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학과 동양의학-철학적 바탕 비교
서양학문의 근본적 바탕은 갈릴레이, 데카르트에서 뉴튼까지 이르는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보는 이분법적이고 분석적인 사고체계에서 출발한다. 서양의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분석적인 서양의학은 질병 치료에서도 몸을 분리하고 분석하는 데로 나아갔다. 사실 이런 이유로 서양의학은 약과 의학이 분리될 수 있었다.
동양의학은 서양의학의 분석적 시각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고있다.
생명에는 개체의 다양성과 함께 변화 혹은 변이라고 하는 큰 특징이 있다.
동양의학에서는 이러한 생명의 특징을 인식하고 인체를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로 보고, 인체내부의 유기체적 균형을 강조하며, 외부환경과의 조화 및 통일성을 중요시한다.
인체는 하나의 우주이므로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적인 흐름의 하나로 인체내의 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질병 치료도 질병이 발생할 수 있는 인체의 체내 환경을 변화시켜 치료하는 방식을 택해 몸 전체를 종합하는 데로 나아갔다.
반면 서양의학의 질병관은 어떠한가?
이분법적인 사고 속에서 탄생한 서양의학은 질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 '병원균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정복자로서의 발상'을 토대로 성장해 왔다. 서양의학은 질병을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전쟁에서의 적'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전쟁에는 전면전이 있고 게릴라전과 같은 지구전이 있다.
급성병에는 전면전이 어느 정도 일시적인 효과를 발휘할지 모르지만 지구전과 같은 만성병에 이르면 서양의학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처음에는 잘 듣던 항생제도 백신이 점점 약효가 떨어져 마침내 더 강력한 약을 만드는 일이 반복된다. 인간의 몸은 이런 방식의 공격으로는 치료에 한계가 오고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난다.
특히 암치료시에 항암제나 방사선은 그 부작용이 심각하다.
그저 병원균을 죽이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약효 자체만 중요시 하였지 과연 그 치료제나 치료법이 인체의 면역 기능에 어떻게 작용하고 생명체 전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무시한 것이다. 병든 세포를 치료하다가 다른 건강한 세포들을 더 손상시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서양의학의 생기론-히포크라테스
그렇다면 서양의학사에서는 인체의 전체적 유기성을 강조하는 전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물론 아니다. 비록 동양의학에서처럼 일관되지 못한 채 18세기 이후의 현대의학에 의해 단절되기는 하였지만 서양에도 몸의 전체성을 중시하는 관점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다. 무엇보다도 서양의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를 화두로 삼을 필요가 있다.
기원전 400년경 그리스에서 활동한 의사 히포크라테스가 서구의학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를 기점으로 의학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즉 히포크라테스는 그 이전까지 자연철학이나 주술과 뒤섞인 채로 존재하던 의학이란 학문을 고유의 방법론을 가진 학문으로 분리시켰다. 이를테면 그는 의사는 자연철학자들처럼 '만물의 근본요소' 같은 형이상학적 이론에 매달리거나 주술사처럼 악마나 초자연적인 힘으로 질병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의학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인체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학문이라는 말이었다. 여기서 '질병이라는 자연현상'을 다루는 '과학으로서의 의학'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과학으로서의 의학이 곧 기계론적인 과학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는 서양의 현대의학이 간과해온 주요한 개념이 많이 피력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공기, 물, 장소'라는 글은 사람의 건강이 공기나 물, 음식물, 사는 곳, 생활 습관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의사는 마땅히 이런 환경적인 요인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세심히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전집은 건강을 일종의 평형상태로 파악하는 한편 몸과 정신의 상호연관성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유머(humors)'와 '열정(passions)'이 평형을 이루는 상태가 건강인데, '유머'에 대한 히포크라테스의 설명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화학적·호르몬적 평형에 가깝고, '열정'은 정신과 신체의 상호의존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이와 함께 혈액, 점액, 담즙, 흑담즙의 네 가지 체액들간의 균형이 깨지면서 질병이 일어난다는 '4대 체액 병리설'도 건강을 평형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보여주는 이론이다.
특히 히포크라테스는 치료에 관한 한 인체가 스스로를 조절하는 본유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하였는데, 바람직스럽지 못한 변화에 대응하여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려는 인체의 이러한 특성을 그는 '자연치유력'이라 불렀다. 따라서 의사가 할 일은 자연 본유의 이 치료과정을 위해 가장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고, 또 자연의 그 힘을 잘 보존해 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시중들다, 돕는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Therapeuin'에서 유래한 '치료(Therapy)'의 본래 의미이기도 하다.
히포크라테스 이후 17세기에 이를 때까지 서양의학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갈렌의 의학 역시 생기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체를 생기적 정기의 순환체계로 바라보는 관점은 평형으로서의 건강과 자연치유력을 강조한 히포크라테스의 전통과 어우러져, 서양의학사에서 일단의 자연주의적·생기론적 전통을 형성했다. 이런 흐름은 비록 과학혁명 이후 기계론적 사상이 대세를 장악하면서 늘 주변부에 머물러 있긴 했지만, 갖가지 이론으로 끊이지 않고 맥을 이어왔다. 어떻게 보면 최근 서구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는 대체의학들, 이를테면 거슨요법이나 뉴스타트운동, 카이로프랙틱 같은 것들, 그리고 마음과 몸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는 심신의학(心身醫學, Psychosomatic Medicine) 같은 새로운 의학 흐름도 이런 전통 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양과 음-생명의 전체성
인체를 에너지의 순환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동양의학의 패러다임은 오늘날 현대의학이 맞닥뜨린 한계를 돌파해 나갈 수 있는 유력한 진지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부분을 정밀하게 탐구하다 놓쳐 버린 '생명의 전체성', 독립된 부분의 실체에 집착하느라 소홀히 지나쳐 온 '관계의 그물망'에 대한 탁월한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을 위해 물러나고,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는 말이 있다. 동양적 사고는 한결같이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을 중시한다. 생태학은 "자연에는 오직 다른 연결망 속에 들어 있는 연결망들이 존재할 따름이다"라고 주장하며, 시스템이론은 "부분들의 특성은 전체라는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동양의학이 새로운 의학을 여는 진지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말은 그동안 서양의학이 쌓아 온 성과가 의미없다거나 폐기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양과 음은 기계론에서 쓰는 이분법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 역시 역동적인 관계이다. 그것은 쪼갤 수 없는 전일(全一)한 것의 양극일 따름이다. 양과 음은 태극이라는 더 큰 관계의 틀 속에서 운동하여 도를 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