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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초꾼 허씨와 화개 사람들(10)

작성자우리민족333|작성시간12.05.02|조회수56 목록 댓글 0

차는 참 희한한 나무다.

찔레꽃을 닮은 희고 작은 꽃이 늦가을과 초겨울 새에 피고 열매는 겨울을 난다.

그래서인지 다른 농작물과 달리 찬 바람이 가시기 전인 음력 정월 대보름을 앞뒤로 새순이 돋아나고, 막 움터서 참새 혀를 닮은 새순을 따는 것으로 수확을 시작한다.

곡우 이전 까지 돋아나는 앳닢를 따서 볶은 것을 우전차라 하여 으뜸차로 우대 한다

그러나 봄 내내 새싹은 돋고 또 돋아나 보리가 익을 무렵까지 수확은 이어지며 차농사를 하는 이곳 사람들은 그 때까지가 농번기이다.

한참 소출이 많을 때는 먼 외지에서까지 일꾼을 불러다 쓸만치 일손이 바쁜 것이 차농사이다.

이곳은 전라도 보성의 재배차와는 달리 자연산 차라서 맛이 각별하게 좋다.

전통 방식에 따라 손으로 조금씩 만들기 때문에 값이 훨씬 비싸다.

 

차 농사꾼 정씨는 누대로 이곳에 터 박고 사는 토박이다.

그의 가친은 이곳 중등학교의 교장직을 정년퇴직하고서 집에서 소일하고 있지만,

이 고을의 존경받는 스승이다.

팔순을 눈앞에 두었는데도 뒷모습은 육십 대처럼 꼿꼿하다.

수년 전에 상배하고서 고적한 노후를 정씨 부부의 효심을 위안삼으며 서예로 소일한다.

차를 만드는 정씨네 집 널찍한 울 안에는 감나무가 가득하여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곶감 깎기가 큰 일이다.

어른은 감껍질을 손수 깎아서 알맹이를 실에 꿰어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

그렇게 잘 말리고 숙성시켜 맛난 곶감을 수십 접을 만든 다음, 한 접씩 일일이 포장하여

우선 객지에 있는 가족과 친지에게 돌리고, 다음으로 경향 각지에서 흩어져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고향의 맛이라며 선사 한다.

그러고도 남은 나머지는 수시로 찾아오는 래방객에게 화개의 맛이라며 안겨준다.

나도 지난 겨울에 그런 곶감 한 접을 선물 받고서는 감격했었다.

이런 가친을 지성으로 모시는 정씨는 일상의 모든 점에서 남달랐다.

쉽지 않은 차농사와 제다를 손수 하는 일상도 그렇지만 잠시 우리와 즐기는 일탈에서 조차도 자세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좌중의 기분을 잡친다거나 흥을 깨는 경우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의 가친이 풍기는 선비의 멋이 원형으로 정씨의 일거수일투족에 녹아들어있었다.


솔 장작으로 데운 가마솥에 애벌 비빈 찻잎을 다시 또 덖(볶)는 일이란

보기에도 만만치가 않았다.

한번 덖어 낸 차를 또 다시 재벌 비비고, 비빈 다음 그늘에 말리고

그러기를 여러 번 되풀이 하다 보면 처음에는 참새 혓바닥 만 하던 찻잎이 어느덧 깨알만하게

졸아들어 솥바닥에 얕게 깔리고 마는데,

부피가 줄고 줄어 처음 것의 일할도 못 미칠 정도가 되어야 완성품이 되었다.

나도 한번 해보자고 나섰으나 손바닥이 화끈거려서 잠깐도 더 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정씨의 손바닥에는 손금이 흐릿하여 분간이 잘 안되었다.

그렇게 손금을 지워가며 진종일 일해야 찌꺼기를 걸러내면 으뜸차 열 통을 채우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공을 들여 만들어진 으뜸차는 이런 과정의 노고를 알면서 즐겨야 마땅할 터인데,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초의선사와 추사가 주고받으며 즐겼다던 다도의 경지는 어떠했을까...

초의선사는 늘 손수 찻잎을 따서 홀로만의 비법으로 차를 만들었고

다도를 바로 아는 추사를 포함한 몇몇에게만 그 차를 보내주었다고 했다.

 

허씨와 정씨는 참 잘 어울린다.

우선 말 없이도 서로 통하고 지칠줄 모르고 차를 덖고 비벼대는 둘의 모습은

질박한 농심을 넘어선 종교적인 자세이다.

그래서인지 허씨는 산에 가지 않을 때는 늘 정씨의 차막에서 일을 도운다.

구경만 하기에 따분해진 나는 장작을 패주며 거들지만 그 일도 어렵다.

주로 소나무 장작을 쓰는데, 은은한 불땀을 맞추려면 장작은 가늘게 패야만 했다.

더러는 망치기도 하고 더러는 쓸만하게 패 대면서 둘이 하는 일을 즐거이 거들었다.

그렇게 바쁜 제다 일도 장마 전이면 끝이 난다.

대개는 주문에 맞춤이었던 으뜸차가 모두 주인들을 찾아가고 나면,

이어서 나는 찻잎으로 후속 등위품들을 만들지만 정씨는 그 일은 고용인들에게 맡기고 쉬면서 우리와 소일을 한다.

근처에서 손꼽히게 큰 차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씨는 우전차만 만들고나면

그만 일손을 놓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는 선비의 자존심과 명예를 아는 장인이었다.

장작을 팬 노고의 답례로 으뜸차 두통과 찌끼차 한봉지를 선물받았다.

그 귀한 선물을 상경하여 집에다 두었는데,

그 가치를 모르는 내 처와 동네 아낙들이 서로 나누어서 헤프게 소모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었다.

찬바람 속에서 비탈진 차밭을 오르내리며 찻잎을 따고,

그것을 수도 없이 비비고 볶아서 으뜸차로

만든 정씨의 정성을 배신한 아내의 행위가 미웠지만 무지의 소치라 치부하며 속만 끓였다.


다른 차막들은 거의 다 쇠어가는 요즘의 잎으로도 차를 만든다고 연기를 피워 대지만

정씨는 심심한 한마디를 툭 툭 내던지며 오늘도 나하고 김 선생부부하고

화투 놀이에 망중한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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