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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난 의술인

오두미교 장도릉

작성자작약|작성시간14.05.21|조회수1,066 목록 댓글 0

중국에서 5월에 집집마다 걸어놓았던 장천사의 부적

 

 

 

장도릉은 2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인물로, 강소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장생(長生)의 도를 구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사천성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살며 모두 24편의 도교 서적을 집필했다. 어느 날 수행을 하고 있는데, 천계에서 노자를 비롯한 많은 신들이 그의 앞에 내려와서 정일명위(正一明威)라는 술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이 술법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비법으로, 눈에 띌 만큼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장도릉의 치료법은 주문이나 호부(護符=부적), 기도를 주로 사용하는 일종의 정신요법이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환자는 우선 조용한 방에 들어가서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반성한다. 그리고 잘못들을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서원을 담은 편지를 세 통 쓴다. 그 내용은 만약 서원을 어길 경우에는 죽어도 좋다는, 대단히 엄숙한 것이었다. 편지 한 통을 산꼭대기에 놓아두어 산신(山神)에게 바치고, 또 한 통은 땅 속에 묻어서 지신(地神)에게 바치며, 마지막 한 통은 하천의 물 속에 빠뜨려 수신(水神)에게 바친다. '천·지·수의 삼관(三官=삼관대제)'에게 바치기 때문에 이것을 흔히 삼관수서(三官手書)라고 부른다. 그러고 나면 환자는 부수(符水 : 호부로 맑게 한 물)를 마시고 기도를 드리는 순서로 넘어간다. 이때 경전을 읽게 되는데, 바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1)이 그것이다.

장도릉의 치료법은 어떤 면에서 선업을 쌓으면 죄가 감해지고, 악업을 쌓으면 벌을 받는다는 불교적인 가치관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병의 원인은 사람이 신이 정한 법칙(rule=선행)을 행하지 않은 결과로 벌을 받은 것이며, 이를 뉘우치고 선행을 베풀면 죄를 면제받는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해서 과연 병이 치료될지는 의문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눈에 띄게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병이란, 사귀(邪鬼 : 문자 그대로 병마(病魔))가 육체에 침입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의 약초 연구는 그 역사가 대단히 오래되었는데, 병자가 약초를 복용함으로써 몸속에 들어온 병마를 몰아낸다는 사고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고 약초의 복용과 함께 무사(巫師=남자 무당 : 한국의 경우에는 '박수'에 해당한다-옮긴이)의 기도로 병마를 몰아내는 종교적인 차원의 치료 행위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왜 병마가 인간을 공격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답한 이가 없었다. 장도릉은 그 이유를, 자신의 내면에 알지 못하는 죄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민중들을 설득했고, 자신의 치료법으로 병자들을 고쳐나갔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과 치료 행위는 설령 지식이 없는 서민이라 할지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오두미도가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강력한 종교 왕국을 건설했던 장도릉

장도릉의 사상과 치료법은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그의 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창시한 종파를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 하는 것은 신도들에게 쌀 5두(약 9리터)를 내도록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장천사(張天師)라는 경칭으로 불리었는데, 그의 아들인 장형(張衡)이 2대이고, 손자인 장로(張魯)가 3대 장천사가 되었다. 장로가 장천사를 이어받을 무렵(185년경) 섬서성 남정현(南鄭縣)을 본거지로 종교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교단은 천사(天師)를 필두로 '제주(祭酒)''간령(姦令)''귀리(鬼吏)' 등의 직제로 만들었으며, 새로운 신도를 '귀졸(鬼卒)'이라고 불렀다. 이 나라에서는 도로 정비나 가난한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등 공공사업도 활발하게 벌였으며, '의사(義舍)'라 불리는 전쟁 난민용 무료 숙박 시설도 만들었다. 제갈공명이 이 교단을 "북쪽에 있는 장로의 국민은 번성하고, 나라는 부유하다"2)고 평가했을 만큼 나름대로는 국가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이 정도로 강력한 종교 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후한(後漢) 말의 나라 형편이 몹시도 황폐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정권은 환관들의 권력 투쟁으로 혼란을 거듭했으며, 대규모 기아와 전염병이 잇달아 발생하여 더 이상 서민들이 살아가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의사도 갈 곳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유민들을 위한 곳으로, 오두미도로서는 신도를 확보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되었다. 병 치료에 영험이 있다는 소문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혼란한 땅에서 격리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전염병이나 각종 질병을 막는 효과를 보았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러한 조직을 만드는 데에는 사실 이 종파보다 앞서 존재했던 태평도(太平道)3)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

천하의 제갈공명에게 칭찬을 받았던 조직도 마침내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215년, 위(魏)의 조조(曹操)가 오두미도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장로는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두미도는 불과 30여 년 동안 지속된 국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조는 장로의 높은 인품을 칭송하고 장군으로 임명하는 등 후의를 베풀었지만, 그는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자신의 3남인 장성(張盛)을 강소성 귀계현(貴溪縣)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곳의 용호산(龍虎山)을 근거지로 삼아 오두미도를 부흥시켰다. 이것이 후에 정일교(正一敎)가 되었으며, 당·송대에는 유일한 도교 교단으로서 세력을 떨쳤지만 이후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오늘날에도 이 교단은 그 전통을 간직한 채 자신들의 교리를 유지하고 있다. 제63대 장천사인 장은부(張恩溥)는 2차 대전 후에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탈출해서 교단의 법통을 이었으며, 현재는 64대째인 장원선(張源先)이 대만의 대북(臺北)에서 활약하고 있다.

쑥으로 만든 장천사 인형

장도릉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나라 시대에 이미 천사부(天師符, 그림 참조)를 집에 붙여서 각종 재앙을 피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러한 호부를 붙이는 것은 매년 음력 5월에 치르는 행사였다. 앞서 '종규(鍾馗)' 항목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중국에서 5월은 좋지 않은 계절로 되어 있다. 단오를 지나 하지를 기점으로 일조 시간은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하지는 음과 양의 분기점으로 대단히 중요시되었던 절기다. 하지를 정점으로 기온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유행병이나 전염병도 발생하고, 독충도 맹위를 떨치는 계절이 되는 것이다. 천사부는 이러한 재난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는(실제로 병을 막아주는 것과는 별개로) 역할을 했다. 원나라 시대에는 이 시기에 쑥을 둥글게 뭉쳐서 만든 장천사의 인형을 장식하는 관습도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 시대 말에는 북경의 각 가정마다 독특한 호부를 도로 쪽으로 난 문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이 호부는 폭 30센티미터에 길이는 60센티미터 정도인데 황색 종이 위에 화려한 색깔로 목판인쇄한 것으로 오독(五毒 : 전갈, 독도마뱀, 두꺼비, 지네, 뱀)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장천사가 이러한 해충들을 퇴치해준다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지방에 가보면 가끔씩 볼 수 있다고 한다.

 

<출처 : 도교의 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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