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중양(1112~1170)은 섬서성에서 세도 있는 부호 집안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이 모두 그러하듯 그도 어릴 때부터 유학을 공부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스승의 노여움을 사 과거를 치를 수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관료가 되어 출세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군인이 되기로 했다. 무과에 무사히 합격한 왕중양은 장래에 입신양명하겠다는 커다란 꿈을 가졌지만, 정작 주어진 직책은 변방의 작은 촌을 관리하는 일에 불과했다. 의기소침한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매일처럼 술을 마시다가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왕중양에게 인생의 전기가 찾아온 것은 그의 나이 48세 때였다. 고향 주막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로부터 금단도(金丹道)에 관한 구결(口訣 : 문서가 아닌 구두로 전해지는 비전(秘傳))을 받았던 것이다. 그 남자는 여동빈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그 이듬해부터 그는 도교에 입문하게 되어, 도호(道號 : 불교의 법명과 같은 것으로 도사로서의 이름)를 중양자(重陽子)로 지었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독자적인 수행법을 모색했다. 바로 '활사인묘(活死人墓)'라 불리는 것으로, 땅 속 수십 미터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 그 속에서 좌선을 한 채 명상에 잠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기를 2년, 그는 땅 속에서 나와 포교를 하기 시작했다.
왕중양의 가르침은 섬서성에서는 그다지 널리 퍼지지 않았지만, 산동성 일대의 주민들로부터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래서 1167년, 마단양(馬丹陽)과 구장춘(丘長春)을 비롯한 뛰어난 제자들과 함께 전진교(全眞敎)라는 새로운 종파를 창시하게 되었다.
전진교의 가장 큰 특징은 도교의 『도덕경』과 함께 유교의 『효경(孝經)』, 불교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주요 경전으로 채택했다는 점에 있다. 즉, 세 종교의 주요 경전을 모두 받아들여 종교 간의 통합을 모색했던 것이다. 실제로 전진교는 도교 집단이면서도 좌선을 하고 탁발을 하는 등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많은 교리와 실천들을 차용해왔다. 게다가 유교의 엄격한 윤리관도 함께 받아들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전진교의 가르침을 대단히 신선하게 생각했다.
전진교의 계율은 상당히 엄격했는데, 도사들은 가족들과 일체의 연을 끊고 도관에서 집단 생활을 하며 수행에 진력했다. 이 종파의 목적은 기존의 도교처럼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수행이 엄격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전진교는 종래의 도교 종파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전혀 새로운 종파였다. 이들은 기복적인 성격을 지닌 주술적인 수단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진교는 앞서 말한 깨달음에 대한 열망에 기초한 무언가 새로운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도교가 추구하는 목적은 '불사(不死)'의 실현이었다.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도교 종파의 가르침은 신심을 단련해서, 그 결과로 주술이나 단약의 효력을 이용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진교는 불사라는 기존의 희망 그 자체를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전환시켜버렸다. 즉, 현세만이 인생이 아니며, 죽음은 전생(轉生 : 삶은 거듭난다는 윤회 개념의 불교적인 사고방식)을 위한 한 고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자 '불사=신선에 대한 열망'이라는 도식은 큰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말하자면, 죽음 그 자체가 멸망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생사에 대한 내부 의식의 변혁은, 전진교가 어떤 면에서 원시 시대 이래로 존재해왔던 주술적인 종교에서 탈피해 근대적 종교로 한 단계 도약한 종파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을 단지 주술의 실패로 인한 파탄으로 보는 원시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시작 또는 전체 과정 중에서 어느 한 단계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에게 공인받은 전진교
왕중양이 죽은 뒤 교단을 이끌게 된 구장춘(=구처기 邱處機) 앞으로 당시 원정 중이던 칭기즈칸으로부터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구장춘이 먼길을 달려가자, 칭기즈칸은 대뜸 장생의 방법에 대해 물었다. 구장춘은 이렇게 대답했다.
"장생의 방법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있다면 양생법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애민지살(愛民止殺 : 사람을 사랑하고 죽이지 않는다)'이야말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근본 요소라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세상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몽골족의 원나라(1206~1368)가 중국 대륙을 놓고 치열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전란으로 인한 민중들의 고초가 말할 수 없이 컸다. 따라서 몸소 이들을 위한 구제 활동을 펼쳤던 구장춘의 머릿속에는 당연히 민중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대답에 만족한 칭기즈칸은 구장춘에게 세금 면제를 비롯한 각종 특전을 베풀고 도교의 최고 지도자로 공인했다.
구장춘의 뒤를 계승한 윤지평(尹志平)은 전진교의 가르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선인(善人)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실행하지 않으면, 어느새 악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따라서 수행이 중요한 것이다. 수행을 크게 방해하는 것은 식(食)과 수면(睡眠), 욕정(欲情) 이 세 가지다. 과하게 먹으면 자게 되고, 잠은 욕정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낮잠을 엄금해야 한다. 훌륭한 도사가 되려면 밤에도 옆으로 누워자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구장춘 어른께서는 7년간이나 그것을 실행하셨다."
전진교는 칭기즈칸이 황제에 즉위하던 1206년부터 원나라가 멸망(1368)할 때까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종교가 되었다. 그 본거지였던 화북(華北)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도교에 귀의해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화북은 중국 인구의 약 5분의 1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당시 중국의 인구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수백만의 도교 신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진교의 총본산은 북경의 백운관이다.
*출처 : 도교의 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