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러시아의 신비주의자 조지 구제프(George Gurdjieff)는 자신의 정신적 탐험을 회고하는 <위대한 사람과의 만남>
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수피 탁발승과 요가의 프라나얌(pranayam)과 아사나(asana)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탁발승은 어떤 종류의 호흡법도 수행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자연스러운 호흡을 변형시키려는 모든 시도가 심신의 부조화를 초래하며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프라나얌과 여타의 호흡 수행법에 대한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사실, 진실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모든 거짓은 그 안에 진실의 요소를 담고 있다. 이 소량의 진리가 그 거짓을 인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소량의 진리로 인해 거짓이 신뢰를 얻고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가능하면 삶의 자연스러운 기능들을 방해하거나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진실이다.
이렇게 간섭하고 방해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우리 몸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
호흡, 걸음걸이, 앉거나 서는 방식 등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는 즉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잃음'도 변화를 의미하고 '얻음'도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을 명심하라. 둘 다 변화를 뜻한다.
그러므로 지금 상태 그대로 머물기를 원한다면 그대의 호흡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디론가 가야 한다면, 그대의 삶에 변화를 원한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호흡 패턴(pattern)을 변화시키면 그대의 생활 방식 전체가 변화한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지금 상태에 만족한다면, 지금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무엇인가 충분치 않다고 느낀다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 때 호흡의 변화는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호흡하는 방식을 변화시키자마자 그대 안에서 많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것들이 태어난다.
수많은 실험을 거친 후에, 호흡 수련을 통해 무엇이 떨어져 나가고 무엇이 새로 탄생하는지 밝혀졌다.
이제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나 다름없이 인정되고 있다.
이 중 몇 가지는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화가 나면 호흡에 변화가 일어난다.
호흡이 똑같은 상태로 유지되지 않는다. 평온함과 침묵에 젖어 있을 때도 호흡이 변화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평상시와 같은 호흡이 아니다.
침묵 속에서 호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안다면 그대는 호흡을 거기에 맞게 조절함으로써 침묵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
마음과 호흡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음 속에 성욕이 일어나면 즉시 호흡이 바뀐다.
그러므로 성욕이 일어날 경우 호흡이 바뀌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성욕은 즉각 사라질 것이다.
섹스에 대한 욕망이 멈출 것임. 그 욕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인간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특정한 상황을 필요로 한다.
다른 부분과 일치되는 상황이 조성되어야만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노의 물결이 거세게 일고 있을 때 호흡을 느리게 하면 분노가 증발해 버린다.
그렇게 느린 호흡 속에서 분노는 자기가 머물 곳을 찾지 못한다.
따라서 호흡 수련은 매우 중요하다. 호흡의 변화는 즉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다.
각기 다른 호흡 세태 속에서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이미 과학적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호흡법을 수련하는 데 위험은 없다.
이 실험을 처음으로 행한 사람들에게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새로운 탐구의 실험 단계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온갖 실험을 거친 후에 모든 것이 명백하게 밝혀지면 그것은 과학적인 법칙으로 굳어진다.
이 때 위험은 사라진다.
가령, 화를 내면서 호흡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노와 고요한 호흡은 공존할 수 없다.
이 반대의 현상 또한 가능하다.
화가 났을 때 하는 방식처럼 호흡하기 시작하면 그대는 얼마 후 마음 속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프라나얌은 호흡을 통해 마음을 변화시키는 많은 방편을 개발해 왔다.
인위적인 호흡과 자연스러운 호흡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자연스러운 호흡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그대는 자연스러운 호흡이라는 것도 습관화된 인위적 호흡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주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호흡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그대는 이런 식의 호흡에 익숙해져 있다.
이것이 그대의 습관, 제 2의 찬성이 되었다. 실제로 그대는 자연스러운 호흡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그대는 낮 시간과 밤에 다른 식으로 호흡한다. 낮에 그대의 호흡은 인위적이다.
그러나 밤이 되어 잠이 들면 그대의 습관과 무관한 자연스러운 호흡이 찾아온다.
수면중에 작용하는 호흡은 낮 시간의 호흡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우리는 낮에 일하는 동안 자연스럽지 못한 습관적 호흡법을 갖고 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대는 군중 속에 있을 때와 홀로 있을 때 호흡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군중을 떠나 혼자 있게 되는 순간, 즉시 호흡이 바뀌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군중 속에 있을 때 특정한 방식으로 호흡한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호흡한다.
군중에 둘러싸여 있을 때 그대의 마음은 긴장되어 있다. 따라서 그대의 호흡은 빠르고 얕게 진행된다.
숨이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홀로 앉아서 릴랙스되면 숨이 다시 깊어진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호흡이 완벽하게 깊어진다.
낮 동안에는 이렇게 깊이 숨쉬지 못한다. 수면중에는 숨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호흡이 깊어진다.
그러나 낮에 깨어 있는 동안에는 그렇지 못하다.
흔히 우리가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은 자연스러운 호흡이 아니다. 그것은 습관화된 호흡일 뿐이다.
너무 익숙해져서 몸에 밴 호흡이다.
어린아이들은 숨쉬는 방식이 다르다. 잠자는 아기를 관찰해 보아라. 그는 배로 숨쉰다. 숨쉴 때 배가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러나 성인은 가슴으로 숨쉰다. 성인은 호흡할 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호흡한다.
만일 그대가 아이들과 같은 식으로 호흡하기 시작하면 그대의 마음 또한 서서히 아이와 같은 상태로 접어들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아이처럼 순진무구해질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보면, 순진무구해졌을 때 그대는 아이들처럼 배로 숨쉬게 될 것이다.
이것이 중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불상(佛像)이 인도의 불상과 다른 이유다.
인도의 불상은 배가 작고 가슴이 크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불상은 이와 반대로 가슴이 작고 배가 크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일본과 중국의 불상은 아주 이상하게 보인다.
우리는 이 불상이 잘못 만들어졌거나 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불상은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호흡법이다.
붓다처럼 순수한 사람은 가슴으로 숨쉬지 않는다. 가슴으로 숨쉬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호흡법이다.
배로 숨을 쉬면 복부가 크게 부풀어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불상의 큰 배는 훌륭한 상징이다.
실제로 붓다가 그렇게 큰 배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불상의 표현법은 옳다. 큰 배는 붓다의 순수함을 상징한다.
붓다와 같은 사람은 배로 숨쉰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졌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면 우리는 자연스러운 호흡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현재 우리의 호흡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럽게 호흡하지 말라는 탁발승의 말은 틀렸다.
우리는 이미 부자연스럽게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우리의 호흡도 점점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호흡이 완전히 자연스러워지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가능성이 내부로부터 전개되면서 실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때로는 갑작스럽고 인위적인 호흡법이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을 위험도 많다는 사실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이득을 얻는 것만큼 손실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도박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는 승자가 될 수도 패자가 될 수도 있다. 이득을 얻을 확률과 손해를 입을 확률은 언제나 똑같다.
그러므로 호흡에 간섭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탁발승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 말은 진리의 반쪽일 뿐이다.
위험이 있는 만큼 가능성도 많다. 이것은 도박이다.
얼마 동안 완벽하게 부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
여기에서 부자연스럽다함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호흡해 본 적이 없다는 의미다.
이렇게 완벽하게 부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 우리는 내면에 전혀 새로운 상황이 창조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미칠 수도 있고 해탈을 얻을 수도 있다. 미칠 가능성과 해탈의 기회가 공존된다.
거기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이 상황은 우리 스스로 창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
취소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위험은 없다. 그대가 상황을 중단시킬 수 없을 때만 위험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상황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면 즉시 중단할 수 있다.
이 상황은 그대의 통제 아래 있다. 이 상황 속에서 매 순간 그대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
자신이 지복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불행을 향해 가고 있는지, 자신이 평화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위험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안다. 매 단계마다 그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한다.
그러므로 위험은 없다.
호흡의 패턴에 돌발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 그대의 내적인 상황 전체가 변화를 겪게 된다.
습관적인 호흡 방식을 통해서는 우리 자신이 육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우리 안에 각인된 호흡 방식이 둘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습관화된 호흡이 육체와 영혼 사이의 다리로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당연히 하나로 여기는 데 익숙해졌다.
이것은 날마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것과 같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대는 자동적으로 대문을 향해 운전대를 돌리고, 곧 이어 현과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대는 이런 과정에 대해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결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평상시처럼 왼쪽으로 운전대를 돌렸는데 바퀴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고 하자.
익숙한 길이 사라지고 갑자기 전혀 생소한 길이 나타났다면 이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대는 갑작스러운 상황 때문에 당황할 것이고, 다니지 않았던 생소하고 낯선 환경 속에 놓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퍼뜩 그대를 깨어나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생소한 환경이 무의식적 패턴에 빠져 있던 그대를 흔들어 놓는다.
이런 환경이 그대를 심리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만든다.
모든 것이 조직화되고 안정된 세상,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세상에서는 그대의 무의식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발적인 상황, 생소한 상황이 벌어져야만 그대의 무의식이 파괴된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그대를 무의식 밖으로 끌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이 테이블이 말하기 시작한다면 여기에서 무의식 상태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럴 수가 없다!
나의 천마디 말도 그대를 무의식 밖으로 끌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 테이블 한 마디만 한다면 대는 즉각 깨어날 것이다.
이 테이블의 한마디가 그대를 각성의 상태로 밀어 넣을 것이다.
왜 그런가? 테이블이 말을 한다는 것은 생소하고 기가 막힌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이 생소함이 그대의 내면을 전복시킨다. 이 생소함이 그대 내면의 고정된 패턴을 붕괴시킨다.
호흡의 변화로 야기되는 이런 경험들은 그대를 미지의 세계, 새롭고 생소한 세계로 데려간다.
이런 경험들이 영적인 성장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 그대를 각성(awareness)으로 가득 채운다.
이 때 그대는 진정한 눈으로 무엇인가 보게 된다.
만일 의식적으로 미칠 수 있다면 이것은 훌륭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경험은 없다.
그러나 미친 와중에도 각성을 유지해야 한다.
내가 고안한 다이나믹 명상은 내적으로 완전히 깨어 있는 동시에 외적으로는 완벽하게 미쳐 버리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내면에서 그대는 자신이 춤추고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춤을 추었다면 그대는 그를 미치광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대 자신을 미치광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 그대는 자신이 춤추고 맴도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자각하는 동시에 미치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한 그대는 미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미친 사람과 똑같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대가 육체와 분리되는 생소한 순간이 온다.
그대가 자신을 육체와 분리시키는 게 아니다. 저절로 분리가 일어난다. 그대는 돌연 육체와 분리된 자신을 발견한다.
육체와 그대 사이의 모든 연결선이 끊어지고 다리가 붕괴된다. 기금까지 잘 정돈되어 있던 모든 것이 전복된다.
질서정연했던 모든 것이 혼란된다. 일상적인 패턴이 산산조각 난다.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손이 움직인다.
울고 싶지 않은데도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멈추고 싶은데도 계속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렇게 이상한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 의식의 각성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호흡을 통해 가장 신속하게 창조된다.
다른 방법을 사용할 때 몇 년이 걸린다면 이 호흡법은 십 분 안에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호흡이 우리의 존재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흡에 가벼운 충격만 가해도 그 반향이 우리의 존재 전체에 울려 퍼진다.
우리는 예로부터 매우 가치있게 여기는 호흡 수련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프라나얌이나 여타의 체계적인 호흡법에 별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대가 어떤 호흡법을 체계화시키자마자 그 호흡법은 생소한 상황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한 쪽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쉬고 한동안 참은 다음, 다른 쪽 콧구멍으로 숨을 내쉬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체계적인 호흡법을 수련한다면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습관화되고 규격화된 호흡이 그대를 육체에 얽매이게 만든다.
내가 가르치는 호흡법은 전혀 체계적이지도 규칙적이지도 않다. 여기엔 아무 규칙이 없다.
체계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참아야 하는 문제도 없다. 이 호흡법은 그대 안에 생경한 느낌을 창조하는 방편이다.
그대를 즉각적인 혼란과 무질서 속으로 밀어 넣어 마음이 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이 호흡법의 목적이다.
마음은 매우 교활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가 시간을 주면 마음은 신속하게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다.
어떤 호흡법을 규칙적으로 행하면 이 호흡법은 하나의 체계로 굳어지고, 마음은 이 체계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 호흡법은 아무 의미가 없다. 새로움과 생소함을 창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대의 뿌리 전부, 그대의 동일시 전부를 단숨에 잘라 버리는 것이다.
문득 아무 뿌리도 없고 아무 아이덴티티(identity)도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날이 와야 한다.
나는 그대가 이렇게 미친 것처럼 보이는 터무니없는 상황에 빠지기를 원한다.
만일 노력을 통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이런 상황에 들어간다면 그대는 정말 미쳐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의식을 갖고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이런 상황으로 들어간다면 그대는 결코 미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대의 통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언제라도 이런 상황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나는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이 호흡법을 수련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자신이 스스로 광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이 광기를 없애는 법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광기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광기에 대해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 명상법은 광기를 만들어 내고 제거하면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하는지 가르쳐 줄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아무 지식도 없이 당해야만 했던 광기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보여 줄 것이다.
물론, 이 명상법은 위험하다.
그러나 위험한 만큼 가능성도 많다.
이 다이나믹 명상을 통해 광기가 치료될 수 있다. 이 명상법은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데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다.
나는 보통 사람이 이 명상법을 수행하면 결코 정신 질환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광기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스위치 켜는 법을 안다.
그러므로 이 스위치를 끄는 법 또한 안다. 이제 그를 미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주인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그는 광기와 온전함의 비밀을 안다.
내가 말하는 호흡법은 아무 리듬도 없고 체계도 없다. 어제 했던 호흡법을 오늘 다시 반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호흡법을 반복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늘 이 호흡 실험을 행하면서 첫 부분과 끝 부분도 같을 수 없다.
매 순간 호흡이 달라질 것이다.
이 호흡법의 유일한 목적은 마음의 습관과 고정된 패턴을 와해(瓦解)시키는 것이다.
신체와 정신적 구조의 너트와 볼트가 느슨해 질 것이라는 탁발승의 말은 옳다.
실제로, 그대를 이루는 구조물의 너트와 볼트가 느슨해져야 한다.
지금 이 구조물은 너무나 단단하게 죄어 있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불가능하다.
이 구조물이 느슨해져야만 그대 안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 그것은 육체와 결합되어 있지만 분리가 가능하다.
이 불규칙한 호흡을 통해 너트와 볼트가 느슨해진다. 하지만 이 명상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죄어 진다.
이것을 죄기 위해 그대가 무엇인가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저절로 다시 조립이 이루어진다.
만일 이 호흡법이 강박 관념처럼 되어서 하루 스물 네 시간 계속 된다면,
호흡이 그대의 통제를 벗어나 비정상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하루에 한 시간만 하고 그만둔다면 이 명상법이 끝나자마자 모든 것이 저절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 다음에는 경험에 대한 기억만이 남는다.
그대는 자신이 어떻게 육체와 분리되었는지, 어떻게 다시 일상적인 상태로 돌아와 결합이 이루어졌는지 기억될 것이다.
이제 평상시처럼 육체와 다시 결합된 후에도 그대는 자신이 분리되어 있음을 안다.
명상이 끝나고 다시 육체와 결합된 상태에서도 그대는 자신이 분리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이 호흡법은 매우 중요하다. 이 호흡법이 없이는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없다.
호흡에 간섭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탁발승의 말은 옳다. 실로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진실로 풍요한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만큼이나 위험 또한 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런 위험과 직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위험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예기치 않게 우리를 덮치는 위험이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초대하고 만들어 내는 위험도 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다.
예를 들어, 이 명상을 하는 동안 그대는 온갖 행위와 동작을 취한다.
어떤 사람은 비명을 지르고, 어떤 사람은 춤추고 노래부른다. 그러나 내가 '정지!'하고 외치는 순간 모든 것이 중단된다.
그들은 즉각 정지할 것이다. 모든 것이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의식적으로 외치고 춤추는 상황과 전혀 다르다.
길에서 춤추는 광인을 생각해 보라. 이 춤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따라서 그는 춤을 멈출 수 없다.
나는 이 명상법이 당장은 아닐지라도 가까운 장래에 중요한 치료법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본다.
이 명상법이 정신적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방편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이 명상법을 행하게 하면 그들은 평생 동안 미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 질병에 대해 면역성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포함하여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주인이 될 것이다.
구제프와 호흡법에 관해 이야기한 탁발승은 전혀 다른 길을 걸은 사람이다.
그는 호흡 수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방편을 통해 내면에 생소함(strangeness)을 창조한 사람이다. 이것이 문제다.
하나의 길을 아는 사람이 즉각 다른 길들을 틀렸다며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방법론에 따라 달라진다. 이 길에서는 옳은 것이 저 길에서는 완전히 틀린 것이 된다.
가령, 우마차의 바퀴에는 핀(pin)이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이 핀이 전혀 쓸모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자동차에는 이 핀이 쓸모없다. 그러나 우마차에 관한 한 이 핀은 자동차의 차축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듯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그러나 항상 이런 실수가 반복한다. 수피의 탁발승은 다른 길을 통해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는 전혀 다른 방법론을 갖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피는 호흡이 아니라 잠을 방편으로 삼는다.
그에게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몇 달 동안 잠을 자지 않는다.
단식과 호흡을 통해 생소한 상황이 창조되듯이,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 똑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한 달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지내면, 깊고 혼란된 호흡을 통해 발생하는 광기와 똑같은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호흡이 그렇듯이 수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수피는 수면이라는 자연 현상에 정면 공격을 가함으로써 매우 생소하고 이상한 상황을 창조한다.
이 불면법(不眠法) 또한 나름대로 위험이 내재해 있다. 혼란된(chaotic) 호흡보다 더 위험하다.
불면법은 기나긴 과정을 필요로 한다.
하루나 이틀 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는 효과가 없다. 몇 달 동안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두 달 동안 잠을 자지 않은 후에 어떤 이상(異狀)이 생긴다면 그 이상은 1초나 2초 안에 치료될 수 없다.
그러나 10분 동안의 호흡 후에 생긴 이상은 단 1초 안에 회복될 수 있다.
두 달 동안 잠을 자지 않은 후에 생긴 이상 증세는 하루만에 회복할 수는 없다.
두 달 동안 불면 수행이 끝나도 그대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수피의 길은 더 위험하다. 물론, 이 불면법이 유용하기는 하다.
수피는 잠을 자지 않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끈기있게 기다린다. 구제프와 만난 탁발승은 이런 길을 걸은 사람이다.
수피가 사용하는 다른 하나의 방편은 춤이다. 춤 또한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춤은 미리 배우거나 훈련된 춤이 아니여야 한다. 훈련된 춤은 아무 효력이 없다.
앞에서 나는 프라나얌이라는 호흡법이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프라나얌은 체계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리 훈련된 춤을 반복하는 사람은 육체와 동일시 된다.
그러나 춤출 줄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춤을 추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자.
내 말을 듣고 그가 갑자기 팔 다리를 휘저으면서 뛰기 시작한다면 그는 어떤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자신을 춤과 동일시 할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 창조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대는 '나는 춤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불면과 춤, 이것이 수피들이 사용하는 두 가지 방편이다. 다른 방법들 또한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수피들은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서 털옷을 입고 지낸다. 이것은 육체와 반대하는 방법 중 하나다.
단식하는 사람 또한 육체에 반대한다.
어떤 사람은 날카로운 못 위에 한 쪽 발을 올려놓은 체로 서 있고, 어떤 사람은 가시 침대에 누워 잠을 잔다.
이 모든 것이 생소한 심리적 상황을 창조하려는 방편들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날 수 있다.
특정한 방편을 따르는 구도자가 '다른 방편에 의해서도 똑같은 상황이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구세프와만난 탁발승은 프라나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만일 그가 프라나얌을 수행한다면 해를 입을 것이다.
아주 큰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것은 우마차의 바퀴를 자동차에 달아놓은 것과 같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불면 수행을 하는 사람이 프라나얌을 행하면 그는 즉각 미쳐 버릴 것이다. 하루밤도 넘기지 못하고 정신이 돌아 버릴 것이다.
그대의 존재는 불면법과 프라나얌의 두 가지 효과를 한꺼번에 견디기는 역부족이다.
이것이 자이나 교의 승려들이 프라나얌을 수행하지 않은 이유다. 그들은 단식을 통해 생소한 상황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만일 단식과 프라나얌을 병행했다면 그들은 심각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그 위험은 실로 크다.
자이나 교 승려는 프라나얌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프라나얌이 아무 효과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프라나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는 '내가 가는 길에 프라나얌은 설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프라나얌을 통해 얻는 것을 그는 단식을 통해 얻는다.
자이나 교 수행자들이 요가 아사나에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랫동안 단식을 하는 사람에게 요가 아사나는 심각한 해를 미칠 수도 있다.
아사나를 수행하는 사람은 우유, 버터, 그이처럼 부드럽고 지방질이 많은 음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단식은 그대 안의 모든 것을 건조하고 메마르게 만든다. 위장의 열이 너무 심해져서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아사나를 행하는 것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도 있다.
이 불이 두뇌까지 올라가 그대를 미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이나 교 수행자들은 요가 아사나가 아무 실용성이 없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요가 아사나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아사나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올바른 음식과 아사나를 병행하면 실로 경이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몸이 기름칠을 한 것처럼 부드럽고 유연해야 한다.
따라서 부드럽고 기름기 있는 음식이 무척 중요하다. 뼈와 근육 모두가 변형된 동작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이 충분히 부드럽고 유연하지 않으면 어딘가 부러질 수도 있다. 몸이 지나칠 만큼 유연해야 한다.
이 요가 아사나는 우리가 정상적으로 취하지 않는 이상한 몸동작을 요구한다.
이것은 생소한 육체적 환경을 창조하려는 방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동작이 마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번민과 근심에 시달리는 사람은 머리를 긁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긁는 것과 근심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긁지 못하게 하면 그는 근심할 수 없게 된다. 근심의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손을 머리로 가져가야 한다.
그러나 머리에 손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면 그는 근심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손이 특정한 위치에 놓여 있어야 한다.
모든 번민은 특정한 몸동작과 상관되어 있다. 몸이 특정한 동작을 취해야만 번민이 활성화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동작은 특정한 마음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오랜 실험과 경험에 의해 얻은 결론이다.
오늘 아침에 말했듯이, 우리가 여기에서 행하는 명상 중에 특정한 아사나와 무드라(mudra)가 형성될 것이다.
수천 번의 실험을 거친 끝에, 특정한 마음 상태에서는 특정한 무드라가 형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반대 현상 또한 진실이다. 특정한 무드라를 취함으로써 특정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붓다와 같은 자세로 앉으면 그대는 붓다가 도달할 것과 똑같은 마음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왜냐 하면 마음의 상태는 몸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붓다처럼 걷고, 앉고, 호흡하면 붓다의 마음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그 역순 또한 진실이다.
그대가 붓다와 같은 상태에 도달한다면 그대의 걷고 앉는 방식이 붓다와 비슷해 질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구제프(Gurdjieff)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알기 힘들다. 그들에게는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구제프는 구도의 방랑 중에, 각기 다른 길을 가는 스무 명 이상의 신비주의자들을 만났다.
그는 그들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해서 한데 모았다. 그의 앎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그의 앎은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여러 부품이 조합된 것이다.
이 부품들이 원래의 자리에 있을 때는 완벽하게 옳았다. 그러나 이 부품들을 한 군데 모았을 때 이상한 조합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의 방편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효력이 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일괄적으로 작용하지는 못한다.
구제프와 함께 한 사람들 중에는 어느 누구도 완벽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왜냐 하면 구제프가 가르친 것은 여러 가지가 뒤죽박죽된 멀티 시스템(multisystem)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 중 어느 한 가지 방편이 구도자에게 작용을 미치기 시작하면 그는 열정을 갖고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가 다음 단계에서 즉각 취하게 되는 다른 방편은 그에게 역작용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것은 구제프가 완성된 수행 체계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체계는 다차원적이기는 하지만 통합되어 있지 않다.
이 멀티 시스템 안에는 서로를 이어 주는 필수적인 연결 고리들이 빠져 있다.
구제프가 수집한 대부분의 정보는 수피들에게 온 것이다. 그는 티베트 요가(Tibetan yoga)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하타 요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하타 요가에 대해 가진 모든 정보는 하타 요가를 반대하는 수피 탁발승들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는 하타 요가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요가와 쿤달리니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정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정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쿤달리니에 관해 그의 견해는 터무니없다.
그는 쿤달리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쿤달리니를 계속해서 '쿤다 버퍼(kunda buffer)'라고 부른다.
이 '버퍼'라는 용어는 좋은 개념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앎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가 쿤달리니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쿤달리니가 그대와 궁극적인 앎 사이에서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애물을 완전히 파괴하고 넘어서야 한다.
구제프에 따르면 우리는 쿤달리니를 깨우는 문제를 고심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구제프의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안에는 완충 장치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충격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이런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달리니는 완충 장치가 아니다. 쿤달리니 자체가 하나의 충격이다. 쿤달리니는 실로 가장 큰 충격이다.
그러나 구제프는 이것을 모른다. 깨어나는 쿤달리니는 가장 강력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대 안에는 완충 장치가 있지만 이 완충 장치는 쿤달리니와 적혀 다른 것이다.
충격을 흡수하는 이 완충 장치가 파괴되어야 한다.
그런데 구제프는 쿤달리니 자체를 완충 장치로 생각한다. 그는 쿤달리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쿤달리니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는 쿤달리니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구제프와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사람들이 이런 모순의 희생자다.
그들은 쿤달리니 같은 용어와 에너지의 뒤에 숨어 있는 비밀에 대해 체계적인 지식이 없다.
사실, 이런 진실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한 번의 생으로는 불가능하다.
수십 번의 생을 통해 여러 가지 다양한 수행 체계를 접해 본 사람만이 이런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이렇게 수십 번의 생애를 통해 여러 가지 수행법을 배운 사람만이 마지막 생애에서 다양한 체계를 종합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종합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흔히 한 사람은 한 가지 방편을 통해 궁극에 도달하고, 그런 다음에 그는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게 된다.
그의 목적이 달성 되었다. 그의 삶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수행법의 종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전세계의 다양한 수행법 사이에 종합이 가능하다고 느낀다. 이것은 대단히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수행법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근하고 한데 모아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똑같다.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다.
선사들 중에는 구도자를 찬 밖으로 집어던지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구도자 안에 생소한 상황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선사는 프라나얌이 아무 필요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이 브라스트리카 프라나얌(bhastrika pranayam), 즉 풀무질처럼 격렬한 호흡이 무용(無用)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은 '브라스트리카 호흡이 아무 효과가 없다면 당신처럼 사람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것은
무슨 효과가 있는가?'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붓다가 마하비라 같은 사람에게 가서 '어떤 사람이 창문 밖으로 떨어진 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하고 말해 보라.
그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대꾸할 것이다. 사람들이 지붕이나 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일은 날마다 일어난다.
하지만 그들 중에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것과 창문 밖으로 내던져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지붕에서 추락하는 것은 미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몇 사람이 그대를 들어올려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고, 그대가 자신이 집어던져지는 것을 안다면
이 때 어떤 상황이 창조된다. 그대는 생소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대는 자신이 창문 밖으로 집어 던져지고 땅바닥에 뒹굴기까지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것이 그대에게 육체와 분리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선사들은 느닷없이 지팡이로 구도자의 머리를 내려친다. 이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그대가 합장 인사를 올리고, '저는 마음의 평화를 구합니다.'하고 말하는 순간 선사는 주장자로 그대의 머리를 내려친다.
구도자는 갑자기 이상한 순간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인도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만일 그대가 누군가를 내리친다면 그는 즉시 반격을 가할 것이다.
그는 싸우려고 덤빌 것이다. 이런 일은 일본 같은 나라에서나 가능하다. 그런 나라에서는 이런 방편이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선사의 이상한 행동 뒤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
구도자를 내려침으로써 선사가 무엇인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선사는 그대를 보자마자 그대의 어머니와 누이를 모욕하는 말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대를 어이없는 상황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그대는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 믿고 그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는 대뜸 욕설을 퍼붓는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만일 그대가 이런 상황을 자각하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대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대는 사람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전통에서는 이상한 상황을 창조하기 위해 욕설과 상소리까지 사용되어 왔다.
가다르와라(Gadarwara) 근처의 사이케라(Saikhera)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에 한 피키르(fakir)가 있다.
그를 찾아간다면 그가 그대를 어떻게 대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대뜸 욕설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그는 온갖 미친 짓을 다할 수 있다. 어쩌면 방문객 앞에 서서 오줌을 갈길지도 모른다.
그대는 기가 막힐 것이다. 이것이 그대 안에 생소한 공간을 창조한다. 그가 그대를 때리려고 덤벼들지도 모른다.
그대가 도망가면 몇 마일씩 그대를 쫓아올 것이다. 그를 방문해서 이해한 사람들은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미친 인간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러나 그를 이해한 사람들은 많은 도움을 얻었다.
몇 마일씩 도망가야 하는 사람은 아주 이상한 처지에 놓인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보라.
그대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면서 도망가고, 스승은 맹렬하게 추격한다.
그리고 그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상황이 창조된다.
여러 가지 전통과 테크닉, 방편들이 이런 상황을 창조해 낸다.
그러나 하나의 전통에 속하는 사람은 다른 전통들 또한 고유한 방법으로 똑같은 상황을 창조해 낸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 밖에도 다른 어려움이 있다.
내가 그렇듯이, 다른 방편에 의해서도 똑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하나의 방편을 설명할 때, 나는 그 방편을 최상의 것으로 언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방편이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다른 방편에 의해 똑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해도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직 내가 말하는 방편만을 통해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 있으며, 다른 방편으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올바르게 이해할 만큼 지성적이지 못하다.
내가 '모든 방편은 똑같은 목적지로 인도한다.'고 말하면 이 말은 그대를 혼란시킬 뿐이다.
그대는 특별히 효과적인 방편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목적을 이룰 방편은 어디에도 없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게다가 모든 방편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그대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지혜를 얻은 사람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무지한 자들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 까닭이 그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이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나는 다른 길을 통해서도 목적이 달성될 수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종종 나는 큰 곤경에 처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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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작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7.04 본문 내용 중 '하나의 길을 아는 사람이 즉각 다른 길들을 틀렸다며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제가 만났던 거의 모든 종교단체나 수련 관련인들이 갖고 있던 모습인데 저는 이것을 뛰어넘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많은 의료인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이군요~ -
답댓글 작성자감초 작성시간 12.07.15 히힛.. 다른것도 공감합니다만 빨간글씨 특히 공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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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인생새옹지마 작성시간 13.03.22 살아오면서보고듣고느낀 모든것들.../위의글들이 다공감이갑니다../깨달음의길이던 무슨길이던 간에 목적지에 도달하는길은 여러갈레길이 있다고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경험한것만이 옳다고 생각하고주장할뿐 ..!틀린말이랄순 없지만..!
결론은 어떤일이든 자신을좀알고 자신의상태에 맞는 방법이나 길을 선택해야 그나마 무난하게 목표나 목적을 얻을수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