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조식법(調息法)
제1절 총론
숨쉼을 고루어 연단(煉丹)의 도를 닦는 법이 지극히 간단하고 쉬우나 예로부터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 처음 시작하는 방법을 몰라서 오래 살기를 원하다가 도리어 중도에 폐하거나 혹은 일찍 죽어 가는 사람이 많았음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개 조식(調息)을 함에 있어 그 첫째 공부는 자기의 숨기운을 닫음[閉氣]에 있을 뿐인데 옛 사람들이 이 방법을 숨기고 입 밖에 내지 않았으므로 연단(煉丹)하는 것이 자신의 숨기운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이를 함부로 금석약품(金石藥品)에서 구하다가 실패를 가져 오고 말았다.
만약 숨기운을 닫는[閉氣] 공부를 하고자 하면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두 다리를 겹쳐 단정히 앉아서 눈을 감은 채 내려서 아래를 보되 눈은 코끝을 빗겨 보고 코끝은 배꼽을 향하여 들숨을 천천히 길게 들이쉬고 날숨은 가늘게 내쉬되 숨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도록 코로만 숨을 쉬고 정신과 기운으로 하여금 항상 배꼽 아래 한치 세푼 되는 단전(丹田=氣海) 가운데 머물게 하되 숨기운을 꼭 닫고 내쉬지 아니할 것은 없고 참기 어려우면 오줌을 눌 때와 같이 힘주어 내리면 자연히 숨기운이 내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처음에는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혹은 찌르는 듯이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골골하는 소리가 나서 두려운 생각도 나니 이것들은 모두 좋은 조짐이다. 위 부분의 풍사(風師=風氣)가 바른 숨기운[正氣]에 쫓겨 공활(空闊)한 곳으로 흘러 들어가다가 전송(傳送)할 길을 찾으면 기운이 편안하고 질병(疾病)은 저절로 사라져서(소화불량·위장병·심화병·폐병·신장병·간장병·담증 등) 질병을 예방함은 물론 낫게도 하여 한 몸이 건강함을 얻으니 이것은 공부하는 초기의 체험(體驗)하는 바로서 항상 가슴앓이와 배앓이 곧 심장병·폐병·위장병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더욱 힘쓰고 행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심묘한 효험을 볼 것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쉬임없이 닦아 나가 공부가 조금 숙련(熟練)되어 이른바 현빈(玄牝)의 한 구멍이 열리면 마침내 모든 구멍이 열리게 되니 이를 회도(會度)라 한다. 조식수도(調息修道)의 근본 목표가 이 한 구멍을 얻음에 있으니 이로써 태식(胎息)을 하고 주천화후(周天火候)도 행하게 되고 단태(丹胎)도 이루어지니 모든 것이 이에서 비롯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정성을 다하여 한달 동안만 공부를 계속하면 한 몸에 젖어든 모든 질병은 스스로 소멸(消滅)할 조짐이 생기게 되고 한달 이상이 되면 오래면 오랠수록 그에 해당한 공효(功效)를 얻게 될 것이다.
대개 사람의 육체상의 질병은 풍사(風邪=風氣)가 혈액(血液) 가운데 들어가 잠복(潛伏)해 있다가 함부로 치달리어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질병이 위중해진 뒤에야 의사를 찾고 약을 먹게 되나 때는 이미 늦었으니 어찌 조식수도(調息修道)에 정성을 다하지 않을 것이랴. 의원은 병이 난 뒤에야 병을 고치게 되나 조식수도하는 사람은 병이 나기 이전에 고치고 낫게 하는 것이다.
정기(正氣)와 풍사(風邪)는 마치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정기가 체내(體內)에 가득 차면 풍사는 침범하지 못하고 달아나게 되어 신체의 모든 혈맥(血脈)은 자연히 순조롭게 유통하니 질병이 어디로부터 발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숨쉼을 고루 하는 공부를 지성(至誠)으로 한결같이 수행하여 차츰 숙련(熟練)하게 되면 반드시 연명강녕(延命康寧)에 이름을 기약할 것이오, 그 정수(精粹)에 이르지 못하고 조박(糟粕)만 얻는다고 하더라도 몸은 회복되어 무병건강(無病健康)에 이를 것이니 살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 아닌가.
본인이 항상 이로서 동호첨체(同好僉?)에게 권면해 왔으니 이 또한 서로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본인의 참람함을 용서하기를 바라나 무엇보다 뜻을 세움은 빠를수록 좋은 결과를 가져오되 정신과 기운이 늙어서 여려진 뒤에는 비록 백배의 공을 드려도 상선(上仙)의 반열(班列)에는 참례하지 못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제2절 폐기(閉氣)
폐기(閉氣)라 함은 복기(伏氣)라고도 하는데 곧 들이쉰 숨을 단전[丹田=기해라고도 하니 곧 배꼽 아래 한치 세푼되는 곳]에 누적(累積)함을 이름이니 눈으로서 깃발을 삼아서 숨기운이 오르고 내리고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앞으로 하고 뒤로 함을 생각의 가는 바와 같이 함이니 기운을 올리고자 하면 시선(視線)을 올리고 기운을 내리고자 하면 시선을 내린다.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을 떠서 시선을 올리면 왼쪽 기운이 먼저 오르고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을 떠서 시선을 올리면 오른쪽 기운이 먼저 올라서 아래로는 임맥(任脈)의 앞에까지 이르고 위로는 독맥(督脈)의 뒤에까지 이르러서 정신이 가면 기운도 가고 정신이 머물면 기운도 머물러서 기운의 가는 바에 기운이 그치지 않아 눈으로서 군령(軍令)을 삼지 않음이 없으니 마치 군중(軍中)에서 군기(軍旗)를 사용함과 같다.
또 시선을 올리고자 하면 눈을 뜰 필요가 없이 다만 눈동자만을 굴리면 마찬가지가 되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위는 왕성하나 아래는 허(虛)하여 매양 이 기운의 오름을 걱정하나 오르고 내림이 고르지 못하므로 무엇보다도 이 기운이 무기토(戊己土)의 중궁(中宮)에 내리도록 힘써 비위로 하여금 화창(和暢)하도록 하기에 힘써 혈맥(血脈)이 두루 고르게 흐르도록 할 뿐이다. 그리하여 혈맥이 고르게 두루 흐르게 하여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이 모두 통하면 연명(延命)함을 기약할 것이니 어찌 이를 실행하지 아니할 것이랴.
그러므로 연단(煉丹) 공부를 하는 길은 반드시 숨기운을 누적(累積)하는 폐기(閉氣)로부터 시작하되 얼굴에 화한 빛[和色]을 띠고 눈을 감고 아래를 보며 반드시 정신과 기운으로 하여금 서로 배꼽 아래의 단전(丹田) 가운데 머물게 하면 위쪽의 풍사(風邪)는 구름처럼 모이고 안개처럼 쏟아져 내려 처음에는 가슴이 아프면서 가슴과 배로 치달려 전송(傳送)할 길을 찾은 뒤에라야 몸이 편안하여지고 한 몸의 모든 혈맥이 두루 퍼져서 마음이 화하롭게 되면 눈앞에는 흰 눈이 마치 쏟아져 내려 나의 허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허울이 또한 내가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오직 아득하고 그윽이 황홀하여 태극(太極)이 갈리기 이전과 같으니 이것이 이른바 참다운 지경이오, 참다운 길이오, 이 밖의 모든 것은 모두 사설(邪說)이오, 망령된 행동일 뿐이라고 하겠다.
제3절 태식(胎息)
태식(胎息)이라 함은 사람의 태(胎)가 처음 부모의 복기(伏氣) 가운데서 맺혀지고 숨기운이 태식의 가운데에서 생기니 정신이 머무르고 숨기운이 들면 남[生]이라 이르고 정신이 이탈(離脫)하고 숨기운이 끊어져서 허울을 떠나면 죽음[死]이라 이르니 정신과 숨기운이 서로 머물러 있어 정신이 행하면 숨기운이 행하고 정신이 머무르면 숨기운도 머무르니 정신과 숨기운이 서로 떠나지 말도록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 불로장생하는 참다운 길이다. 다시 말하면 모태(母胎) 속에서 코로써 호흡(呼吸)하지 않고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이 태(胎)를 통하여 호흡함과 같이 환원(還元)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폐기(閉氣)의 첫 단계적인 공부가 차츰 숙련되고 정신과 숨기운이 점차 자리를 잡으면 이로부
터 차츰 아랫배의 불두덩에 이르도록 숨기운을 내리도록 하여 정밀하게 이 숨기운이 좇아 나온 곳을 살피면서 들고 남을 따르되 한번 들이쉬고 한번 내쉬는 숨기운으로 하여금 항상 그 가운데 있게 하되(이것이 이른바 현빈의 한 구멍으로서 연단하는 길이 오직 이에 있을 뿐이다) 입이나 코로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나 얼마간의 숨기운은 항상 입과 코에 머물러 있어 이것이 이른바 모태(母胎) 속에서의 숨쉬는 법으로 귀원복명(歸元復命)하는 방법이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모든 질병이 숨쉬는 데로부터 생기고 또 요사(夭死)함도 이를 좇아서 이루어지니 이 귀복(歸復)의 법을 터득하여 정진(精進)하지 않으면 벽곡(?穀)과 등선(登仙)도 어려울 것이다. 옛사람의 시에도「집이 허물어지면 고치기 쉽고, 마른 잎은 살아나기 어렵지 아니하고, 다만 귀원복명의 이치를 알면 사람에겐 보배가 산같이 쌓임과 같다」고 하였으므로 능히 태식(胎息)을 한 뒤에라야 이 숨기운이 부드럽고 화해지고 화한 뒤에 정해서 호흡(呼吸)이 없는 가운데 숨쉬는 지경에 이르니 황정경에 말한 숨기운이 자리잡으면 호흡이 없다고 함이 곧 이것이다. 옛날에 갈선옹(葛仙翁)이란 선인(仙人)은 매양 더운 여름철을 당하면 깊은 연못에 들어가 열흘을 그 속에 머물러 있다가 나왔으니 그것은 태식(胎息)과 폐기(閉氣)를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조식연단(調息煉丹)하는 데 있어 둘째 단계의 공부가 되니 더욱 정성을 다하여 닦아 나갈 것이다.
제4절 주천화후(周天火候)
불[火]에는 안팎과 빠름이 있어 처음에는 기혈이 허(虛)함으로 폐기(閉氣)한 지 오래지 아니하면 화기(火氣)가 흩어지기 쉬우므로 배꼽 언저리에서 오래도록 흩어지지 아니하면 되는데 주천화후(周天火候)란 곧 열기(熱氣)를 온몸에 퍼지게 함을 말한다. 정신과 숨기운이 배꼽 언저리에 항상 머물러 있으면 그 가운데 따뜻한 기운이 나오고 이 때에 혈기(血氣)도 점차로 차[實]게 되고 화기(火氣)도 또한 더디게 되고 또 불에는 문화(文火)와 무화(武火)가 있는데 문화는 자시(子時) 이후요, 무화는 오시(午時) 후인 바 나가고 물러가는 이치를 살피지 아니할 수 없다.
심신(心身)이 고요히 자리잡은 후에 화기를 이치에 따라 들이면 방광(膀胱)이 불처럼 뜨겁고 두 쪽 불알은 뜨겁게 화끈거리되 허리로부터 윗몸은 예사 때와 마찬가지로 시원하다. 만약 고요히 자리잡지 못한 화기를 빠르게 들이면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서 도리어 몸에 큰 해로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조심할 것이다. 이 때에 힘주어 불어 쉬면 따뜻한 기운이 가는 데로부터 차차 드러나 아래로부터 위로 이르는데 이는 더운 기운이 이르는 바에 점점 널리 열려서 위로 이름이라 마치 꽃이 조금씩 피는 것과 같으므로 화지(華池)에서 연꽃이 피는 것이라고 한다. 보수(保守)하기를 차차 오래하면 열리고 점점 왕성하여져서 신수(神水)는 거슬러 오르고 감진(甘津:예천 또는 옥장·금액이라고도 함)이 입안에 생기고 뱃속은 크게 열리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게 되고 이내 열기가 온몸에 퍼지니 이것이 이른바 주천화후(周天火候)라 진실로 이치대로 화기(火氣=熱氣)를 들인다고 하면 결코 참고 견디지 못할 지경에는 이르지 아니한다.
뇌(腦)는 수해(髓海)가 되니 곧 상단전(上丹田)으로 기운을 저장하는 곳이오, 마음은 강궁(絳宮)이 되니 곧 중단전(中丹田)으로 정신을 모으는 곳이오, 배꼽밑 한치 세푼 되는 곳은 하단전(下丹田)이 되니 정신과 기운이 항상 이곳에 머물도록 하는 곳으로 정기를 저장하는 곳이 된다. 상단전은 니환궁(泥丸宮)이라고도 하는데 하단전과 상단전이 부르면 대답할 듯 서로 대하니 이른바 옥로(玉爐=丹田)의 불은 따뜻하고 정수리[頂上=泥丸所存]에는 자하(紫霞)가 나른다는 것이다. 위와 아래에서 물대듯 불어넣으면 마치 고리에 끝이 없음과 같아서 진실로 이 화기 곧 화후(火候)로 하여금 따뜻하게 기름을 잃지 아니하면 공부는 절로 성공하여 맑고 밝은 기운이 위의 니환궁(泥丸宮)에 맺힌다. 이를 선도(仙道)에서는 현주(玄珠)라 하고, 불교에서는 사리(舍利)라고 하는데 반드시 그리되는 것이나 성도(成道)하느냐 못하느냐는 오직 공부하는 사람의 정성이 지극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을 뿐이고 무엇보다 조달(早達)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꼭 지킬 것은 하루 중에 자시(子時=밤 12시)와 묘시(卯時=오전 6시)와 오시(午時=낮 12시), 유시(酉時=오후 6시)의 네 번은 반드시 화기를 들게 하여 따뜻한 기운으로 하여금 잠시도 쉬지 아니하도록 화기를 들이되 항상 밤낮으로 한결같이 하면 열 달이 지난 뒤에 도태(道胎)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로 약(藥)을 단련(鍛鍊)하여 단도(丹道)를 이룬다고 하는 것이 다름이 아니오, 정신으로 기운을 막음으로서 기운을 허울에 머무르게 함이다. 수도하는 방술(方術)을 안다고 절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오, 방술은 알기 쉬우나 도(道)는 만나기 어렵고 비록 도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전일(專一)하게 실행하지 아니하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수행은 하였어도 마침내는 성공하는 사람이 극히 적은 바, 수도에 있어 가장 귀중한 것은 정성이니 도와 방술을 굳게 믿고 한결같이 정성껏 닦아 천궁(天宮)에 올라 비길 데 없는 쾌락(快樂)을 누리지 아니할 것인가?
황정경(黃庭經)에 말하되,「사람들은 모두 오곡(五穀)의 정기를 배불리 먹고 살아가나 나는 홀로 음양(陰陽)의 기운을 먹고 산다」고 하였으니 벽곡(벽穀)도 오직 태식(胎息)에서 말미암아 나고 벽곡은 음양의 기운에서 이르니 땅의 문은 닫히고 하늘의 문이 열리는데 어찌 신선으로 오르지 못할 것인가?
이제 폐기(閉氣)와 태식(胎息)과 주천화후(周天火候)의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였으나 이것은 오늘에 한 가지를 행하고 내일에 또 한 가지를 행하는 것이 아니오, 그 수행은 오로지 폐기하는 가운데 있고 다만 수도의 깊고 얕음에 따라 높고 낮은 등급과 공효(功效)의 크고 작음은 있을 것이나 지성만 다하면 변화(變化)하고 날아오르는[飛升] 술법도 이 조식(調息)의 세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음을 깊이 생각할 것이며 이보다 더 자세한 수행법은 먼저 깨달은 사람에게 지도를 받아야만 소기의 공효(功效)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금촉법(禁觸法)
제1절 금정욕(禁情慾)
정(情)은 마음에서 갈려짐이고, 욕심(慾)은 정에서 갈림이다. 아무리 성철(聖哲)이라도 정욕(情慾)이 없을 수 없고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품[性心]이 없을 수 없음은 마치 본말(本末)과 모자(母子)와의 관계와 같다. 바꾸어 말하면 근본이 없는 끝이 없으며 어미가 없는 자식이 없는 것이니 근본은 하나이나 그 끝은 천 갈래 만 갈래에 이르고 어미는 하나이나 열 곱이나 되는 아들딸을 낳음과 같이 성품은 참된 한 원[일원(一圓)]이오, 마음은 선악의 두 갈래요, 정은 공과 사곡과 사특[公·私·邪]의 세뿔[三角]이오, 욕심은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과 음탕함과 닿음[聲色臭味淫抵]의 여섯 길의 무수한 각도로 퍼져 나감을 감추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학에서도 사사로운 마음을 억제하고 예의를 다시 세우는 조목으로서 듣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곧 귀와 눈과 입과 몸의 접촉에 있어 예가 아니고 바르지 아니함을 상대하지 말도록 규정하여 놓았다.
금(禁)함은 이목구비(耳目口鼻)의 공능(功能)을 완전히 폐함이 아니라 음탕한 소리와 사특한 빛을 귀와 눈에 접하지 말고 나쁜 냄새와 후한 맛을 입과 코에 들이지 말고 간음과 일함에 있어 난잡하게 하지 말 것이니 이것이 약(藥)을 쓰지 아니하고 스스로 몸의 건강을 얻는 근본방법(根本方法)이며 생명을 위하여 기혈(氣血)을 기르고 정수(精髓)를 보전(保全)하여 하늘이 부여(賦與)한 명한(命限)을 온전하게 하는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여섯 가지 욕심에 끌리어서 호화롭게 사치를 다함으로서 귀와 눈으로 보고 듣는 욕심을 채우고, 맛좋은 음식으로 위장을 쇠약하게 하고, 음란한 행위로서 기혈(氣血)을 쇠약하게 하니 이것은 살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재촉하기 위해 사는 것이니 어찌 가련하지 아니한가.
삶을 사랑하는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죽은 뒤에 저승의 극락(極樂)과 천당(天堂)을 동경(憧憬)해 바라지 말고 현세(現世)의 몸을 편안하게 하고 입명(立命) 곧 하늘이 명하여 부여한 본 성품을 온전히 하여 이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수진(修眞)의 비법(秘法)을 정성껏 수행할 것이다.
마음을 바로 하고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차례로 나감이 이치에 당연한 길이니 한배검께서 마련하신 윤리(倫理)를 밝히고 제천보본(祭天報本)하신 교화(敎化)를 지키어 착하면 복을 주고 악하면 재앙을 내리는 하늘의 법칙을 잘 지킴으로서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생활을 해 나가려면 먼저 정욕의 불길[情慾火]을 끄기에 힘쓸지어다. 집에 붙은 불은 끄기에 힘쓰면서 마음에 붙은 정욕의 불길은 그대로 내버려 둘 뿐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이를 더해 나가니 참으로 우매(愚昧)함을 탄식하며 가엾음을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가장 맹렬하고 무서운 욕심불은 재물을 탐내는 것[財利火]과 명예를 탐내는 것[名利火]과 주색을 탐내는 것[酒色火]과 분노하는 것[忿怒火]의 네 가지가 시간을 다투어 마음을 불태우며 목숨을 재촉하니 깊이 반성하고 깨달아 사대욕화(四大慾火)를 끄고 막기에 힘을 다할 것이다.
제2절 독신고(讀神誥)
정욕(情慾)을 금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몸이 건강해지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방을 가리어 지감하는 방법과 같이 자리잡아 앉되 북쪽 벽에는 천진(天眞)을 모신 뒤 남쪽 벽에는 창호지 한 장 크기의 진리도(眞理圖)를 써 붙이고 향불을 피우고 촛불을 밝힌 다음 정성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서원(誓願)하되 모든 사념(邪念)을 끊어 없애고 서사를 읽고〈각사〉를 염송한 후에 목소리를 가다듬어《삼일신고(三一神誥)》를 낭송(朗誦)하되 하루의 공부하는 과정은 자신의 역량과 능력에 따라서 미리 정하되 총횟수(總回數)를 3만독(三萬讀)이나 5만독(五萬讀)이나 백만독(百萬讀)이나 자기의 뜻에 따라 먼저 정하고 일정(日程)은 쉬임없이 한결같이 계속하여 실천하라.
먼저 몸에는 3백 66알의 대단주(大檀珠)를 걸고 손에는 36알의 소단주(小檀珠)를 쥐고 한 말씀에 한 알을 헤아리며 복동하되 어김이 없도록 하라. 적어도 한번 공부하는 독고수(讀誥數)는 3만회를 내리지 않음이 좋고 오직 경건(敬虔)한 마음과 정성과 믿음을 다하여 소원하는 목표를 다하도록 주의하라. 지성(至誠)이면 하늘이 감응(感應)한다고 함은 수도하는 사람의 격언(格言)이니 성공(成功)에 이르지 못함은 오직 신념이 빈약함과 정성이 미치지 못한 것임을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이에 서사(誓辭)와 각사(覺辭)와 신고(神誥)의 원문(原文)과 진리도(眞理圖)를 적어 둔다.*
제3절 성변화(成變化)
변화(變化)라 함은 물체(物體)와 사태(事態)의 변천상태(變遷狀態)로 알 것이나 여기에서 말하는 변화라 함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신비(神秘)로운 변화이니 참[眞]을 닦는 사람은 먼저 이 점에 마음 두어 이해하고 공부할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말에 지성감천(至誠感天)이라고 하는 것은 성력(誠力)을 다하면 하늘의 현묘(玄妙)한 이치가 감응(感應)하여 때아닌 물질도 얻고 뜻밖의 사업도 성취하고 피하지 못할 재액(災厄)도 모면하고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세(事勢)에도 봉착하게 되니, 예를 들면 부모의 병환을 구원하려는 지극한 정성에서 맹종(孟宗)은 눈 속에서 죽순(竹筍)을 얻고, 왕상(王祥)은 얼음 속에 잉어를 얻었고, 솔거(率居)는 한배검(天神)께 원도(願禱)하여 비법(秘法)을 받아 절세(絶世)의 명화가(名畵家)가 되었으며, 흘나사한(訖那沙翰)이 출유(出遊)할 때에 삼척동자(三尺童子)가 아비의 명을 실행하고자 엿새 동안 전력한 결과로 폭우(暴雨)가 몰아쳐서 바위를 운전함이나 천지신령께 기도하여 자손을 낳고 병을 고쳤다는 등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들이 예로부터 수없이 현실에 나타났음을 옛 문헌이나 전해 오는 고담에서 익히 보고 들어온 바이다.
역경(逆境)에서도 선(善)을 행하면 순경(順境)으로 변화하고, 편안한 곳에서도 악(惡)을 행하면 위험한 데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 하늘의 이치인데 이와 같이 변화하는 근본(根本)은 진선(眞善)이고. 그 작용(作用)은 성신(誠信)인 바 평소에 착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행동을 쌓으면서 오직 하나요, 둘이 없는 정성을 다하고 믿음을 다하면 그 어떤 일을 기원하여 이루지 못할 이치가 있으랴.
부딪힘을 금하는 수행을 정성을 다하여 쉬지 말고 어김없이 실행하므로써 하늘로부터 받은 바 양심(良心)을 지키고 귀와 눈과 입과 코와 정혈(精血)의 남용을 막고 스스로 몸에 지닌 정신과 기운을 건강하게 한 후에 일심(一心)으로《삼일신고》를 정성껏 읽음으로써 큰 고동을 발동할 것을 목적하면 혹은 그 성력(誠力)에 따라서 혹은《신고》를 읽은 횟수에 따라서 차차 좋고 맑은 조짐을 징험하게 된다.
징험(徵驗)과 성공(成功)의 순서와 공효(功效)를 들어 보면 재앙(災殃)과 액운(厄運)이 차츰 사라져 없어지고, 질병(疾病)이 침입하지 못하고, 병장기(兵仗器)를 피하게 되고, 금수(禽獸)를 순복(馴伏)케 하고, 사람과 귀신이 공경하고 두려워 하며, 선관(仙官)과 신장(神將)들이 지도하고 환골탈태(換骨脫胎)하여 도수를 모아서[會度] 한 몸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과학자(科學者)는 의심도 하고 불신(不信)도 하고 부인(否認)도 할 것이나 다시 한번 인식과 사고(思考)를 바꾸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질은 형체(形體)가 있음으로 자연적인 변화도 있고 인위적(人爲的)인 변화도 있음을 눈으로 볼 수 있으나 마음은 본래 형체가 없이 허령(虛靈)한 것임으로 고요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움직이면 나타나는 작용(作用)의 변화가 지극히 큰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자각(自覺)으로서 인식(認識)하게 되는 것이다. 빈 것 곧 허(虛)는 본래 부피[量]가 없고, 영(靈)은 일정한 한정(限定)이 없음으로 형체가 있는 물체는 변화의 도수가 더디고 형체가 없는 물체의 변화는 그 도수가 빠르다는 것은 현대의 과학상에서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어찌하여 물질은 변화가 있으되 정신과 마음은 변화가 없음을 누가 보증하며 그 누가 단정할 것이랴. 이것은 어리석고 몽매(蒙昧)한 사람의 추상(推想)이며 억설(抑說)인 것이다.
큰 고동[大神機 곧 見聞知行]의 발현과정(發現課程)은 수진(修眞) 공부를 하는 사람의 체험하는 현비(玄秘)에 맡기고 이에서 자세하게 설명함은 피하나 물방울이 떨어져서 바위를 뚫으며 성심(誠心)을 모아 금석(金石)을 꿰뚫어 봄과 같으니 빨리 성공하고자 탐내고 재촉함은 절대로 금할 일이다. 열매가 다 익으면 손을 대지 아니 하더라도 절로 나무에서 떨어지게 마련이니 서둘지 말고 쉬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닦아 나갈 것이다.
정성이 부족하고 게으른 사람과 신념이 서지 아니한 사람 곧 호기심(好奇心)에서 시작하는 사람 그리고 죄과(罪過)가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수행을 시작하지 말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비록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신기(神機)가 발동되지 아니함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재앙과 책벌(責罰)을 입어 수명(壽命)이 줄어지거나 질병을 얻는 등 해침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설혹 눈앞에 화해(禍害)는 나타나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에 발전이 없고 더구나 성공이란 절대로 기약할 수 없으니 앞에 말한 바, 정성이 부족하고 게으른 사람과 신념이 서지 아니한 사람 곧 호기심에 끌린 사람과 죄과가 많은 사람은 시간과 심력을 허비하지 말고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 것을 다시금 주의시켜 두는 바이다.
맺는말
이상에서 해설한 것으로 우선 수진삼법(修眞三法)의 서술(敍述)을 마치는 바, 그 어느 것이나를 막론하고 평소에 겪은 바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선사(先師)의 가르치심과 각 종문의 설법에 벗어남이 없이 수행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현비(玄秘)를 찾도록 하였다.
사람마다 제각기 가진 정신이 곧 천신(天神)의 한 분자(分子)임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주재(主宰)가 육체인 것으로 그릇 알고 육체는 두텁게 양생(養生)코자 힘쓰나 정신은 이를 정양코자 하는 사람이 적고 또 자기의 정신은 중하게 여기면서 만물을 주재하시는 천신은 소홀히 하는 사람이 많음은 실로 탄식할 노릇이다.
사람이 삼재(三才)에 참여함도 이 신심(神心)이오, 만물을 지배하는 것도 이 신심이오, 만사를 조성(造成)함도 이 신심이오, 자유자재로 변화함도 이 신심이오, 하나에서 비롯하고 하나에서 마침과 셋에 나아가고 셋을 모음도 모두 이 신심 작용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신심의 작용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정성[誠]과 믿음[信]과 부지런함[勤]의 여하에 달려 있으니 믿음을 세우고 정성을 다하는 힘으로 심령(心靈)의 신비(神秘)함을 통하여 영원토록 쾌락(快樂)을 누리는 만덕문(萬德門)으로 오르기를 거듭거듭 바라며 추호라도 거짓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경자(庚子:개천 4417[1960]년) 단오날에 지은이 삼가 씀
* 서사(誓辭)
開天立道 四千幾百幾年 干支幾月 幾日 (不肖子孫某) 謹告于
개천입도 사천기배기년 간지기월 기일 (불초자손모) 근고우
三神一體上帝 伏惟 聖靈在上 善福惡禍 儆示天解 終身服膺 罔敢改易 有?此心
甘心罪罰
삼신일제상제 복유 성령제상 선복악화 경시천해 종신복응 망감개이 유투차심
감심죄벌
* 각사(覺辭-깨닫는 말씀): 한배검께 원도(願禱)하는 송주(誦奏)이니 아래와 같다.
神靈在上 天視天聽 生我活我 萬萬世降衷
신령재상 천시천청 생아활아 만만세강충.
[세 검 한 몸이신 우리 한배검이시여 가마히 위에 계시사 한으로 듣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 대종교 총본사 단암 이 용 태 道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