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타지식

[스크랩] 약초꾼 허씨와 화개 사람들(11)

작성자우리민족333|작성시간12.05.02|조회수20 목록 댓글 0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다.

횟집 어항에는 황어가 은어 자리를 차지하고 누치라는 멍청하게 큰 고기도 황어하고 같이 논다.

농익은 알밤이 아람되어 쏟아지려 하고 감도 발그레한 빛깔을 뽐내기 시작했다.

농토라고 해야 계단식 다랑논과 산비탈을 일군 돌밭이 고작이지만

사랑방 식구들은 그 논에 벼농사를 하고, 밭에는 고구마와 깨, 콩 등을 짓는다.

가실을 하느라 모두가 바빠서 사랑방은 잠시 휴업 중이다.


벼가 익으면서 송이 철도 따라왔다.

송이는 말 뜻대로 솔 버섯이다. 소나무 밑 둥이나 그 언저리에서 몰래 피어난다.

송이는 솔내음 섞인 버섯향과  쫄깃한 맛이 황홀하게 어우러진 먹거리다.

송이가 사는 터는 까다롭고 은밀하여 깊은 산 솔밭에서만 얼굴을 드러냈다.

하늘과 바람을 가늠하며 며칠을 벼르다가 허 씨는 이제 때가 되었으니 떠나자고 하였다.

사흘쯤 산에서 머물  채비로 새벽길을 나섰다.

먼저 와 봤던 피아골 연곡사 뒷길로 접어들어 산 등 중간 참에서 등고선을 그리며

동쪽으로 무찔렀다.

그 길은 여태껏 보아왔던 약초꾼들의 길도 아닌 무인지경이었고, 전인미답의 오지였다.

허씨는 거침없이 숲을 뚫고 나아갔다.

독이 오른 뱀들이 우리 앞을 수없이 지나치고 가로막았지만

허씨의 작대기가 마땅하게 처리하여 불편하지 않았다.


험한 길을 한참이나 질러가자 앞바람을 타고 진한 솔 향을 날리며

곧게 자란 아름드리 솔밭이 나타났다.

빽빽한 솔잎 사이로 아침햇살이 빗살처럼 퍼져 내렸다.

벅찬 숨을 고르려고 솔가리 수북한 나무 밑둥에 앉으려는 나를 허씨가 말렸다.

자세히 살폈더니 밑자리의 솔가리가 눈에 띌락 말락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조심스레 솔가리를 헤집는 허씨의 손 밑에서 채 피지않은 갓을 쓰고

앙증맞은 송이가 부끄러워한다.

"이쁘지러 나는 요놈 맨키로 이쁜 송이를 보면 초경을 시작한 소녀를 보는 것 같다닝께...

맘이 막 설레인단말여."

첫 송이를 캐 든 그는 참으로 기뻐하며 그놈을 내 코앞에 디밀어 주었다.

코를 찌르는 송이 향에 나는 어찔하여 잠깐 혼이 빠졌다.

이끼를 뜯어 신문지에 깔고 첫 송이를 곱게 싸 담았다.

솔밭 여기저기서 허씨는 족집게처럼 송이를 찾아냈다.

그 기미를 분간할 수 없어서 나는 그저 뒤따르며 이끼를 뜯고 싸 담는 일만 열심히 거들었다.

귀한 만큼 송이는 많지 않았다.

솔밭을 다 훑어서 여나므 개를 캐 담고서 그 곳을 뒤로한 채

또 등고선을 그리며 동쪽으로 무찔러 나아갔다.

숲에 가린 하늘은 다시 숨어버리고 어둡고 험한 길이 되었다.

벼랑을 내려서면 골이고 그 골을 넘어서면 또 다시 오르막 벼랑을 타고 넘어야 했다.

방향감각을 잃은 나는 몹시 불안하였다.


그의 발꿈치만 졸졸 따르면서 그가 했던 말을 되씹어 보았다.

한번 다녀봐서는 아무도 이런 길을 다시 찾기가 어렵다고 했었다.

이런 식이라면 몇 번을 뒤따라 다닌들 길 문을 터득하기는 커녕 미로 속을 헤매며 제자리 걸음만 할 터였다.

그 사이에 마주친 솔숲이 여럿이나 있었으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잔가지가 무성한 왜 솔밭에는 송이가 나지 않는다 하였다.

어렸을 때 산림녹화 한다며 민둥산에 수없이 심었던 나무들이

빨리 자란다는 명분을 앞세운 왜송들이었음을 철이 들고서야 알았었지만

그 가치가 이렇게 다름을 이제야 처음 알았다.

반나절이나 더 걷고서 송이 밭을 겨우 다시 만났다.

아까 보다 숲이 더 크고 울창하였다. 갓이 피고 쇠어서 다 자란 버섯들이 내 눈에도 띄었다.

화개장터에서 갓이 핀 송이도 눅은 값에 거래가 되는 것을 봤던 터라서

핀 것이라도 따가자고 했더니, "기왕 핀 버섯은 씨를 퍼트리게 놔 둬야 혀."

라며 허씨는 내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솔 숲이 큰만치나 송이도 많았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천천히 캐 담았어도 한짐은 넉히 되었다.

대충 한바퀴를 돌았다 싶자, 숲 언저리 평평한 자리에서 노숙을 하자면서 그가 먼저 짐을 풀었다.

해는 산등 위에 한 뼘쯤 남았으나 우리는 이른 밥을 지어 먹고 천천히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키를 넘는 고사리 잎을 베어다 바닥을 고른 다음 싸릿대로 바람벽을 세우고서

고사리 잎으로 지붕을 덮으니 근사한 초막이 되었다.

고사리 잎으로 싸릿대 틈새를 촘촘하게 막고서 안에 누워보니 아늑하고 편했다.

뱀 막이로 백반가루를 뿌리고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단잠을 자고 눈을 떴더니 반달이 밝았다.

피로는 싹 가셨고 머릿속이 아주 맑았다.

“곤혔나벼, 안 골던 코를 다 골더만." 

"저 달이 커지면 추석이네요." 

"그려 이사장은 언제 집에 갈라나?"

그러고 보니 내 일도 이젠 거의 마무리 됐고 집에 갈 때가 코앞에 닥쳐있었다.

이번에 상경하면 공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다시 화개에 올 일이 없을 터인데,

그는 내가 하는 사업 이치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이냐고 물으며 애써 말머리를 돌렸다.

곰취 뜯으러 갈 때와 방향은 같지만 주능선에서 3,4 부쯤 내려선 토끼봉 서남쪽이라고 했다. 그전의 산행은 곰취 채집이 목적이 아니라 오늘의 노정을 정찰한 것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이별이란 단어만 빼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장래와 허씨의 미래, 내 가족과 그의 자랑스러운 자녀에 대해서 말하고 듣다 보니 반달은 빛을 잃고 동녘이 어슴푸레 밝아졌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