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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난 의술인

예수회 창시자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

작성자작약|작성시간17.09.05|조회수850 목록 댓글 0





1.  예수회의 태동

 

  (1)  예수회의 창설자인 이니고 로페즈 드 레깔데(Inigo Lopez de Recalde)는 1491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구이부쯔꼬아(Guipuzcoa) 주(州)의 로욜라(Loyola) 성(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카톨릭의 십자군으로 있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창설자 가운데 종교의 문하생들과 후계자들의 의식과 품성 속에 종교의 특질을 가장 확고하게 심어놓는 바탕이 되었다. 표면적으로 예수회에 대한 “공통된 인상”이나 “특성”이 계속 이어지는 그것을 예수회의 전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폴리에(Folliet)는 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수립된 다수의 증거들은 예수회가 어떤 영속적 특질을 가지고 있음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으로서 저메(Guimet) 박물관의 소장품 하나를 들 수 있다. 그것은 16세기를 배경으로 일본의 풍물과 더불어 일본에 상륙하는 포르투갈인, 특히 로욜라의 후예들이 그려진 일본 화가의 그림이다. 그 화가는 오랫동안 풍물에 매료되어 있었음을 그의 뛰어난 밝은 색채로 알 수 있다. 반면 그 광신자들의 사악함만이 검은 그림자로 음울하게 그려져 있다. 바로 이 16세기 동양화가의 그림과 1830년대의 프랑스 화가 도미에(Daumier : 정치 풍자만화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민중의 분노와 고통을 풍자한 사회?풍속 화가)의 작품은 상당히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후에 이그나티우스(Ignatius)라고 카톨릭식으로 개명한 이니고(Inigo)는 처음엔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자였다. 성 어거스틴,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시스와 같은 그밖의 수많은 성인들.

 정열적인 청년기의 그는 실수뿐만 아니라 가증스런 죄악으로 가득하였다. 경찰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불성실하고, 잔인하며,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에게조차 져 본 사실이 없으며, 하찮은 일에서도 양보를 몰랐다고 그의 모든 전기(傳記) 작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그는 자만심이 강한 까다로운 병사였다.”고 절친한 친구 중 하나가 말한 바 있으며, “그는 타락한 여자만큼이나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도박과 결투가 그의 주특기였다.”고 그의 비서였던 폴란꼬(Polanco)가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로욜라의 영적인 후예 중의 하나인 예수회의 로꾸에뜨(R.P. Rouquette) 신부는 “이런 불같은 성미가 결국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로 바뀌었다.”고 옹호하고 있다. 


 (2)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많은 성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그나티우스의 성격을 변화시킨 주 요인은 그의 크나큰 신체적인 불행이었다.

 

그는 캐스틸(Castille - 스페인 중부의 옛 왕국)의 국왕을 섬기며 견습회계로 있었으나 신망을 잃게 되자 나바르(Navarre - 스페인 남서부에서 북부에 걸쳐 있었던 옛 왕국)의 총독을 섬기게 되었으며, 국왕의 친위병(Gentleman : 귀족의 아래에서 평민에 대한 특권을 지닌 계층)이 되었다. 그후 프랑스가 침공하자, 드 포와(de Foix) 백작의 명령을 받고 팜펠루나(Pampeluna)를 방어하게 되었다. 그때의 전투로 심한 부상을 당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미래는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는 총탄으로 한 쪽 다리를 잃게 되었으며, 승리한 프랑스로부터 그의 형 마르틴 가르시아(Martin Garcia)가 있는 로욜라 성으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그는 마취도 시키지 않은 상태로 외과 수술을 받았으며, 그에 따르는 모든 고통을 맛보게 되었는데 그나마 수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수수을 재차 반복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다리는 다시 절개되고 봉합되었다. 결국 그는 한쪽 다리를 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의 신경조직이 다소 손상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때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 준 “눈물의 선물”은 그의 성품을 대단히 감성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 이후로 그러한 감성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그의 충실한 전기(傳記) 작가들은 말하길, “하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고통스런 병상에서 누워있는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는 특별히 종교적 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지만 그렇게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보니,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인들의 순교는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충격적인 감동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영적 상태가 이 절름발이 전사를 사도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는 편협하고 몽상적인 책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소아적 기질이 성년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그의 정신적 영역을 침범하게 되면 신경과민 증세나 자아상실의 현상을 나타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를 활동적인 한 종교의 창설자로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알고 있듯이 조직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위대한 신비주의자”로 보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익히 알고 있듯이 그 모든 사실은 그들의 지나친 과대망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써, 있을 수 없는 사실을 그들은 믿는 것뿐이다.

 

이점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한 작가의 글을 인용하면, “지능이 뛰어난 사람에 의한 신비주의 연습의 성과라는 사실을 저자는 지적하고자 한다. 신비주의를 탐닉하는 허약한 정신도 위험스럽지만, 지성이 넓고 깊게 작용하는 지적인 신비주의자는 더욱 엄청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앙이라는 것이 현실 속에서 활동적인 관념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오로지 광신이 될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편파적인 자기 확대나 굴절로부터 비롯된 의지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행동적인 신비주의”와 “의지의 변조”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러나 한 귀족 전사로부터 카톨릭의 한 종교의 “총재”로의 전환은 매우 서서히 이루어졌다. 그는 확고한 사명감을 갖기 전에 많은 방황을 하였다. 여기서 그의 전생애를 분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1522년 봄, “중세적인” 성인전을 탐독한 후, 성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로욜라 성을 떠난 이후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 어느날 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그에게 현현하자 몽세라(Montserrat) 수도원에서 철저한 신앙고백을 한 후에 예루살렘 순례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 전염병이 만연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이 단절되어 근 1년간 만레사(Manresa)에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는 오랫동안 기도와 금식과 고행을 하였다.

 

“고해성사의 법정” 앞에서도 완전할 만큼 오랜 금식과 갖은 고행을 육체에 자행했다. 그의 신앙은 얼마나 철저했는지 몽세라에서 행한 그의 고해성사는 사흘 낮과 밤이 꼬박 걸렸다. 이러한 사실은 모두 그의 정신상태와 신경상태를 단적으로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의 뜨거운 마음 속에는 언제나 끊임없이 떠오르는 다채롭고 풍부한 환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드디어 모든 것은 마귀의 장난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뵈머(H. Boehmer)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가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일련의 환상 때문이었다. 그는 환상을 통하여 카톨릭 교리를 깨달았으며, 그러한 환상이 그의 삶을 인도하였다.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묵상하더니 세 개의 코드로 된 악기의 형상 아래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으며, 태양광선으로부터 뻗어나온 빛 속에서 우주 창조의 신비를 깨달았고, 성수 속에서 빛이 산란될 때 성찬식에 강림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으며, 사제가 그 성수를 받쳐들고 기도할 때 눈이 부시도록 하얀 성모 마리아의 모습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느꼈으며, 번뜩이는 군중의 눈으로부터 희미하게 사탄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 등이다.”

 

 (4)  바로 이러한 모든 점들이 널리 알려진 예수회 특징의 시초가 아닌가?

 

심오한 교리의 의미가 하늘의 특별한 은총으로 초월적인 직관을 통하여 그에게 나타났다고 뵈머는 덧붙이고 있다. “신앙과 과학의 많은 신비가 갑자기 그에게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평생을 공부한 것보다 그 짧은 순간에 더 많은 것을 배웠노라고 후일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자신에게 나타난 신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마치 그는 ‘또 다른 지성을 지닌 다른 사람’처럼 그의 신비로운 감정을 그의 애매한 기억 속에 간직할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경조직의 파괴로 나타나는 결과이며, 아편 중독자나 대마초 상습 흡연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한 자기확대 내지는 한없이 치솟는 환각현상은 현실을 초월하게 되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물의만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그의 일생은 그렇게 희열에 찬 불빛과 환상이 지배하였다. 그는 그러한 현상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마치 미친 개에게 하듯이 막대기를 들고 마귀의 뒤를 쫓아갔고, 사람과 하듯이 성령과 말을 주고 받았으며,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계획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모 마리아의 은총을 기도하였으며 그분들께서 현현(顯現)하시자, 그는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하늘 문이 그에게 열렸으며, 하나님을 바라본 그는 천국의 기쁨을 선험(先驗)하였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환상에 사로잡힌 자들의 분명한 특징이 아니던가? 이렇게 지각(知覺)되는 하나님, 가시적인 하나님이 로욜라의 영적 후예들에게도 전승되어 왔음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 본질은 정책적인 목적에 의하여 마음 속 깊이 뿌리박힌 독선적 태도에 기인한 맹신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그들의 의식을 완벽하고 철저하게 세뇌시킴으로써 다져진 하나의 신념의 세계일 뿐이다. 예수회에서는 조직 초기부터 중세의 신비주의가 크게 성행하였으며 지금까지도 그것은 예수회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현실적이며, 지성적이고 학문적인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기본 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이다.

 

 예술과 문학, 그리고 과학 심지어 철학까지도 그들에게는 혼을 사로잡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 합리화에 치중한 여러 가지 궤변은 한낱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예수회로서는, 향락에 빠진 정신과 의지를 자극하고 더욱 순수하고 평안한 생활로 돌아가기 위하여 개선되지 않아도 될 인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 아래 모든 사람이 모여드는 그들의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렇게도 학문적인 사람들이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이상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대단히 기이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감정이 매우 중요하듯이, 실생활에서 흔히 간과된다고 해서,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칸트는 말하기를 , “ 모든 철학은 단지 그 철인의 기질과 성격의 표현일 뿐이다 .” 라고 하였다 .

 개개인의 차이는 다소 있겠지만, 예수회 회원의 전체적인 “기질”은 하나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 “경건함과 처세술, 금욕주의와 세속적 지식, 신비주의와 냉정한 계산성 등의 복잡한 특성은 과거 로욜라의 성격이었으며 오늘날 예수회의 특징이기고 하다."

 

 

2.  영적 수련

 

 드디어 이그나티우스가 만레사를 떠나게 되었지만 그의 앞날은 예측할 수가 없었고, 구원에 대한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하였다. 1523년 3월, 그는 성지 팔레스타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순례가 아니라 선교의 목적도 아울러 가진 것이었다. 그는 많은 모험을 겪은 뒤, 9월 1일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으나 이내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과 터키인들과의 불안정한 평화마저 위협하는 시기상조의 선교를 못마땅하게 여긴 프란체스코파 수도사들의 압력 때문이었다.

이에 실망한 이그나티우스는 베니스, 제노아, 바르셀로나를 경유하여 알칼라(Alcala) 대학교에 머물면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였고, 추종자들을 모아 “혼의 치료”(cure of souls)를 하였다. 

 

  “이 비밀 종교집회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졸도한 적이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이는 그의 종교의식이 얼마나 격렬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며, 그와 같은 뜨거운 종교행위는, 곧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종교재판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1527년 4월, 종교재판소에 의하여 이그나티우스는 이단으로 수감되었다. 그에 대한 심문은 이례적인 것으로, 피고의 신비로운 힘에 의한 궤변과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 가운데에서 진행되었다. 그의 순수성에 대한 심리가 있었으며, 그의 궤변에 의하면 자신은 죽어야 할 대역죄인이 아니며, 죄가 있다면 마땅히 사면할 만한 경범죄인임을 논증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후 예수회 궤변론자들의 이론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마침내 이그나티우스는 석방되었지만 종교집회는 일체 금지당하고 말았다. 그는 살라맨크(Salamanque)로 떠나게 되었으며, 거기서 똑같은 종교활동을 재개하였다. 이에 종교재판소에서는 다시 그를 구속하였지만, 다시는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그는 좀더 깊이 공부를 하려고 파리의 몽떼이그(Montaigu) 대학으로 갔다. 또다시 그는 기괴한 그의 종교적 체험을 동료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종교재판소의 제지를 받았다. 그는 좀더 신중하게 처신하면서 그의 삶에 중요한 6명의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중에 살메론(Salmeron)과 라네즈(Lainez)는 후일 예수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나이 먹은 한 학도에게 젊은 친구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매료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이상과 그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매력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모든 것이 하나의 소책자를 통하여 상세히 나타나고 있는데, 그 분량은 적지만 인간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 책은 여러 번 복사되었기 때문에 그 수는 짐작할 수 없으며, 다만 현재 400가지 이상의 주해서가 있음은 분명하다. 예수회의 대가로서 오랫동안 정진한 영적발전의 결실이며, 동시에 예수회의 교본이 된 그 책을 “영적 수련”(Spiritual Exercises)이라고 한다.


 뵈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어떤 이상이 그 사람 가운데에 그의 환상의 주인이 되게 하는 가장 최상의 방법을 앞서간 다른 종교의 어떤 지도자보다도 더 분명하게 깨달았다. 한 번 주입된 영적인 힘은 다시 제거하기가 용이하지 않으며, 그 힘(force)이란 신조나 교리보다도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때로는 몇 년간 잠재하고 있다가 갑자기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며, 너무나 절대적인 것이어서 어떠한 장애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래서 카톨릭 교리의 모든 진리는 묵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험자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수련”에 전념함으로써 느끼며 체험해야만 하게 되었다. 즉, 신자는 가능한 가장 강렬한 긴장감으로 신비를 체험하고 보아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감응도라는 것은 의식보다는 잠재의식으로 더욱 강력하게 신비작용에 반응하게 되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과 같은 인식의 한 작용일 뿐이다. 결국 그 본질은 조작된 자기암시에 불과한 것이다. 천사들의 반란, 아담과 이브의 낙원추방, 하나님의 심판, 예수의 고난과 복음주의적 사건들이 수련자들 앞에서 상기되며, 달콤하고 행복한 장면들이 가장 음산한 부분과 기술적으로 배열되어 교대로 나타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옥편으로 망령들이 불바다 속으로 던져지며, 끔찍하게 울부짖는 비명과 알몸을 유황불로 태우는 잔학한 고문과 절규가 처절하게 그려진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거기에 함께 계셨다. 지난 날 자신들의 죄과로 이미 지옥에 떨어져 있어야 할 자신이 아직도 무사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감사해야 할 지 모르는 신비주의자들을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에드가 뀌네(Edgar Quinet)의 기록을 살펴보자.

“환상이란 사전에 조작된 것일 뿐이다. 숨을 들여 마시며 내뿜고 호흡을 몰아쉬는 것조차 의도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침묵의 길이와 간격이 마치 악보처럼 기제되어 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인용하고자 한다. ‘기도하는 세 번째 방법은 유효적절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며, 침묵의 주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는 특별한 기교는 숨을 쉴 때마다 몇 마디씩 말을 흘리도록 하며 목이 메인 흐느낌을 일정한 간격으로 유지해야 한다. 달리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람을 기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지시된 순간마다 정확히 한숨을 쉬고, 흐느끼고, 중얼거리고, 울부짖고, 고함치는 훈련에 숙달되면 노련한 경험에 의하여 적당한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으며 기대하는 효과도 충분히 얻는다는 것이다.”

 

  그 수련자들은 4주 동안 교사의 철저한 지도를 받은 후에도 계속 연습과 수련에 매진한다. 

 이것은 뀌네가 그와 같은 환각적인 방법의 창안자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했을 때 말했던 것이다. 

  “과거의 모든 수도사들과 다른 점이 그에게 있다면, 그것은 황홀경의 상태에 빠진 자신을 스스로 논리적으로 냉철하게 관찰하고 분석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이견도 있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의도대로 제자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데까지는 30일이면 충분하였다. 마치 기수가 말을 길들이듯이 습성 속에 배어 있는 의지나 비판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수회의 정신은 근대 종교재판소와 함께 발전하였다. 종교재판소가 인간의 육체적인 삶을 파괴하였다면, 예수회의 “영적 수련”은 인간의 사고력을 박탈하고 인간을 로욜라의 기계로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예수회의 창설

 

 (1)  “예수회”는 1534년 어섬션 데이(Assumption Day : 성모 몽소 승천 축일)에 몽마르트의 노틀담 사원에서 조직되었다.

 

 그 당시 44살의 이그나티우스는 그 자리에서 학업을 마치는 대로 동료들과 함께 성지(팔레스타인)로 가서 이교도를 개종시키기로 맹세하였다. 그 이듬해 그들은 교황이 있는 로마에까지 갔으나 당시 독일 황제와 베니스 공화국이 주축이 되어 터어키를 공격할 십자군을 편성하는 전쟁준비를 목도하고, 그들의 계획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그나티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일단 기독교 지역인 베니스에서 그들의 선교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사도로서 그들의 활동은 또다시 종교재판소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회의 조직이 정식으로 입안되고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하자, 드디어 예수회는1540년 로마 교황 바오로 3세(Paul Ⅲ)의 승인을 얻었다. 이로써 예수회는 교황의 관리 하에 가르침, 고해성사, 설교, 자선사업 등이 그들의 새로운 권한이자 활동영역으로 주어졌으며, 1541년 프란시스 싸비에르와 두 동료가 복음을 전하러 리스본을 떠나 극동으로 갈 때까지는 해외선교는 포함시키지 아니했다. 1546년에 교황에 의하여 라네즈(Lainez)와 살메론(Salmeron)이 “교황청 신학자”라는 자격으로 트렌트 종교회의에 참석하자, 예수회의 정치적인 면모가 최초로 드러나게 되었다. 

 

  (2)  뵈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황은 예수회를 하나의 임시방편으로 이용할 의도였다. 그러나 교황청의 지원 하에 그들은 맡은 소임을 철저하고 열성적으로 완수했기 때문에 교황의 깊은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자연히 활동하는 모든 분야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교황의 특별한 신임은 대단한 것이었으며 당연한 것이었다. 예수회 회원인 라네즈와 그의 절친한 친구 모론(Morone) 추기경 등은 1562년 3차에 걸친 트렌트 종교회의가 끝날 때까지 카톨릭 교회 교리의 모호성과 교황의 절대 권위를 지킨 유능한 불굴의 투사였다. 그들은 교묘한 책략과 논법으로 사제들의 결혼을 포함하여 각국이 자국어로 예배드리는 문제와 특히 교황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반대파의 모든 “이단적” 주장을 일축하고, 단지 수녀원의 개선 문제만을 안건으로 상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라네즈가 강력히 제안한 교황의 무오성(無誤性)은 반대파의 거센 반대로 일단 보류되었지만 3세기가 지난 후에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결, 공표되었다. 바티칸 공회(Vatican Council), 1870.  파경의 위기에서 벗어나 강력한 힘을 회복하게 되자 로마 교황은 확고부동한 예수회의 충성에 깊은 사의를 표하였다. 그것은 바오로 3세가 예수회에 보낸 칙서의 용어를 살펴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대들은 교회의 수호자라”(Regimen Ecclesiae militantis).

 

  (3)  이러한 예수회의 투혼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발전하였으며 해외 선교에 비하여 유럽의 선교활동은 인간의 영혼, 특히 지배계급으로 집중되었다.

 

이들의 목표가 압축되고 구체화되자, 정치가 그들의 주요한 활동 분야가 되었다. 그것은 교황이 세계를 지배하려면 우선 세계의 “지도자”들이 교황을 따라 주어야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상이 실현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심스럽지만, 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권위 있는 고해성사와 고위층 인사나 그 자녀에 대한 교육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미래에 대비했기 때문에 현재는 항상 안전한 것이었다.

 

 얼마 후, 로마 교황은 이 신흥 종교가 곧 갖게 될 무서운 힘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회원수를 60명으로 제한하기도 하였으나 그 조치는 이내 풀리게 되었다. 1556년 이그나티우스가 사망할 당시 그의 후예들은 인디아, 중국, 일본, 신세계 등의 이교도들 가운데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유럽에서도 그들의 맡은 소임에 충실하였다. 프랑스와 남서부 독일은 물론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심지어 아일랜드를 경유하여 영국에까지 가서 “이단자”들과 맞서 싸웠다. 흥망성쇠로 이어지는 예수회의 역사는 세상을 낚으려고 던지는 “로마” 교회의 그물과 같이 끊임없이 터진 부분을 수선해야 할 것이다.

 

4.  예수회의 정신

 

 (1)  “역사적으로 ‘교황 지상주의’는 ‘만인구원론’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예수회 신부 로꾸에뜨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통합과 하나의 지배질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만인구원론은 허구적인 교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그나티우스는 스스로 교황의 지배질서 체계 안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대리자를 섬기는 하나의 카톨릭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회는 로마 당국에 대하여 로마 교회의 강력한 군주적 독재체제를 요구하게 되었으며, 기독교의 유일한 수장으로서 교황만이 존재하며 이 교황의 대리 자격으로 각국의 통치자들이 통치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군주는 교황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회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고 모든 조치를 강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 당국은 유럽의 정치적인 동향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만일 세속 군주들이 교회에 대하여 곤란한 결정이라도 내리게 되면, 교황청에서는 예수회를 사주하여 음모를 꾸미거나 선전, 선동 내지는 반역을 도모해서라도 그 결정을 막아야만 했다.


 (2)  우리는 “영적 수련”을 통하여 예수회의 창설자의 신비주의와 수도 생활, 그리고 그의 정신이 어떻게 예수회의 정신으로 발전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예수회를 형성하고 있는 그 “체계”와 “수련”에 있어서는 어떠한 의혹도 배제하고 있다. 더욱이 예수회 회원들이 예수회의 규칙, 특히 그들의 그 특별한 복종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그 점에 있어서 근대적인 개념이 현저히 달라진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절대적인 복종에 대하여 폴리에(Folliet)는 그것을 단순히 한 단체의 “종교적인 복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로꾸에뜨 신부는 보다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지적이며 의지적인 이 복종은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속박의 해방이며... 자유의 극치이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사리 판단의 분별력은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회 회원에게는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떠한 명령이 하달되더라도 그들은 지배자의 유순한 수족 이상의 역할과 가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로서는 어떠한 자유도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맹신적 요소”는 모든 “영의 문학” 안에 흔히 나타나며, 동양이나 헤쉬킨의 조직(Hagchichins' Constitution : 마약을 이용한 전설적인 테러 집단)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폴리에는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회가 그들의 지배자의 수중에서 마치 “모든 명령 밀랍 덩어리로서, 그리고 원격 조종되는 작은 십자가상으로서” 존재한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신기한 제도가 예수회에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설립자의 행적과 사상에서 비롯된 이 종교의 진의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회 회원들은 자기의 의지뿐만 아니라 이성과 도덕적 양심마저도 그들의 첫 계율인 복종에 바치지 않으면 안되며, 바로 그것이 “예수회의 강력한 방어벽”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총재가 지시하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은 정의로운 것이며 온당한 처사임을 모든 회원은 명심해야 한다.”고 로욜라는 기록하였다. 그리고 부언하기를 “만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동물을 한 마리 주셨다면 너희는 주인으로서, 조련사로서, 그 동물을 길들이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운명을 결정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2)  예수회 회원에게 보다 선행되어야 할 규칙이 있다면 그것은 총재의 잘못을 논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실 일이라는 것이다. 뮌헨의 카톨릭 신학교의 후버(J. Huber) 교수는 예수회에 관한 그의 주 저서 가운데 하나에서 “이것은 증명된 사실이다. 예수회 회원은 총재에게서 반드시 그리스도를 500번 이상 반복적으로 보아야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대식 훈련을 대폭 수용하고 있는 예수회의 수련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군대의 복종도 예수회의 복종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보다 광범위한 적용을 받으며 병사와 같이 외부적 행동의 복종이 아니라 자기의 판단을 배제한 자기 의지를 희생제물로 요구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가 포르투갈 예수회 회원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교회가 검은 것을 흰 것이라 한다면,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찍이 로꾸에뜨가 극찬했던 “자기 굴레로부터의 해방”이며 “자유의 극치”인 것이다. 사실 어떠한 의심이나 가치관마저도 죄악시 되는 예수회 회원들로서는 위로부터 완전한 통제를 받음으로써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사실이다.

 뵈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직의 관리에 있어서 상급자들은 하급자, 특히 초보자들의 엄격한 교육을 실행하도록 충고받는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처럼 명백한 범죄적 환경하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며 피교육자들은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교육으로 야기될 결과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3)  예수회의 역사는 기복이 심하다. 그들을 추방하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으며, 심지어 카톨릭 국가마저도 그들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들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 사회적으로 상류층 인사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지나치게 맹목적인 집착을 보인다. 본래 전도란 종교적 사명감에 따른 것이지만, 보다 정치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예수회의 만인구원론, 즉 교황 지상주의는 불가피하게 시민권의 위협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예수회의 정신은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 온 것이다. 처음 국내외의 “선교활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그나티우스는 능력을 중시하였다. “순수하지는 않더라도 뛰어난 영리함은 노련한 능력이 결여된 거룩함보다 낫다. 훌륭한 목자는 많은 것을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는 매사의 주체로서 맡은 바 그의 소임을 현명하게 처리할 만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지나가는 말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때문에 미끼없이 낚시를 던지듯이 그들의 영에 대해 속보이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이그나티우스는 기록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용모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머리를 가볍게 숙이되,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 것이며, 눈을 치켜 떠서도 안된다. 그리고 상대방을 살펴보는 것도 안되며, 대화할 때에는 상대를 직시하지 말고 간접적으로 볼 것이다...”


 로욜라의 후예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잘 숙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그러한 가르침을 더욱 확대 적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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