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수련 관련글(일반)

OSHO 신심명 강의 중에<깨달음과 단계 오름에 대한 집착>

작성자작약|작성시간12.05.21|조회수108 목록 댓글 2

깨달음에 사로잡히는 것조차 엉뚱한 길이다.

 

 

 

이번에는 깨달음이 문제가 된다.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생각에 너무 집착하면 이번에는 그것이 문제가 된다.

 

깨달음은 달성되는 게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달성되는 게 아니다. 달성하려는 생각(mind)이 그것을 달성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그대는 이 세상의 권력을 쥐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대는 이번에는 저 세상의 권력을 얻으려고 애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 세상의 물질을 산 만큼 쌓아 올리려 하고 이어서 저 세상의 물질을 거머쥐려고 한다.

 

하지만 그대는 마찬가지다. 그 의지, 그 행동방식, 그리고 전체의 구도는 변함없이 그대로다.

 

달성하는 일, 다다르는 일, 바로 그것이 에고 트립이다. 달성하려는 이 생각(mind)이 바로 에고다.

 

 

 

도달하는 것은 도달하려고 애쓰지 않는 무엇인가다.

 

그것은 어디에 있든 오로지 행복한 무엇인가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이든 그저 더없는 행복으로 가득 차 있는 무엇인가다.

 

거기에는 목적지가 없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인다. 다만 움직이는 것은 목적지를 향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에게 맡겨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지를 향하는 게 아니라 그 동기 없는 움직임에 그저 맡겨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목적지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으로 핵심은 아니다.

 

강물이 히말라야에서 흘러나온다. 그 강물은 바다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강물은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다 따위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히말라야의 골짜기를 흐르면서 내는 그 노랫소리는 정말 아름답다.

 

강물은 계곡을 빠져나와 나무들 사이를 지나 들판으로 내려와 사람들 가까이 다가온다. 그 순간순간이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강물은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 바다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강물은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만약 강물이 지나치게 바다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강물은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강물은 이르는 곳곳마다 멈춰 서서 어디로 가야만 좋은지, 어느 길이 옳은지 수없이 묻게 된다.

 

그리고 북쪽으로 향하면 갈 수 있는지, 아니면 남쪽인지 동쪽인지 서쪽인지 하고 끝없이 의심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된다.

 

어느 쪽으로 가야만 되나 하고.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바다는 어디에나 있다. 북쪽으로 가든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바다는 어느 곳에나 있다. 주위 전체가 바다다.

 

그것은 언제나 그대의 눈앞에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어디로 가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길을 묻는 일은 없다.

 

어떻게 하면 좀더 흐를 수 있는가를 묻도록 하라. 어디가 목적지인지 묻지 않는 것이다.

 

목적지는 어느 한 곳에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춤추며 가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는 반드시 바다에 다다른다.

 

그것은 일어난다. 그것은 작은 강에도 일어나고 큰 강물에도 일어난다. 모두 다다른다.

 

작은 강물이, 자그마한 한 줄기 흐름이 바다에 다다른다는 것을 그대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도달하는 것이다. 작거나 크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존재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한없이 자비롭다. 작든 크든 아무 차이가 없다.

 

작은 나무도 꽃을 피우고 커다란 나무도 꽃을 피운다. 꽃을 피우는 게 일이다.

 

작은 나무가 꽃을 피울 때, 큰 나무가 꽃을 피울 때만큼 기쁘지 않은 게 아니다. 그 기쁨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그 행복은 크기가 아니고 양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질(質)이다.

 

작은 강물도 춤추며 다다른다. 큰 강도 춤을 추며 도달한다.

 

 

 

그대들은 모두 강물과 같다. 모두 어김없이 바다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목표로는 삼지 말라. 그렇지 않고 서두르게 되면 흐름은 느려진다.

 

다다르고 싶은 마음을 품으면 품을수록 그대는 더 지체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만큼 더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목표를 놓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으로 그대가 마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대가 당도해야만 하는 목적지가 없다고 하면 그곳에 두려움 같은 것은 없다.

 

 

 

기억해야 한다. 두려움이란 목적지향인 것이다.

 

만약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대는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대는 놓칠 것도 없고 실패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그대는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두려움이란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는 마음이다.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실패의 가능성은 어디로부터 찾아오는 것일까? 그것은 목적지향에서 비롯된다.

 

그대들은 늘 목적지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서 “벌써 세 달째 명상을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하고 말한다.

 

기다리고 있는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해프닝은 기다릴 수 없다. 왜냐하면 기다림조차 내재하는 노력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고대하고 있다.

 

 

 

하지만 유유자적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곳에 자신이 없어졌을 때 그것은 일어난다.

 

그것은 결코 그대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배가 텅 비었을 때만, 집이 텅 비었을 때만 일어난다.

 

춤을 추고는 있지만 그곳에 춤추는 자가 없을 때, 보고 있지만 관찰자가 없을 때, 사랑하지만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때

 

그것은 일어난다.

 

걷고 있어도 내면에 걷고 있는 자가 없을 때 그것은 일어나는 것이다.

 

 

 

기다려서는 안 된다.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말라.

 

목적을 만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깨달음조차 속박이 된다.

 

동양에서는 실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불교의 비구나 힌두교의 산야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오도가도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기도 하는데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같다.

 

거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런 사람들은 사원에서 오도가도 못한다. 그 정도의 차이뿐이다.

 

거리에서 실패한 자가 있다고 하면 그들은 사원에서 실패한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까닭인지 자신이 실패자인지 아닌지를 결코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실패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만약 목적지를 지향한다면 그대는 실패자자 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적을 지향하는 의지(mind)는 훼방꾼이다. 그것은 가장 큰 돌뿌리다.

 

그저 존재토록 하라. 궁극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것은 자신 쪽이 아니라 궁극 쪽의 결정에, 궁극 쪽의 문제로 삼으라.

 

저쪽에 맡겨 버려라. 저쪽이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신의 문제로 삼는 것이다.

 

그런 걱정을 신께 맡기도록 하라. 자신은 걱정 따위는 하지 말고, 그것이 이어지는 동안 있는 그대로의 삶을 그저 즐기도록 하라.

 

그대는 춤추고 노래하고 몰두하는 게 좋다. 그리고 신께 걱정을 돌려라. 왜 그대가 걱정하는 것인가?

 

 

 

걱정하지 말고 그저 존재토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달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달성자가 되려는 게 인간의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긴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는 지금 이곳을 못 보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는 먼 장래를 애타게 기다리게 된다.

 

바로 저곳에 목적지가, 유토피아가, 황금도시가, 샴발라가 있다고.

 

렇게 되면 그대는 그곳에 당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대는 달린다.

 

그대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그대는 누구한테서 달아나려는 것일까? 무엇을 향해 그대는 달리는 것일까?

 

샴발라는 지금 이곳이다. 유토피아는 벌써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느냐. 나는 이곳에 있다.”고.

 

예수의 제자들조차, ‘구세주는 언제 오십니까. 그제 언제이죠?’하고 물은 것이다.

 

유태교도는 몇 세기에 걸쳐서 구세주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세주가 찾아왔을 때, 그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예수는 찾아왔지만,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없었을 때도 다른 많은 예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늘 찾아오고 있다.

 

 

 

신은 늘 넘치고 있다.

 

어떤 때는 마호메트와 같은, 어떤 때는 예수와 같은, 어떤 때는 붓다와 같은, 어떤 때는 승찬과 같은, 어떤 때는 장자와 같은

 

인물이다.

 

신은 흘러넘치고 있다.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다.

 

신께는 달리 볼 일이 없는 것이다. 신은 구두쇠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도는 하나님한테는 오직 한 분의 아들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능인가? 예수가 태어난 뒤로 하나님은 불능이 된 것일까?

 

이 ‘독생자’라는 말은 우스꽝스럽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하나님은 신이 아니다. 신이 될 만한 자격이 없다.

 

 

 

회교도들 역시 단 한 분의 예언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호메트가 마지막이다. 최후의 예언자라고 한다.

 

왜 마지막일까?

 

신은 죽어 버렸다는 것일까? 이제 그보다 나은 메시지를 보낼 수 없다는 말일까?

 

신은 더 이상 개량할 수 없다는 것인가? 신은 이제 조물주가 아닐까?

 

왜냐하면 창조란 항상 자기초월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기 초월하는 것을.

 

 

 

화가는 그림을 계속 그린다. 그리고 늘 줄기차게 자신을 초월한다.

 

누군가 고흐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린 작품들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이죠?”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이것입니다.”

 

 고흐가 대답했다.

 

 

 

며칠 후 그 사람은 다시 물었다.

 

고흐는 대답했다.


“당신한테 말했을 텐데요, 이
 그림이라고.”

 

 

 

하지만, 고흐는 그때와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신은 범람한다. 신은 끝없이 넘쳐흐른다.

 

마호메트가 올 때는 마호메트가 가장 훌륭하다.

 

붓다가 올 때는 붓다가 가장 훌륭하다.

 

사실 신은 중고품 따위는 하나도 만들지 않는다. 신은 늘 최상을 창조한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을.

 

 

 

하지만 인간은 계속 기다리기만 하고 문가에 서 있는 신의 사자를 놓친다.

 

왜냐하면 눈이 그쪽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축복은 어딘가의 유토피아를, 어딘가 다른 곳을 떠돌고 있다.

 

인간은 그곳에 없다. 자기 집에 없다.

 

신은 몇 번씩이나 그대를 찾아 왔다가 돌아간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결코 자신이 있는 곳에 없다. 신은 그곳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대는 그곳에 없다.

 

 

 

걱정은 신께 맡기도록 하라. 그대가 걱정할 것은 없다.

 

그대는 걱정할 필요 없이 오로지 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상태는 이 두 가지뿐이다.

 

걱정하고 있거나 기뻐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 양쪽은 함께 있을 수 없다. 기뻐하고 있다면 미친 듯이 좋아하고 있고, 걱정하고 있다면 고민으로 미칠 것만 같다.

 

정신 이상자에게는 두 부류가 있다.

 

걱정에서 비롯되는 광기와 존재하는 데서 비롯되는, 다시 말해서 흘러넘치는 실존에서 비롯되는 광기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그대다.

 

걱정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 어느 정신병원의 병실에 누워 있거나, 아니면 성 프란시스나 승찬처럼 신의 광인이 되거나

 

그 둘 중의 하나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삶은 춤이 된다. 그것은 무한한 환희가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 된다.

 

그것이 더 커지고 더욱 늘어나 지복이 된다. 그곳에 끝은 없다. 시작하는 일은 있어도 결코 끝나는 일은 없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작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5.21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단계를 나눠놓은 거의 모든 단체는 거의 대부분이 맹목적인 단계오름에 집착하고 단계가 없는 거의 모든 단체는 이게 뭔가 되고 있는 거야 안되고 있는거야....하며 수도에 대한 혼란과 의심이 팽배해 보였습니다......저도 항상 조심할게요~
  • 작성자작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5.21 저의 존재상태는 기뻐하거나 걱정하거나 두 사이를 계속해서 왔다갔다 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