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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구학

<손영기> 오직 마음뿐 - 1.마음침心鍼

작성자작약|작성시간12.10.25|조회수270 목록 댓글 2

 

 

침 잘 놓는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으니 초롱초롱한 눈빛에 힘이 있고, 남에게 베풀길 좋아하며 성격이 톡톡 튀는 다혈질이다. 내가 침쟁이 전부를 만난 것은 아니나 대부분 이러한 공통점이 있음을 확신하는 바 이것을 반대로 보면 위 세가지는 침을 잘 놓기 위한 필수 조건이니 눈이 게슴츠레 하고, 제 것 챙기기 좋아하며 성격이 물렁물렁한 사람은 침과 인연이 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심각하다. 위의 조건 없이는 평생 침 공부를 해도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냉정하다. 노력이 99%라 하지만 타고 나는 것이 더 크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침은 기운용의 대표적인 매개체로서 환자라는 기체와 의사라는 기체를 이어준다. 즉 의사의 氣는 침을 매개로 환자의 문제된 氣와 교감되는데 이때 의사는 스스로 氣를 운용하여 환자의 氣를 다스린다. 쉽게 말해 의사는 침을 통해 환자에게 자신의 氣를 불어 넣거나 환자의 氣를 빼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선 다음의 침술 조건이 형성된다. 첫째 의사 스스로의 氣가 충만해야 하고, 둘째 氣를 내뿜고 빨아들이는 힘이 강해야 한다. 의사가 오히려 환자보다 氣가 약하다면 이건 완전 꽝이니 이 상태로 침을 만지작 거리면 나이 40에 수전증이 생길 뿐만 아니라 제명에 못산다. 끔찍한 사실이다. 설사 氣가 충만하더라도 운용하는 힘이 약하면 이또한 낭패이니 한낱 돈만 밝히는 침쟁이로 전락해 버린다. 앞서 언급한 초롱초롱한 눈빛은 氣가 충만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잘 베푸는 성격은 氣를 전달하는 힘이 강함을 나타낸다. 게다가 괴팍한 성격, 잘 튕기는 성격은 氣의 강한 폭발력을 의미한다.  

 

 의사의 氣가 침을 통해 환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 있어선 의사 자신이 기운용의 주체가 되므로 의사 자신의 氣 충만 여부에 따라 침 효과가 좌우된다. 그러나 맑고 순수함으로 가득찬 우주, 자연의 氣. 이 氣를 운용한다면 의사 자신의 氣 충만엔 의미가 없다. 의사 자신도 침과 함께 氣의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질로나 양으로나 한계가 있는 인간의 氣보다 순수하고 무궁무진한 自然의 氣에 대한 효과는 설명이 필요없으니 침 한방에 효과를 보는 의사는 이같은 자연의 氣를 사용할 줄 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의 氣 충만보단 자연의 氣를 이용하는 것이 중요시 되는 바 의사 자신도 하나의 침이 되어 자연의 氣를 환자와 교감시킴이 필요하다. 이제는 혈자리 외우고 침 놓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보다, 손에 맞는 좋은 침을 고르는 것보다, 스스로 氣를 충만시키려 노력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氣의 매개체, 살아있는 침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침에 관심 있으신 분, 침으로 성공하고픈 분들은 이를 명심하자.

 

 살아있는 침, 자연의 힘을 전달하는 氣의 전도체. 이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 그러나 후천적인 노력으로도 가능하다고 자위해보는데 후천적 노력이란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자연의 氣를 순수하게 흠뻑 받아 들이는 '열린 마음'.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마음, 과학이란 무기로 마녀사냥에 앞장 서는 마음, 인체를 하나의 유기체로만 보는 마음, 우리 전통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마음, 단전호흡이나 도가 수련을 사탄의 행위로 보는 마음 등등 이처럼 닫힌 마음으론 자연의 氣를 순수하게 받아 들일 수 없다. 사실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은 氣라는 표현 자체를 싫어하는데 놀랍게도 우리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많다. 벌거숭이 임금님이란 동화내용 같지만 지금 이 글을 보면서 "뭐 이 따위 말이 있어!"한다면 당신은 이미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열린 마음이 어렵다면 달리 '낮은 마음'으로 표현해 보자. 낮은 곳으로 물이 고이듯 자연의 氣도 낮은 마음으로 모인다. 낮은 마음, 자신을 낮추는 마음. 의사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인 조건없는 봉사와 희생도 자신을 낮추는 마음에서만 나온다. 下心!!! 마음을 낮추는 下心만이 자신을 살아있는 氣의 매개체로 만든다. 앞서 말한 통통튀는 성격, 따지고 드는 불같은 성격은 자신이 가진 氣만은 폭발적으로 발휘시키지만 자연의 무궁한 氣는 운용할 수 없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없이 남을 위하는 자. 그런자만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짜 道人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에 알려진 이름만을 쫓는 우리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열린 마음에 있어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세상은 마음먹은 데로, 믿는 데로 돌아가기에 자연自然의 氣를 이용하려면 먼저 그 氣를 믿고 그것이 내 안에 가득차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자기 암시라고 비웃겠지만 사실 자기 암시는 마음의 무한한 힘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 단편일 뿐이다. 그리고 환자患者의 의사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필수적이니 의사의 믿음이 열린 마음으로 자연自然의 氣를 흠뻑 받아 들이듯이 환자患者의 마음 또한 열려 있어야 의사가 전하는 氣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환자患者는 자연自然의 氣에 대한 믿음까지는 없더라도 최소한 의사는 신뢰해야 한다. 애당초 자연自然의 氣에 의지하고 믿었다면 처음부터 환자患者일리도 없지만... 따라서 의사는 환자患者의 신뢰를 얻기 위해 氣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의사 자신이 아무리 氣를 충만해 놓거나 氣의 전도체가 되어도 환자患者와 공감대가 없으면 뚜껑 덮힌 빈 병에 물 수천톤을 부어도 단 한방울 채울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환자患者와 의사 사이에 공통된 기감氣感이 형성되지 못하면 아무리 최첨단의 의료장비로도 좋은 치료효과를 볼 수 없다. 예컨데 양방洋方의 치료율이 떨어지는 것은 기계음이 요란한 양방洋方의 경직된 분위기에 있다. 따라서 침을 잘 놓기 위해선 먼저 환자患者와 기공명을 일으켜야 한다. 환자患者를 대하는 의사 마음 속에서 氣가 어지럽게 동動하면 환자患者에게 즉시 공명되어 닫힌 마음으로써 의사의 氣를 거부하게 만든다. 술 생각, 여자 생각, 돈 생각, 도박 생각 ... 의사의 아주 작은 마음 변화만으로도 氣는 쉽게 나쁜 방향으로 동動한다. 그러므로 침의 올바른 효과를 위해선 침 놓는 그 순간만이라도 좋은 생각으로 스스로의 氣를 움직여야 한다. 그냥 놓는 침과 환자를 꼭 낫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놓는 침은 분명히 다르다.

 

이에 나는 종교를 가진 의사에게 한가지를 권한다. 신앙信仰은 의사 자신 뿐만 아니라 환자患者에게도 열린 마음을 가지게 하니 침 놓을 때 기도하는 자세로 임해 보자. 예컨데 불교인들은 '아미타불', 기독교인들은 '할렐루야'를 속으로 외치면서 침을 놓는 것이다. 순간 침을 통해 의사로부터 강한 氣가 환자의 열린 마음으로 전해짐이 느껴진다.

 

 '아미타불'침이나 '할렐루야'침은 의사의 맑은 氣를 순간적으로 집중시켜 환자患者에게 보내고, 환자患者도 기공명을 통해 거부감 없이 의사의 氣를 받아 들이므로 효과가 탁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침!!! 마음을 비우는 침. 앞서 말한 낮은 마음의 상태, 하도 낮아서 마음 자체도 없어진 상태에서 놓는 침. 무한정 쏟아지는 자연自然의 氣가 의사를 통해 환자에게 전달된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을 달리 표현하면 '기氣의 진공眞空'이니 의사 자신이 氣의 진공眞空상태가 되면 자연自然의 氣가 찰라에 들어 찰 뿐만 아니라 바로 환자患者에게 전해진다. 즉 자연自然의 氣와 환자患者의 氣가 바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경지에선 침이라는 도구도 필요없다. 의사의 눈빛 하나, 말 한마디가 바로 치료 그 자체이다. 가만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다스려지는 경지. 성인聖人의 경지. 한 생명으로 태어나 평생의 목표로 삼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경지. 눈물나도록 아름답다. 주위에선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가리켜 사이비 교주라고 부른다. 솔직이 나는 한의학韓醫學을 철저히 종교화시키고 싶다.  

 

 장래 한의교韓醫敎 교주로서 내가 강조하는 침술은 오행침도 아니요, 사암침도 아니요, 동씨침도 아니요, 체질침도 아닌 마음 심자 심침心鍼이다. 감히 말하건데 침은 어디를 찌르고 어떻게 쑤시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마음으로 찌르고 쑤시느냐가 핵심이다. 따라서 스스로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침의 달인達人이 되고자 하는 것은 자전거를 타고 달나라에 가겠다는 철부지의 허황된 꿈이다. 언급했듯이 심침心鍼엔 마음을 모으는 경지와 마음을 비우는 경지가 있는데 모으는 경지를 비행기에 비유하면 비우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타임머신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타임머신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타임머신을 생각하는 상상력 때문에 비행기라도 발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행기를 우습게 보지 말자. 온갖 세발 자전거가 난무하는 현실에선 비행기도 다른 차원의 경지이다.

 

 침은 바늘이다. 그것은 환자患者에게 따끔, 찌리찌리한 느낌을 주며 살속에 파고 든다. 사실 침은 아플수록, 느낌이 강할수록 효과가 있다. 누구나 자신의 몸에 이물질異物質이 들어 오면 긴장을 하는데 그러한 긴장감은 정신의 집중도를 높인다. 그리고 통증痛症과 같은 감각 변화는 순간적인 氣 흐름을 야기시키니 침이 들어오는 통증痛症부위로 氣가 몰린다. 이처럼 환자患者의 긴장으로 야기되는 정신집중으로 氣가 응축 폭발하여 침 자극부위로 氣가 강하게 흐르는 것만으로도 침술의 효과를 보는데 이건 순전히 환자患者 자신의 기운용氣運用만으로 이루어지니 이것이 바로 세발 자전거의 수준이다. 이 단계에선 침 놓는 부위가 가장 중요한데 환자患者 자신의 氣만을 이용하다보니 효율적으로 氣가 가장 잘 모이는 곳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첩보위성과 미사일을 가진 선진국이 언제 어디서나 목표물을 파괴시킬 수 있는 것에 비해 수류탄 하나 들고 목표물까지 직접 가야만 하는 후진국의 모습과 같다. 결국 우리의 교육수준은 수류탄 던지는 연습단계일 뿐이다.

 

 선배들의 말을 빌리면 환자患者에 따라 침 효과가 다르다고 한다. 이처럼 같은 병病의 환자患者에게 같은 위치, 같은 방법으로 침을 놓아도 효과가 다른 것은 세발 자전거의 수준일 때 가장 극심하다. 특히 침을 처음 맞는 환자患者와 수시로 맞는 환자患者의 효과는 판이하다. 즉 침을 처음 접하는 '침 처녀'일수록 효과가 아주 좋다. 그것은 그만큼 침에 대한 긴장도와 감각변화에 민감하다는 것이니 환자患者 자신의 氣 증폭과 이동이 강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침에 익숙한, 심지어 생활화된 사람은 효과가 크게 떨어진다. 침의 뾰족한 끝을 보아도 긴장은 커녕 반갑기만 하니 이래가지곤 만사 꽝이다. 그렇다고 환자患者를 탓할 순 없다. 세발 자전거도 세 살짜리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나이가 들면 눈에도 들지 않는 것처럼 한방韓方에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에겐 그 수준에 맞는 접근이 필요하다.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낯선 동양의학東洋醫學이 신비롭기만한 곳에서나 세발 자전거가 통하지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처럼 전통적으로 침술을 접해 온 사람들에겐 잘 먹히질 않는다. 이 땅의 의사들이여, 비행기를 옆에 두고 세발 자전거에 매달릴 필요가 있는가? 이젠 심침心鍼으로 눈을 돌릴 때이다.  

 

 비행기를 마음껏 다루게 되면 침이라는 바늘도 필요없으니 의사 자신이 기운용氣運用의 주체이기 때문에 의사의 손가락 하나로도 침보다 뛰어난 효과를 나타낸다. 바로 이 단계에서 기공氣功이 발휘된다. 특정 혈穴자리를 알 필요도 없이 환자患者의 몸에 손만 대면 자연自然의 氣, 의사 자신의 氣가 전달되어 환자患者의 氣를 정돈시킨다. 이것은 정말 경이로운 경지이기에 실제 활용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흉내내는 사람은 정말 많다. 그중에 나도 한 몫하지만 ... 운전도 못하는 비행기에 앉아 있는 꼴이란 ... 우습다. 어차피 뜨지 못할 비행기라 추락하지도 않을 것이므로 백퍼센트의 안전도를 자랑하겠지만 스스로를 파일럿이라 자랑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안쓰럽다. 자위하건데 나를 포함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그나마 희망이 있다. 최소한 비행기라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 저것 당기고 누르다 보면 언젠가는 뜨겠지. 그런데 이 세상엔 비행기 자체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기공氣功을 의료의 사기술로 생각하는 사람들, 단전호흡을 사탄의 행위로 보는 사람들, 사주四柱, 주역周易, 풍수風水 등을 미신으로 여기는 사람들 ... 이들에겐 뜨지 않는 비행기도 사치다. "에이 평생 세발 자전거나 몰아라!!!"

 

 자연自然의 氣, 의사의 氣, 환자患者의 氣라 표현한다고 해서 그러한 각각의 氣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즉 자연계自然界에서 자연自然의 氣라는 것이 특별히 존재하거나 의사나 환자患者의 몸에 마치 피처럼 氣 또한 별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자연自然 그자체, 의사나 환자患者 그자체가 바로 氣이다. 따라서 자연自然과 의사, 환자患者는 같은 범주의 氣속에 존재한다. 이처럼 천지만물天地萬物 모두가 氣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나 氣 응축 농도에 따라 각각의 형질形質 차이를 보이는데 氣 응축에도 전체적인 틀(나는 이 틀을 '法'이라 부른다)이 있으니 예컨데 사람들 모습이 각자 달라도 눈이 둘, 코가 하나, 입이 하나라는 공통점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러한 일정한 범위(法)내에서 氣는 응축 또는 분산하는바 나는 이를 '기氣의 산합散合'이라고 정의한다. 氣는 늘 산합散合의 과정을 반복하므로 절대 고정적이지 않으니 변화(易)를 중시하는 동양철학의 바탕엔 이러한 氣의 속성이 잘 베어있다.

 

 형이하形以下가 기합氣合이라면 형이상形以上은 기산氣散이다. 육체肉體가 기합氣合이라면 정신精神은 기산氣散이다. 산 사람이 기합氣合이라면 귀신은 기산氣散이다. 약물이 기합氣合을 다룬다면 침은 기산氣散을 다룬다. 눈에 보이는 것이 기합氣合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기산氣散이다. 과학이 기합氣合의 문제를 다룬다면 종교는 기산氣散의 문제를 다룬다. 그릇이 기합氣合이라면 그릇 안의 빈 공간은 기산氣散이다. 거울 자체가 기합氣合이라면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기산氣散이다. 땅이 기합氣合이면 하늘은 기산氣散이다. 동물이 기합氣合의 습성을 따른다면 식물은 기산氣散의 습성을 따른다. 색色이 기합氣合이면 공空은 기산氣散이다. 등등

 

 기합氣合과 기산氣散의 관계를 음양陰陽으로 이해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것은 음양陰陽이 기氣가 산합散合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상象일 뿐이기 때문이니 엄격히 말해 음양陰陽은 기합氣合의 단계에서나 논의 되는 문제이다. 기氣는 항상 산합散合의 과정을 반복하기에 합기合氣는 늘 산散하려 하고, 산기散氣는 늘 합合하려 하니 고정됨 없이 항상 동動한다. 그러나 기氣의 산합散合은 시간적, 공간적 개념을 초월하는 바 이 순간에도 찰나의 기산합氣散合이 반복된다. 예컨데 우리 몸에서 혈血이 흐르는 것은 찰나에 반복되는 기산합氣散合의 과정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血 자체가 늘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합기合氣된 상태로서 찰나에만 존재하니 곧 산기散氣되어 버리고 찰나에 다시 기합氣合하여 血을 이룬다. 바로 이런 찰나의 반복된 과정에서 血은 움직이고 나아간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氣가 血을 이끈다는 말은 적절치 못하다. 사실 血 자체는 찰나의 기합氣合 상태일 뿐이고 이제껏 배운 氣의 개념은 찰나의 기산氣散 상태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血이라는 합기체合氣體가 산기散氣하였다가 다시 기합氣合하여 血이되는 과정을 찰나에 반복함으로써 혈액순환血液循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체의 血처럼 천지天地의 모든 존재는 단 하나의 예외없이 찰나의 기산합氣散合을 반복한다. 따라서 일체의 흔들림 없이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다. 결국 동변動變하는 우주宇宙, 자연自然의 이치는 산합散合을 반복하는 氣의 대표적인 특성을 통해 드러난다. 내 말이 너무 어렵다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과학의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 모든 것이 원자原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 그 원자原子내의 핵核과 전자電子는 고정됨 없이 늘 움직인다. 특히 전자電子는 결코 일정치 않은 방향으로 운동하는데 단지 확률만으로 그 움직이는 길을 예측할 뿐이다. 상상해 보라! 우리가 만약 전자電子까지도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다면 세상은 엄청나게 정신 없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언급할 것은 기산합氣散合을 통해 만물萬物은 찰라의 멈춤없이 동변動變하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데 지금의 나는 1초 전의 나, 1초 후의 나와 다르다. 항상 동변動變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나'라고 지칭할 만한 대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쉼없는 동변動變 속에서 드러나는 상象을 가지고 '나'라고 인식할 뿐 실제 고정된 '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엄청난 착각속에 있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실재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오류는 마음의 작용에서 비롯한다. 마음 또한 기산합氣散合의 法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늘 동변動變하는 마음에 비춰지는 대상은 어긋나게 마련이다. 출렁이는 물에 비춰진 사물이 이그러져 보이듯.  

 

 엄격히 말해 마음이란 기산氣散의 상태인데 기산氣散은 곧 합기合氣의 실질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마음의 작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크다. 결국 심침心鍼은 이러한 마음의 힘, 기산력氣散力을 최대한 발휘하여 합기合氣된 형태로 나타나는 환자患者의 질병疾病을 다스린다. 사실 질병疾病도 기합氣合에 문제된 병病과 기산氣散에 문제된 병病으로 구분된다. 모든 질환疾患을 정精(육체肉體의 병病), 기氣(감정感情의 병病), 신神(정신精神의 병病)으로 나눔에 있어서 정병精病은 기합氣合의 문제, 신병神病은 기산氣散의 문제 그리고 기병氣病은 기합氣合과 기산氣散의 공통된 문제로 나타난다. 정병精病의 대표 질환인 암癌은 기합氣合의 문제로 새로운 덩어리가 생긴 것이고, 신병神病의 대표 질환인 노이로제는 기산氣散의 문제로 생긴 것이며 기병氣病의 대표 질환인 고혈압高血壓은 기합氣合과 기산氣散의 부조화로 야기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질병疾病 분류가 다소 견강부회적이지만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관심의 여지가 있다. 즉 정병精病은 산기散氣시켜 치료하고, 신병神病은 합기合氣시켜 치료하며 기병氣病은 산기散氣와 합기合氣를 조화롭게하여 치료하는 것인데 심침心鍼은 이러한 기氣의 산합散合을 원할하게 조절하여 질병을 다스린다.

 

 

 '파우더'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비록 백색증白色症이라는 신체 장애를 지니고 있지만 세상을 바로 보는 지혜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동물의 감정까지도 공감하는 초능력을 지닌 주인공은 결국엔 한줄기 벼락과 함께 온몸이 분해되어 자연自然 속에 흩어진다. 이 마지막 장면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주인공의 죽음이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 장면. 문득 '천상의 예언'이란 책이 연상된다. 그 책에선 사람의 에너지가 극도로 순수해지면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면서 바로 자연自然으로 동화되어 버린다. 이것은 기산합氣散合의 끝없는 반복 과정에서 벗어나 기진공氣眞空의 영원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이라는 산기散氣의 상태를 거쳐 다시 곧 합기合氣되어 새롭게 탄생하는 윤회를 한다. 즉 윤회는 생명체에 있어서 기산합氣散合의 반복과정을 말하니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기산합氣散合 반복에 있어서의 해탈은 氣의 진공眞空상태를 의미한다.

 

 氣의 진공眞空된 자리에 자연自然의 氣가 차이면 이는 바로 자연自然과 동화됨을 의미한다. 나의 존재가 인체人體라는 하나의 합기체合氣體에서 자연自然으로 확대된다. 이는 결코 우리가 인식하는 죽음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 가뭄에 시냇물은 말라도 바다는 끄덕 없듯이 인간이라는 껍질에서 벗어나 자연自然과 하나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파우더의 주인공도 마지막에 기氣의 진공眞空상태가 되면서 자연自然속으로 스며 드는데 주위 사람들은 환희에 찬 모습으로 이를 지켜 본다. 그의 진공眞空 속으로 주위 사람들의 氣 또한 빨려 들기에 사람들 마음 속에도 그가 늘 함께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람들은 주인공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단 오히려 기뻐한다. 주인공의 백색증白色症은 氣 응집도가 그만큼 낮음을 상징한다. 이에 남보다 쉽게 眞空상태로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동물과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응집력 낮은 氣가 쉽게 다른 氣 속에 스며 들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의 수행자가 발휘하는 초능력은 이러한 氣의 운용運用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氣 응집을 낮춤으로써, 氣의 산합散合 과정을 뜻대로 조절함으로써 다른 합기체合氣體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컨데 둔갑술은 자신의 氣 배치를 변형시키는 것이고, 축지법은 지기地氣를 강하게 합기合氣 시키는 것이며 천리안은 자신을 더욱 산기散氣시켜 스스로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잡술에 불과하다. 가장 높은 경지는 바로 기산합氣散合에서 벗어나는 氣의 진공眞空에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잡술로 기산합氣散合의 재미에 빠지다 보면 다른 이의 주목을 받게 되고 자아도취에 빠져 무리들을 이끌게 되는데 이는 곧 사이비 종교 집단을 형성한다. 정통 종교와 사이비 종교의 차이는 창시자의 기운용氣運用 성격에 달려 있으니 석가모니와 예수가 氣의 진공眞空 단계에까지 오르신 분들이라면 사이비 교주는 기산합氣散合의 잔재주만 즐긴다. 기진공氣眞空 상태에선 억지로 다른 氣를 산합散合시킬 필요가 없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선 기氣를 산합散合시킴에 개인의 인위적인 욕심이 들어간다. 따라서 사이비 종교는 이처럼 창시자의 사심私心이 깃들기에 자연自然의 법칙에 순수하게 따를 수 없다. 불가佛家에선 수행 과정에서 저절로 얻게 되는 초능력을 가장 금禁해야 할 마장魔障으로서 경계하는데 이는 참으로 올바른 가르침이다.

 

 삶의 고통은 氣가 산합散合하는 생生과 멸滅의 쳇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마음의 집착은 모든 것이 고정불변하기를 바라나 평생 체바퀴 속에서 바쁘게 뛰는 자신의 실체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는 점. 氣의 산합散合으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여기서 벗어나려면 기진공氣眞空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 강한 실천을 통해 그 경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 절대 자유를 얻은 자가 손에 꼽힐 정도인 걸 보면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으니 문제는 집착에 있다. 집착은 기산氣散보다 기합氣合을 강하게 만들어 氣의 진공眞空을 힘들게 한다. 氣의 진공眞空은 기산氣散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데 기산氣散의 극대화란 자신의 마음을 자유롭게 놓아 버리는 것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 무아無我의 경지.

 

 누진통漏盡通. 이는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비컨데 인간을 물 드럼통에 비유해 보면 윤회의 굴레 속에 있는 인간의 드럼통엔 여기 저기 온통 구멍투성이다. 그러한 구멍으로 물이 세는 것은 당연한 이치. 누진통漏盡通은 모든 구멍을 막어 물이 절대 세지 않게 하는 경지이다. 그렇다면 그 구멍은 어떻게 생기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드럼통엔 구멍이 뚫린다. 마음의 움직임은 자신을 산기散氣시키는데 여기엔 반드시 기합氣合의 반작용이 따르는 바 이러한 기합력氣合力이 바로 집착과 욕심이다. 즉 고통의 원인이 되는 집착과 욕심은 마음의 움직임, 기산氣散에서 비롯된다. 뚫린 구멍으로 물이 세면 자연히 세는 물에 대한 아쉬움이 생기는데 이러한 아쉬움이 집착과 욕심을 만들어 낸다. 드럼통에 물이 계속 공급된다면 괜찮지만 누구나 일정한 물만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 누진통漏盡通을 통해 기운이 세는 것을 막으려면 마구 날뛰는 마음의 움직임을 다스려야 하는데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번뇌라고 일컬어지는 마음의 난동을 잠재우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꽉 잡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마음을 놓아야 한다. 마음이란 것은 참 묘한 것이라 잡으려 하면 할수록 잡히질 않는다. 잡자하는 마음이 그 마음을 더욱 강하게 움직이게 하므로 더욱 기산氣散되어 멀리 달아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기산氣散이 극대화됨으로써 氣의 진공眞空이 이루어 진다면 마음이 마구 움직여 강하게 기산散氣될수록 좋아져야 할텐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 이는 기산氣散이 심하게 될수록 보상작용에 의해 합기合氣가 강해지기 때문이니 기산氣散의 순수한 극대화는 합기合氣라는 보상작용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 즉 마음을 움직일수록 집착과 욕심이 증가되는데 이러한 집착과 욕심을 없앤 상태에서 마음을 움직여야 절대 자유를 얻게 된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스승께서도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끼십니까?" "나도 느낀다." 다시 제자가 여쭈었다. "그렇다면 일반 대중과 깨달은 자가 다를게 무엇입니까?" "나는 기쁠 때만 기뻐하고, 슬플 때만 슬퍼한다."

 

이 일화는 마음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하니 그것은 마음을 잡는 것보다 마음을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낄 수 없게 마음을 붙잡는 것보다 마음을 놓아 집착 없이 순수하게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언젠가 명상을 하면서 개미떼처럼 몰려 오는 번뇌로 인해 고생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의 바램은 번뇌를 잡아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였는데 노력하면 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그런데 그때 나를 지도해 주신 분의 말씀이 무척 인상적이였다. "번뇌는 꼭 붙잡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그냥 놔두어야 스스로 없어진다. 일어나는 번뇌를 그냥 놔두고 바라 보는 것이 그놈을 죽이는 방법이다." 그냥 놔두고 바라 보는 것. 이것이 바로 관법觀法이다. 사실 '관觀'을 바라 봄으로 해석하기 보단 조용히 응시함으로 이해함이 적합한데 조용히 응시함에는 기다림의 여유와 집중이 필요하다. 이 여유와 집중은 별개가 아니니 마음의 여유 속에서 집중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 속에서 봄 햇살을 기다리는 여유. 겨울에 쉼 없이 내리는 눈 속에서 삽자루 하나 들고 눈을 다 치우기란 애당초 불가능이다. 봄이 되어 따스한 햇살에 눈이 저절로 녹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초조함에 눈을 맞으며 겨우내내 삽질만 하다간 봄이 오기 전에 지쳐 죽는다. 몰아치는 눈은 사정 없이 흔들리는 마음의 그림자인 번뇌와도 같다. 겨우내 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지긋이 응시하며 봄을 기다리는 여유처럼 번뇌 또한 잡으려는 초조함 없이 그냥 놔두고 응시하면 언젠간 사라져있다. 초조함은 번뇌라는 악마의 대표적인 무기이다. 초조와 조바심은 기산氣散을 촉발시켜 반작용인 합기合氣를 강하게 유도함으로써 기산氣散의 순수한 극대화를 방해한다. 반면에 여유는 기산합氣散合의 작용을 자연스레 놔둠으로써 사심私心없이 氣가 흐르게하여 기산氣散의 순수한 극대화를 통해 기진공氣眞空을 이루게 한다.

 

문득 탄허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말세末世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일러 주시겠다며 하신 말씀.

 

"놀라지 마라."

 

그래 큰스님 말씀대로 마음의 여유만이 살길이다. 말세末世는 인간들의 초조와 조바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쌓인 눈을 순식간에 녹이는 봄햇살의 근본인 태양은 기진공체氣眞空體!!! 태양은 氣가 강하게 뭉쳤기에 빛과 열을 내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氣가 철저히 빈, 기진공氣眞空의 상태이기에 무한한 에너지와 생명력을 발한다. 비어 있음으로부터 쓰임이 나오는 원리, 이것은 진리이다. 체體에서 용用이 나온다면 체體란 반드시 비어있음, 즉 공空을 그 근본원리로 삼으니 공空 없이는 체體가 있을수 없고, 체體 없이는 용用이 있을수 없다. 따라서 기산합氣散合의 쓰임은 기진공氣眞空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착한 사람이나 못된 사람이나 개나 소나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에 불성佛性이 있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이로써 이해되어진다. 즉 기산합氣散合의 원리로 생멸生滅하는 생물체는 모두 불성佛性이라는 기진공氣眞空을 바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기진공氣眞空에서 비롯되었고, 그 원리를 바탕으로 기산합氣散合을 반복하기에 기진공氣眞空으로 회귀하는 잠재력을 가진다. 봄의 태양이나 겨울의 태양이나 그 존재에 있어선 다름 없듯이 지금 우리도 잠시 번뇌라는 눈구름으로 덮혀 있을 뿐 기진공氣眞空의 태양, 불성佛性은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

 

 이제까지 심침心鍼의 원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기산합氣散合과 기진공氣眞空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결국 심침心鍼을 놓기 위해선 어떠한 지식이나 기술의 습득보다는 마음의 다스림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실천적인 수행이 강조된다. 그리고 그 수행법으로 관법觀法을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조용히 응시할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집중은 어떻게 얻는가.

 

여기엔 적극적인 방법과 소극적인 방법이 있는데 먼저 여유를 방해하는 요인을 직접 제거하는 소극적인 방법부터 설명해보자. 초조와 조급을 야기하는 요인으론 대표적으로 TV 등의 언론매체와 자가용 등의 교통매체가 있다. 소극적 면에서 보면 결국 문화혜택을 누리는 도시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인데 수행 도량이 모두 산골짜기에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이 번잡하면 절대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질 않는다. TV 등으로 정보의 습득이 많아지고, 발전된 교통으로 그 정보의 활용이 빨라지면 생활은 윤택해질지 몰라도 정신적으론 반비례한다. 서양의 컬러 문화와 동양의 흑백 문화는 정신과 마음에 끼치는 영향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데 단순한 흑백과 여백의 미로 강조되는 동양의 문화는 확실히 마음에 여유를 준다. 옛날 흑백 TV 세대보다 요즘의 컬러 TV 세대는 정신적으로 혼란스럽다. 현란한 쇼, 현실감 없는 드라마, 눈치만 빠른 뉴스, 오로지 이쁘고 겉똑똑한 사람들만이 설치는 TV. TV는 이제 바보상자가 아니다. 정신을 마르게 하는 마기魔機이다.

 

 바퀴가 근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일찍이 바퀴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반중력 자동차를 타거나 우주선으로 우주를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과학이란 것이, 기술이란 것이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문명은 정신문화를 통해 발전, 성숙해왔다. 몸이 편해지면 마음이 풀어지는 것처럼 과학이 발전할수록 정신은 말라가니 장기적으로 보면 과학기술은 문명을 퇴보시킨다.

 

문득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전화기가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서로 텔레파시로 대화를 다눌지 모른다. 자동차가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축지법이나 경공으로 하늘을 날지 모른다. 텔레비가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천리안으로 세상 곳곳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컴퓨터가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두뇌력를 최대한 발휘할지 모른다. 등등 이것이 말도 안되는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란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이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면서부터 나는 나의 글씨체를 잃어 버렸다. 글씨체가 사람의 성격을 나타내듯 글씨체를 다듬어 스스로의 성격을 고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나는 그런 가능성을 잃어 버린 것이다.

 

 나에겐 아직 운전 면허가 없다. 다소 불편하지만 앞으로도 특별한 계획이 없을 것이다. 게으른 성격이 그 원인이나 늘 조급한 상태에서 여유를 소중히 하는 나의 본능 때문이다. 차창밖 경치를 즐기는 여유. 운전 걱정없이 마음껏 술마시는 여유. 밑창 닳은 신발을 버리고 새신을 고르는 여유. 교통체증에서 벗어나는 여유. 주차장소를 신경쓰지 않는 여유. 기름값 인상에 크게 민감하지 않는 여유. 주위 친구들의 차 기종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여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하는 여유.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실失보단 득得이 많다.

 

그러나 의사에겐 오히려 득得이다. 운동부족으로 인한 소화기 장애, 운동기 장애, 비뇨기 장애, 스트레스 등을 야기시킴으로써 먹고 사는 데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의료인들은 공로상을 주어야 한다. 둥근 바퀴의 자동차에게......

 

 멋대로 주절거리다 보니 문화 비판론자가 된 듯 싶다. 그러나 TV나 자동차 등을 멀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방법. 다음부터 설명되는 적극적인 방법에선 TV를 통해 여유를 찾는 법, 자동차를 통해 여유를 찾는 법이 강조되는데 이것은 관법觀法에서나 가능하다. 쉽게 말해 TV를 보면서, 운전을 하면서 참선이나 명상을 할 수 있다. 관법觀法이란 응시하는 것. 예컨데 TV를 응시하여 화면 안에서 찰라에 펼쳐지는 변화를 빠짐없이 살피니 이는 TV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것에 적용이 가능한 바 이렇게 되면 삶 자체가 수행이 된다. 길을 걸을 때는 자신의 발자욱이나 주변을 응시하고, 쌀을 씻거나 설거지 할 때에는 쌀이나 그릇을 응시하고, 화장실에서 응가를 할 때에는 항문을 빠져 나가는 응가를 응시하고, 상대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상대의 입과 말을 응시하고, 자동차를 몰 때에는 운전 그자체를 응시한다. 그런데 이와같은 응시는 말처럼 쉽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은 소극적 방법으로 자신 주위에 단절의 벽을 세우고 그 안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의 마음 변화만을 관觀한다. 소위 말하는 참선 수행이다. 그러나 관법觀法을 통한 선禪수행은 가부좌만이 전부가 아니다. 즉 적극적인 면에선 삶 그자체가 바로 선禪수행의 대상인 것이다. 지금 현재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나 또한 오로지 키보드만을 마음으로, 시선으로 응시하며 집중한다면 이것이 바로 수행이 된다. 기산氣散의 극대화에 이르는 수행. 기진공氣眞空을 이루는 수행. 소극적 방법이던 적극적 방법이던 무형無形, 유형有形의 대상을 오로지 관觀하고 있으면 마음이 모아지고 곧 합기合氣의 보상작용이 없는 기산氣散의 순수 극대화가 이루어진다. 삼매三昧!!! 기진공氣眞空으로 들어간다.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암기하는 자기 동생에 비해 자신은 부처님 말씀 한구절도 기억할 수 없었던 주리반트가는 어느날 부처님을 찾아가 하소연 했다. "스승이시여, 저에게도 우수한 두뇌를 주소서." 부처님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전하셨다. "이제부턴 도량 앞마당을 쓸고 닦으면서 오로지 입과 마음으로 다음의 주문을 외우거라. 쓸고 닦으리..." 이에 주리반트가는 자신으로선 이해하기 어렵고 외우기 힘든 부처님 가르침 대신에 한손엔 빗자루, 다른 한손엔 걸레를 들고 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며 청소를 했다. "쓸고 닦으리..." 그러던 어느날 이웃 나라에서 부처님께 법法을 청하자 부처님은 주리반트가를 보내시며 대신 法을 설하기를 명하셨다.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에 놀란 제자들은 주리반트가를 의심하였으나 그의 설법을 듣자 모두들 합장을 하며 깨달음의 경지를 인정하였으니 그는 빗자루와 물걸레만으로 기진공氣眞空을 얻은 것이다.

 

 

 법당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는 한 수행자에게 스승이 물었다. "뭘 하는고?" 제자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선 수행을 하나이다." 스승은 주장자를 내리치며 제자를 꾸짖었다. "기왓장을 간다고 거울이 되느냐!!!"

 

불가佛家에선 최고 상근기上根氣만이 참선을 할 수 있다고 하니 그만큼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은 어렵다. 이리 저리 날뛰는 번뇌에 하루종일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무가내로 다리만 꼬고 있다면 이는 기왓장으로 거울을 만들려는 무모한 행위와 다름없다. 주리반트가도 만약 자기 동생을 흉내내어 어려운 경전을 외우면서 가부좌만 틀고 있었다면 절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쓸고 닦으리... 라는 그의 주문은 앞서 언급한 적극적인 면에서의 참선 방법이다. 그런데 적극이니 소극이니 하는 나의 표현 때문에 다소 소극적 방법이 하수下手인 것처럼 느껴지나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니 전문 수행자에겐 소극적 방법이 적합하고, 우리같은 생활인에겐 적극적 방법이 필요하다. 처자식 버리고 산속에 들어갈 용기가 없는 사람. TV나 자동차 없이는 도저히 못 사는 사람. 일이 바빠 가부좌 틀 시간도 부족한 사람에겐 적극적 방법이 적합하다.

 

 한때 나는 한 스승으로부터 기氣수련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그는 도道를 얻고자 서울 법대를 중퇴하고 7년을 이 산, 저 산에서 여러 스승을 전전하며 고행하였다. 그러나 배움이 진전되지 않자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도시로 내려와 어느 이름 모를 스승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스승은 그에게 가르침 없이 오로지 청소와 부엌일만을 시켰으니 그는 7년 경력의 수행자임에도 불구하고 머슴처럼 잡일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스승은 그에게 한마디 던졌다. "니가 지은 밥은 밥이 아니다. 번뇌로 지었으니 말이다. 니가 쓸고 닦은 바닥엔 먼지만 가득하다. 번뇌로 쌓였으니 말이다. 앞으로 밥 지을 땐 밥만을 생각하고, 쓸고 닦을 땐 쓸고 닦음만을 생각하라." 이 말씀에 한소식 얻은 그는 적극적인 관법觀法을 터득하였으니 보름 만에 지혜를 얻어 스승에게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이처럼 전문 수행인 중에서도 적극적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은 이가 많다. 무협영화에서 주인공이 스승으로부터 무술을 배우기 위해 먼저 물통을 지고 뗄나무를 한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 행위만으로도 이미 고수高手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땅의 여성들이여, 힘을 내자. 그대들은 집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는 남성들에 비해 깨달음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번잡한 도시에서 수행하던 한 스님은 너무 시끄러워 수행이 어렵자 깊은 산골에 위치한 조용한 암자를 찾아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너무나 고요한 침묵이 방해되어 수행을 할 수 없었으니 이 스님에겐 침묵조차도 그 마음에 걸린 것이다.

 

나는 이 일화를 듣고 깊이 공감했다. 나 또한 주위 환경에 무척 예민하기 때문이다. 그 스님이나 나처럼 예민한 사람은 보통 氣가 상초上焦로 몰려 있다. 달리 표현하면 상단전上丹田이 발달되어 있고, 기산합氣散合에 있어선 기산력氣散力이 무척 강하다. 내 주위 분들은 아시겠지만 늘 上氣되어 있는 나의 붉은 얼굴은 강한 기산氣散작용을 나타낸다. 이처럼 기산력氣散力이 강한 사람은 남다른 정신능력을 소유하므로 이를 올바르게 승화하면 기산氣散의 순수 극대화로 깨우침을 얻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강한 기산氣散작용에 비례하여 합기合氣를 동반하므로써 신체적, 정신적 부작용을 유발한다. 앞서 언급한 스님의 일화를 예로 들자면 주위 환경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것은 강한 기산력氣散力이지만 이를 곧 못 마땅히 여겨 마음이 불편한 것은 합기合氣된 상태이다. 따라서 미세한 찰라의 주위변화를 여유 있게 응시하면서 자신의 마음 상태까지도 관觀할 수 있다면 합기合氣의 반작용 없이 본시 강한 기산력氣散力을 순수 극대화시킬 수 있다.

 

 예민한 사람, 기산력氣散力이 강한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이 여유는 하초下焦, 하단전下丹田, 기합력氣合力에서 나온다. 따라서 여유 속에서 기산氣散시킴으로써 기산氣散의 순수 극대화를 이루려면 하초下焦에 氣가 충만된 상태에서 상초上焦로 氣를 모아야 한다. 하단전下丹田이 충실한 상태에서 상단전上丹田을 개발해야 한다. 기합氣合의 탄력성을 가진 상태에서 기산氣散되어야 한다. 기합氣合의 탄력성은 반작용으로서의 합기合氣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니 고무공을 높이 올리기 위해 바닥으로 강하게 내치는 것이 기합氣合의 탄력성이라면 하늘로 올라간 공이 저절로 땅에 떨어지는 것은 합기合氣의 반작용이다. 땅으로 강하게 내리 칠수록 하늘로 높이 올라 가는 고무공처럼 기합氣合의 탄력성이 극도로 강해지면 합기合氣의 반작용 없이 기산氣散되어 버린다. 비컨데 바닥으로 세게 내리친 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올라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같은 유리한 조건의 사람들이 깨우침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노이로제 환자가 된 것은 하단전下丹田이 약하기 때문이다. 기합氣合의 탄력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가道家에서는 하단전下丹田이 부실한 상태에서 상단전上丹田부터 수련하는 것을 최고 금기로 삼으니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 컴퓨터 앞에서 설치는 나 자신도 이미 주화走火상태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황당한 이야기를 주장하고자 비어 있는 하단전下丹田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상단전上丹田을 엄청 뒤흔들기 때문이다.

 

 하단전下丹田을 단련시키는 수많은 방법 중에서 내 경험으론 '절'이 가장 좋을 듯 싶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에 사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절'이라는 행위는 상대에게 자신을 최대한 낮춤으로써 극진한 예禮를 표하는 것이지만 사실 절은 그 이상의 엄청난 의미가 있다. 자신을 낮추는 절의 행위는 하심下心을 자연스레 유도하여 낮은 곳에 물이 고이듯 우주宇宙, 자연自然의 氣를 내 몸에 모으니 이로써 하단전下丹田에 氣가 차이고, 기합氣合의 탄력이 생긴다. 특히 불교인들에겐 절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바 3배, 108배, 1000배, 1080배, 3000배... 등등 모두가 절 횟수와 관련된 용어들이다. 타 종교인들은 불상佛像에 대해 절하는 모습을 가리켜 우상숭배라고 몰아 세우나 우리의 절 행위는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 뿐만 아니라 하심下心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적극적인 구도의 의미를 가진다. 이건 휴학休學을 생각할 정도로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하루도 빠짐없는 2년간의 108배로 이겨낸 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한배, 한배 절을 하면서 그 절 자체를 응시하면 하단전下丹田을 단련하면서 상단전上丹田으로 氣를 모으는, 기합氣合의 탄력을 키우면서 기산氣散을 극대화시키는 이중의 효과를 볼 수 있다. 3000배를 한 사람만 친견하셨던 성철 스님. 그 깊은 뜻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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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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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베르나르 | 작성시간 13.10.1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침공부를 시작하면서 미 분이 쓰신 "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얼마전 읽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철학적이론에 무어라 토를 달 수는 없었지만 일단 접수하고 가 보기로 했습니다.
  • 작성자바니하 | 작성시간 13.11.26 손영기님의 글이군요..
    감사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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