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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일> 자천 비법

작성자작약|작성시간12.05.26|조회수161 목록 댓글 0

비법 1

 

 

 

지식이라는게 있다.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사회적인 상식, 정보같은 것을 말할 수도 있는데,

난 학문적인 성취나 지성이나 각성으로 얻게된 지혜나 안목이나 견해마저도 대강 지식이라면서 혼란하게 사용한다.

그래서 내가 지식이라고 말할 땐 문맥을 보면서 이해해야 한다. 안 그러면 오해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자기 지식의 수량과 어떤 성격을 가지는지, 또 한계와 도달한 곳의 경계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떤 종류의 지식들을 잘 그리고 많이 알고 있는지, 어떤 개념을 규정할 때 사람마다 접근법이나 범위와 원하는 것과 의도가 다를 것인데 이런 것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고 있고, 어디까지 알아내고 있는지와 그 알아낸 것의 적용성과 자기함양의 상태까지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우린 많은 지식을 알고 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보이긴 힘들 것이니 그중에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종류의 지식들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자기 지식의 성격과 개념규정의 경계선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뭘 알아 냈는지,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 또 남과 비교해서 더 나아간 생각인지 알게 된다. 이건 뭘 모르고 있는지 더 알아야 할게 뭔지 어떤 관념이 부족하고 허술하며 빈틈이 있고 엉성한지 알고 있어야 가능하다.

아니면 사후적으로 알게 되기도 한다. 즉 내가 어떤 견해가 떠오르며 생각이 정리되어가면 아하! 내가 이런 것을 너무 안일하게 정의하고 있었구나! 또 이렇게 까지 간략화 되어 가는구나! 이런 관점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면서 말이다.

 

또는 항상 떠올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관념에 대한 해석이 풀일 때가 있다.

그래서 언제나 여러가지 의심나는 것과 알고 싶은 구절이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어느 순간 이해되고 정리되기를 바라면서 생각나고 떠올려 질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따져보고 검토 해보면서 맘에 들 때까지 반복해서 연구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지식들을 이런 식으로 떠올려 질때마다 다시 재고하고 따져보며 비판적이고 냉정한 시각으로 검토하면서 기존의 알고 있다고 하는 것도 다시 버리고 다시 구성하며 알아가지만 안 것을 소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위와 같은 더 나아간 지식의 확충이 단순히 머리만의 애씀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내 마음이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더욱 커져야하고 넓어져야 한다.

또 이런 위로나 앞으로의 지식의 나아감만이 아니라 지식의 다양함과 세분된 정밀성도 역시 마음이 그런 것을 감당할 수 있을 시간이 필요하며 세분된 정밀함도 내가 그런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과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물을 정의하고 알고 있다고 할때, 이 알게된 지식을 넘어가기 위해선 먼저 내 마음이 그러한 정의로 만족하지 못할 정도의 다름이 생겨냐야 한다.

마음은 대개는 크기나 수용성으로 말하니 마음이 그 지식보다 커져야 한다.

그럼 이해하던 그 지식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고 머리는 다시 다른 정의를 찾고 다른 방법으로 개념을 설정하려고 한다.

그래서 만족할 만한 이해가 생기면 그걸 마음에 대입해보고 그럴듯하면 우선 그걸 가진다.

이렇게 가진 것을 전부로 알면 더 이상의 성장은 일어나지 않고 고착화 되어가며 고집불통으로 되어가는 사람이 된다.

마음의 융통성이 없는 것이 된다.

 

이런 마음의 융통성은 또는 포용력은 일상의 생활과 자기의 뜻과 연관해서 현실에서 점검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흡족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새롭게 가진 지식으로 내 뜻과 행동을 설명하는 것에 온전하지 못하고 더욱 발전시키거나 의지를 성취하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설명한다는 것은 생활하면서 내가 가진 지식으로 이해해도 별로 부족함을 모르다가 점점 틈이 벌어지면서 뭔가 차이를 느끼게 된다.

즉 설명은 내 생활과 지식이 또는 마음과 지식이 서로 잘맞고 대응된다고 또 아는대로 일어나고 아는대로 살아가고 아는대로 이루어 간다고 생각하는게 나에게 하는 설명이지만 이건 항상 부족함으로 끝난다.

뭔가 다 설명되지 못하는 또다른 부족한 차이가 있다고 알게 하는 것은 마음이다.

합당하거나 받아들이기가 허술해 보이도록 하는 이 마음의 아쉬움이 지식의 추구로 일어나게 한다.

이렇게 지식의 간략화와 지적인 한계돌파와 더 흡족한 관념과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많은 지식의 나아감은 이러한 마음의 불만족이나 아쉬움의 마음과의 대응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의 학문적 지식이나 각성으로 평생을 산다면 평생 그러한 지식과 마음이 대응됨으로서 흡족하고 아쉬움 없이 머리와 가슴이 일체된 것이다. 이 말은 더 나은 각성을 원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더 넓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견해나 이런 것이 내 삶을 설명해주고 이해시켜 줄거라고 기대하지만 이건 불가능하다.

이걸 처음 감지하는 곳이 마음이며 마음은 남고 모자른 듯한 식으로 느낀다.

이러한 마음이 모자르고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그 머리는 마음을 충족시킬 지식을 찾아 헤메이며 부단한 노력을 해야한다. 그전엔 그 아쉬움과 뭔지모를 불안함과 허무함과 인생의 불만족을 채울 수 없다.

이것이 내 인생에서 뭔가 설명해줄 딱 이거다! 라는 납득되는 뭔가를 찾는 원인이 된다.

이런 마음의 허전함을 해소할 거 같은 것을 찾았다고 느껴지면 거기에 빠져 한참을 그것으로 살아가지만 역시나 거기에서도 나를 만족해줄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또는 처음엔 만족 되었지만 서서히 뭔지 모를 아쉬움이 싹튼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성장으로 포용력이 커져서 처음에 만족스러웠던 지식이나 무언가도 궁극은 아니라는, 즉 내가 커짐으로 해서 더이상 나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벗어나야 하고 다른 것으로 찾아 떠나야 한다.

그런데 이걸 인정하기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이 차이나고 달라지며 빠져나오는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도 있어서 이런 틀의 파괴와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것의 아픔은 바로 존재의 두려움과 불안함의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려운건 이런 이탈의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 멀어져서 다른 것으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의 두려움은 엄청 큰 고통이다. 그래서 죽음의 벗어남 마저도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의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게 이생의 사람들의 한계이다.

 

 이런 마음의 성장이 더디어서 오랜 세월을 거기서 안주하는 경우도 있고 이런 안주를 유지하지 못할 때의 두려움이 있다.  또는 그 가르침이 너무도 광대해서 마음의 성장이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가르침의 광대함으로 빠져나오기 힘든 것은 내가 보기에 불교가 유일하다. 그 외의 것은 저열하고 서구의 과학이나 철학은 번잡하면서도 단순하며 한계가 극명하지만 사회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이익에 의해 나오기 어려운 학문이며 그러한 것에서 마음의 성장이 억압되는 것이 되기도 하다.

하지만 대개의 불교공부가 공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그런 마음의 성장이 그러한 것을 넘어가지 못하는 정도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이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물질과 현실의 이러한 간단한 것마저도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나약하고 좁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된다. 이런 마음으론 철학이나 사상이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식적인 관념을 뛰어 넘지 못하는 마음이 되기 쉽다.

 

마음의 커져감이나 확대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무주(無住)인데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깨우침도 경지도 득도도 머무르지 않아야 그 다음으로 넘어 갈 수 있다.

그렇다고 무주가 무조건 무주해야 하는걸 안다고 무주가 되지는 않는다. 내 마음이 내가 깨달은 깨달음을 넘어 성장이 되어야 또다른 깨우침으로 발심을 낼 것인데 이건 솔직히 버겁다. 별로 불교인들에게서 못보았다. 깨우침도 힘든데 그 깨우침을 포용해서 더 나아간다는건 글쎄... 이래서 한생에 한번도 힘들고 두번은 희소하다고 본다.

이 말은 마음의 확대라는 것이 그렇게 쉽거나 원한다고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기 위한 것이 또 가르침이 되지만 어찌 이게 먹히겠나? 지식의 알려줌도 버겁다. 마음은...

 

마음이 차이를 만들고 이탈되지 못한다면 굳이 벗어나라고 할 것은 없다고 본다. 한생애에서 하나의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더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런 현실적인 현상을 인정해야 하고 억지로 나무라고 부정하면서 비난할 필요는 없다. 다른 간접적이고 장래의 기약을 하는 방법도 있는 것이니 지금 너무 서두를 것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뭔가를 알기 위해선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이 마음을 연다는 것은 이러한 자기 마음의 성장을 인위적으로 한다는 것인데 이걸 할 수 있으면 자천은 아주 쉬운게 된다. 하지만 결코 쉽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대개는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는게 많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건 생활체계에 접목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단순히 기억하고 외우라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지식으로 살아가라는 것이고 자기의 생활에서 확인하고 성찰하면서 마음과 지식의 부합함을 보는 것이다. 이건 지식의 자기 내면화 이기도 하고 계정혜 삼학중에 정이라는 마음의 형이상학이 되어가는 것도 된다.

곧 자천이다. 자천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된다.

 

또 머리가 새로운 개념과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마음에 대입하며 생활하면서 설득 해보려 하지만 역시나 뭔가 모를 아쉬움이 있게 된다.

그러면 또다시 다른 지식을 찾고 그 찾은 지식으로 마음을 삼게 되지먄 역시 아쉬움을 얻을 때까지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 아쉬움이 드러나면 또다시 지식의 추구를 하게 된다. 이런 더나아가려는 욕망은 끝이 없다.

이런 과정을 수년에서 수만년을 또는 더 오랜세월을 반복해온 것이다.

또 이런 마음과 머리의 왕복을 자주한 횟수만큼 성장한 인격이 된다.

대개는 한생애에 한번이거나 그보다 못하거나이며 두번이면 천재가 된다.

 

이런 왕복을 보면서 자천진행의 점검을 하는 것이다.

계제는 이러한 왕복의 성취의 결과이다. 아까 말한대로 사회적인 통념, 이데올로기, 가치관, 세계관같은 다양한 지식들을 일생에서 몇번이나 바꾸고 재구성을 하겠는가?

한번이라도 하면 각성했다고 깨달은지 아는게 작금의 수행세계의 현실이다.

아시는가?? 이 자천계제의 깊은 의미를...

단순한 자천의 오름이나 성취를 말함이지만 그 성취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걸 성찰했어야 한다.

 

이글은 외부의 사물이나 사건들에대한 지식의 정확함이나 방대하고 체계적인 이해를 말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 즉 자기주체와 생활과의 관련에서 지식의 남음과 부족함을 견주는 것이다.

마음을 자신의 주체로서, 그리고 생활하는 것으로서 안팎의 의미로 썻다.

다만 생활의 중요함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만으론 성장과 나아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본성자체의 한계는 외부와의 교류에서 일어난다. 그 원천과의 교류는 우선 제외하고 내적인 것을 위주로 말했을 뿐이다. 생활에 이러한 것도 포함하는 의미가 있다.  마음으로 마음을 성장하는 것을 말하며 다음엔 지식으로 마음을 성장하는 것을 다룰 것이다.

 

왜 비법인지 제목이 궁금한가?

이걸 잘 이해하면 구차한 다른 자천법을 넘어 자기만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이 자천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긴 시간을 생존하는 것이다.

오래 살면 영명해지는 것이다. 단순히 한생을 말하는건 아니다.

왜?

시간을 지속한다는건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한다는 것은 마음을 성장시킨다는 의미가 되는데, 생활하면서 자기를 발견하고 발견된 자기보다 더 나은 자기를 원하게 되며 이것은 나와 나를 비교하며 또 대상이 되고 목적이 되는 외부와 남과 세상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그 외부와도 비교해서 나의 왜소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보다 낫기를 바란다.

지식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내 해석이고 이러한 세상 해석은 내가 세상보다 우위에 있다는 그 증거를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진 것이다. 자기의 존재 증명이며 나를 이끌기 위한 계획이기도 하다.

세상을 알면 내가 세상을 지배하는 듯한 착각을 한다. 우린 사물의 이름을 알거나 용도를 알면 더이상 그 사물에 대해서 흥미가 떨어진다. 미지의 무언가가 더이상 없을때 사람이든 사물이든 더이상 내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며 이건 마음이 이미 다른 사람과 사물로 옮겨가는 이탈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항상 나에게 좌절을 준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것이 늘어가는데 이러한 굴욕이 내가 의욕을 주며 세상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이 세상은 바로 내 인생이며 삶이라는 운명으로 대체 되어진다. 세상에 대한 좌절이 나 자신에 대한 좌절로 전환 되어지면서 우린 단순한 세상정복이라는 것에서 나 자신에 대한 정복으로 바뀌어지면서 가장 커다란 성장인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러한 것을 빠르고 쉽게 하려면 더 많은 생활 경험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우린 식물같은 부동성에서 움직이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진보를 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생활을 극단적이고 활발하며 극대화한 움직임을 하는 것이다.

장소 이동은 생활 경험을 확대한 필연이다.

이런 확대는 짦은 시간으로도 긴시간을 산거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이런 살아봄으로써 지식이 생기고 그 지식을 점검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하는지, 그 존재방식이 마음에 드는지, 내가 내게 맘에 드는지, 이런건 살아봐야 아는 것이다.

이 살아봐야 한다는게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아봐야 이게 맞는지,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는 있는 건지, 이게 먼지, 저게 먼지, 이런 판단이 서게 된다. 뭐든지 생활해 보면서 결정나야 하고 모든 기준과 점검과 판단의 가치는 바로 여기 우리의 삶에서이다.

 

마음이 불만족해지며 더 나은 것을 욕구하는 것이 자기변형과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간다.

이런 마음의 욕구와 충족과 생활하면서 다시 충족의 부족함을 알게 되고 또다른 것으로의 이탈과 새로운 것에 대한 멈추지 않는 움직임이 성장이다.

생활경험의 확장이 마음의 확장이 되며 이런 확장에 맞는 지식을 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지식이 마음과 생활체계 확장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디를 어떻게 확장할지 마음에게 알려주는 등대가 된다. 이건 마음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근거가 된 것이다. 뭔가 있어야 이게 좋은지 나쁜지 큰지 작은지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불만족은 지식 때문이다. 모르면 부족하다는 것이나 충족된다는 것이나 아쉬움이 있지 않다. 이렇게 마음과 지식은 서로에게 의지하는 곳이면서 서로를 부추기는 힘이다.

 

이런 것을 자기 내면에서 홀로 할 수 있으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자기 안에 세계를 구축하면서 무한한 자유와 긍지를 가지는 것이다.

이게 불필요한 형식을 배제하고 자천하는 비법이며 내적원리이다.

이 원리 때문에 자천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자천법이라는 것이 이러한 것을 강화하고 더 빠르고 쉽게 하기 위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좌선이나 뭔가 집중해서 한다는 것은 마음과 지식의 차이를 알기 위한 것이다.

그러다가 차이나 새로운 재구성을 할 수 있는 기미를 발견하면 각성했다고 느낀다.

그러다가 각성한 것을 생활하면서 또 좌선하면서 결국 부족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 또 느껴가야 한다. 아니면 자기의 관념에 자기가 빠져 죽어가는 것이다.

머무르면 썩는 것이고 머무르지 않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퇴보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려면 또다른 차이와 새로움을 이루어 내야만 한다.

 

이런 것일 뿐인데 좌선이나 호흡이나 주문이나 기타 다양한 자천법이라는게 무슨 소용인가. 이러한 원리를 안다면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을 성장시키고 그로인해 견해의 부족함을 느끼며 견해의 확충을 노력하고 견해가 생기면 다시 그것이 마음에 충족되는지 살아가 보면서 알아가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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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법 2

 

 

 

비법이라고 거창한 것을 쓰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들 알고 있는 자천(수도)하는 원리를 알자는 것이다. 앞에선 마음의 생활이 모든걸 평가하고 그 확충이 근원적인 것이라고 한 것이고 여기선 마음과 지식을 따로 나누어 서로의 차이를 세우고 말한 것이다.

즉, 두가지로 나눈다는 것인데 마음공부와 지식공부이다.

지식공부는 지혜나 견해나 안목, 성이나 교학이나 이론이나 인식의 확장이나 격물치지나 지성적인 것이나 이러한 머리로 하는 것이고 관법이다. 서구인들이 철학이나 합리적인 이성주의나 과학주의나 모두가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성장하자는 것일 것이다. 객관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과거부터 사서를 공부하고 독서를 하고 묻고 답하며 공부하는 것이나 글쓰고 대화하고 하는 것부터 지금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나 서점에 널려 있는 것이나 누구가 쉽게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는 그러한 것이 지식을 이용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공부라는 것은 좀 어려워 보이는 것인데 접근하기도 어려워 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워 한다. 하지만 의미는 간단하다. 그건 자신 안에 선천적으로 도덕과 신과 여래와 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선정이나 삼매나, 지, 정, 유교에선 함양공부나 거경공부나 미발공부나 존천리나 중이나 도교적인 양생이나 신인합일이나 단전공부나 결태나 계제이룸이나 명공부라고 하며 또 간단히 위에서 열거한 도덕이나 여래 등과 같은 것을 기르고 드러나게 하기위한 것이다. 선정같은 것을 번뇌가 사라지고 신비한 체험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건 지나가는 또는 방편적인 기술을 말하는 것으로 목적은 불성을 증득하기 위한 것이니 과정상의 현상과 근본 목적을 헷갈리면 안된다.

즉, 마음의 경지 이룸으로 사물에 나아가 현명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여래장이라는 것이 이 마음공부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여래라는 것이고 마음이 여래처럼 되어야 한다는 식이며 이기론이나 선이나 사람이 착하고 순수하며 완벽한 무언가를 마음에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러한 선천적인 도덕을 기르고 밝히는 것을 자천의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선정이나 삼매라고 하면 감당하기 어려워 하지만 자기마음이 여래처럼 또는 부처처럼 되어 있으니 그것을 알면 된다고 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또 좋다고 한다.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나 신성이 있다는 것이나 같은 원리이다.

이런 것의 목적인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되기이다. 부처나 보살이 되는 것이나 다 같다.

이것을 사회적으로 풀면 도덕적인 인격을 가지는 사람으로 어떠한 감정과 외부의 유혹과 자극에서도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선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종교적으론 온전한 신이나 부처나 이상적이거나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난다는 식이다.

 

이렇게 간단히 지식적인 탐구와 심성적인 바름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 자천이 된다.

 

구체적으로 호흡으로 지식을 얻을 것인지 마음을 밝힐 것인지 그건 하는 사람 마음이지만 이런 것이 원리로 있음은 알고 하면 된다.

호흡이 아니라 주문이나 좌선이나 행공이나 어떤 것을 하든지 말이다.

이런 걸 알면 호흡이나 좌선이나 주문이나 무술을 이용하거나 일상에서나 자신만의 자천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내 삶에서 생활에서 적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고 해간다면 별 어려움이 없고 이론과 현실의 괴리에서 좀더 일치된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서의 불합리와 부정과 억울함과 피해당하고 좌절당하며 손해보듯이 살아가는 것에서 내적인 자기 마음을 견지해가면서 최소한의 도덕적인 또는 신성적인 마음을 보면서 허물어지지 않고 자기를 지켜내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곧바로 자천이 되어가는 것이다. 일종의 인내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으라고 자기의 인격을 가지라고 할 순 없고 무엇이 불합리한지 무엇이 나에게 억울함을 주는지 적극적 해결법은 없는지 긍정적으로 해쳐나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따지고 해결하면서 나와 타인과 사회에 더 이익이되며 함께 사는 나은 세상을 바라는 것이 역시나 좋을 것이다.

이것이 지식을 추구하는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비법이라는 글에선 이 둘의 내적으로 작용하는 상호 유기적인 교류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머리가 나뻐서 더 헷갈리게 한거 같다.

 

지식이 없어 자신의 마음상태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 고요하고 안정적인 마음도 불안해지고 퇴보도 되는 것이고 이런 경우가 실재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을 가져야 하는 또다른 이유이다.

마음의 성취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론의 공허함을 면하기 어렵고 한계 부딫힘을 극복할 수 없다.

지금은 사회적인 공부가 이런 이론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시대라서 그럴듯한 발상과 현란한 지식이 난무하면서 그것이 진정한 인격의 함양과 성장을 이끌진 못하는데 게다가 마음공부의 중요성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별난 지식을 가지게 된다.

지식은 사람을 평등하게 본다. 물론 우린 평등하다. 하지만 어느 면에서 평등한지 그 한계를 명확히 하면서 말해야할지 모른다.

이 마음의 성취에 대해선 평등하지 않다. 도덕의 수준과 신성과 불성의 증득의 경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걸 할 수 있는 기본 잠재력은 평등할지 모르지만 가능성으로서 지금 이룰 수 있는 부분은 차별이 되며 이룬 것 역시 차별된다.

그래서 평등하기 때문에 우린 언젠간 누구나 비슷한 마음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명확히 알건 알아야 이정표로서 마음공부의 집중할 단계적이고 방법적인 효율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공부란 자기변형과 같은 거라서 마음이 변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변해가는 것을 거치는 것인데 지식연구가 지식으로 끝나고 마음으로 적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다보니 마음과 지식의 간극이 벌어지기만 하고 좁혀지진 않고 있다.

 

지금이 무조건 그르다고 할순 없다.

과거는 지식보다는 심성적인 면을 더 치중했는데 그것도 개인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그저 착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욕망부정을 해왔다.

그래서 다양한 욕구의 억압이 사회문제가 되며 자기의 내면의 솔직한 욕구를 외면하고 부정만 하면서 도피하는 비뚤어진 사람들을 기르게 된다.

자기 욕구부정이 타인의 부정과 제어로 가면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인정받기보다 권력이나 국가의 필요에 의한 사육이 되기도 했다.

이것이 지금도 자기는 가진게 있고 힘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식의 행동을 하기도 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성찰이 되지 않고 있다.

생각하기보다 이용하는 것에 더 영민한 사람들 득세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면에서 좀더 지식추구하는 합리적인 논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감정적인 면보다 체계적이고 규율적이며 시스템적인 것이 개인의 욕구를 제어하면서 견제하는게 나을 것이다.

그런 제어나 견제를 빠져나가는 역시나 돈과 권력을 가진자들의 부정은 없어지지 않고 있지만 항상 빠져나가는 이탈자들은 있고 또 그런 욕구가 없어야 한다는건 아니다.

다만 힘없는 사람들의 피해를 등에 업고 그런 사욕을 취한다면 그들의 욕구는 이해해주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을 것이다.

욕구의 부정이 아니라 욕구의 합당함은 사회적인 의견으로 해야할 것이다.

물론 자천에선 선악이나 욕구의 합당함과 시비나 의와 불의를 나눔이 다르다. 사회적인 것과 자천적인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하기도 하다.

난 자천적인 측면에서 그동안 많은 말을 하고 그것을 위한 지식을 말한게 많은데, 사회적인 것을 말하기엔 소양이 부족함을 느끼고 또 지금의 내 위치에서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라서 조심스러웠다.

 

우린 같이 사니 같이 함께 해결점을 찾고 논의해가야 한다고 보는데, 혼자선 어떤 욕구도 없을지 모르고 그 욕구의 해소도 없을지 모르니까 우리의 욕구가 발생하는 것도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함께 사는 공동체로서의 의미와 홀로 사는 것의 힘겨움과 무의미와 두려움과 불편을 알고 공동체내에서 합리적이고 서로의 뜻을 이루는 방법을 고민하며 살아가야 할거 같다.

 

내적인 심성의 기름이나 외적인 지식의 추구는 우리 삶이다. 난 이걸 도라고 한 것이다.

사회생활과 나의 삶의 과정에서 보고 들으며 경험하면서 쌓아가는 지식이 있고 그러한 지식에서 나름의 통찰을 가지기도 한다.

또 난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니 내면으로 침잠하면서 자신의 욕망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게 되고 그 욕망과 외부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욕망해야 하고 욕망하지 말아야 하며 욕망하는 것을 어떻게 충족할지 충족하지 말지 판단도 하면서 긍정적인 자신의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건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인데,

다만 좀더 효과를 확실하게 하고 더 빨리 이루고 쉽게 이루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자천이나 수도나 공부이다.

공부는 누구나 하는 것이고 삼라만상이 하는 것이며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니다.

존재하는 그것이 이걸 하고 있는 것이니 필연적인 숙명이다.

이것부터 인정해야 다음을 논의 할 것인데 이것을 인정하는 시대는 아직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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