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여자요?
김지하에게 언제든 따질 생각입니다"
● 단학선원 창시자 이승헌과 시인 김지하, 사제(사제)관계에서 악연으로 끝난 진짜 이유
● 김지하 테러 사건의 진실은?
● 김지하가 밝힌 이승헌의 돈과 여자 소문, 진실인가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올 해 정초 시인 김지하씨(59)를 인터뷰했을 때다. 그는 단학(丹學)수련에 푹 젖어 있었고, 건강을 되찾게 해준 단학선원의 창시자 일지(一指) 이승헌(李承憲) 대선사(大仙師)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심을 보냈다.
그는 미국 애리조나주 세도나의 단학명상센터에 머물고 있는 이승헌 대선사(49·인체과학연구원장)를 만난 자리에서 3배의 예를 갖춰 제자가 됐노라고 기자에게 고백하기도 했다. 당대의 대논객으로 평생 천하의 어느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을 일이 없을 것 같던 그가,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을 스승으로 모셨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그를 ‘감복케’ 한 이승헌씨는 과연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으나 당시 김시인과의 인터뷰 주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기사화하지는 않았다(신동아 99년 2월호 참조).
그런 그가 지난 8월 돌연히 스승으로 섬겨온 이승헌씨와의 사제(師弟) 관계를 철회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우리나라 상고사(上古史) 바로세우기 운동’을 전개해온 민족정신회복시민운동연합(이하 민시연)을 자신이 이끄는 과정에서 단학선원측이 운영하는 한문화운동연합(총재 이승헌)과 노선 갈등을 빚었음을 그 이유로 들었다.
김시인의 고백을 직접 들은 바 있는 기자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기(氣)수련과 같은 도의 세계에서 맺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학문 등으로 맺은 사제 관계와는 격이 다르며, 부모와 자식간의 혈연 못지 않은 인연으로 치는 게 수련계의 일반적 인식이다. 또 스승이 제자를 내치는 일은 있어도 제자가 먼저 나서서 스승을 치는 것도 보기 힘든 경우.
그러나 독재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과거 김시인의 행적을 고려해 보건대, 김시인으로서는 운동 노선 차이가 사제간에 금을 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흐른 뒤인 지난 10월 초, 전혀 예상 밖의 소식이 또 날아들었다. 김지하씨는 신원을 밝히지 않은 40대 남자로부터 “단학선원 지도부가 당신과 단학선원에 비판적인 글을 쓴 중앙일보 이규행 고문을 테러하려 한다”는 내용의 제보 전화를 받고, 거주지인 경기 고양경찰서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던 것.
또 김지하씨가 제보전화를 받기 하루 전 날, 각 언론사에는 ‘단학재건위원회’라는 단체 이름으로 김씨 테러와 관련한 제보 문건이 팩스로 전달됐다. 그 내용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단기 4332년(1999년) 10월5일 오전 (주)단학선원 지도자 일지 이승헌은 LA에서 테러책임자 3명을 지명해 테러를 지시했다.
●테러 책임자: 강기영(남·30대 초반·천안본부 정사), 신미정(여·30대 초반·논현동본부 정사), 김혜선(여·30대 초반·정사)
●지시내용: 테러와 분신자살 등 극단적 방법을 동원해서 젊은 20대 애들을 조직하라. 그리고 급격히 출동해 중앙일보 고문 이규행 등(3번째 또는 4번째에 시인 김지하가 포함돼 있음)을 테러하라. 반대로 단학지도부는 아주 유연하게 정부와 사회단체에 타협적으로 대응하라.
●현재(10월5일 오후 5시39분 무렵) 중앙일보에 항의 방문중임.
-단학지도부의 부패에 분노하여 탈퇴한 단학도우 단학재건위원회소속-’
즉 제보는 김씨가 스승으로 모시던 이승헌씨가 김씨를 테러하려는 세력의 배후자라는 것이다. 이로써 선연(善緣)이 순식간에 악연(惡緣)으로 바뀌는 상황이 돼버렸다. 김씨는 그 며칠 후인 10월9일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인터넷에 단학선원을 비난하는 글을 게재하면서 본격적으로 단학선원과의 투쟁에 나섰다. 10월11일에는 신문 및 방송사 기자들을 자택으로 불러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또 폭탄 발언을 했다.
김씨는 “2년 전 단학선원과 관계를 맺은 이후 단학선원 창립자인 이승헌씨의 개인 비리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내부개혁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단학선원 회원에 대한 노동 착취, 불법 외화반출, 여성회원들을 성적(性的)으로 이용했다는 얘기 등 좋지 못한 소문이 그치지를 않고 내부개혁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노력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어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직당국의 수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결국 단학선원과 김지하씨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버린 것이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단학선원측은 즉각 반박에 나섰다. 단학선원측은 “단학선원을 음해하려는 모종의 조직적 활동이 김지하씨와 결합해 있는 것 같다”면서 “허위사실을 유포한 김지하씨를 명예훼손으로 정식 고소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단학선원의 한 관계자는 “김씨가 이승헌원장과 결별을 선언할 때만 해도 단학선원을 비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해 참고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기사 김지하씨의 주장대로라면 단학선원은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흔히 불거지는 돈, 여자, 폭력, 지도자의 신격화 문제 등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단체로 낙인찍힐 판이었다.
행방 감춘 김지하
그간 우리 사회의 수련 문화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8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수련 열기는 21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에 수련 인구 100만명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수련 지도를 하는 수련 단체가 비대해지면서 갖가지 부작용이 심심찮게 노출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김씨의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 국내 수련단체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성 발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김씨의 주장은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곳이자, 한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기수련 단체인 단학선원을 겨낭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현재 단학선원은 전국에 300여개의 지원(支院)을 가지고 있고 이를 운영하는 직원만 1200여명에, 회원수 10만 여명을 확보한 대규모 수련단체다. 또 단학선원측 자료에 의하면 국세청 검찰청 서울시청 등 직장내 단학 모임만도 160곳이 넘고, 전국 160여 개 단위부대에서 10만여명의 군인이 단학수련을 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에 47개 단학수련장을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수련단체로 부상했다.
단학선원 한 관계자의 말.
“82년 이승헌 대선사가 경기도 안양의 한 공원에서 단학수련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성장해오는 동안 우여곡절을 겪어왔고 회원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대식구를 거느린 살림살이에 잡음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다른 사람이 그런 터무니없는 발언을 했으면 우리도 대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김씨가 퍼뜨린 말들이 언론을 통해 확산됨으로써 단학선원이 마치 사이비 종교 집단처럼 매도당하는 바람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 단체에 우호적이던 사람들의 눈길이 변하고, 수련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반인들의 호응마저 적어지는 등 정신적, 물질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 시점에 기자는 우리나라 수련문화에 대해 중간 점검도 해볼 겸, 단학선원과 김지하씨가 빚고 있는 갈등을 취재해보기로 했다.
먼저 김지하씨의 발언을 재확인해보기 위해 그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종적을 감춰버린 후였다. 김씨의 신변보호 요청을 받은 고양경찰서 관계자도 “테러와 관련해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 철수한 상태”라고 말했다. 수소문 끝에 들려온 김지하씨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할 말을 다했으므로 더 하고 싶은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김씨의 한 측근은 “김시인은 지금 어느 시골에서 집필중이며, 12월 쯤에야 돌아올 것”이라고만 밝혔다.
“제자가 스승더러 스승이 아니라고 하니…”
김지하씨가 인터뷰를 거부하고, 테러사건을 제보한 단학재건위원회라는 단체 역시 그 실체가 잡히지 않아 취재는 답보 상태에 빠졌다. 그러다 11월 초, 미국에 머물고 있던 이승헌씨가 귀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씨가 ‘단학선원 비리의 주인공’으로 지목한 당사자를 직접 만나 이번 사태를 파악해보기로 했다. 다음은 지난 11월10일 단학선원 조직의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인체과학연구원(원장 이승헌, 서울 서초구 신사동 무림빌딩)에서 이승헌씨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 사제간의 인연이 틀어져 제자였던 사람이 스승을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지금 감회가 어떤지요?
“97년에 김지하가 단학선원을 찾아왔을 때 얼굴이 완전히 가면을 쓴 것처럼 굳어져 있고 웃지도 않았어요. 그 자신이 언론에도 털어놨듯이 신경안정제를 한움큼씩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아주 악화돼 있었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어요. 우리는 한때 민주화를 위해 큰일을 한 사람이니까 특별히 고쳐주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정말이지 정성을 다 기울였고, 본인 입으로도 기적이라 할 만큼 건강이 좋아졌어요.
그리고선 김지하가 내 앞에서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하겠습니다’하면서 3배를 올렸어요. 내가 절하라고 한 적도 없는데, 김지하가 절 하라고 시킨다 해서 들을 사람도 아니겠지만, 스스로 제자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또 자기는 평생 그래왔듯이 신의를 지키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 없어요. 제자라는 사람이 자기는 제자가 아니라고 말하면 진짜로 아닌 건지…. 나는 지금도 김지하를 제자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참 답답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란 실수도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나한테 찾아와서 사죄를 하면 용서하고 포용할 마음을 갖고 있어요. 제자니까요.”
─ 김지하씨는 운동 노선 차이 때문에 단학선원과 인연을 끊는다고 밝혔습니다. 스승과 제자 관계를 털어버릴 정도로 노선 차이가 심했습니까? (김지하씨는 모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나는 민족이란 담론 안에서 보편적, 우주적 담론을 꺼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그것은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단군이었는데, 단학선원은 상고사 바로 세우기에서 단군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부각시켰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게 난 잘 이해가 안 돼요. 분명히 그는 단군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단학(丹學)이 자신한테 알려줬고, 자신이 말년에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삶의 목적을 제시해주었다고 말했거든요. 그리고 98년 단군대성인 축전 때(11월22일)는 단군할아버지 앞에서 이제 주색잡기 안 하고, 담배도 끊고, 단학인의 한 사람으로 수련을 철저히 하겠다고 발원문까지 썼어요. 그런 사람의 노선과 단학선원의 노선에 차이가 있을 수 없지요.
문제는 딴 데 있었어요. 김지하씨는 지난 6월에 민족정신회복운동연합 대표를 맡은 이후에 전국에 세워진 단군상 훼손 사건에 대응하고 왜곡된 상고사 회복 운동을 주도해왔고 7월달에 ‘대정부 요구사항’이라는 성명서를 작성한 적이 있어요. 내가 미국에 있으면서 그 성명서 내용을 훑어보니까 정부를 막말로 너무 심하게 밀어붙이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까지 정부에 강하게 항의한 적이 없고, 얼마든지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부드럽게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가 시라면 김지하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이 성명서는 민시연이 아닌 한문화운동연합(총재 이승헌) 이름으로 낼 것이고 내 의도와도 다르니까 좀 고치라고 지시했어요. 그래서 김지하가 작성한 8개항의 대정부 요구사항을 4개항의 국민제안 사항으로 수정한 성명서(7월26일)를 각 신문에 싣게 된 것이지요.
그랬더니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가 봐요. 내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하는데 나중에 제자들을 통해 들어보니까, ‘동양 제일의 시인을 이렇게 모독할 수 없다’ ‘홍익인간(弘益人間) 한다는 단체가 사람 대접 안 하는데 무슨 홍익이냐’하고 화를 내더라는 거예요. 그 이후부터 공개적으로 저에 대한 비난성 발언을 하기 시작했는데, 하여튼 성명서 사건이 김지하를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는 김지하가 육성으로 녹음한 테이프를 내게 보내왔어요. 들어봤더니 ‘내 말을 안 들으면 단학이 3년 안에 망한다. 내가 박정희도 죽였다. 당신도 내 말대로 단학을 개혁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입디다.”
“내가 교주라구요?”
─ 결국 단군운동하는 과정에 김지하씨와의 관계가 어긋났다는 말이군요. 일각에서는 단학선원이 단군을 내세워 종교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일지 이승헌은 교주와 같다는 비판도 제기하고 있습니다만….
“내가 79년 모악산에서 수도할 때 얘기부터 꺼내보지요. 그때 산에서 100일 수도하면서 큰 이치를 깨달았어요. 남자 여자가 하나고, 생사(生死)도 같은 하나고, 너와 내가 다 하나라는 자리, 선도(仙道)수련에서 말하는 ‘우아일체(宇我一體)’의 세계를 체험했습니다.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하나라는 사상이죠. 그때 저는 이 이치를 내가 최초로 깨달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고조선(古朝鮮) 단군임금 때의 경전이라고 하는 천부경(天符經)을 보니까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란 글귀가 나와요. 너무 놀랐습니다. 바로 제가 깨달은 자리를 가리키는 거였어요. 나는 그 전까지는 고등학교다닐 때 배운 단군신화 정도밖에 몰랐는데, 나보다 먼저 우리 조상인 단군 할아버지가 이미 그 자리를 깨달았던 것이지요.
또 단군 할아버지는 실천이념으로 홍익인간이라는 사상을 펼쳤어요. 홍익인간이란 수련의 최고 목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기적인 것에서 벗어나 공적(公的)인 기준을 세우라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에 이런 정신이 있었고, 이를 알리는 일이 내 몫이구나’하는 신념을 가지게 됐고, 그래서 단학선원의 설립목적도 홍익인간이라고 한 겁니다. 아마 그때 천부경을 보지 못했다면 진짜로 내가 교주가 됐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단학수련에서 자연스럽게 단군 얘기를 하다 보니까 나더러 국수주의자니 민족주의자니 하는 비판도 나오고, 심지어 단군 추종자니 교주니 하고 별소리를 다 듣게 됩디다.
나는 외국에서 단군과 홍익인간 정신을 외국인들에게 얘기할 때, 단군 할아버지가 비록 2000년 전 인물이지만 그 이념을 볼 때 사부(師父)로 모실 만한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또 수련지도를 할 때 단군이 비록 우리 조상이지만 수련으로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른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외국인들이 아주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요. 여하간 저에게는 단군이 사부라는 의식 외에는 없어요. 사부가 있는데 그 제자가 어찌 교주 노릇을 할 수 있겠어요?”
여기서 잠시 이승헌원장이 수련계에 도인(道人)으로 등장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씨는 1950년 충남 천원군에서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했던 집안에서 자란 그였지만 어릴 때부터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에 매달려 있었고, 9살 때는 신비한 기운을 체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 시절 깡패들을 만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얻어맞은 후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에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합기도와 태권도를 아주 잘했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공부와는 담을 쌓고 무술에 몰두했다. 고교를 졸업할 때 이미 태권도 4단을 딴 고단자였다. 그는 학업에 별로 뜻이 없었으나 부친이 화를 내면서 대학 진학을 요구하는 바람에 22살 때 어느 야간전문대학의 임상병리과에 입학했다. 퇴직한 부친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 학비를 벌기 위해 태권도장을 차려 낮에는 태권도 지도를 했다. 또 2년제 임상병리과를 졸업하고 나서는 4년제 대학 체육교육과에 편입해 학업을 마쳤다. 이후 개인병원과 종합병원을 옮기며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도 하고, 아둘 둘도 낳았다고 한다.
28살이 되던 어느날, 그는 어렸을 때 느꼈던 신비한 기운을 다시 체험하면서 본격적으로 구도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그는 79년에 직장 등 일체의 사회생활을 정리하고 모악산에 들어가 100일 수련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한다. 그리하여 82년 안양의 충현탑 공원에서 시민들에게 무료로 심신수련 지도를 시작한 이후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승헌 저 ‘단학’ 참조)
이승헌 사진만 봐도 마음이 안정된다?
─ 일부에서는 단학선원 수련법 중에 ‘영기통 수련’이란 게 있는데, 이것은 일지 이승헌의 사진을 보고 수련하는 방식으로 한 개인을 신격화, 우상화시키는 것 아니냐고 비판하던데요.
“(이원장 집무실 내에 걸려 있는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저 사진 속의 얼굴이 나입니다. 비뚜름한 자세로 웃고 있는 저 사진이 과연 교주 사진 같아요?
영기통 수련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수련에 집중할 때 음악을 틀어놓고 공부하면 잘 되는 수가 있듯이, 수련생이 자기가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사진을 걸어놓고 수련할 때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안정감을 느끼게 되고 집중력이 굉장히 증강됩니다. 제자들은 나를 좋아하니까 수련을 지도받으려 했을 거고, 내 사진만 봐도 마음이 안정될 것 아닙니까. 우리 선원에는 기독교신자, 불교신자 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교주로 생각하지는 않아요. 스승으로 생각하지.
단학선원의 설립목적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홍익인간하자는 것인데, 홍익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수련을 통해 누구를 따르는 게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속의 영(靈)과 만나야 하는데, 이것을 개발하는 것이 영기통 수련이고 제 사진은 그 수련에 도움을 주는 방편 정도입니다.”
─ 단학선원이 각 학교에 설립한 단군상과 관련해 사단도 많이 났지 않습니까. 단군상 목이 잘려나가는가 하면, 왜 엉터리 단군상을 세웠느냐고 비판한 이규행씨는 김지하씨가 밝힌 테러 명단에 올라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을 했고, 지금도 단군상 건립을 반대하는 기독교측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만…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을 얘기해보죠. 전북 무주초등학교에서 철거된 단군상이 다시 교정에 세워지자 단군상 건립 찬성쪽과 기독교를 믿는 반대쪽이 심한 승강이를 벌였어요. 결국 이래서는 안되겠다 해서 학부형들을 대상으로 찬반 투표를 하기로 했어요. 우리 쪽에서 나간 사람이 단군상 건립을 왜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고 그곳 교회 목사님이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밝힌 다음 투표에 들어갔는데 약 70%의 찬성을 얻었어요. 그곳 학부형 대다수가 기독교 신도들인데도 그런 결과가 나온 겁니다. 즉 우리 한국 사람들 가슴속에는 단군이 살아 있습니다.
저희 단학선원이 한문화운동연합의 이름으로 단군상을 학교에 세운 것은 서기 2000년을 맞기 전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건강한 국가관, 민족관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건국주에 대한 존중심이 필요하다는 뜻에서였습니다. 일부에서는 왜 허락없이 세웠느냐 하는데, 그 할아버지를 그렇게 세워놓지 않았으면 아예 단군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었을 것 아닙니까. 애석하게 단군 할아버지 목이 잘려버리는 사건이 여기저기서 발생했습니다만, 어떤 면에서 보면 단군 할아버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단군상을 왜 공해물질인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냐, 단군상이 솔거의 단군그림과 달라 또다른 역사왜곡이다 하는 등으로 중앙일보에다 비판적인 글을 발표한 이규행씨는 그것이 자신의 오해에서 비롯됐다면서 한문화운동연합에 공식적으로 사과했어요.”
“내가 테러 지시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서 이원장님이 이규행씨나 김지하씨 등에 대해 테러를 지시했습니까? 단학재건위원회라는 단체가 테러 주도자 3명을 구체적으로 공개한 걸 보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는 속담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기자가 보기에는 제가 테러를 지시할 사람으로 보입니까?(웃음) 내가 왜 테러를 시키겠어요? 테러 책임자로 지목된 세사람 중에 우리 선원의 운영이사인 여자가 두 명이나 있는데, 그 사람들이 테러를 시킨다고 해서 들을 사람들도 아니고 김지하 같은 사람들을 테러해서 뭐하겠어요? 그리고 단학재건위원회라는 단체는 정체불명의 조직이에요. 실체가 없어요.
난 정말 김지하씨한테 묻고 싶어요. 당신처럼 용감한 사람이 그런 얘기를 들었으면 전화로라도 미국에 있는 나한테 ‘스승님, 진짜 저 테러하라고 시켰습니까’하고 왜 묻지 않았느냐 이거예요. 그럼 금방 확인되는 것 아니에요? 김지하는 그 사건 이후 한번도 나한테 전화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정말로 테러지시 사건이 있었고 그것이 발각됐을 경우 주모자라면 한국에 있다가도 외국으로 나가버릴 것 아닙니까? 하물며 나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렇게 복잡한 사건이 생긴 와중에 뭐하러 여기 오겠어요? 하도 말 같지도 않고 너무 황당하니까 들어온 거예요.”
─ 그렇다면 테러 지시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봅니까?
“김지하씨를 누군가 이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김지하씨의 정신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상태예요. 거기에다 김지하의 마음이 단학선원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누군가가 김지하에게 불을 지른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 세력이 단학선원을 음해하려는 목적으로 단학재건위원회라는 간판을 걸고 김지하에게 전화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승헌원장의 추정은 테러지시 문건이 불거져 나왔을 때 단학선원측의 반응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당시 단학선원측은 단학선원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나 단군상 건립운동에 반대하는 일부 과격한 종교인들이 자신들을 음해할 목적으로 테러설을 유포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 김지하씨는 처음에는 단순히 단군운동에서 단학선원과 노선상 차이 때문에 탈퇴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단학선원 내부의 개혁인사를 보호하기 위해 노선 차이라는 이유를 댔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기자가 올 정초 단학선원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김지하씨를 인터뷰할 때도 “단학선원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부에 들어가 얼마든지 개혁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단학재건위원회라는 단체도 단학지도의 부패에 분노하여 탈퇴한 단학 도우(道友)들이라고 했는데, 내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요?
“회원 수가 10만명을 넘어서는데 문제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큰 병원에서도 병을 고쳐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나가는 사람도 있듯이, 단학선원에서도 회원들이 들락날락합니다. 단학선원에서 하는 일이 자기 기대에 안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중이 싫으면 절을 떠난다고 훌쩍 떠나버리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 못내 한이 돼 막 가는 사람도 있고, 하여튼 여러 유형이 있어요. 단학선원이 생긴 지 15년이 지났는데, 초창기부터 극소수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쭉 있어 왔어요. 그런 사람들이 옛날부터 계속 청와대, 안기부, 국세청 같은 곳에 투서를 하고 했어도 우리는 변명해본 적이 없어요. 저도 할 일이 무척 많은 사람인데 일일이 그들의 비위를 맞춰줄 수는 없지 않아요?. 그렇다보니까 불평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김지하씨한테 몰려들 수도 있겠지요.”
이승헌 원장은 기자의 질문에 재고 꾸미며 말하지는 않았다. 질문을 하자마자 속사포처럼, 때로는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고 답변을 했다. 대체로 무술계 출신의 도인들은 솔직 담백한 용어를 구사하는 편인데, 그 역시 그런 유형에 속하는 듯했다. 그래서 기자도 그의 주변에서 떠도는 돈, 여자 소문 등을 직설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 김지하씨와 단학재건위원회라는 단체는 이원장이 IMF관리체제를 전후해 수년간 세도나 명상여행자 혹은 단학선원 국제지도자들에게 1인당 1만달러씩 지참케 하는 방식으로 외화를 밀반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은 현지에서 대저택을 구입하고 요트나 최고급 승용차를 굴리는 데 쓰였다고 했습니다.
“나도 경제적으로 잘 살고 싶어요”
“외화 1만달러 이하를 지참하는 것이 외화유출입니까? 그건 법적으로 보장된 거예요. 단학선원 국제지도자들이 미국 같은 데서 몇 개월씩 생활하려면 돈 없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러니까 근거도 없고 상식이 전혀 없이 하는 소리들이에요.
그리고 나는 돈을 벌어서 세금 잘 내고 잘 살고 싶어요. 이런 생각은 굳이 감출 필요도 없지만, 실은 아직은 잘 살지 못합니다. 미국 세도나에 한번 와보세요. 제가 어떻게 살고 있나를 직접 보세요. 거기가 사막지대지만 너무 환상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어서 원래 집값이 비싼 동네예요. 그러나 내가 사는 집은 그 동네에서 값이 제일 싼 집이고, 단학선원 직원 10여명하고 사무실 채려놓고 공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지하는 이곳 세도나를 두 번이나 왔다 간 사람입니다. 자기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텐데 다른 사람 말에 넘어가 당한 거예요. 김지하는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거예요? 그래서 이용당한 김지하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요.”
이승헌씨는 이 대목에서 약간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그런데 진짜로 요트 가지고 있으세요?
“기자 양반, 요트하고 보트하고 구별할 줄 아세요? 나는 요트 같은 것은 없고, 보트를 두 번 빌려서 탄 적이 있어요. 한번에 60달러 주면 탈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여행 가이드를 많이 하는 편인데 그곳에 아주 멋진 호수가 있어요. 거기서 레인보브리지라는 데를 가려면 보트를 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마 그게 누구 눈에 띈 모양이에요. 그리고 나는 미국에서 세탁소 하는 사람도 타고 다니는 벤츠 대신에 캐딜락을 타고 다닙니다. 그것도 제자들이 사준 거예요.
내친 김에 또 말합시다. 내가 나이 50이 다 돼가지고 처와 아이 둘이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올해에야 뉴저지에 마련했습니다. 그간 미국 선원에서 돈이 벌리면 벌리는 대로 다른 지역 선원 개척에 썼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선원 50개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겁니다. 이제 한숨 좀 돌릴 만하게 됐는데, 제자들이 우리 가족이 사는 걸 보고 ‘스승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하고 가족들끼리 살 수 있는 집을 장만해주었습니다.
─ 여하간 세도나를 개척할 때 집을 사고 시설을 설치하려면 돈이 들어간 것 아닌가요?
“단학선원 회원 중에 한국은행에 다니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분의 조언을 받아 단학선원을 정신사업, 즉 문화사업이라고 해서 투자법인체로 만들었습니다. 외국에 투자해서 외화를 벌어들이려구요. 그래서 합법적으로 단학선원이 미국에 투자한 겁니다. 단학선원이 투자법인체이다 보니 1년에 세금만 30억원을 냅니다. 그 돈 세금으로 안내면 다른 좋은 데다 생색내면서 얼마나 잘 쓸 수 있겠어요? 단학선원더러 상업적이다 뭐다 하는데 정신 수련 단체로 세금 낸 단체 있나 한번 찾아보세요.
이렇게 적법한 투자 절차로 미국에다 50개 지원을 개척했는데, 완전히 자생력을 갖췄어요.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가 외국에다 자동차 1대 팔면 100달러 남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외국인 회원들로부터 한달 회비로 100달러를 받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문화사업이고 국익에 도움됩니까? 그래서 내년부터는 한국에서 투자한 돈도 상환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성공하기까지 말할 수 없는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어요. 저는 국가에서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 이원장님의 가족 생계는 어떻게 책임지고 있습니까?
“먼저 책을 저술한 인세 수입이 있고요. 제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판공비와 생활비가 나오니까 먹고사는 데 걱정은 없습니다. 또 저는 컨설팅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회사 운영에 대한 자문을 해주는 거지요. 저는 회사를 보면 망할 회사인지, 안 될 회사인지, 신규 사업을 언제 해야 할지를 파악해내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 회사의 성쇄를 미리 파악해내는 능력 정도면 김지하씨 경우도 미리 그 행동을 예측해볼 수도 있지 않았나요?
“제 철학이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제자가 되겠다는데, ‘넌 배신할 놈이니까 안돼’하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일단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일을 하도록 받아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지 제 책임은 아닌 거죠.”
아이 가졌다고 위협하는 여자들
─ 돈 얘기 다음에는 여자 얘기를 해야 할 것같습니다. 이원장님과 여성 지도자들간에 성적 관계가 있었으며, 이른바 이것을 성도(性道)라고 하며 천지기운의 전달이라고 해석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또 단학선원 내 지도자들에게도 이러한 성적 행위가 계속 나타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저를 보면 어때요? 여자들이 많이 따르겠어요, 안따르겠어요? (기자는 이에 여자가 많이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이원장은 미남형이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단학선원을 음해하는 사람들이 나의 얼굴을 보고 진시황이나 포주로 몰아붙이는 모양이군요.
하긴 제가 15년간 단학선원 일을 해오다 보니까 여자 회원들이 많이 따랐고 별의별 여자들이 다 있었어요. 어떤 여자는 ‘스승님은 부처의 현신 같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해오고, 어떤 경우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아주 진한 글을 적어 보내오고…. 또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여자들도 있지요. 한 여자는 자기가 지금 호텔에 있다고 하면서 나보고 오라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호텔에는 왜 가냐’ 하고 거부하니까 그녀가 ‘오지 않으면 약 먹고 죽어버리겠다, 죽으면서 나 당신 아기를 임신했다고 말해버리겠다’고 위협해요. 그러면 처방이 있습니다. 바로 ‘죽어버려라’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절대 죽는 여자가 없더라고요(웃음). 그러면 그 여자는 바깥에 나와 또 ‘저 사람은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자기 도가 깨질까봐 연연하는 것을 보면 진짜 도인 아니다’하고 비방하고 다닙니다.
나는 결혼을 해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또 그 이전에 여자를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충분히 알고 컨트롤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15년간 여자 문제는 단 한건도 없었습니다. 이걸 관리 못했으면 단학선원이 지금까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또 하나 나는 1인 10역을 하며 사는 사람이에요. 제자들이 벌어다 준 것을 가지고 편하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단학선원 개창할 때도, 미국에서 선원을 개척할 때도 간판부터 내가 직접 달고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하루에 3시간 이상 자지를 않아요. 이렇게 일에 미치다보니까 여자한테 미칠 겨를이 없어요.
문제는 남자 제자들입니다. 틀림없이 그들도 나와 같은 과정을 겪을 텐데, 그 유혹을 이겨내는 것도 공부입니다. 나는 남자 제자들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여자가 아무리 예뻐봤자 결국 뱃속에 똥 들어 있기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지요. 마음이 쏠리는 예쁜 여자가 있으면 그 50년 후로 돌려보라, 이빨 빠진 할망구가 될 텐데 뭘 그렇게 자꾸 홀리냐 하지요.
그런데 수련 과정상 홀릴 수밖에 없으면 홀려도 봐라 하고 놔두기도 합니다. 그게 어디 인위적으로 되는 겁니까? 자기가 겪어봐서 공부하는데 지장도 있고 아주 인간관계가 복잡해진다고 스스로 판단해서 넘고 나오도록 해야지 무슨 법문으로 될 일이 아니거든요.”
─ 단학선원에 남녀 관계에 대해 어떤 지침이라도 있습니까?
“지침이랄 것까지는 없고요. 나는 남녀 관계에서 중요한 점은 ‘책임’이라고 봅니다. 남녀 관계에서 서로 좋아해 선택할 경우 책임을 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혼도 할 사람은 하라고 하구요. 단 3년간은 지도자 과정의 수행 기간이니까 이 기간은 넘기라는 거지요. 단학선원에 수행하려고 왔지, 결혼하려고 온 것은 아닐 것 아닙니까.”
─ 수련자가 어떤 단계에서 여자 문제로 삐끗해 문제를 일으키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그런데 수련과정에 그런 고비는 항상 찾아오는 겁니까? 성적인 부분이 자극되는….
“수행단체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환상입니다. 성적인 것은 수행하건 안 하건 본능이에요. 자신의 의지로 그런 본능을 극복했느냐, 못했느냐가 문제겠지요. 예를 들어 단식수련 40일간을 했다 칩시다. 그러면 이것은 음식 문제를 극복한 것이지, 성 문제를 극복한 게 아닙니다. 성 문제는 성 코스에서 마스터해야 합니다.
성 문제를 두뇌 심리학적으로 봅시다. 이 뇌라는 것이 어느 부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면 그것을 알 때까지 사람을 탐닉케 합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충분히 알고 나면 이제는 싫어지는 거예요. 마치 껌과 같은 것이라고. 껌을 한두번 씹은 걸 뺏으면 엄청 기분 나쁘지만, 실컷 씹고 나면 씹으라고 줘도 안 씹잖아. 그러니까 산에서 10년 수도한 사람이 여자한테 홀리는 건 너무 당연하지요. 그간 참기만 했으니까 정보가 없잖아요? 이런 걸 모르고 산에서 수행하면서 여자 관계를 졸업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기꾼이죠. 그래서 원래 고승도 기생 집에 보냅니다. 여자하고 한 번 관계해봐라, 냄새도 좀 맡아보게 하고 나서 물어본다고요. 그 맛이 어떻더냐. 이게 사실은 공부지요. 이런 걸 성도(性道)라고 말하는가 보지요. 여하간 그냥 참어, 이건 죄니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승헌 원장은 91년 한국인체과학연구원을 설립해 두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뇌호흡’이라는 독특한 수련법을 창안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성 문제 역시 뇌와 관련해 해석된다는 것이다.
─ 외부에서는 단학선원에서 뇌호흡 수련을 하다가 기가 상기돼 오히려 몸이 나빠지거나 정신질환 등에 걸려 병원을 찾는 사람들도 적잖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저는 한번도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는데요. 상기(上氣)되는 현상은 뇌호흡이 아니고 숨을 참는 단전호흡하다가 발생하는 것이에요. 뇌호홉은 굉장히 부드러운 것이고, 완전한 방법입니다. 뇌호흡이 특별한 게 아니고 먼저 체조를 해서 온몸을 풀어주고, 그 다음 음악을 들으면서 몸을 완전히 이완시켜주고, 마지막 3단계로 뇌에 집중하는 수련법이에요.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뇌에다 집중을 할 경우 뇌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머리가 아프게 되지요.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만 따라 하면 어떤 부작용도 생길 수 없지요.”
주식회사 단학선원
─ 심신수련단체인 단학선원이 주식회사라는 상법상 회사로 등록된 이유가 있습니까? 주식회사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게 목적인데, 수련단체의 설립취지와는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처음부터 주식회사로 출발하지는 않았어요. 초창기에 단학선원이 한두개 쯤 있을 때는 누가 와서 시비하는 사람도 없고 사실 세금도 안 내서 좋았어요. 그런데 선원이 한 30개쯤으로 불어나니까 종교니 뭐니 시비를 걸고 투서도 날아들고 하는 바람에 아예 문화사업을 하는 주식회사로 등록시켰습니다.”
─ 성장하는 과정에 왜 종교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까?
“제가 1년에 선원 12개를 만들기도 했어요. 한번 공개 강의라도 하면 참석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병이 낫고 몸에 진동이 오고 하니까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그러한 파워를 보고 저더러 도인이라고 하며 따랐지요. 게다가 선원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수신(修身)되지 않은 회원들이 들어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하도 문제가 있어 회원들을 조사해보니까 50%가 전과자로 나타났고, 회사가 부도가 나 오갈데 없는 사람들도 적잖게 있었던 거지요. 그런 사람들이 초창기에 상술로 저를 신비화시키려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들을 정리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 일각에서는 이승헌원장이 단학선원을 주식회사로 만든 뒤 선원 식구들을 착취한다는 비판도 제기합니다. 말하자면 돈 문제가 투명하지 못하다는 얘기인데요.
“주식회사 단학선원은 개인이 설립했기 때문에 엄연히 개인 재산이에요. 그러나 나는 홍익인간 정신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 것이기도 하지만 제자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식회사로 전환시키고 보니 사범들이 다 나이가 어려서 그들에게 경영을 맡길 수 없었고,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이제는 그들에게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5년 전에 저의 지적재산권을 포함해 1000억원 상당의 재산가치가 있는 국내의 모든 경영권을 직원들에게 다 양도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미국으로 떠났던 것이지요.
이승헌원장은 끝으로 단학선원은 정직, 책임, 성실이라는 마음자세를 가진 도인들이 경영하는 도인경영체제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런 단체가 사회에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단학선원은 아직 완전치는 않지만 모범적인 단체로 행동했다고 말했다. 세간에 나돈 단학선원에 대한 음해는 사실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물의를 일으킨 제자 김지하씨를 만나 따져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