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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초꾼 허씨와 화개 사람들(12)

작성자우리민족333|작성시간12.05.02|조회수28 목록 댓글 4

동녘하늘이 발개지며 희뿌윰히 날이 밝자 우리는 새벽 송이를 만나러 나섰다.

나도 이제는 솔가리를 들치는 송이의 솟구침을 대강은 보고 들을 수가 있었다.

기지개 켜며 솔가리를 들썩이는 그들의 작은 동작은 허씨의 표현대로

산골 소녀의 부끄러운 첫 나들이였다.

솔숲이 넓고 울창한 만치 송이는 많았다.

아침볕이 퍼지기도 전에 그의 자루와 내 배낭을 거의 채우며 또 한짐이 되었다. 

곱게 갈무리 하여 싸 담고 아침밥을 먹은 뒤 우리는 천천히 다시 길을 나섰다.

앞길을 알고 났더니 이제는 마음이 편했고 험한 길도 힘이 덜 들었다.

토끼봉으로 올라서 주능선을 타고 삼신봉에 이르니 내동 뒤따르던 햇님이 반야봉 궁둥이(반야봉은 쌍봉이라서 두 봉우리 가운데로 빠지는 낙조가 천하의 절경임)새에 알맞게 걸려있다. 넋을 놓고 빠지는 해를 바라보다 삼신봉 아래로 내려왔다. 

어제처럼 노숙을 하고 새벽부터 솔밭 두어 곳을 더투어 허씨의 자루와 내 배낭의 빈틈을 마저 다 채웠다.

숲을 벗어나 삼신봉에 올랐으나 해는 아직 중천에 맹간하여 시간은 턱없이 남돌았다.

만족한 그와 나는 남은 시간을 청학동을 바라보는 숲 안에서 빈둥거리다가,

엊저녁에 애써 만든 초막에서 하룻밤을 더 자면서 그 새 못다한 회포를 마저 풀었다.

산에서는 술 마시기를 절대 금기로 아는 허씨였지만 몰래 감춰둔 내 고량주가 만발하는 우리의 우정에 아름다운 거름이 되었다.

 

푹 자고서 삼신 봉에 다시 올랐다. 

산마루에 올라 앉아 천왕봉을 거느리고 뜨는 해를 지켜보았다.

시간이 멈춘 찰나가 이런 것일까...

우리는 그 찰나를 같이 느끼며 말을 아꼈다.

먼동을 틔우며 둥실 해가 떠오르자 나는 지나온 숲길을 살피며 그새 과거가 된 어제를 깨우치며 소스라쳤다.

문득 잡힐듯 눈에 드는 청학동과 화개는 안개 속에서 마냥 졸고만 있다. 

바로 이 순간의 미래일두 마을이 눈 아래서 아득하게 다시 멀어만 간다,

뒤돌아보니 천왕봉과 반야봉은 아침 햇살 아래로 활발하게 살아났다.

이처럼 온전하게 바라보는 지리산은 난생 처음이었다.

나는 영원에 아르는 한 순간을 꿈결처럼 느꼈다.

 

숙소에 돌아와서 송이를 선별하였다.

캘 때는 몰랐는데 꼴들이 각양각색에다 크기도 모두 달랐다.

알이 굵고 곧아 잘난 놈이 있는가 하면 작고 등이 굽은 못난이도 있다.

잘난 놈과 못난이를 먼저 가르고, 그 중에 크고 잔 놈을 다시 별러 놓으니,

네 등급이 되었다.

허씨는 제일 못난 무리를 부인에게 주며 요리하라 이르고,

나머지를 공평하게 등분하여 그 반을 정성스레 다시 싸서는 내 앞에 내밀었다.

거절하지 말라는 결연한 표정이 내 말문을 막기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의 노고와 정성을 우물쭈물 받고 말았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정성은 며칠 뒤에야 내 가족 친지들에게

귀한 추석 선물이 되어서 모두를 참 기쁘게 하였다.

 

허씨 부인이 먼저 내 온 송이요리는 줄기를 가늘게 찢어놓은 회였다.

잘 익은 더덕 술을 송이 회를 안주 삼아 아낌없이 먹어대자니 누구에게인가 죄를 짓는 것처럼

마음이 편찮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참 통쾌했다.

왜놈들은 우리의 송이로는 요리하기도 아까워서 얇은 조각편을 만들어 책갈피에 끼워두고 

그 향내만 맡으며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송이 국을 곁들인 밥상이 들어왔다.

국에서 풍기는 향기가 방안을 먼저 가득 채웠다.

가늘게 찢은 버섯 가닥 위로 고명처럼 얹혀있는 애호박과 풋고추가 건더기일 뿐인

말간 탕국에서 이렇게 별난 맛이 우러난다는 게 신비할 뿐이다.

그 국물을 한술 뜨고 보니 어느새 속풀이가 되어서 술이 다시 당겼다.


허씨 부부는 나 모르게 고향에 갈 채비를 해 왔었나보다.

다음 날 아침 허씨는 새벽부터 그들의 점포인 타이탄 트럭을 움직이고 있었다.

운행 점검은 벌써 마쳤으나 미련이 남았던지 쓸 데 없이 주차장을 빙빙 돌더니만,

"이 사장 보다 먼저 가서 미안혀, 사업 잘 혀서 좋은 일 많이 하시게,"

라는 허씨의 말끝에 이어서, "잘 계시다 가셔유,"라는 부인의 말이 아쉽게 흩어지며 

그들의 차는 국도로 우회전 하여 멀어져 갔다.


-끝-

 

그동안 이 졸작을 어여삐 보아주신 직필님과 모람님 여러분들께 머리숙여 감사합니다.

구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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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감초 | 작성시간 12.05.03 읽으면서 익숙한 문학작품이란 생각은 했으나 무엇이 익숙한지는 딱히 표현하기 어려운 문학적 소양의 부재를 느낍니다
  • 답댓글 작성자우리민족33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5.03 세파에 흔들리다 잠시 청정한 사람을 만나 가슴 한켠에 서늘한 바람 한줄기 스치고 지나간듯한...그런 기운이 좋아서 옮겨왔습니다.전 감초님처럼 영력이 뛰어나지도... 더더구나 문학은 문외한입니다요...^^*
  • 답댓글 작성자감초 | 작성시간 12.05.03 하하 오해십니다.. 영력이란 표현에 오해가 있으십니다.. 저도 영력이 높다 뛰어나다 이런 평가와 무관한
    지극히 평범한 사오정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우리민족33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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