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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지식

령(靈)이란 바로 껍 (박현선생의 모울도비)

작성자감초|작성시간12.06.18|조회수128 목록 댓글 2

[계간 한배달 4330(1997)년 가을호]-전통사상강좌-하늘뜻 모울도비
 고구려인의 몸과 마음-1


-삶은 의 하나됨-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말 가운데는 한자어만 남았을 뿐 겨레말이 사라진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의 삶을 그려내는 데서 뿌리가

되는 말들, 이를테면 우리의 몸이나 마음과 엮인 말들조차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나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신령(神靈)이라든가 혼백(魂魄)이라든가 하는 한자어를 곧잘 쓴다. 그러나 그

한자어에 해당되는 겨레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으니, 자신이 쓰고 있는 말의 뜻조차 모르기 십상이다.

 

  이미 보편화 된 신의 겨레말은 ‘검’으로서 검은빛의 ‘검’도 뿌리가 같은 말이며, 그것은 땅조차 생기지 않고 빛조차 없었던 때부터

이미 있었던 ‘울줄’(우주)의 움직임을 가리킨다. 즉 검은 내림의 움죽조차 없었을 때에도 이미 있었던 ‘힘뿌리’ 인 것이다. 그리고 내

림의 ‘움죽’(기운)을 통해 땅과 모든 살이에게 고루 나누어진 ‘삶의 뿌리’를 가리키기도 하는 말이다.

검이 내려와 머무르는 집을 ‘껍’(또는 깝)이라고 하는데, 껍질이나 껍데기 등의 껍과 ‘깝죽거리다’(껍데기만 힘을 쓰다), ‘까불다’(깝

울다, 껍데기만 소리내다, 껍데기를 걸러 내다) 등의 ‘깝’이 바로 그 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들이다. 령(靈)이란 바로 껍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모든 삶은 검과 껍이 어울려 하나됨을 이룬 것이니, 검은 하늘의 상징이요, 껍은 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뿐만 아니

라 모든 살이(존재)에는 다 검이 있고 껍이 있으니, 검과 껍은 이른바 보편적인 것이었다.


 

◉ 쓸개는 ‘슬’의 삶터

  검이 인격화되면 ‘슬’(또는 쓸)이라 했으며, 껍이 인격화되면 ‘널’(또는 넋)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슬’은 사람다운 검을 가리켰

고, ‘널’은 사람다운 껍을 가리켰다. 또 한자로 바꿀 경우 슬은 혼(魂)이 되었고 널은 백(魄)이 되었다.


슬과 널이 하나되는 힘을 일러 ‘풀’이라 했고, 슬과 널이 갈라서는 힘을 일러 ‘죽’이라 했는데, 풀과 죽을 한자로 모두 기(氣)라고 옮

겼다. 물론 풀을 일러 생기(生氣)라 하고, 죽을 일러 사기(死氣)라 함으로써 나눠부르기도 했지만 혼돈되기 일쑤였다.  ‘죽이 잘 맞는

다’ 라든가 ‘풀이 죽다’, ‘죽다’ 라는 말에서 보이는 풀과 죽도 그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풀이 들어 하나된 것을 ‘알’(한자로 옮길 때 極, 삶의 첫 뿌리)이라 했고, 죽이 들어 갈라선 것은 ‘얼’(한자로 옮길 때 無, 虛 등이며,

삶이 끝난 뒤까지 남는 것)이라 했다. 우리 겨레의 상징인 태극(太極, 겨레말로 ‘한알’)은 알과 얼의 하나됨을 가리킨다(無極而太極).



  또 슬이 다스리는 사람의 기관을 일러 ‘마음’이라 했고, 널이 다스리는 사람의 기관을 일러 ‘몸’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은 서

로 짝을 이루는 것이어서 몸 속에도 슬과 관계를 맺는 기관이 있는데, 이를 쓸개(슬애)라고 한다.  ‘쓸개빠진 사람’이 ‘혼빠진 사

람’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도 그런 탓이다.
마음에서 슬이 잘 돌아가는 사람을 일러 ‘슬기롭다’고 하는 것도 물론 그런 이유에서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 서적이며, 우리 기마종족의 몸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황제내경 영추](黃帝內徑 靈樞) <본신>

(本神)편에서도 간(肝, 쓸개는 간에 포함시킴)이 혼(슬)의 집이라고 밝혔는데, 이 또한 슬과 쓸개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어쨌든 슬과 널이 하나됨을 이루면 살게 되고 슬과 널이 갈라서면 죽게 된다는 것은 겨레사상의 밑바탕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옛 어른들은 ‘슬과 널이 찰나간에도 하나됨을 잃지 않고 제 결(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돌림을 이루어야만 사람의 삶이

밝아진다.’

 

◉ 마음을 구성하는 기관들

  고구려를 비롯한 겨레의 옛 어른들은 사람의 마음도 그 몸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틀(기관)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사람

의 몸에 피(血)와 뼈(骨)와 살(肉)과 갖(皮) 등이 있듯이, 그 마음에도 그런 것들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기마종족의 전통을 물려받은 공구(공자)도 [논어]에서 그런 틀 가운데 하나를 말한 적이 있다. ‘앎이라는 틀이 움직이면 알게 되고

앎이라는 틀이 움직이지 않으면 알지 못하게 되는데, 앎이라는 틀은 바로 그런 것이다.’(이 부분은 늘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로 잘못 번역되어왔다.)

  이처럼 앎은 마음의 한 기관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를 보다 잘 보여주는 문헌이 바로 앞에 들었던 [황제내경 영추]이다. 거기서는

마음의 틀을 혼(魂)과 백(魄)과 기(氣)와 지(志 또는 知))와 의(意 또는 識)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겨레말로 ‘슬’과 ‘널’과 ‘풀’과 ‘뜻’과 ‘홀’이다.

 

  오늘날에도 기수련을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기가 삶의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겨레의 옛 어른들은 기(풀)를 삶의 에

너지가 아니라 마음의 기관이라고 보았으며, 그 쓰임새는 마음의 다른 기관들인 슬과 널을 하나로 묶어주고 나아가 마음과 몸을 하

나로 묶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고구려인을 비롯한 겨레의 옛분들은 몸을 닦기 위해 먼저 몸의 주인인 마음을 닦음으로써 ‘참나’를 찾아 바로세우려고 했으

며, 마음을 닦기 위해 마음의 각 기관을 바르게 움직이는 공부를 했다.   그 공부법이 바로 최치원 선생이 말했던 ‘결흐름’ 곧 풍류

(風流)였으며, 그런 공부에 매달리던 젊은이들을 ‘화랑’(꽃사람)이라 했고, 그런 공부를 어느 정도 이룬 사람을 ‘쇤뷔’(선인, 선비)

고 불렀다.

그러나 선종(禪宗)불교와 함께 마음의 여러 기관을 무시하고 마음의 뿌리만 찾는 흐름이 들어왔고, 그 뒤 마음의 여러 기관을 닦는

겨레다운 뛰어난 공부법은 차츰 사라져갔다.

그 결과 이제는 마음에도 몸처럼 기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혀지기에 이리렀고, 마침내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겨레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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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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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감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18 志 는 業(카르마)와 같은 뜻입니다.. .
    업도 선업이 있고 악업이 있습니다만..
    전자는 긍정적 후자는 부정적 개념으로 보통 이해합니다만
    여튼 제겐 선업과 뜻지<志>는 같은 개념입니다
  • 작성자麻黃(마황) | 작성시간 12.06.19 오.. 우리말 너무 새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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