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부처 마니와 그의 제자들
마니는 파르티아 시대인 서기 216년 4월 16일 바빌로니아 북부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파티그(Pattig)는 메디아 왕국의 수도 하마단(Hamadan) 출신이고 어머니 마리얌(Maryam)은 파르티아 왕실 가문인 캄사라간(Kamsaragan)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마니'는 아람어 이름으로 당시 통용되던 공용어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해 12살 소년 시절에 쌍둥이라고 불리는 거룩한 영에게 진리를 계시받았다고 말한다.
이 계시는 마니교의 근간이 된다. 그가 처음 계시를 받은 해는 228년으로 아르다시르 바바칸이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건국한 초기 무렵이었다. 그리고 12년 후 다시 그 거룩한 영이 마니에게 나타나 이번에는 그가 계시한 진리를 전파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형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설명한 후에 이란의 동부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떠난다. 그는 이 여행에서 바다를 건너 인도까지 갔다 왔으며 투란[Turan, 현재 이란의 발루치스탄(Baluchistan)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왕을 개종시키는 큰 결실을 맺기도 했다.
샤푸르 1세가 아르다시르 바바칸을 이어 왕이 된 242년 그는 다시 파르스[Fars, 현재 시라즈(Shiraz)를 주도로 하는 파르스 주 지역] 지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자신의 고향인 바빌로니아 지역까지 도보 여행을 하며 마니교를 전파한다. 물론 마니의 전도에 저항이 있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첫 번째 여행을 마쳤다. 그런 후 곧 파르스 지역으로 두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지에는 메디아(현재 이란의 하마단 주 인근 지역)가 포함되었는데 그곳은 전도에 대한 저항이 극심했다. 하지만 여기서 샤푸르의 동생인 페로즈(Peroz)가 마니교를 믿게 되면서 페로즈의 주선으로 샤푸르에게 마니교를 소개하는 기회를 갖는다. 마니의 설교집인 『케팔라이아』에 따르면 샤푸르 1세는 마니를 크테시폰(Ctesiphon)의 자신의 왕궁으로 세 번 불러서 마니의 가르침을 경청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렀을 때는 그를 궁정 사제의 일원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사산조 페르시아 지역에서 제한받지 않고 마니교를 전파할 수 있는 특권을 내렸다고 한다.
이어지는 기록을 보면 그는 그 이후 궁정에서 샤푸르 1세와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비샤푸르(Bishapur)에 잡혀와 있던 로마의 황제 발레리아누스와도 함께 지냈다. 그는 샤푸르 1세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에는 페르시아 전역뿐 아니라 로마와의 접경인 아디아베네[Adiabene, 현재 이라크의 아르빌(Arbil)-자이툰 부대가 주둔했던 지역]까지 전도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하면서 마니교를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병든 자를 돌보고 고쳐 주었다. 그는 계속 포교 활동을 하여 말년에는 샤푸르 1세의 동생 중에 메세네(Mesene) 지역의 왕이었던 메흐르샤(Mihrshah)까지 개종시켰다.
244년에서 261년 사이에는 마니 자신은 주로 웨-아르다시르(Weh-Ardashir) 지역에 머무르면서 선교사들을 각 지역으로 보냈다. 먼저, 이집트에 아다(Adda)와 파티그(Pattig, 마니의 아버지로 추정)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선교사들을 보냈다. 이들은 이집트 선교에 큰 성공을 거두고 멀리 알렉산드리아까지 마니교를 전파했다. 두 번째 선교단은 암모(Ammo)를 주축으로 하여 이란의 북동부 지역으로 퍼져 갔다.
세 번째 선교단은 카르쿡(Karkuk)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을 개종시키기도 했다. 기록에는 남지 않았지만 이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마니교를 전파하기 위해 각 지역으로 흩어져 나갔다. 샤푸르 1세가 죽은 273년 무렵,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니교는 페르시아 지역에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샤푸르 1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호르모즈(Hormoz) 1세가 왕위를 계승한다.
이 기간 동안 마니는 자신의 고향인 바빌로니아 지역으로 잠시 돌아온다. 그는 바빌로니아를 떠나 티그리스 지역의 마니교 공동체를 방문하고 현재의 아흐와즈(Ahwaz)인 호르미즈드-아르다시르까지 여행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북동부 지역의 마니교 공동체를 방문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크테시폰으로 돌아온다. 호르모즈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1년 만에 다시 동생인 바흐람(Bahram)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마니교가 성장하여 조로아스터교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위기를 느끼고 조로아스터 사제들과 마니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바흐람 1세의 부름을 받은 마니는 곤데 샤푸르(Gonde-shapur)에 있는 궁정으로 출두하였다. 마니는 그곳에서 카르디르를 포함한 조로아스터교 사제들과 논쟁을 벌이다 옥에 갇힌 후 26일 만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사산조 말기까지의 마니교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마니교도들이 당시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끊임없는 핍박을 받고 동으로 서로 피난을 떠났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제 마니가 바흐람 1세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호르모즈 2세가 등극하면서 그의 극심한 핍박에 견디지 못한 많은 마니교도들이 국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로 인해 마니교가 사방으로 급격히 전파되어 4세기에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탈리아의 시실리 섬을 비롯하여 스페인에도 이들의 교회가 세워졌으며 마니교는 유럽으로 계속 전파되었다[이때 전파되었던 마니의 가르침은 훗날 중세 유럽에서 신(新) 마니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기독교에서도 마니교의 영향을 받아 그의 가르침과 비슷한 이단 종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7세기 아르메니아 지역의 바울파(Paulicians)라는 그룹과 10세기 불가리아의 보고밀파(Bogomilists) 그리고 12세기 프랑스의 카사(Cathars)라는 그룹이다. 고대 기독교 사회의 가장 유명한 교부 중 한 사람인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젊은 시절에 마니교에 심취했었다. 중앙아시아의 트랜스옥시아나에서는 마니교 중심지인 바빌로니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샤오흐르미즈드(Shah-Ohrmizd)의 지도 아래 독립적인 마니교 공동체를 형성했다.
옥수스 강 너머의 마니교 공동체들은 이란에서 피난 온 마니교도들에 의해 더욱 견고히 세워져 갔다. 당시 대부분의 마니교도들은 소그드인으로, 이 지역에서 마니교는 널리 퍼졌다. 이 마니교 공동체는 6세기 말엽에 형성되어 점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들의 세력은 8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8세기 무렵 아랍이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마니교에 대한 박해가 잠시 멈추자 옥수스 강 건너 이주해 갔던 페르시아 마니교도들 중 몇몇은 다시 이란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바스(Abbasid) 왕조가 들어서면서 다시 마니교도들을 향한 핍박이 시작됐다. 바그다드에서 10세기 무렵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사마르칸트로 이주하면서 마니교는 이란 땅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이들은 당시 실크로드 무역을 주름 잡던 소그드인들을 개종시켰다. 이후로 마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694년에는 중국의 황실에까지 마니교가 전파되었고 마침내 732년 중국 지역에서 전도의 자유를 얻기에 이른다. 이란 동쪽으로 마니교가 가장 융성했던 지역은 중국 북서부의 소수민족인 위구르 왕국이다.
위구르 왕국의 황실과 귀족층들이 마니교를 열성적으로 믿었다. 이곳에 전파되었던 마니교는 몽골의 침입에도 살아남았지만 14세기 중국의 강력한 탄압에 못 이겨 자취를 감추었다. 마니교는 불교의 몇몇 분파에도 흡수되어 재림(再臨)불교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마니교는 영단어에도 흔적을 남겼는데, 한곳에 심취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영어 마니아(Mania)도 마니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출처 : 페르시아의 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