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나르골(Nargol)의 명상캠프에서 당신은 삭티파트(Shaktipat)의 의미를 신(The Divine)의 에너지가 구도자에게
하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삭티파트와 은총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이 두 가지는 다소 차이점이 있는 동시에 유사성도 있다. 사실, 이 두 가지의 범위는 서로 겹치는 면이 있다.
삭티파트는 신(The Divine)의 에너지다. 실제로 신의 에너지를 제외한 다른 에너지는 없다.
삭티파트에서는 한 사람이 매개체로 작용한다. 궁극적으로는 이것 또한 신의 작용이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는 신의 에너지가 작용하는 수단으로 한 개인이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것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번갯불고 집안을 밝히는 전깃불에 비교할 수 있다.
그 에너지는 똑같다. 그러나 집안을 밝히는 전깃불은 매개체를 통해서 온 것이다. 그 뒤에는 인간의 손길이 숨어 있다.
번갯불도 똑같은 에너지다. 그러나 번갯불은 인간을 통해 온 것이 아니다.
인간이 멸망해도 번갯불은 여전히 하늘을 가로지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멸망하는 순간 전구는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삭티파트는 전구와 같다. 거기엔 인간이 매개체로 작용한다. 반면, 은총(grace)은 하늘의 번갯불이다.
거기엔 매개체의 도움이 필요 없다.
이 에너지를 얻은 사람, 신과 접촉한 사람은 매개체로 기능할 수 있다. 그는 그대보다 더 훌륭한 수단이다.
그는 신의 에너지에 친숙하다. 그 에너지의 작용에 익숙하다.
그러므로 그를 통하면 에너지가 더 신속하게 그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는 효율적인 매개체다.
두 번째로,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잘 조정된 통로의 역할을 한다.
이 통로에 의해 그대의 능력에 적합한 만큼의 에너지가 들어온다. 그대는 전깃불 아래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다.
전깃불은 잘 조정된 불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갯불 아래에서 책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번갯불은 조절되지 않은 빛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연히 은총의 상태에 들어가 매개체의 도움 없이 별안간에 삭티파트가 일어난다면,
이 때 그는 미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많다. 그의 수용 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아무리 환희에 넘치는 경험이라 해도 이렇게 생경하고 정도에 넘치면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경험이 된다.
이것은 몇 년 동안 어둠 속에 살던 사람이 갑자기 밝은 태양 아래서는 것과 같다.
그는 태양의 빛을 보기는커녕 더 깊은 어둠을 맞을 것이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는 빛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릴 것이다.
때로는 그대도 사이에 모르는 무제한적인 은총의 에너지가 들어오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그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은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불시에 습격을 당하는 꼴이다. 따라서 큰 재앙이 빚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 은총이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삭티파트의 경우에 이런 재앙이 일어날 확률이 드물다. 거의 제로에 가깝다.
매개체로 작용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매개체를 통과하면서 에너지가 부드럽고 순하게 된다.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에너지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그는 그대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에너지만 통과시킨다.
그러나 명심하라. 그는 에너지의 수단이며 통로일 뿐이지, 이 에너지의 근원은 아니다.
'내가 삭티파트를 행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완전히 틀렸다.
이것은 전구가 '내가 빛을 준다.' 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빛은 전구를 통해 발산된다.
그러므로 전구는 '내가 빛을 창조한다.' 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전구는 빛의 근원이 아니다. 다만 빛이 현현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삭티파트를 행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 전구와 똑같은 환상에 빠진 것이다.
전이되는 에너지는 언제나 신의 에너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매개체로 작용하면 우리는 이것을 삭티파트라고 부른다.
매개체 없이 이 에너지가 직접 하강하면 해를 미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면, 끈기를 갖고 꾸준히 명상해 왔다면, 이때는 삭티파트가 은총의 형태로 일어날 수 있다.
이 때는 매개체가 없어도 아무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끈질긴 기다림과 인내, 흔들림 없는 헌신, 굳건한 결의가 무한한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이 때는 아무 재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신의 에너지가 그대를 찾아오는 것은 매개체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를 불문하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매개체가 없는 겨우, 그대는 이것을 삭티파트가 아니라 저 너머에서 오는 은총으로 느낄 것이다.
이렇게 차이점과 유사성이 공존한다. 나는 가능한 한 은총의 편에 서고 싶다.
가능한 한 매개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방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매개체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매개체가 그들에게 신의 에너지를 부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에고가 없는 사람만이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이때 위험율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에고가 없는 사람은 매개체로 기능하는 동안에 구루(guru)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라는 에고가 사라졌다. 그러므로 구루가 될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
구루가 된 사람은 그대와의 관계 안에서 구루가 된다. 그는 그대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매개체로 작용하는 사람은 우주적 존재(universal being)와의 관계 안에서 일한다.
그는 그대와 아무 관계도 맺지 않는다. 이 차이점을 이해하겠는가?
신과 관련된 상황에서는 에고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와 관련된 상황에서는 에고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루는 구루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사드구루(sadguru), 완벽한 스승에 대한 정의는 '구루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 말은 스스로 구루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구루가 될 자격이 없음을 뜻한다.
자신을 구루로 내세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구루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보다 더한 무자격자는 없다.
이것은 그의 에고를 보여준다. 이런 사람은 위험하다.
에고가 완벽하게 사라진 공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사실 '그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말도 틀렸다. '그는 매개체다.'라고 말해야 옳다.
이런 사람의 곁에 있을 때, 그의 현존을 통해 삭티파트가 일어날 수 있다.
여기엔 아무 위험이 없다. 그대에게도 위험이 없고, 매개체에도 위험이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는 은총을 선호한다.
에고가 죽고 더 이상 '개인'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면 삭티파트는 거의 은총이 된다.
매개체에 '나는 매개체다.'라는 의식이 없을 때 삭티파트는 은총과 거의 같아진다.
그럴 때는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해프닝(happening)이 일어날 수 있다.
그대의 눈에는 그가 하나의 개체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과 하나가 되었다.
'그는 그대를 향해 뻗는 신의 손이 되었다.' 고 말하는 것이 더 낫겠다.
그런 사람은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의 말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나'라고 말할 때 이 '나'는 절대자(the Supreme Self)를 의미한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단어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크라슈나(Krishna)가 아르주나(Arjuna)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내게 복종하라.'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이기에 감히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하고 생각해 왔다.
크리슈나의 말은 그의 에고를 확인시켜 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에고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나'는 크리슈나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손이 뻗어 나간 것이다.
'내게 복종하라.'고 말한 존재는 크리슈나의 뒤에 숨어 있다.
크리슈나는 말한다.
"내게 복종하라. 유일자에게 복종하라."
맘 에캄(mam ekam), 이 유일자라는 말은 매우 소중하다. '나'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다수의 '나'가 존재한다.
그러나 크리슈나는 '나'가 유일자(the only One)가 된 지점에서 말한다. 이것은 에고의 언어가 아니다.
우리는 에고의 언어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한 말을 에고로 가득 찬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자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는 필연적으로 착각이 따른다 다른 하나는, 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여기엔 착각의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크리슈나처럼 개인의 에고가 작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궁극적인 해프닝이 일어날 수 있다.
삭티파트와 은총은 표면적으로 크게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심에서 보면 아주 가까이에 있다.
나는 삭티파트인지 은총인지 구별하기 힘든 상황을 선호한다. 그런 상황만이 유용하고 가치 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승려가 큰 잔치를 열어 스승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누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인지 물었다.
그는 항상 '내게는 스승이 없다. 스승은 필요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잔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꼬치꼬치 묻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사람들은 굽히지 않았다.
"당신은 스승의 날인 오늘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스승이 있다는 말입니까?"
승려가 말했다.
"나를 궁지에 몰지 마시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그러나 사람들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그렇다면 이 잔치는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스승이 있습니까?"
승려가 말했다.
"이렇게 끈질기게 파고드니 몇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오늘 나는 내 스승이 되기를 거부했던 한 분을 떠올렸습니다.
만일 그가 나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면 나는 길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거부당했을 때 나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분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고 싶습니다. 원하기만 했다면 그는 내 스승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내 청을 거절했습니다. "
사람들이 물었다.
"아니, 당신을 거절한 사람에게 무엇을 감사한단 말입니까?"
승려가 말했다 .
"그는 내 스승이 되지 않음으로써 어떤 스승도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따라서 내가 입은 은덕도 두 배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내스승이 되었다면 우리 서로가 주고받은 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르침을 주고 나는 엎드려 절하면서 경의를 표했겠지요.
그런데 그는 내 스승이 되지도 않았고 존경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게 입은 은덕은 두 배가 되는 셈이지요.
이것은 철저하게 일방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엄청난 것을 주었지만 나는 감사를 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감사할 기회조차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는 삭티파트와 은총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만일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을 멀리해야 한다.
차이점이 없을수록 좋다.
나는 은총을 강조한다.
삭티파트와 은총이 아주 가까워져서 구분조차 불가능한 날이 온다면, 이때 궁극의 일이 올바르게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알면 된다. 집 안의 전기가 하늘의 번개처럼 무제한적이고 자연적인 에너지가 되었을 때,
전구가 더 이상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 때, 그 순간에 삭티파트는 은총과 동일하다. 내가 말한 바를 명심하라.
-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