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당신은 삭티파트의 효과가 점차 감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도자는 매개체와 정기적인 접촉을 유지해야 합니까?
이 말은 구루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런 의존성이 있을 수 있다.
구루(guru)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과 구루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의존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제자가 되거나 구루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
제자도 없고 구루도 없다면 의존의 문제는 없다.
그대가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해도 그 사람은 그대 자신의 일부다.
그 사람은 그대의 조금 앞서 있는 부분에 불과하다. 이 때 누구 구루고 누구 제자가 되겠는가?
붓다에 관해 내가 자주 언급하는 이야기가 있다.
붓다는 자신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생에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어떤 현자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를 찾아갔다.
나는 그의 밑에 엎드려 절하며 경의를 표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얼른 일으켜 세우고는 나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 왜이러 싶니까? 제가 당신에게 절하는 것은 당연한 행위 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제게 절하다니요? 이것은
합당한 처사가 아닙니다."
그러자 그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내게 절을 하는데 내가 그대에게 절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실수가 될 것이다. 나는 그대의 일부다.
그대 중에서 몇 걸음 정도 앞선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대와 내가 둘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지나면 그대 또한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고 왼발이 뒤따라오는 것과 같다.
사실, 왼발이 뒤에 남는 것은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
사실 스승(guru)과 제자의 관계는 해롭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 아닌 관계(non-related relationship)는 아주 유용하다.
이 '관계 아닌 관계'라는 말은 거기에 두 사람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관계에는 두 사람이 있다. 제자가 스승을 분리된 개체로 느끼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제자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 또한 이런 식으로 느낀다면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이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앞에서 인도하는 소경은 매우 위험한 존재다.
뒤에 따라오는 소경이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 영적인 의미는 없다. 실제로 모든 관계는 힘과 연관된 역학적 관계다.
모든 관계가 힘의 정치학과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고 어떤 사람은 아들이다.
만일 이것이 사랑의 관계라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때 아버지는 자신을 아버지로서 의식하지 않을 것이고, 아들은 자신을 아들로 의식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아들은 그저 아버지에 후속되는 존재고, 아버지는 아들에 선행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씨앗을 심으면 나무가 자라난다. 그리고 이 나무는 다시 수많은 씨앗을 낳는다.
그렇다면 처음의 씨앗과 나중의 씨앗들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어떤 씨앗은 먼저 오고 다른 씨앗들은 나중에 왔다.
그러나 땅 위에 떨어지고, 흙 속으로 들어가 썩고, 싹을 틔우는 것은 똑같은 씨앗의 여정이다.
똑같은 사슬 속에서 아버지는 첫 번째 고리고 아들은 두 번째 고리다. 하나의 사슬이 있을 뿐 분리된 개체는 없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에게 절한다면 그는 자기보다 선행하는 고리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들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고, 양육하고, 옷을 사 입힐 때 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양육하는 존재는 그 자신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젊어진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이 때 그것은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사랑이지 관계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정치적인 관계를 목격한다.
아버지는 강하고 아들은 약하다. 따라서 아버지가 아들을 지배한다.
은연중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전부다.'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조만간 아들이 강자가 되는 때가 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때가 되면 아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아버지를 지배할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남편과 부인의 관계는 변태적인 현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남편과 부인 사이에 왜 관계가 있어야 하는가?
두 사람은 서로간에 일체감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같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를 지배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을 지배한다. 서로가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이것은 힘의 정치학이다.
스승과 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승이 제자를 압박하고, 제자는 스승이 죽기를 기다린다. 그래야 스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스승이 빨리 죽지 않으면 그에 대항하는 음모와 술수가 펼쳐질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거나 적이 되지 않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힘들다.
수제자는 스승의 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수제자를 선택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이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힘에 의한 압박은 항상 반역을 초래한다. 이것은 영성(spirituality)과 아무 관계가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압박하는 경우는 이해할 수 있다. 두 사람 다 무지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이것은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런 데로 너그럽게 봐 줄 만하다.
남편이 아내를 압박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압박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는 흔하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용서해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스승이 제자를 억압하는 경우는 곤란하다.
최소한 이런 영역에서만큼은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주장이 없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무엇인가?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 너는 무지하지만 나는 지혜롭다. 무지한 자가 지혜로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그러나 '너는 경의를 표하고 복종해야 한다. '고 말하는 사람이 현자인가?
그야말로 가장 무지한 사람이다. 그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식을 습득하고 경전을 공부했다.
그리고 기억을 통해 그것을 되풀이한다.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아마 이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모르는 것이 없는 고양이가 있었다. 그는 고양이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해졌다.
세상에서 독보적인 스승이며 성자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많은 것을 알게 된 이유는 도서관으로 숨어 들어가는 틈바구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서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란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 길, 어느 쪽 서고가 기대앉기에 가장 편안한가,
겨울에 어느 책이 따스하고 여름에는 어느 책이 시원한가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양이들 사이에는 누구든지 도서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전지한 고양이를 찾아가라는 말이 떠돌았다.
도서관에 대한 어떤 질문이든지 답을 준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이 고양이는 당연히 전지한 존재로 여겨졌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책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어느 책 위에 앉으면 편안한가, 어느 책이 헝겊 표지가 되어 있어서 따뜻한가 하는 따위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 이상 아는 게 없었다. 그는 책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고양이가 어떻게 책안에 있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인간 중에도 이렇게 전지한 고양이들이 있다. 책으로 자신을 가릴 줄 아는 고양이들이 있다.
그대가 공격하면 그들은 라마야나(Ramayana)속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그 안에 실린 구절들을 갖고 그대를 반박한다. 또한 그들은 '기타(Gita)에 이렇게 씌어 있다'고 말한다.
이제 누가 기타에 맞서 싸우겠는가? 만일 내가 '이것은 나의 말이다.' 하고 말한다면 그대는 나와 논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타를 들먹이는 즉시 나는 안전해진다. 나는 기타 뒤로 피신한다. 살벌한 냉기 속에서 기타는 따스함을 준다.
기타는 내게 직업을 주고, 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방패막이 된다. 기타는 장신구도 되고, 가지고 노는 장남감도 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기타에 대해 아는 것은 도서관 안의 고양이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는 고양이보다 더 아는 것이 없다.
어쩌면 고양이도 도서관을 오래 들락거리다 보면 책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식으로 가득 찬 구루들은 결코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책에 대해 더 많이 배울수록 알고자 하는 욕구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안다는 환상에 빠질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앎의 권위를 내세운다면 그는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는 꼴이다.
안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무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안다고 말하기를 꺼린다면 그는 지혜의 빛을 보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구루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구루가 될 꿈조차 꾸지 않는다.
구루가 됨과 더불어 지식이라는 권위가 등장한다. '구루'하는 말의 의미는 아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자신이 안다고 확신한다. 이제 그는 '너는 알 필요가 없다. 내가 너에게 지식을 나누어 줄 것이다.' 하고 말한다.
이런 주장과 권위가 다른 사람들의 탐구심을 죽인다. 타인을 억누루지 않으면 권위는 존재할수 없다.
권위를 휘두르는 사람들은 그대가 진리를 발견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대가 진리를 발견하면 그의 권위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그는 그대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추종자와 제자들을 긁어 모은다.
그리고 제자들 사이에는 수제자와 말단 제자라는 계급이 생길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정치 조직이다.
영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특정한 사람의 현존을 통하면 신의 에너지가 하강하는 삭티파트가 쉽게 일어난다.
이 말은 그 사람에게 집착하거나 매달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나 의존하라는 뜻이 아니다.
또한 그대의 탐구를 포기하라는 뜻도 아니다.
매개체를 통해 신의 에너지가 내려올 때 그대는 이렇게 느껴야 한다.
"매개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경험도 이토록 기쁨으로 넘친다면 신의 에너지가 직접 내려올 때는 얼마나 지복에 넘치겠는가?"
타인을 통해 오는 것도 신선도를 잃는다. 그것은 다소 생동감이 떨어진다.
내가 정원에 들어갔다가 꽃향기가 몸에 가득 베어서 나왔다고 하자. 이 때 그대가 와서 나를 통해 꽃향기를 느낀다.
그러나 이 꽃향기에는 나의 체취가 섞여 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이 향기마저 희미해질 것이다.
그대는 저기에 정원이 있으며 꽃이 만발해 있다는 소식을 접해야 한다.
그래야 이 소식에 고무되어 용기를 갖고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내가 '처음에는 삭티파트가 유용하다.' 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뜻이다.
구루를 찾는다면 그대는 그 자리에 정체될 것이다. 이정표 위에 멈춰 서지 말라.
이정표는 우리가 구루라고 부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이정표는 목적지까지 정확하게 몇 마일이 남았는지 말해 준다. 어떤 스승도 이렇게 정확한 정보를 줄 수 없다.
우리는 이정표를 숭배하거나 그 곁에 주저앉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스스로 이정표보다 못 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꼴이다.
이정표는 여행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 아려 주려고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정표는 그대가 멈춰서야 하는 지점이 아니다.
거기에 멈춰서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정표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너에게 필수적인 정보를 주었다. 너는 지금까지 10마일을 여행했으며 20마일이 남았다.
이제 이것을 알았으니 더 갈 필요없다. 내 제자가 되어라. 나를 따르라."
그러나 이정표는 말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구루가 될 수 없다. 인간은 말을 한다. 그래서 구루가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 내게 감사하라. 너는 내게 감사의 예를 올려야 한다.
너는 내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
명심하라.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은 그대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이정표는 여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정표 위에는 정보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 정보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감사함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경계하라. 한 개인에 얽매이지 말라.
개인을 넘어 형상 없는 세계로 나아가라.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라.
그러나 매개체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을 통해 일별을 얻는 것은 가능하다.
궁극적으로 개인 또한 신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물을 통해 바다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개인을 통해 무한의 세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말라. 어느 것에도 노예가 되지 말라. 모든 관계는 구속이다.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이 모든 관계가 구속이다. 관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속박이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도자는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지키는 것은 아무 해가 없다.
이런 관계는 장애물이 아니다. 이런 관계는 구도의 길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이없는 사실은 그가 부부 관계와 부자 관계를 포기하고 스승과 제자라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영적인 관계'라는 개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관계가 세속적인 영역에 속한다. 관계 자체가 세속적이다.
그러므로 관계 자체가 세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대는 독립적인 존재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말이 아니다 타인들 또한 혼자며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대보다 두 걸음 정도 앞서 있다.
그 발자국을 발견했다면 그대는 자신의 여행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안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대보다 두 걸음 뒤져있고, 어떤 사람은 그대와 나란히 가고 있다.
이렇게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모두 동반자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조금 앞서 있고 어떤 사람은 조금 뒤져 있다는 것뿐이다.
그대보다 앞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어라.
그러나 절대로 노예가 되지 말라.
의존과 관계를 멀리 하라. 특히 영적인 관계를 멀리 하라. 세속적인 관계는 위험하지 않다.
세상 자체가 하나의 관계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메시지와 암시를 얻을 수 있는 곳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어라. 이 말은 그들에게 감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라. 감사를 요구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그대가 감사하지 않는 다면 이것 역시 똑같이 나쁘다. 지금 나는 이런 뜻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정보를 준 이정표에 감사해야 한다.
이정표가 그대의 말을 듣건 말건 상관없이 감사해야 한다.
구루가 감사함을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듣는 사람을 미혹시키고 에고를 살찌게 만든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맞는 말이다! 그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 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실수를 범한다.
우리는 이 말을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해석한다.
나는 그대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내말은 구루가 감사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감사하지 않는다면 감사를 요구하는 구루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 똑같이 잘못된 것이다.
그대는 감사해야 한다. 이 감사함은 속박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감사함을 요구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감사드리는 것은 전혀 속박이 아니다.
그대가 요구하지도 않는데 내가 감사한다면 이것은 속박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가 감사를 요구한다면 내가 감사를 표하건 표하지 않건 속박이 될 것이다.
암시나 일별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얻어라. 그것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영구적일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대 자신의 것만이 지속될 것이다.
그대는 여러 번 반복해서 삭티파트를 체험해야 한다. 만일 자유를 잃을까 봐 두렵다면 그대 자신의 경험을 구하라.
그러나 속박에 대한 두려움은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그대에게 묶이는 것이 속박이라면, 이 속박이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 또한 그대에게 속박된 행위다.
이 또한 그대에게 얽매인 행위다.
그러니 그대가 얻은 것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감사하라. 그리고 계속 나아가라.
만일 무엇인가 얻었다가 다시 잃었다고 느낀다면 그대 내면의 근원을 찾아라.
그 곳에서 나온 것은 영원히 잃지 않는다. 그것을 잃을 방법이 없다. 우리 내면의 보물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는 거지가 되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들인 것을 기회로 삼아 그대 자신의 탐구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관계에 매달리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다른 사람을 통해 무엇인가 얻었다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감사하라. 그리고 더 나아가라.
-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