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민
1. 나는 어떻게 심령과학도가 되었는가?
필자가 자라난 가정환경은 무종교의 집안이었다. 기독교나 불교 또는 어떤 신흥 종교와도 필자는 인연을 맺어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30대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필자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었다. 그러한 필자가 지금과 같이 철저한 유신론자로 변하게 된 데는 아내의 공이 크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어려서 신동도 아니었을 뿐더러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만 해도 성적은 중간 아래를 맴돌고 있었고, 어린 나이답지 않게 심한 자학증에 고민하는 감정이 풍부한 소년이었다.
말도 더듬었고, 심한 적면공포증(타인 앞에서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 때문에 괴로움을 받기도 했었다.
충남 서천출신인 아버지와 황해도 장연출신인 어머니는 성격 차이가 너무나 심해서 항상 말다툼으로 지새웠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두 분은 상대방에게 적응을 못한 불행한 집안이었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삶에 대해서 늘 회의를 느껴 왔고, 곧잘 자살충동까지도 느끼곤 했었다.
부모들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란 필자는 심한 열등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잘못 태어난 인생으로 규정하는 경향을 갖기도 했었다.
이런 상태에서 필자는 문학에 몰두했고, 그 덕분에 위험한 청년시절을 별 탈없이 지내온 게 아닌가 싶다.
대학시절, 여러 해에 걸쳐서 한 여성을 사모한 일이 있었으나 그녀로부터는 끝내 냉대를 받았었기에 자신은 여성으로부터 평생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열등감마저 갖게 되었다.
그럭저럭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 여섯이 되던 해에 필자는 우연히 K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되었고, 그때 출판사의 직원이었던 지금의 아내를 알게 되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애정에 몹시 굶주려 온 필자는 그때까지 알게 된 여러 여성에 대해 연모의 정을 가져 본 일이 많았지만 그때까지 한번도 올바른 대우를 받아 본 일은 없었다. 애정이란 서로 주고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아내는 나의 첫사랑의 연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한다. 얼마동안 교제가 계속된 뒤에 필자는 구혼을 했다. 그녀는 며칠 동안 생각해 볼 여유를 달라고 했다. 그녀가 나에게 대답을 하기로 한 날은 몹시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늦가을의 아무도 없는 덕수궁 뒤뜰 벤치에 앉아서 그녀는 필자의 구혼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전에 결핵을 앓은 일이 있는데, 그 병이 재발을 했으며 의사의 이야기가 종신토록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으니 자기는 그 누구하고도 결혼할 수 없는 몸이라고 했다. 그러니 다른 더 좋은 사람과 결혼해 달라는 것이었다.
모처럼 얻은 행복을 놓치게 된 필자는 눈앞이 캄캄했다.
"나를 알아주는 여성, 나의 애정을 받아주고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연이 없었구려. 나는 평생을 통하여 나를 알아준 고마움을 사랑으로서 갚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소용이 없게 되었구려, 그렇다면 당신에게 갚지 못한 보답을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갚으리다. 어느 의미에서든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작은 지팡이가 되리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오."
하고 필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속 깊이 서약했다.
그 뒤 필자는 1년 동안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건강한 모습을 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사라졌던 희망이 다시 솟아났다. 얼마동안 교제가 계속된 뒤에 또 다시 청혼했다.
이번에는 그녀도 승낙을 했다. 그런데 양쪽 집안 어른들끼리 만나기로 한 날 아침, 그녀의 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아침 각혈을 했으니 동생을 단념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아니 어디 색시가 없어서 폐병 앓는 색시를 얻겠다는 거냐. 다시는 이야기도 꺼내지 말아라!"
하는 부모님 말씀 앞에 필자는 몸둘 곳을 몰라 했다.
역시 인연이 없는 여인이었구나 하고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 1년이 또 지났다.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간 친구의 약혼식에서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E대학 강사로 나가는 여성이었다.
복잡한 경위를 밟아서 그녀와 약혼을 했다. 그러나 약혼한 지 한 달이 지나는 동안 필자는 자신이 큰 오산을 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헤어진 여인과는 반대로, 그녀는 필자의 인격을 전혀 인정치 않았다. 이대로 결혼한다는 것은 두 사람이 다같이 불행해진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말다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단치 않은 일로 큰 언쟁이 일어나고, 이것을 고비로 그녀는 필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를 보내놓고서 필자는 다시 한번 헤어진 여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건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집안에서 크게 반대를 했는데, 필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토록 섬세하게 마음을 써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이번에는 저쪽에서도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 딸이 스물 아흡이나 된 노처녀가 되었으니 완강한 입장이 못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부모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버지께서 맹렬히 반대하셨다. 몸이 아픈 며느리를 집안에 맞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필자의 고집이 승리를 거두어 결혼은 했지만, 그 뒤 반년 동안 처가살이를 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던 날,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 여인과 결혼하면 행복은 하겠지만 앞으로 10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아주 불길한 예감이었다.
'10년이면 어떤가! 그동안 행복하다면 10년도 긴 세월이다!'하고 필자는 생각했다.
이런 예감이 맞았던지 필자는 결혼 후 한달 만에 무서운 열병을 앓았다. 꼭 죽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고열이 계속되던 어느 날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5년 후에 다시 보자!"
그 뒤 5년 후, 필자는 세째 처남 일로 해서 곤경을 치루어야만 했었다. 그때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7년 후, 설흔 아홉살을 너는 넘기기 어려우리라!"
필자의 10년에 걸친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이런 게 아닌가 여겨질 만큼 필자의 마음은 안정이 되었다. 그동안 책도 여러 권 출판했다.
아버지를 도와서 여러 가지 좋은 일도 했다. 설흔 아홉살이 되자 필자는 아무래도 이 해가 생애의 마지막이 될 것 같기만 했다.
주변을 정리했다.
하루하루를 곱씹어 가면서 후회 없는 1년을 보냈다. 남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사는데 죽는 날을 알고 살게 된 것을 하늘에 감사했다.
12월 30일 이었다고 기억된다.
필자는 충무로에 나갔다가 우연히 이규대씨라는 분을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요가행자의 일생'이라는 책을 빌려 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히말라야 산 속에서 2천년 이상의 젊음을 누리고 산다는 신인 파파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어쩐지 이 파파지가 전생에서의 스승 같기만 했다.
마흔살이 되던 정월 이튼날 밤, 필자는 파파지에게 기도를 했다. 이때만 해도 필자는 아직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이 믿지를 못했었기에 구체적인 인물인 파파지에게 기도를 드린 것 이었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저승으로 데려가 주셔도 좋고 또 연명이 된다면 앞으로는 제 자신 보다는 많은 동포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선생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날 밤, 필자는 죽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유체이탈을 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온 몸이 싸늘하게 차지고, 심장의 고동이 멎으면서 필자의 영혼은 육체에서 빠져 나왔다. 멀고 먼 과거, 약2천년 전 중동지방에서 살았던 전생을 필자는 경험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천연색 장면이었다. 필자는 이날 밤 많은 전생의 기억 가운데서 하나를 찾은 것이었다. 얼마가 지났던 것일까!
필자의 유체는 다시 강한 힘으로 다시 끌려가기 시작했다. 어딘지 먼 곳에서 아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정신 차리세요! 여보!"
차차 그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필자의 영혼은 다시 육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왼쪽 발 뒷꿈치에서 맥이 뛰기 시작하자 정신이 들었다. 다시 정신이 든 필자를 보고 아내는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이 정말 죽은 줄만 알았어요. 몸이 갑자기 싸늘해지는 것 같아서 잠을 깼어요.
자세히 보니 당신이 숨을 쉬고 있지 않더군요. 저는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 같은 아내의 말을 귀곁에 들으면서 필자는 다시 깊은 잠 속에 빠져들어 갔다.
새벽이었다. 잠은 분명히 깨었는데, 아직 두 눈은 감고 있는 상태이고, 갑자기 눈앞에서 별 빛이 반짝이더니 커튼이 둘둘 말아올라 갔다.
눈 앞에는 여러 제자들을 거느린 파파지의 모습이 보였다.
"안동민, 너는 네가 전생에서 누구였었는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너는 라히리 마하사야다! 전생에서 라히리가 하던 일을 계속해서 완성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 순간, 커튼이 다시 내려가고 필자는 두 눈을 떴다.
그 길로 서재로 달려가서 '요가행자의 일생'을 펼쳐보니 과연 필자의 모습과 라히리 마하사야는 닳은 데가 많았다.
그렇다면 유체이탈해서 과거로 돌아가서 본 것은 라히리 마하사야 이전의 전생이 분명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필자는 또 다른 놀라운 발견을 했다. 10년동안 앓아온 기관지 천식을 비롯해서 몸에 있던 여러 가지 병들이 모두 쾌유되고 몸이 완전히 건강해졌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 뒤 한달 동안 천국에 가 있는 것과 같은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신변에 여러 가지 기적들이 일어났다. 죽은 지 30분 이상 된 금붕어를 살려낸 것을 위시해서 가슴앓이를 앓던 이모님의 병을 순식간에 고치는 등 상상도 하지 못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 그런 후 한 달이 지나자 여러 가지 무서운 시련이 닥쳐 왔다.
아버지가 간암임이 밝혀졌고, 돌아가시기 전후해서 필자는 남이 알 수 없는 무서운 정신적인 고통을 겪어야만 했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단식요법을 택한 아버지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필자는 아버지를 굶어 돌아가시게 하려고 한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었다.
미국에 있는 동생들이 쫓아 나오고 지금 생각하면 아주 끔찍스러운 악몽의 연속이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춘추 70이셨다.
여기서 부모의 결혼식과 관련된 춘원선생 이야기를 잠깐 소개해 볼까 한다. 부모님의 주례를 춘원선생께서 서 주셨는데 그때 춘원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네는 위로 아들만 셋을 낳거든 단산을 하게. 큰아들의 이름은 둘을 지어주겠네.
하나는 외자 이름으로 동자이니, 이 이름을 지으면 애국자가 될 것이고, 동민이라고 지으면 40까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겠지만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긴 뒤에 겨레를 위해서 큰 일을 하는 인물이 될 것일쎄. 둘째는 동방, 세째는 동국, 이들은 외국에 가서 살기가 쉽네."
"아들 삼형제는 너무 적지 않습니까?"
"옛끼 이 사람, 자네는 욕심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삼형제만 낳고 단산을 하면 자네는 말년이 행복할 게고 80까지 살겠지만 욕심을 부려서 셋을 더 낳으면 삼불출이 나와서 자네는 인간고가 많을 게고 70을 넘기기가 어려워. 그런 것을 알고서야 어떻게 이름을 지어주겠나. 지으려 거든 자네가 짓게."
하고 춘원선생은 몹시 못마땅해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분 말씀대로 동방과 동국은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고, 그 밑으로 태어난 3남매가 말년의 아버지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화병으로 간암이 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는 서울문리대 국문학과 졸업논문으로 (춘원연구)를 제출했는데, 모두가 기이한 인연이라고 생각된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무서운 투병생활을 하셨지만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뒤 2년 동안 필자는 어떻게든 출판사를 키워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한국아동문학선집)출간을 계기로 필자가 자영하던 동민문화사는 파산을 하여 문을 닫게 되었다.
문을 닫을 때, 빛은 천만원이 휠씬 넘었다.
여기서 잠깐 필자가 지금 하고 있는 체질개선연구원을 열게 된 동기를 이야기해 볼까 한다.
부산에 출장 갔다가 오는 길에 경주 근처에서 그때 영업부장이었던 김봉룡씨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태양 에너지를 장심으로 빨아들여서 뇌의 송과체에 뇌사를 응집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필자는 알아낸 것이었다.
그 뒤 출판보다는 이 일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한국일보사에 계시던 이기석씨의 소개로 (주간한국)에 12회에 걸쳐서 (방랑 4차원)이라는 글을 연재한 것이 인연이 되어서 많은 난치병 환자들을 접하게 된 것이 동기가 된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린 필자는 출판사 문을 닫기 직전에 '체질개선연구원'의 간판을 함께 달았다.
이때 필자의 손을 거쳐간 사람들이 100여명이었고, 전원에게는 거의 무료로 시술해 주었었다.
이들 가운데 기적적으로 회복한 어느 분의 경제적 협조로 예수님의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12세에서 30세까지의 기록이 담긴 '보병궁 복음서' 출판을 마지막으로 동민문화사는 영 문을 닫게 되 었다.
1961년 12월 4일 창립해서 만 12년만에 출판사는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빛 갚을 길은 전혀 없고 하잘 것 없는 가구, 집기까지 차압당했다.
차압을 당하던 날 아내는 말없이 부엌에서 울었다.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좋은 책을 내보려고 몸부림치며 노력한 결과가 파산이었다. 셋방이라도 얻어 나가려고 집도 내어놓았지만 팔리지가 않았다.
필자가 출판사를 할 때 단골로 종이를 대주던 Y지업사의 사장에게도 (한국아동문학선집)용 용지대 2백만원이 고스란히 빛으로 남아 있었다.
Y지업사 사장은 그 뒤 T출판사를 창립했다. 필자가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첫째 하늘의 보살핌이오, 둘째는 T출판사 사장이었던 왕한조씨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1973년 8월 2일 밤, 필자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모든 인간의 노력이 속절없음을 깨달았으니 하늘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을 맹세하고 손발을 풀어 주실 것을 간곡히 기도 드렸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분명히 내일 무슨 기적이 일어 날 거요."
하고 필자는 실망에 차 있는 아내를 위로했다.
다음 날, 동네 복덕방에 계시는 노인이 고혈압 환자 한 분을 모시고 왔다. 이 환자에게 기적적인 효과가 나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필자를 찾기 시작했다.
심하게 빛 독촉을 했더라면 필자는 소생할 길이 없었을 터인데 다행히 왕사장은 1년 이상을 너그럽게 기다려 주었기 때문에 그 동안 필자는 6백명 가까운 사람들의 체질개선을 할 수가 있었다.
환자들이 주고 가는 얼마 안 되는 사례금을 모아서 우선 급한 빛부터 갚아나갔다.
인과율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필자는 뼈아프게 체험한 셈이다.
또한 필자를 찾아온 많은 환자들을 통해서 처음으로 체질개선의 원리도 체계를 세우게 된 것이 사실이다. 참고 서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스승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심령치료와 체질개선 연구를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자 어느덧 필자는 이 방면에 대해 전문가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증산진법회의 회장이라는 배용덕씨가 필자를 찾아왔다. 이원섭씨의 소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는 자신이 연구한 '체질개선의 원리'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드렸다. 그는 증산연구 논문집 한 권을 선사하면서 필자에게 안경을 벗어보라고 하더니 유심히 얼굴을 살펴보고 그냥 돌아갔다.
필자는 별 이상한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고 돌려보냈을 뿐이었다. 밤낮없이 시간에 쫓기는 몸이라 그가 놓고 간 책은 차일피일 미루며 읽을 기회가 없었다. 이 무렵, 필자는 진동수를 직접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아무 대가없이 공급해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한 두 사람 오던 것이 수십명으로 증가되고 보니 우리 연구원은 공동수도장 비슷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감당하기조차 어려웠다.
하루는 공심법을 써서 명상에 들어갔더니 '자기테이프'인 녹음테이프에 진동음인 '옴'을 녹음해서 그 진동으로도 진동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카셋트 테이프에다가 옴 진동을 넣은 뒤, 시내 아는 어느 문방구점에 가서 연구원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를 불러내어 카셋트 태이프를 틀게 하여 전화로 보내게 하고 수돗물에 쪼여 보았다. 맛을 보니, 직접 진동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뒤로 일년 반 동안 하루에 때로는 100통화 이상이나 진동을 보내곤 했다.
결과는 소수의 예외를 빼 놓고는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결핵, 악성 피부병, 알콜 중독을 위시해서 많은 난치병이 완쾌되었고 성격이 변했다는 보고 예도 있었다. 물론 전화는 순전한 봉사에 속하는 일이고 필자는 이에 대하여 어떤 보수도 받은 일은 없다.
그런데, 1년 반이나 지났을 때, 전화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직접 진동수 만들기 2년, 전화로 진동수 보내기 1년 반, 모두 3년 반에 걸친 시험결과 필자는 직접 카세트 테이프에 옴 진동을 녹음해서 실비로 보급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옴 진동 테이프에는 옴 진동과 그 원리 설명과 효과를 본 사람들의 여러 가지 증언들이 녹음되어 있고 뒷면에는 아나운서와 대담하는 형식으로 '체질개선의 원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 있다.
글을 모르시는 분도 카세트 녹음기만 있으면 모든 설명을 들을 수 있고, 또한 이 테이프로 시술도 가능한 것이다.
가령 결핵환자일 경우에는 우선 깨끗한 그릇(플라스틱 제품은 금물이다)에 물을 떠놓고 진동을 시킨 뒤, 두꺼운 타올로 적셔서 옷 위로 가슴 위에 놓고 그 위 10센티 가량 떨어진 거리 에서 진동소리를 쪼이면 되는 것이다.
옴 진동 테이프와 카세트 녹음기 한대면 웬만한 난치병은 치유될 수 있음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용이 있기를 바란다.
얼마가 지난 뒤였다.
탤런트로 유명한 이경훈씨의 누님 되시는 분이 필자를 찾아 온 일이 있었다. 그녀는 거의 광신에 가까운 증산교 신자였다. 심령과학 시리즈인 '기적과 예언' 속에 꼭 소개를 해 달라고 원고까지 써다 주셨지만 필자는 이때도 과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 뒤 또 얼마가 지난 뒤였다.
성남시에 사는 어느 모자가 필자를 찾아 온 일이 있었다. 그들을 영사해 보니 젊은이는 전생이 강화도령인 철종이었고, 그 어머니는 민비였었다. 어머니는 얼굴 모습까지도 꼭 민비를 닳은 것 같았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 나라 백성들이 이렇게 어렵게 사는 것은, 제가 전생에서 무엇인가 잘못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과 같은 자책심을 늘 느끼곤 했지만 그 까닭을 몰랐었죠."
하면서 젊은이의 어머니는 고백하는 것이었다.
"젊은이는 벌써 3대째 특수한 종교를 믿어온 것 같군요. 혹시 할아버지 때부터 증산교 신자가 아니었던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고 젊은이는 놀라워 했다.
"할아버지 제삿 날자와 젊은이의 생일이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젊은이는 할아버지가 다시 재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전생이 철종이셨구요."
하고 말하는 순간 필자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증산이 다름 아닌 내 자신이었구나!'
하는 자각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서가에 꽂혀 있기만 했던 증산연구논문집을 펼쳐보고 필자는 그와 필자 사이에 너무나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증산교 신자들의 믿음에 의하면 증산은 구천상제라고 했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필자 자신이 하나님의 재생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이것은 평범한 범부를 자처해 온 필자로서는 여간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때부터 필자의 증산 연구는 시작되었다.
그 결과 얻은 결론은 필자는 증산과 공통점도 많지만 또한 전혀 상이한 점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 내었고 따라서 필자 나름대로의 견해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밝혀둘 것은 필자는 어디까지나 심령과학도이며 증산교 신자는 아니라는 것, 또한 동학의 신자도 아니라는 것, 인간이 거듭 태어나는 원리를 밝혀내고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고 또한 체질개선법을 가능한 한 널리 세계에 보급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 어떤 종교단체에 가입할 생각도 없을 뿐더러 장차도 종교단체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점을 밝혀 두고자 한다.
일반인들이 너무나 모르고 있는 근세에 태어난 위대한 선지자이셨던 강증산, 최수운, 김일부, 전봉준 등을 소개 하고자 함도 이상과 같은 뜻에서 일 뿐이다....
거듭 말하지만 필자는 어디까지나 종교의 영역 밖에서 일할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유사종교 단체를 만들 생각은 없음을 확언해 두는 바다.
또한 올바른 의미에서 영능력자나 영각자는 어디까지나 인류 동포에 대한 봉사자일 뿐, 군림하려고 든다던가 심판자는 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변함없는 소신이다.
성경에도 있지 않은가!
'심판하지 말라, 네가 이웃에게 심판 받으리라.'
인간이 공해문명을 만들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려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태초부터 봉사자이셨을 뿐 심판하시지는 않는다는 것,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닳아서 이웃과 세계 동포에 대한 봉사자가 될 때 지상낙윈은 이루어질 것이며 지상낙원이 이루어질 때, 하늘에도 낙원이 마련되리 라는 신념을 필자는 끝까지 지켜 나갈 생각이다.
우리나라가 과거 어려운 시기에 뜻하지 않게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은 앞으로 닥쳐올 여려운 시기에 하늘의 선민으로서 봉사자가 되어 영광이 깃든 후천세계 보병궁시대로 안내해야 할 숙명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