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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티벳 생자의 서 (사자의 서는 사후의 묘사고 이것은 입태전과 과정중의 묘사 입니다)

작성자감초|작성시간12.06.12|조회수64 목록 댓글 2

난타가 석존에게 다시 돌아온 것은 손타라가 죽은 지 꼭 사십구 일 만이었다.

그때 석존은 서다림에 머무르고 계시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인연 따라 중생들을 제도하시려고 모든 대중들과 함께 점파 국으로 가셔서 게가 못가에 머물고 계셨다.

오백의 비구들과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난타는 석존에게 나아가 석존의 발에 예배하고 신열에 뜬 목소리로 물었다.


붓다이시여, 

붓다께서 설하신 대로 손타라를 제도하였나이다. 하지만 아직도 저는 미욱한 비구에 지나지 않는지라 그녀를 올바로 제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사옵니다.

그녀가 구원받았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석존이 온화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너의 마음을 알겠구나.

그러하다.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시고 잠시 인연의 법에 대하여 설하신 다음, 석존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바로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설하셨다.

 

그날 석존 자신이 처음으로 본 것이 바로 그런 앎이었으며 깨달음의 일곱 단계를 거쳐 마음이 완전무결하게 흔들리지 않게 되자 보게 된 것이 전생의 회생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석존은 자신이 수십 번 수백 번 수만 번 수십만 번 그렇게 태어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날 밤 두 번째로 다시 본 것은 환생에 대한 지식을 보충해 주는 또 다른 종류의 앎이었다고 하셨다.

석존은 순수한 눈으로 중생들이 지은 업에 따라 사라졌다가 다시 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카르마(업)는 우주를 지배하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 전혀 어긋남이 없는 법칙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 난타를 향해 다시 일렀다.

나에게 법요法要가 있으니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훌륭하다.

글과 뜻이 교묘하며 순일하고 원만하며 청백한 범행이니 이른바 생의 바르도가 그것이니라.

 

입태에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경이 그것이니 너는 자세히 듣고 지극하게 뜻을 지어 잘 생각할지니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생의 바르도를 연설하리라.

 

 

 

인간의 본성 속에는 두 가지의 성질이 있다.

그것은 절대적 본성과 상대적 본성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이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지혜로 충만한 마음으로 내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이 죽음과 삶의 문제를 보았다.

그리하여 죽음을 통해 세 가지의 바르도를 너희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生의 바르도이다.

지금 내가 말하려는 이 생의 바르도는 입태에서 죽을 때까지 우리 인생 전반에 걸친 것이다.

 

깨달음이 아닌 중간적인 상태의 마음 상태, 이 역시 생의 바르도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내가 먼저 설한 죽음의 바르도에서만이 깨달음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그것은 타의에 의한 깨달음이다.

하지만 생의 바르도에서의 가르침은 주관적이다.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중간적인 마음 상태인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르쳐 나아간다는 것, 그리하여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것, 그것은 아주 중요하고 소중하다.

 

너희들이 이 생의 바르도에서 생의 현상을 확실히 파악하고 수행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음의 본성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갈 수만 있다면 진리가 저절로 마음속에 펼쳐져 죽음의 바르도는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생의 바르도가 가장 소중하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바르도에 대한 준비를 완전히 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은 오로지 바로 이 순간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에게 이르나니 바르도를 준비하는 최상의 시간은 천상에 나는 것도 아니요 지옥에 나는 것도 아니다.

 


천상의 삶, 그 삶의 질은 인간계보다 나은 것처럼 보이나,

그리고 지옥의 삶 또한 인간계보다 못한 것처럼 보이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의식과 지성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이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환해야 한다.

 


고통을 깨달음으로,

비탄과 좌절과 상실을 깨달음으로,

 

그런 것들은 인간이 완전해지기까지 목적을 위해 마련된 것이며 그로 인해 윤회의 고리를 끊고 대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지금. 이 삶에서 깨달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석존은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아직도 깨달음이 아닌 중간적인 마음의 상태에 있다면 보지 못한다.

오로지 그 시간을 지나 본질적인 단 하나의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본 자만이 볼 수 있으리니 자세히 들으라.

너는 손타라를 인도했지만 그녀가 너의 인도대로 자유를 얻었는지 윤회를 벗어났는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옳은 말이다.

범부는 결코 그것을 보아 내지 못한다.

 


내 너희 같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 여기 설하나니 자세히 들어라.

 


나는 저번에 死의 세계에 대하여 설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어떤 현상을 거쳐 다시 인간계로 오는가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하였다.

 


무릇 생물이 현상 세계의 업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환생하게 될 때 생명이 다시 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생이 없다면 死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또한 업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니라.

死者가 죽음의 바르도에 들어 해탈을 얻지 못하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올 적에 그때 생의 바르도가 일어나나니 비록 어머니의 태胎가 있다 하더라도 그 태에 들어가고(入) 들어가지 못함(不入)이 있느니라.

 

어떻게 어머니의 태 속으로 들어가 生을 받는가 하면

부모 될 사람이 월기(月期)에 이르러 뱃속이 깨끗한 상태에서 음행한 마음을 일으키면 중온(中蘊)이 그 앞에 나타나 그 태 속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이 중온의 형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형색이 단정한 것이요,

또 하나는 용모가 누추한 것이다.

 

지옥의 중음은 마치 불에 탄 등걸과 같이 용모가 누추하며,

축생의 중음은 그 빛이 마치 연기와 같고,

아귀의 중음은 그 빛이 마치 물과 같으며,

사람과 하늘의 중음은 형상이 마치 금빛과 같느니라.

 

색계色界의 중음은 형색이 산뜻하며,

무색계천無色界天에는 원래 중음이 없으므로, 형색이 없기 때문이다.

 

중온의 중음신은 두 손과 두 발이 혹 있기도 하고 네 발 또는 여러 개의 발이 혹 있기도 하며 혹은 발이 없기도 하므로, 그가 전생에 지은 업을 따라가서 의탁하여 태어날 곳에 감응하는 중음이므로 곧 저 형색과 같다.

만일 하늘의 중음이면 머리를 곧바로 위로 향하고 있을 것이고, 사람, 축생, 아귀의 중음이면 머리를 모로 돌려서 다닐 것이고, 지옥의 중음이면 머리를 곧장 아래로 향할 것이니라.

 


무릇 모든 중음은 모두가 신통을 갖추고 있으므로 허공을 날아다니며 그가 태어날 곳을 마치 천안天眼과 같이 멀리서 보게 되느니라.

 


월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중음을 태 속으로 받아들이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니라.

 

모든 여인들은 혹은 삼 일 동안이기도 하며,

혹은 오 일 동안,

혹은 반 달 동안,

혹은 한 달 동안이기도 하며,


혹은 인연을 기다리면서 오랫동안 있다가 월기의 물이 비로소 이르기도 하느니라.

 

또 어떤 여인은 몸에 위세가 없어서 모진 고통을 많이 받는데 그 생김形容이 누추하며 좋아하는 음식이 없어서 월기가 비록 온다 하더라도 마치 마른땅에 물을 뿌리면 쉽게 말라버리는 것과 같이 속히 그쳐버린다.

 

하지만 몸에 만일 위세가 있으면 그 용모가 단정하고

항상 안락함을 느끼며 음식을 좋아하게 되어서

마치 윤기 있는 땅에 물을 뿌리는 것과 같이 월기가 속히 그치지 않느니라.

중음이 어찌하여 태에 들어가지 못하느냐 하면,

두 부부가 합궁할 당시 아버지의 정수精水가 나올 때

어머니의 정수가 나오지 않거나,

어머니의 정수가 나올 때 아버지의 정수가 나오지 않거나

둘 다 같이 나오지 않을 때이다.

 

또 어머니의 것은 깨끗하지 않은데 아버지의 것만 깨끗하거나

아버지의 것은 깨끗하지 않은데 어머니의 것만 깨끗하거나

둘 다 깨끗하지 않을 때 역시 수태受胎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또 어머니의 음처陰處에 병病이 있을 때이니라.

또 부모는 존귀한데 중음이 비천하거나

혹은 중음은 존귀한데 부모가 비천하면 수태가 되지 않느니라.

부모와 중음이 다 같이 존귀한데도

지은 업業이 화합되지 않으면 그 또한 수태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 그 중음이 앞의 경계에서

부모가 될 남자 또는 여자 두 편에 대한 애정이 없어도 받아 나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중음이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면,

위와 같은 허물이 없어야 하느니라.

 

물론 어머니의 뱃속은 깨끗하여야 하며

음행 하는 부모 앞에 중음이 나타났을 때

그 부모와 아이가 서로 감응할 업이 있어야 비로소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또 중음이 태로 들어가려 할 때 마음이 뒤바뀌게 되므로,

남자라면 어머니에 대하여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고,

아버지에 대하여 증오심을 느끼게 될 것이며,

만일 여자라면

아버지에 대하여 애정을 내게 될 것이고 어머니에 대하여는 증오심을 내게 될 것이다.

또 전생에 지었던 모든 업 때문에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어

삿되게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춥고 차다는 생각과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오고 구름과 안개가 끼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혹은 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기도 하리라.

이런 생각을 낸 뒤에 업의 우열優劣을 따르는 것이니라.

또 열 가지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라.


그 열 가지는 이렇다.

 

나는 지금 집으로 들어간다.

나는 누각에 오르려 한다.

나는 대전臺殿에 올라간다.

나는 평상에 올라간다.

나는 풀로 지은 집으로 들어간다.

나는 낙엽으로 지은 집으로 들어간다.

나는 우거진 풀에 들어간다.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담장 구멍으로 들어간다.

나는 울타리 사이로 들어간다.


그렇게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니라.

이러한 생각을 한 뒤에 중음은 곧 어머니의 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라. 

그렇게 수태되는 때의 이름을 갈라람이라 하나니 그것은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이지 다른 물건이 아니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기와 피가 화합하는 인因과 연緣으로 말미암아 의식意識이 반연攀緣하는 대상에 의지依止하여 머무르는 것이니라.

비유하면 마치 타락酪의 병甁이 사람의 공功에 의지하여 뚫릴 적에 움직임이 그치지 않으면 소(젖)이 나올 수 있고(연유를 그릇에 담아 사람이 정제함으로써 깨끗하고 매끄러운) 이것과 다르면 생기지 않는 것처럼 부모의 깨끗하지 못한 정기와 피로 된 갈라람의 몸도 그와 같느니라.

 

 

또 네 가지 비유가 있느니라.

벌레는 푸른 풀(靑草)에 의지해 생기지만 풀 그 자체가 벌레는 아니요,

그렇다고 벌레가 풀을 떠나서 있는 것도 아니니라.

그러나 풀에 의지하는 인과 연이 화합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벌레가 생기겠느냐.

인과 연의 화합으로 인해 비로소 생기며

봄이 푸른 색깔로 되는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로 된 갈라람의 몸도 이와 같다.

인과 연이 화합하여 사대(四大:地水火風)의 근본이 생기는 것이니라.

마치 쇠똥(牛糞)에 의지하여 벌레가 생기지만 쇠똥 자체가 벌레는 아니요,

그렇다고 벌레는 쇠똥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도 아닌 거와 같다.

하지만 쇠똥에 의지하는 인과 연이 화합하여야 비로소 벌레가 생기게 되어 몸이 누런 색깔로 되는 것과 같이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로 된 갈라람의 몸도 이와 같으니라.

인과 연이 화합하여 사대의 근본이 생기는 것이다.

 

또 갈라람은 부모의 부정不淨에 의지하여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지계地界인 땅의 요소가 앞에 나타나면서 딱딱한 성품이 되고,

수계水界인 물의 요소가 앞에 나타나면서 축축한 성품이 되며,

화계火界인 불의 요소가 앞에 나타나면서 따뜻한 성품이 되고,

풍계風界인 바람의 요소가 앞에 나타나면서 움직이는 성품이 되느니라.

 

만일 부모의 부정으로 된 갈라람의 몸에

땅의 요소만 있고 물의 요소가 없다면 곧 바짝 말라서 모두 다 분산하게 되리라.

비유하면 마치 손으로 마른 미숫가루나 재 따위를 움켜쥐는 것과 같고

만일 물의 요소만 있고 땅의 요소가 없다면

여의고 흩어져서 마치 기름 방울이나 물과 같으리라.

물의 요소 때문에 땅의 요소가 흩어지지 않고 땅의 요소 때문에

물의 요소가 흐르지 않음이 이와 같느니라.

부모의 부정으로 된 갈라람의 몸에

땅과 물의 요소만이 있고 불의 요소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곧 부서지고 무너져서 마치 여름철에 응달에 둔 고깃덩이와 같으리라.

갈라람의 몸도 이와 같아서 그 몸에 땅, 물, 불의 요소만이 있고 바람의 요소가 없다면 곧 더 자라지도 못하고 넓고 커지지도 못하리라.

 

이들은 모두가 전생의 업으로 말미암아 인이 되고 연이 되어서

서로가 함께 부르고 감응하여 의식이 생기게 되며 곧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땅의 요소로 지탱할 수 있고

물의 요소로 포섭할 수 있으며

불의 요소로 익게 하고

바람의 요소로 자라게 하는 것이니라.

 

또 마치 어떤 사람이 제자와 함께 엿을 만들면서 그 엿에다 공기를 불어 넣어 넓고 크게 속이 텅 비게 하는 것이 연뿌리와 같게 하는 것처럼 몸 안의 요소인 땅, 물, 불, 바람과 업의 힘을 자라게 하는 것도 이와 같느니라.

 

 

부몽, 부정으로 인한 갈라람의 몸이 있는데

어머니의 배도 아니요 또 업, 인, 연도 아니요,

다만 이들의 많은 연이 어울려 모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수태함이 있느니라.

 

마치 새로운 종자種子를 햇볕에 쪼이고 바람을 쏘여 그 종자가 손상되거나 썩지 않고 단단하고 알차게 잘 간직하였다가 질 좋은 밭에다 뿌리면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해 비로소 싹과 줄기, 가지와 잎, 꽃과 열매가 차례로 자라나게 되는 것과 같느니라.

이 종자는 연을 여의지 않고 화합하였으므로 싹 등이 생기는 것이다.

수태 또한 이와 같아서 부모만도 아니요

다만 업과 남은 연만으로 수태가 되는 것도 아니니라.

반드시 부모의 정기와 피와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써만이 수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마치 눈 밝은 사람이 불을 구하기 위해

일광주日光珠를 햇빛에다 놓고 마른 쇠똥을 그 위에다 놓아야 비로소 불이 생기는 것처럼, 부모의 정기와 피와 인과 연이 합해져야 비로소 수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나는 찬탄하지 않느니라.

부모의 부정으로 된 갈라람을 물질(色)이라 하고,

느낌(受)이나, 

생각(想)이나, 

지어감(行)이나, 

의식(識)은 곧 이름(名)이어서

명색(名色:이름과 물질)이라 하나니

존재(有)에 의탁하여 태어나는 것이므로

조그마한 부분이나 찰나刹那까지라도 나는

찬탄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존재 속에 태어나게 되어 있고 태어나게 되면

그것은 큰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마치 더러운 오물 찌꺼기는 적어도 악취가 나는 것처럼

모든 존재 속에 태어나면 적은 것도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니라.

이 오취온五取蘊 즉 물질,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은

모두가 태어나고(生) 자라나고(增長) 쇠하여 끝내 무너지는 것이니,

태어나는 것은 곧 괴로운 것이요

머무르는 것은 곧 병病이며 자라고 쇠하여 무너지는 것은

곧 늙어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라면 누가 존재의 바다(有海)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할 수 있겠느냐.

모든 것은 어머니의 태 속에 눕게 됨으로 인해 이런 극심한 고통을 받게 것이니라.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무릇 중음이 태 속에 들어가게 되면

대략의 수數로 말하여 서른여덟 번의 칠 일씩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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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칠 일 동안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는

막대기 같고 부스럼 같은 것이 더러운 찌꺼기 위에 누워 있느니라.

그것은 마치 냄비 속에 있는 것과 같은데

그때 몸(身根)과 의식이 한 곳에 같이 있느니라.

그것은 왕성한 열熱에 볶이면서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고

그 이름은 갈라람이라 하느니라.

 

그 형상은 마치 죽의 즙汁과 같고 혹은 타락의 물과 같은데

칠 일 동안 안의 열(內熱)에 끓여지고 삶아지면서

지수화풍 즉 땅의 요소의 단단한 성품과,

물의 요소의 축축한 성품과,

불의 요소의 따뜻한 성품과,

바람의 요소의 움직이는 성품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느니라.

 

두 번째 칠 일 동안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에도

더러운 찌꺼기 위에 누워 있느니라.

 

몸과 의식이 한 곳에 같이 있고

그 형상이 마치 냄비 속에 있는 것과 같은데 맹렬한 열에 볶이며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어머니의 뱃속에서는 저절로 일어나는 바람이 있어 그 이름을 편촉遍觸이라 하느니라.

 

전생에 지은 업을 좇아 생기는 바람이 곧 그것이니라.

이 바람이 태胎에 부딪칠 때를 알부타라 한다.

 

그 생긴 모습은 마치 빡빡한 타락 같기도 하고 혹은 엉긴 소(우유)와도 같은데,

안의 열에 끓여지고 삶아져서 이 칠 일 동안에

네 가지 요소(四界)가 나타나게 되느니라.

 

세 번째 칠 일 동안의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느니라.

세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으니,

 

그 이름을 도초구刀革肖口라 하느니라.

전생에 지은 업을 좇아 생기게 되는 바람인데

 

이 바람이 태에 부딪칠 때를 폐시閉尸라고 하느니라.

그 생긴 모습이 마치 쇠젓가락 같기도 하고 혹은 지렁이 같으며,

 

이 칠 일 동안에 네 가지 요소가 생기게 되느니라.

 

네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는데

그 이름을 내문內門이라 하느니라.

 

이 바람이 태전胎箭에 불어칠 때를 건남健南이라 하는데

그 생긴 모습은 마치 신골 같기도 하고

혹은 따뜻하게 달군 돌과도 같으며,

 

이 칠 일 동안에 네 가지 요소가 생기게 되느니라.

 

다섯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 바람이 있는데

그 이름을 섭지攝持라 하느니라.

 

이 바람이 태에 부딪칠 때 다섯 개의 모양이 나타나게 되는데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넓적다리와 머리가 바로 그것이니라.

 

비유하면 마치 봄철에 단비가 내려 나무의 가지와 줄기가 더욱 자라 울창해지게 되는 것처럼 이것 역시 그와 같아서 다섯 가지 모양이 나타나게 되느니라.

 

 

여섯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광대廣大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부딪치면서 두 개의 팔꿈치와 두 개의 무릎,

그렇게 네 가지 모양이 나타나게 되나니,

마치 봄철에 비가 내리면 싹이 가지에서 돋아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느니라.

 

일곱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선전旋轉이라고 한다.

 

이 바람이 태에 부딪치면서 네 개의 모양이 나타나게 되는데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다리가 바로 그것이니라.

 

그 네 개의 모양은 마치 거품 무더기와 같기도 하고

혹은 물에 있는 이끼와도 같느니라.

 

여덟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번전番羽轉이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부딪치면서 스무 개의 모양이 나타나게 되는데,

처음 생기게 되는 손가락 열개와 발가락 열 개가 그것이다.

 

그 모양이 마치 새봄에 비가 오면 나무 뿌리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과 같느니라.

 

아홉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분산分散이라고 한다.

 

이 바람이 태에 부딪치면서 아홉 가지의 모양이 나타나게 되는데,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와 두 개의 코와 입과 아래에 있는 두 개의 구멍이 그것이니라.

 

열 번째 칠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견경堅硬이라 한다.

 

이 바람이 태를 견실堅實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칠 일 동안 또 한 줄기 바람이 있는데 그 이름을 보문普門이라 한다.

 

이 바람이 태 안을 불룩하게 하여

마치 부낭浮囊과 같게 만들면서 공기를 가득히 채우느니라.

 

열한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소통疎通이라고 한다.

 

이 바람이 태에 부딪치면서 아홉 개의 구멍이 나타나게 되느니라.

만일 어머니가 움직일때에는 그 바람이 빙빙 돌면서 빈 곳을 통하여 구멍은 커지게 된다.

 

그 바람이 위로 향하면 위의 구멍이 열린다.

아래로 향하면 아래의 구멍이 통하는 것이니라.


비유하자면 마치 대장장이들이 풀무질을 할 때에

위와 아래로 공기를 통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바람이 제 할 일을 다하면 곧 가만히 사라지게 되느니라.

 

 

 

 

열두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곡구曲口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불면 아치 연뿌리와 같은 대장大腸과 소장小腸이

왼편과 오른편에 만들어지느니라.

 

그것들은 몸에 의지하여 서로 교차되어 엉켜서 머무르게 되는데

이 칠 일 동안에도 다른 바람이 있으니, 그 이름을 천발穿髮이라 한다.

 

그것이 태 안에서 가감 없이 백서른 개의 마디를 만들고,

다시 백한 개의 금처禁處를 만드느니라.

 

열세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바람이 태에 불면 배고픔과 목마름을 알게 되고,

 

어머니가 음식을 먹어서 생긴 모든 양분은 배꼽으로부터 들어가 그 몸을 돕게 되느니라.

 

열네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선구線口라 한다.

 

그 바람이 태로 하여금 일천 개의 힘줄을 만들게 하느니라.

몸 앞에 이백오십 개,

몸 뒤에 이백오십 개,

오른편에 이백오십 개,

왼편에 이백오십 개가 있게 되느니라.

 

 

열다섯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연화蓮花라 한다.

 

그 바람이 태에 불면 아이에게 스무 가지의 맥脈이 만들어지게 되느니라.

아이는 모든 양분을 흡수하게 되나니,

 

몸 앞에 다섯 개,

몸 뒤에 다섯 개,

오른편에 다섯 개,

왼편에 다섯 개가 있게 되느니라.

 

맥에는 갖가지 이름과 갖가지 색깔이 있으니

그 이름을 반伴 혹은 역力

또는 세勢라고 하기도 한다.

 

색깔은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색이 있고

콩이나 소유蘇油, 타락 등의 색을 띠는 것도 있으며,

또 여러 색깔이 함께 뒤섞인 색도 있느니라.

 

그 스무 개의 맥에는 마흔 개씩의 맥이 각각 권속을 이루고 있어

모두 합하면 팔백 개나 되느니라.

 

몸 앞뒤와 좌우에 각각 이백 개씩 있어 기운을 흡수하느니라.

이 팔백 개의 맥도 각각 권속을 거느니고 있으니,

 

백 개씩의 도맥徒脈이 그것이다.

권속을 이루어 서로가 연결되어 있느니라.

 

합하면 팔만 개가 되는데

앞에 이만 개가 있고,

뒤에 이만 개,

오른편에 이만 개,

왼편에 이만 개가 있느니라.

 

팔만 개의 맥에는 또 여러 개의 많은 구멍이 있느니라.

한 개의 구멍이 있기도 하고 두 개의 구멍이 있기도 하다.

 

나아가 일곱 개의 구멍이 있기도 하다.

이 하나하나는 저마다 털구멍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것은 마치 연뿌리에 있는 많은 구멍과 같느니라.

 

 

열여섯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감로행甘露行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불면 그 방편으로 인하여

태에 있는 아이의 두 개의 눈이 생기게 된다.

 

눈만 제자리에 박히게 하는 게 아니라

두 귀와 두 코,

입, 목구멍, 가슴 등

 

먹은 음식이 들어가 멈추고 저장되는 곳이 있게도 하고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통과하게 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마치 옹기장이들이 찰진 진흙 뭉치로 만들려는 기물器物을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게 하는 것처럼

이것 역시 업의 바람으로 눈 등을 만들되 그 형세에 따라 틀림이 없게 하느니라.

 

열일곱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모불구毛拂口라 한다.

 

이 바람은 태에 있는 아이의 눈이나 귀, 코, 입, 목구멍, 가슴 및

음식이 들어가는 곳을 미끄럽고 윤택하게 하느니라.

 

들숨, 날숨이 통하게 하는 곳도 제자리에 놓이게 하니 비유하자면

솜씨 좋은 장인匠人이 거울을 만들어 마무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이 업의 바람으로 말미암아 잘 만들어져 제자리에 놓이는 것에 장애가 없느니라.

 

열여덟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무구無垢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있는 아이의 여섯 감관을 깨끗하게 하나니

마치 사나운 바람이 갑자기 구름을 사방으로 흩어 버리면 해와 달이 깨끗하게 되는 것처럼, 이 업의 바람으로 말미암아 태에 있는 아이의 여섯 감관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이와 같느니라.

  

열아홉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갈 때 이미 세 가지 감관을 얻고 있었으니

 

그것은 몸과 목숨과 뜻이라

이제 그 바람이 아이의 눈, 귀, 코, 혀 네 가지 감관을 성취하게 하느니라.

 

 

 

 


스물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견고堅固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모든 것을 견고하게 한다.

 

먼저 왼다리 발가락 마디 스무 개의 뼈가 생기게 되고

오른다리에도 스무 개의 뼈가 생기게 된다.

발꿈치에는 네 개의 뼈가 있게 되고

발목에는 두 개의 뼈가 있게 되며

무릎에도 두 개의 뼈가 있게 되고

볼기짝에도 두 개의 뼈가 있게 되며

엉덩이에는 세 개의 뼈가 있게 되고

등골에는 열여덟 개의 뼈가 있게 되며

갈비에는 스물네 개의 뼈가 있게 되며

왼손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손가락의 마디와 스무 개의 뼈가 생기게 되고

또 오른손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역시 스무 개의 뼈가 생기게 되며

팔뚝에는 두 개의 뼈가 있게 되고

팔에는 네 개의 뼈가 있게 되며

가슴에는 일곱 개의 뼈가 있게 되고

어깨에도 일곱 개의 뼈가 있게 되며

목에는 네 개의 뼈가 있게 되고

턱에는 두 개의 뼈가 있게 되며

이에는 스물두 개의 뼈가 있게 되고

해골에는 네 개의 뼈가 있게 되느니라.

 

비유하자면 흙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 때 먼저 단단한 나무로 속을 세우고

그런 뒤 줄로 얽어매고 진흙을 발라 그 형상을 완성하는 것처럼

 

이 업의 바람으로 말미암아 그 힘이 모든 뼈를 만들어 펴는 것도 이와 같느니라.

 

스물한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생기生起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있는 아이의 몸 위에 살이 생기게 하느니라.

비유하자면 미장이가 먼저 진흙을 잘 이긴 뒤에 담장이나 벽을 바르는 것과 같느니라.

 

 

스물두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부류浮流라고 한다.

이 바람이 태에 있는 아이의 몸에 피가 생기게 하느니라.

 

스물세 번째 칠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정지淨持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있는 아이의 몸에 피부가 생기게 하느니라.

 

스물네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자만滋漫이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있는 아이의 피부를 반드럽게 하느니라.

 

스물다섯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지성持城이라 한다.

 

이 바람으로 말미암아 태에 있는 아이의 몸에 피와 살이 더욱 불어나고

또한 윤택하게 되느니라.

 

스물여섯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생성이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있는 아이의 몸에 머리칼과 털과 손발톱이 생기게 하느니라.

그리고 모두 맥脈과 서로 연결되게 하느니라.

 

스물일곱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곡약曲藥이라 한다.

 

이 바람이 태에 있는 아이의 머리칼이 완성되게 하고

털과 손발톱이 모두 완성되게 하느니라.

 

 

 

///

 


전생에 나쁜업을 지으면 이러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느니라.

 


태에 있는 아이도 전생에 간탐을 잘 부리고 몹시 인색하였으며, 모든 재물에 욕심이 깊어 집착하여 보시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부모나 성현의 말씀을 멀리하고 몸과 말과 뜻으로 지었던 착하지 않은 업이 밤낮으로 자라서 이러한 과보를 받게 되느니라.

즉 인간으로 태어나도 받게 되는 과보가 모두 마음에 맞지 않을 것이니라. 언제나 갈망하는 일에 반대가 나타날 것이다.

 


세간 사람들이 긴 것을 좋아하면 그 반대로 짧게 될 것이다.

짧을 것을 좋아하면 그 반대로 길게 될 것이다.

거친 것을 좋아하면 그 반대로 가늘게 될 것이다.

가는 것을 좋아하면 그 반대로 거칠게 될 것이다.

서로 떨어진 것을 좋아하면 그 반대로 서로 가깝게 될 것이다.

또 세간 사람들이 많은 것을 좋아하면 그 반대로 적게 될 것이다.

적은 것을 좋아하면 그 반대로 많게 될 것이며,

살찐 것을 좋아하면 반대로 야위게 될 것이고

야윈 것을 좋아하면 반대로 살찌게 될 것이다.

겁내는 것을 좋아하면 반대도 용감하게 될 것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하면 반대로 겁이 많게 될 것이며,

흰 것을 좋아하면 반대로 검게 될 것이고

검은 것을 좋아하면 반대로 희게 될 것이다.

또 나쁜 업으로 말미암아 얻는 나쁜 과보를 받았다면 모두가 싫어할 것이다.

귀머거리로 태어나기도 하고,

소경, 벙어리, 어리석고 누추한 이로 태어나기도 하니

그가 내는 음성은 사람들이 듣기를 싫어할 것이니라.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마치 아귀와 같이 되므로

친족들조차 모두가 미워하여 서로 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니라.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면 오죽하겠느냐.

남에게 말할 때도 믿으려 들지도 않고 뜻에 두지도 않으려 할 것이다.

바로 그가 전생에 지은 악업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만약 태 속의 아이가 전생에 복된 일을 많이 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니라.

 

마음을 닦고 보시를 좋아하고 간탐하지 않으며 없는 이들을 가엾이 여겨 돕고 그렇게 공덕을 쌓았으면 그가 지었던 착한 업이 점점 자라서 마땅히 훌륭한 과보를 받을 것이니라.

 

즉 인간 세계에 태어나서 얻게 되는 과보가 모두 다 마음에 맞을 것이니 모든 것이 뜻대로 되리라.

만일 세간 사람들이 긴것을 좋아하면 길게 될 것이다.

짧은 것을 좋아하면 짧게 될 것이며,

긴 것을 좋아하면 길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법도에 맞고 신체의 마디도 적당하며, 많고 적고 살찌고 야위고 용감하고 겁이 많고 얼굴빛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랑하지 않는 이가 없으리라.

여섯 감관도 완전하게 갖추어 그 단정함이 남들보다 뛰어날 것이니, 말씨는 분명하고 그 음성은 청아하니 보고 듣는 이들이 기뻐하게 되느니라.

남을 향하여 말할 때도 상대를 믿고 공경하는 생각으로 마음에 새겨두나니 그것은 전생에 지은 착한 업 때문이니라.

 


태 속에 있는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어머니의 오른편 겨드랑이에 쭈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머니의 등골을 향하여 있을 것이니라.

여자아이라면 어머니의 왼편 겨드랑이에 쭈그리고 앉아 어머니의 배를 향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것이니라.

 

생장生藏은 아래요 숙장熟藏은 위이므로

생물건은 아래를 누르고

익은 물건은 위를 찌르니

아이는 마치 뾰족한 나무 끝에 끼워놓은 것과 같으니라.

어머니가 음식을 많이 먹어도 적게 먹어도 모두가 고통이니라.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혹은 바짝 마른 음식을 먹어도 차고 뜨겁고 짜고 싱겁고 쓰고

신음식을 먹어도 고통을 받게 되며

혹은 너무 달거나 극도로 매운 음식을 먹을 때에도 고통을 받으리니,

어머니가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받느니라.

음욕을 행하거나 급히 걷거나 달려가거나

때로 똑바로 앉거나 오래 앉아 있거나 오래 누워 있거나 모두 고통받느니라.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에도 전생에 공덕을 쌓지 못한 이는 그 업으로 인해 고통받으리라.

 


사람 세계人趣에서도 고통이 이러한데 하물며 나쁜 세계惡趣인 지옥이면 오죽하겠느냐.

그 고통이야말로 비유하기조차 하기 어렵느니라.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라면 끝없이 나고 죽는 괴로움의 바다에 있으면서 이런 액난厄難을 받기 좋아하겠느냐.  

 

 

 

 

 

스물여덟 번째 칠 일 동안에도 바람이 있느니라

 

이 기간에는 그 바람으로 말미암아 어머니의 태 속에 있는 아이는

문득 여덟 가지 뒤바뀐 생각을 내게 되어 있느니라.

 

그 여덟 가지는 바로 이러하다.

 

집이라는 생각이다.

탈것이라는 생각이다.

동산이라는 생각이다.

누각이라는 생각이다.

나무숲이라는 생각이다.

평상이라는 생각이다.

강물이라는 생각이다.

옷이라는 생각이다.

 

그것들은 실은 경계가 없는데도 허망하게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스물아홉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화조花條라 한다.

 

이 바람은 태 안에 있는 아이에게 불어서 그 형색을 변모시킨다.

산뜻하고 깨끗하게 하기도 하고,

업의 힘에 의하여 검은 빛깔을 띠기도 한다.

또는 푸른 빛을 띠기도 하고,

또 갖가지로 뒤섞인 얼굴빛을 갖게 하기도 한다.

혹은 바짝 말라서 윤기가 없게 하기도 하고,

흰빛과 검은빛이 색깔에 따라 나오게 하기도 하느니라.

 

 

 

서른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철구鐵口라 한다.

 

이 바람은 태 속에 있는 아이에게 머리칼과 손발톱을 자라게 하는데

업에 따라 색깔은 희고 검고 달리 나타나느니라.

 

서른한 번째, 서른두 번째, 서른세 번째, 서른네 번때, 각 칠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아이는 점차로 커지는데

 

서른다섯 번째 칠 일 동안 아이는

어머니의 태 속에서 팔다리가 완전하게 갖추어지느니라.

 

서른여섯 번째 칠 일 동안에는 아이가 태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느니라.

 

서른일곱 번째 칠일 동안에는 아이가 어머니의 태 속에서 세 가지 생각을 내게 되느니라.

뒤바뀌지 않는 그 생각은 이러하다.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

냄새나고 더럽다는 생각,

검고 어둡다는 생각이 그것이니라.

 

이것은 극히 일부분을 설명한 것이니라.


서른여덟 번째 칠 일 동안에도 어머니의 태 속에는 바람이 있느니라.

그 이름을 남화藍花라 한다.

 

이 바람이 태 속에 있는 아이로 하여금 몸을 움직여 아래를 향하게 한다.

두 팔을 길게 펴고 산문産門을 향해 나아간다.

 

거기에 또 바람이 있으니,

그 이름을 취하趣下라 한다.

 

업의 힘 때문에 생긴 바람이니라.

이 바람이 태의 아이에게 불면 아이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두 다리를 위로

향하면서 장차 산문으로 나오려 하는 것이다.

만일 그 태에 있는 아이가 전생에 수많은 나쁜 업을 몸으로 지었다면 지극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가령 남에게 낙태落胎를 하게 하였다면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아이는 과보를 받을 것이다.

자궁 밖으로 나오려 할 때 손과 다리가 멋대로 놓여 움직이지 못하고 어머니의 뱃속에서 죽게 될 것이니라.

그때 조산의 경험이 있는 여인이나 용한 의사가 따뜻한 소유蘇油나 혹은 느릅나무 껍질 즙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미끄러운 물질을 손에 바르고 날카롭고 창끝같이 얇은 칼을 가운뎃손가락에 끼고, 냄새가 나는 구덩이 속에 밀어넣어 아이 몸을 조각조각 저미어 끊어내면

그 어머니는 극심한 고통에 그로 인하여 죽게도 되며 설령 산다 해도 죽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느니라.

만일 저 태 속에 있는 아이가 전생에 착한 일을 많이 하였다면 그 업이 감응하여 그의 어머니를 손상하지도 않고 안온하게 출생하게 될 것이니라.

설령 예사로운 일로써 이런 재액이 없다 해도 서른여덟 번째 칠 일이 되면 그 어머니는 고통으로 하여 죽을 뻔하여야 비로소 아이를 낳게 되느니라.

 

 

 

 


석존은 여기까지 말슴하시고 잠시 숨을 고르신 다음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 태 속에서의 고통과 태어날 때의 고통을 알았으리라.

마땅히 범인의 태를 받아 나는 것은 극히 괴로운 것임을 알았으리라.


태어난 후에도 고통은 계속되느니라.

처음 태어날 때에 남자이건 여인이건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있으리니

갓난아이는 옷에 싸여 있기도 하고

혹은 햇볕에 있기도 하고

혹은 그늘진 곳에 있기도 하고

혹은 흔들리는 수레에 놓이기도 하고

혹은 평상이나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기도 하리라.

 

어떤 경우이든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모지고 독한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비유하자면 가죽을 벗긴 소를 담장에다 바짝 붙여서 매놓았을 때와 같다.

가죽을 벗긴 소를 담장에 붙혀 매변 담장의 벌레들이 살을 뜯을 것이요,

또 나무나 풀에 가까이 두면 나무나 풀의 벌레가 달려들어 살을 뜯어먹을 것이다.

빈곳에 놓아두어도 다른 벌레들이 달려들어 쪼아먹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 태어난 때에도 그러하느니라.

따뜻한 물로 씻는다고 하나 큰 고통을 받게 되나니,

그것은 마치 문둥이의 피부가 문드러지고

몽둥이로 맞아 모진 고통을 받는 것과  다름없느니라.

뒤이어 어머니 피 찌꺼기血垢를 마시면서 자라게 되나니,

피 찌꺼기라 함은 거룩한 법률 속의 젖즙이 바로 그것이니라.  

 

이와같이 지혜 있는 이라면 이미 갖가지 고통으로 인해

하나도 즐거워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거늘

 

어느 누가 이런 고통의 바다를 좋아하며 그리워하겠느냐.

언제나 이 세계는 유전流轉하는 것이면서 휴식함이 없는 것이니라.

 

더욱이 태어나 칠일이 지난 뒤에는

몸 안에 팔만 마리의 벌레가 생겨나 몸을 뜯어 먹으니 내 모습을 상세히 그려 주리라.

 

식발食髮이라는 한 마리의 벌레는 머리 뿌리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머리 뿌리를 뜯어먹고 산다.

복장伏藏이라는 벌레와 추두라는 두 마리의 벌레는 머리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그 머리를 뜯어먹으며 산다.

요안繞眼이라는 한 마리의 벌레는 눈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눈을 뜯어먹고 산다.

구축驅逐이라는 벌레와 분주奔走, 옥택屋宅, 원만圓滿이라는 벌레는 뇌腦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항상 뇌를 뜯어먹고 산다.

또 도엽稻葉이라는 벌레는 귀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귀를 뜯어먹고 살고

장구藏口라는 벌레는 코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코를 뜯어먹고 산다.

요척遙擲이라는 벌레와 변척遍擲이러는 벌레는 입술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입술을 뜯어먹고 살고,

밀엽蜜葉이라는 벌레는 이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이를 뜯어먹고 살며,

목구木口라는 벌레는 이 뿌리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이 뿌리를 뜯어먹고 산다.

또 침구針口라는 벌레는 혀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혀를 뜯어먹고 살고,

이구利口라는 벌레는 혀의 뿌리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혀의 뿌리를 뜯어먹으며 산다.

수원手圓이라는 벌레는 턱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턱을 뜯어먹고 살고,

수망手網이라는 벌레와 반굴半屈이라는 벌레는 손바닥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손바닥을 뜯어먹고 산다.

또 단현短懸이라는 벌레와 장현長懸이라는 벌레는 팔뚝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팔뚝을 뜯어먹고 살고 원비遠臂라는 벌레와 근비近臂라는 벌레는 팔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팔을 뜯어먹으며 산다.

욕탄欲呑이라는 벌레와 이탄已呑이라는 벌레는 목구멍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목구명을 뜯어먹고 살고, 유원有怨이라는 벌레와 대원大怨이라는 벌레는 가슴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가슴을 뜯어먹고 산다.

또 나패螺貝라는 벌레와 나구螺口라는 벌레는 살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살을 뜯어먹고 살고 유색有色이라는 벌레와 유력有力이라는 벌레는 피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피를 빨아 살고,

용건勇健이라는 벌레와 향구香口라는 벌레는 힘줄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힘줄을 뜯어먹고 산다.

 


불고不高라는 벌레와 하구下口라는 벌레는 등골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등골을 뜯어먹고 산다.

똑같은 이름의 지색脂色이라는 두 마리의 벌레는 비계에 의지하여 살면서 비계를 뜯어먹고 살고, 황색黃色이라는 벌레는 황黃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황을 뜯어먹으며 살고, 진주眞珠라는 벌레는 콩팥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콩팥을 뜯어먹으며 산다.

대진주大眞珠라는 벌레는 허리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허리를 뜯어 먹으며 산다.

 


또 미지未至라는 벌레는 지라에 의지하여 살면서 지라를 뜯어먹고 살고,

수명水命이라는 벌레와 대수명大水命, 침구針口, 도구刀口라는 벌레는 장腸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장을 뜯어 먹으며 산다.

월만月滿, 월면月面, 휘요暉曜, 휘면暉面, 별주別住라는 이름을 가진 벌레는 오른 겨드랑이를 뜯어먹으며 산다.

또 이름이 그와 같은 다섯 마리의 벌레는 역시 반대편 왼 겨드랑이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왼 겨드랑이를 뜯어멱으며 살고, 천전穿前, 천후穿後, 천견穿堅, 천주穿住라는 벌레는 뼈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뼈를 뜯어먹으며 산다.

대백大白, 소백小白, 중운重雲, 취기臭氣라는 벌레는 맥脈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맥을 뜯어먹으며 산다.

또 사자師子, 비력備力, 급전急箭, 연화蓮花라는 벌레는 생장生藏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생장을 뜯어먹으며 살고, 안지安志, 근지近志라는 벌레는 숙장熟藏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숙장을 뜯어먹으며 산다.

염구鹽口, 온구蘊口, 망구網口, 작구雀口라는 벌레는 소변 보는 곳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오줌을 먹고 산다.

또 응작應作, 대작大作, 소형小形, 소속小束이라는 벌레는 대변보는 곳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똥을 먹고 살고 흑구黑口라는 벌레와 대구大口라는 벌레는 넓적다리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넓적다리를 뜯어먹고 산다.

나癩라는 벌레와 소라小癩라는 벌레는 무릎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무릎을 뜯어먹고 살고,

우근愚根이라는 벌레는 종아리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종아리를 뜯어먹고 산다.

흑항黑項이라는 벌레는 다리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다리를 뜯어먹고 산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몸에는 팔만 마리의 벌레들이 살고 있느니라.

그것들은 밤낮으로 우리의 몸을 뜯어먹고 있나니 이로 말미암아 몸이 고달픈 것이니라.

그것들에게 세차게 시달려서 파리해지고 피곤해지고 배고프고 목마르게 되니

그리하여 갖가지 근심 걱정과 고뇌가 밀려와 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니라.

그러니, 좋은 의사를 만난들 어떻게 병을 고칠 수 있겠느냐.

 


또 사람들은 신병神病에 붙들리기도 하느니라.

이른바 천신天神, 용신龍神의 팔부신八部神에게 붙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귀신과 갈타포단나羊曷咤布單那와 그 밖의 모든 길짐승, 날짐승, 도깨비에게 붙들리기도 하는 것이니라.

스스로 그것들로 하여 자신을 핍박하고 괴롭히는 것이니, 이루 다 설명하기조차 어렵느니라.

 

 

 

중음신이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가는 데는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중음신이 바른 기억正念으로 들어가는入 것이고

바른 기억으로 머무르며住

바른 기억으로 나오는 것이니라出

 

둘째는 바른 기억으로 들어가

바른 기억으로 머무르다

바르지 않은 기억不正念으로 나오는 것이며,

 

셋째는 바른 기억으로 들어가

바르지 않은 기억으로 머무르다 나오는 것이며,

 

넷째는 모두가 다 바르지 않은 기억인 것이니라.

 

그 무엇이 바른 기억으로 들어가고 머무르며 나오는 것인가하면

중음신의 성품이 생전에 계율 지니기 좋아하였고

 

착한 일을 자주 익혔으며 훌륭한 일을 하기 좋아하였고

복된 일을 많이 하여 항상 정직하고 방일하지 않은 이이니라.

 

그는 큰 지혜의 소유자이니라.

죽으려 할 때도 후회함이 없이 곧 생生을 받나니,

 

그는 일곱 번을 오가면서 생을 받는 예류預流이거나

혹은 가가家家로서 혹 일래一來이기도 하고

혹 일간一間이기도 한이이니라.

 

그 사람은 착한 행을 닦았기 때문에 목숨이 다하여 마치려 할때도 흔들리지 않느니라.

괴로움이 와서 핍박하고 시달림을 받아도 마음이 평온하여 산란하지 않으니

 

바른 기억으로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가느니라.

모든 법은 업을 좇아 나는 것이니

 

모두가 인연을 따라 생기는 것임을 분명하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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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작약 | 작성시간 12.06.12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감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12 예..부인병과 소아병.. 성관련을 총체적으로 이해할수 있는 글인듯 합니다..
    물론..확인할 수준이 안되는게 저의 문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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