았다.


오늘은 내 몸보신이 주목적이었던지 약초는 캐지 않고

둘이서 너럭바위 위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늦봄의 볕을 한껏 쬐었다.

등산로로 내려오는 길은 편했고 우울했던 마음도 산바람처럼 맑아졌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