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이 미카오는 1865년 일본의 기후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향학심이 높아 실력이 친구들 가운데서 특출났다. 가까운 절의 학당에서 공부를 하다가 더욱 향상하기 위해 일찍이 고향을 떠났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서도 구미지역과 중국에 가서 역사, 의학, 종교, 심리학, 신선술, 역학, 인상학 등의 지식을 쌓았으며 직업도 공무원, 회사원, 실업가, 신문기자, 정치인의 비서, 종교포교사, 형무소의 사회복귀 카운슬러 등을 지냈다.
이같은 경험이 후일 ‘우스이 레이키 요법학회’를 창설하는데 기초가 됐다고 이야기 되고 있다. 50살이 넘어서자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안심입명’을 이루는데 있을 것이라는 자각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목적을 위해 선택한 것이 선禪의 길이었다. 그러나 선의 길은 기대에 반해 어려운 길이었다. 3년 동안 좌선을 했는데도 별다른 성과가 없어서 한 선승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한번 죽었다가 크게 살아나라”라는 선의 말을 일러주었다. 이 말에 감동해 마음을 굳힌 우시이는 1922년 이른 봄에 쿠라마 산으로 들어가 21일간의 단식 명상에 들어갔다.
3주일째 되던 날 한밤중에 뇌 한복판에 번개가 친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의식불명이 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지금껏 맛본 일이 없는 투명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가득 찬 의식 상태에 있었다.
그때에 몸 안의 기氣와 쿠라마 산에 가득 차 있는 우주의 기가 공명하면서 ‘내가 우주이고 우주가 나’ 라는 우주와의 일체화를 이루었으며 추구하던 안심입명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지금 몸 안의 기와 우주의 기가 완전히 공명, 공진하면서 깊은 평안감과 지극한 행복감 속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안심입명의 경지이고, 건강과 행복의 길이다” 라는 자각을 얻은 우스이는 그 이래 언제나 기와의 공명이 이뤄지면서 한상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스이 레이키 요법학회 개업이후
이렇게 안심입명의 경지를 얻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전할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자각한 우스이가 1922년 4월부터 대중들에 대한 공개 전수에 나서자 레이키를 배우려는 사람들과 치료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밀려들어 문밖으로 긴 행렬이 이어졌다.
홍보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도 시골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온 것은 입소문 때문인 것으로 여겨졌다.
1923년 9월에 도쿄에 대지진이 일어나 부상자와 병자가 도쿄 시가에 흘러 넘쳤을 때 우스이는 제자들과 함께 매일 거리로 나가 시가를 순회하면서 현장에서 치료도 해주고 학회로 데려다가 치료도 해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레이키요법의 효과가 대중 사회에 더욱 인식되 입문자가 계속 늘어났다.
회원이 증가함에 따라 장소가 협소해져 1925년 2월에 학회를 도쿄의 나가노로 이전하고 지부를 일본 각지에 설치하면서 학회는 더욱 발전의 길을 걷게 됐다.
그 무렵에 21명의 사범(레이키 마스터)이 탄생해 학회의 운영과 회원의 지도를 돕게 되자 우스이는 일본 각지의 지부로 출장 교육을 하러가는 일이 잦아졌다.
1926년 봄에 사범회의를 열어 우시다 주사브로를 학회의 2대 회장으로 지명하고는 우스이는 도쿄를 출발해 구레, 히로시마, 사가를 방문한 다음 3월 9일 후쿠야마라는 곳의 한 여관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유는 ‘뇌졸중’이었던 것으로 최근에 알려졌다. 그 2년 전에도 가볍게 뇌졸중에 걸린 일이 있었다니까 지병이었던 듯하다. 2대 회장을 지명하고 출장에 나섰던 것은 어떤 예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을까 한다.
<출처 : 치유하는 손 레이키의 신비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