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지난번 강의에서 당신은 갑작스럽고 직접적으로 내려오는 은총이 때로는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은총이 항상 축복과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의문이 당연히 떠오릅니다.
이런 재앙은 은총의 수혜자가 그 은총을 받기에 적합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합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은총이 내려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은 인격체(person)가 아니라 에너지다 그리고 에너지는 개인을 고려하지 않는다.
에너지는 개인 각자에게 공평하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강둑에 서 있는 나무는 강으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더 크고 강하게 자라난다.
그러나 강 속에 빠진 나무는 거센 물결에 떠내려가면서 파괴된다. 사실 강은 이 두 그루의 나무와 아무 상관이 없다.
강은 둑에 서 있는 나무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데도 관심이 없고, 떠내려가는 나무를 파괴하는 데도 관심이 없다.
강은 그저 흐를 뿐이다. 강은 흐르는 에너지다 강은 인격체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 신에 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은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한다.
우리는 신이 친절하고 자비롭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이 항상 축복을 준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기대와 욕망을 신에게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기대와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모든 책임이 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은 인격체로 보기 때문이다.
에너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할 수 없다.
에너지를 다루면서 그 에너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꿈 속을 헤매는 것이다. 에너지를 에너지로 다루면 그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
중력을 예로 들어보자.
그대가 땅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력이 특별히 그대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걷지 않아도 중력은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대가 걷지 않으면 중력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중력은 그대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그대가 사라진 다음에도 있을 것이다.
잘못 걷다가 넘어지면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이 또한 중력의 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누군가를 고발할 수는 없다. 책임질 사람이 없다.
중력은 에너지의 흐름이다. 중력을 다루고자 한다면 그 작용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중력은 자신의 법칙을 따를 뿐 그대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신의 에너지는 각 개인을 고려해서 작용하지 않는다. 사실,'신의 에너지'라는 말은 적당치 않다.
'신이 에너지다.' 라고 말해야 한다. 신은 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는다.
신이라는 에너지는 고유의 영원한 법칙을 가지며, 이 법칙에 따른다. 이 영원한 법칙이 종교다.
종교란 신이라는 에너지가 행동하는 법칙을 의미한다.
그대가 이해와 분별력을 갖고 이 에너지와 일치되게 행동하면 이 에너지는 은총이 된다.
이것은 에너지 자체에서 비롯되는 일이 아니라 그대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그대의 행동이 에너지를 은총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정반대로 행동한다면, 에너지의 법칙과 상반돼 행동한다면 이 에너지는 은총과 거리가 멀다.
신이 은총을 거두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대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것은 오류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라 에너지다.
그러므로 기도와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다. 신에게 무엇인가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신성한 에너지가 축복과 은총을 가져다 주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
영적인 수행이 의미를 갖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기도는 무의미하다. 명상은 의미가 있지만 예배는 무의미하다.
이 차이점을 분명하게 이해하라.
기도 안에서 그대는 신에 대해 무엇인가 행한다. 그대는 구걸하고, 주장하고, 기대한다.
그러나 명상 안에서 그대는 단지 자신에게 무엇인가 행한다.
예배를 통해 그대는 신에게 무엇인가 행하지만, 사드하나( sadhana)를 통해서는 그대 자신에게 무엇인가 행한다.
사드하나는 존재계 또는 종교와 불협화음을 이루지 않도록 그대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그대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대는 강둑에 서서 물을 빨아들이며 뿌리를 강하게 만든다.
신을 에너지로 보는 순간 종교의 구조 전체가 바뀐다.
돌발적이고 직접적인 은총이 내려오면 때로는 큰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질문의 다른 부분에서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적합하지도 않은 사람이 은총을 받을 수도 있습니까?"
자격을 갖추지 안은 사람에게 은총이 내려오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언제나 은총은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내려온다.
그러나 때로는 부적합한 사람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필수적인 자격 요건을 갖추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해프닝(happening)은 항상 올바른 조건하에서만 발생한다.
이것은 눈이 있는 사람에게만 빛이 보이고 장님에게는 비칭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장님이 치료를 받아 눈을 떠도 곧장 병원 밖으로 나와 직접 태양을 보면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것이다.
그는 직접 해를 볼 수 있기 전까지 두세 달 동안 색안경을 쓰고 지내야 한다.
수용능력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면 재앙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태양을 탓할 수는 없다.
그는 태양 빛을 견딜수 있는 안력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눈이 멀어 버릴 위험성이 있다.
처음에 눈이 멀었을 때는 의학적인 수술을 통해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눈이 멀었을 때는 치료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을 잘 이해하라. 경험은 오직 자격을 구비한 사람에게만 일어난다.
그러나 자격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어떤 환경 탓으로 인해 필수적인 특성을 갖게 되는 일이 간혹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항상 재앙의 위험이 따른다. 갑자기 에너지가 내려오는데 그것을 견딜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얻어서 아무 해가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돈을 얻었을 때 재앙이 생기는 경우를 흔히 본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복 또한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 행복을 견딜 능력이 필요하다.
서서히 찾아온 행복을 감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복이 서서히 찾아오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서서히 찾아와야만 그것을 감당 할 준비가 된다.
이런 감당 능력은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뇌신경, 신체 조건, 정신적 능력...
그러나 이 모두가 한계를 갖고 있는 반면 우리를 찾아오는 에너지는 무한하다.
이것은 바다가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바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물방울은 즉각 죽어 버릴 것이다.
물방울은 철저하게 파괴될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드하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리는 에너지의 길에 들어가 그 에너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그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두 가지 과제가 완수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문을 열어 시야를 넓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눈이 밝은 빛을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빛이 더 깊은 어둠을 초래할 수 있다. 빛은 이 일에 책임이 없다.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아무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삶이라는 여행은 수많은 생에 걸쳐서 진행된다.
인간은 한 번의 생마다 많은 일을 한다. 인간은 삼매를 얻기 직전에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죽음과 더불어 그는 그 삶에 대한 기억을 모두 상실한다.
여러 생 동안 수행을 해서 99도에 도달했을지라도 그대는 그것을 모른다.
죽음과 더불어 과거 생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그러나 99도의 상태는 그대 안에 그대로 남는다. 기본적이 요소는 그대로 남아 다음 생으로 전달된다.
이제 그대 옆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다고 하자.
그는 전생에 1도 밖에 성취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이룬 상태를 모두 잊었다.
이제 그대와 그가 같이 앉아서 명상한다고 하자.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수준에 속해 있다.
과거 생에 1도의 성장을 이룬 사람에게 다시 1도의 성장이 일어나면 그는 2도의 수준에 도달할 것이다.
그에게는 은총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생에 99도의 성장을 이룬 그대는 1도만 성장하면 100도에 도달한다.
돌연 은총이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이것이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대가 전생에 이룬 99도의 성장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갑자기 은총이 그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를 위해 적절한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재난(mishap)'이란 그대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프닝이 일어나는 경우를 뜻한다.
'재난'이 반드시 나쁘거나 고통스러운 사건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재난이란 그대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백만 달러의 복권에 당첨된다면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놀래서 죽을 수도 있다.
백만 달러! 그의 심장이 멈춰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재난'이란 그대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의미한다.
이 반대의 경우 또한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준비가 된 상황에서 죽음이 온다면 이 죽음은 반드시 나쁜 사건만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처럼 기꺼이 죽음을 맞고 두 팔을 벌려 환영할 준비가 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죽음은 삼매가 된다.
그는 넘치는 사랑과 기쁨으로 죽음을 맞는다. 그래서 그는 결코 죽지 않는 실체를 알게 된다.
우리는 극심한 비통함으로 죽음을 대한다. 그래서 죽기 전에 우리는 무의식 상태에 빠진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 동안 수없이 죽음을 겪었으면서도 그 죽음의 과정을 알지 못하는 이유다.
일단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결코 떠오르지 않는다.
이 때는 죽음이 찾아와도 옆에 비켜서서 그 죽음을 지켜볼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의식이 완전히 깨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이 행운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은총이 불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성장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리는 궁극의 해프닝을 열망하고, 추구하고, 꾸준히 나아가야 하는 것과 동시에, 그 해프닝을 대비해 스스로를 준비시켜야 한다.
빛이 우리의 문은 찾아왔을 때 그 빛 때문에 눈이 멀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
나는 앞에서 신은 인격체가 아니라 에너지라고 말했다. 이 말을 명심하면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신을 에너지로 받아들이면 아무 어려움이 없다.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는 개념이 큰 어려움을 초래한다. 마음은 신을 인격체로 만들고자 한다.
그래야만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그의 탓으로 돌린다.
어떤 사람이 직업을 구하면 그는 신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직업을 잃어버리면 신에게 화를 낸다.
종기가 난 사람은 그것을 신의 탓을 돌린다. 그리고 종기가 다 나으면 신에게 감사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신을 이용한다. 신이 우리의 종기에 대해서 까지 걱정해야 하는가? 이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점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길에서 동전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 우리는 '내가 동전을 찾은 것은 신의 은총이야.'하고 말한다.
우리는 신이 우리의 돈 1원까지도 지켜 주기를 원한다. 이런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을 대하는 태도는 주인이 하인을 다루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신이 우리의 문 앞에 보초를 서면서 단 돈 1원까지도 지켜 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면 많은 이득이 있다. 모든 책임을 쉽게 그에게 덮어씌울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구도자는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다.
사실, 구도자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의 삶이 슬프다 해도 그것은 그대의 책임이다. 그대의 삶이 행복한 것도 그대의 책임이다.
그대가 평화롭다면 그 평화는 그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대가 불안하다면 그 불안은 그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은 그대의 실수지 중력을 탓할 수는 없다.
이런 자세를 가지면 이때 그대는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다. 이때는 재난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그러므로 준비가 된 사람에게 은총은 커다란 축복이라고 나는 말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모든 일에는 적합한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비극이다.
-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