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물은 금세 불었다가 감쪽같이 빠진다.
폭우가 만든 흙탕이 가라앉기까지 하루나 이틀만 지나면 누렇던 탁류는 어느새 가라앉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나 몰라라 하면서 말짱하게 제 물빛을 뽐낸다.
수정같은 바탕 위에 하늘색을 머금은 물빛은 쪽빛보다 더 곱다.
섬진강은 진안과 장수의 경계인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임실과 곡성을 거쳐
구례 하동 광양을 뒤로하고 바다로 드는, 짧지만 참 아름운강이다.
지리산 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쳐지며 수질이 더욱 맑아진다.
은어와 재첩, 참게가 살고 바다가 가까운 덕에 강과 바다를 오락가락하는 고기들이 화개까지 올라온다.
보성강 물이 보태지는 압록(鴨綠)은 이름처럼 물빛이 오리의 목털 색이라
이 강의 또 다른 얼굴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구례에서 하동 포구에 이르는 백 리 물길은 강기슭에 지리산과 백운산을 거느리며
굽이굽이 휘돌아 친다.
강 따라 산자락을 돌아가는 강가의 풍경은 자연이 만든 걸작품이다.
그 길을 따라서 지나노라면 그 맛과 멋이 계절에 따라 수없이 바뀐다.
봄이면 강가에 매화와 진달래, 벚꽃과 배꽃이 차례로 흐드러지고,
여름이 되면 지리산과 백운산의 우거진 숲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저 잘난 얼굴을 내세우며 사람의 혼을 빼앗아 간다.
단풍이 녹아든 가을에는 알록달록한 물빛이 영롱하여 보석처럼 빛이 난다.
낙엽이 지고 숲이 옷을 벗으면 섬진강은 비로소 본바탕을 드러낸다.
가루 고운 모래가 반짝이는 둔치를 끼고서 은빛 비단 띠가 되어 얌전히 흐르는
강물의 자태는 꾸미지 않은 귀부인의 거동처럼 고매하다.
불었던 물이 빠지며 흙탕이 가라앉고 있을 때
허씨가 쪽 대를 들고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하였다.
고기들은 세찬 물살을 즐기려고 이럴 때 계곡으로 올라오는 법이라며
물가의 수초 밑을 쪽대로 간단하게 훑었다.
이름도 모르는 고기들이 한 움큼씩 잡혔다.
피리, 꺽지, 기름쟁이, 쇠치, 동자개들이라고 했다.
나도 따라서 채 질을 해보았지만 쉽지 않아서
포기한 채 그저 몰이꾼 역할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순식간에 한 냄비를 채우고 허씨 부인에게 탕을 끓이라 하여 매운탕 파티를 하였다.
갓 잡아 요리한 탕 맛은 별미였다.
된장으로만 간을 하여 풋고추로 매운맛을 내고 얼갈이배추를 곁들여
푹 끓인 탕은 비린내 하나 없이 맑고 시원하여서 처음 먹는 참 맛이었다.
허 씨 부부는 서로 닮기도 하였지만 심성은 더하여 둘인지 하나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술을 사려는 나를 억지로 막더니 허씨 부인이 큰 더덕이 생동하는 술병을 하나 까 냈다.
더덕향이 그윽한 술과 처음 맛보는 탕의 진미에 나는 거침없이 식탐을 하였다.
참으로 멋지고 맛난 파티였다.
술상을 치우고 허씨와 나는 평상 위에 호젓하게 앉았다.
과묵한 그가 묻지도 않은 말을 시작하였다.
지나간 산 생활이 사십 년을 넘었으나 가업을 더 잇지 못할 것이 안타깝다고 하였다.
그동안 산을 좋아하는 나에게 약초를 알려주면서
그런 허전함을 이겨낼 수 있어서 고맙다고 하였다.
명문대 장학생이 된 그의 외아들에게 약초꾼 가업을 이어받으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지금이라도 다른 누구를 가르쳐서 대를 이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마땅한 사람이 드물고 너무 늦었다고 하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우리가 십 년 전에만 만났으면...,”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이때서야 나는 허씨와 내 본질의 차이를 알았다.
그는 산처럼 살았으나 나는 산에 다니는데 그쳤고,
그가 산이라면 나는 등산객으로서 그 덕을 누리기만 한 시혜자 와 수혜자 관계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산이 내게 베풀어 준 덕과 지혜가 헤아릴 수 없었으나
말하는 산을 따라다니며 보고 배운 체험은 이론에 덧부치는 실기와 같은 이치였다.
다시 묵묵해진 그와 나란히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듣는 매미 소리는
산이 부르는 여름 찬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