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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난 의술인

비교신화학자이자 명연설가인 조지프 캠벨

작성자작약|작성시간20.08.25|조회수176 목록 댓글 0






조지프 캠벨은 1904년 3월 26일 뉴욕주 화이트플레인스에서 가톨릭계 중산층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캠벨은 일곱 살이 된 해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남동생 찰리와 버팔로 빌의 와일드웨스트 쇼를 구경하러 갔는데, 그 경험이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쇼의 주인공은 분명 카우보이들이었지만, 캠벨은 손에 활과 화살을 들고 특별한 지혜가 담긴 표정으로 땅에 귀를 대고 있는 벌거벗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모습에 매혹되었다. 캠벨에게 큰 영향을 준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보고 느끼는 것들은 이후로 알게 모르게 지식을 습득하고 경험하는 방식과 기준이 되거나 또는 그에 따라 사물을 분류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세계관의 기초가 수립될 뿐만 아니라 피상적이거나 깊이 있는 관점을 갖게 된다. 그 이후로도 계속 생각이 발전하고 완성되지만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어린 캠벨도 그러했다. 그는 가족의 신앙생활에 열심히 참여했던 동시에 아메리칸 원주민 문화에 빠져들었다. 따라서 그의 세계관은 서로 다른 신화적 관점이 팽팽한 긴장을 이룬 가운데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는 아일랜드 가톨릭의 전통 의식, 상징, 풍부한 유산에 둘러싸여 살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원시 부족의 직접 경험에 사로잡혀 있었다. 훗날 그는 원시 부족에게서 느낀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초월적이면서 보편적으로 편재하는, 전체 우주이면서 우리 자신의 근거가 되는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를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열 살 때는 동네 도서관의 어린이 서가에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한 책을 모두 읽은 후에 성인 서가에 출입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 <미국 민족학국 보고서> 시리즈 전권을 완독했으며,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토템 기둥과 가면 같은 수집품에 매료되어 자주 드나들면서 평생의 탐구를 시작했다.


13세에는 호흡기 질환을 치료하느라 한 해를 쉬고 잠시 뉴욕 웨스트체스터에 있는 사립학교 아이오나에 다니다가 다시 코네티컷 뉴밀포드의 가톨릭 기숙사학교인 캔터베리로 전학했다. 고등학교 생활은 대체로 만족스러웠으나 그의 가족에게 큰 비극이 일어났다. 1919년 집에 불이 나서 할머니가 죽고 전 재산을 잃었다.


1921년 캔터베리를 졸업하고 다음 해 9월 다트머스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학구열이 부족한 분위기에 실망하고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간 후에 두각을 나타냈다. 중세문학을 전공했고 재즈 밴드에서 연주를 하며 달리기 선수로도 활약했다. 1924년 가족과 함께 유럽을 배로 여행하던 중에 신지학협회의 차기 메시아였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친분을 맺었다. 그들은 이후 5년 넘게 이따금씩 만나 우정을 이어갔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1925년) 아서왕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1927년) 프라우드핏 트래블링 장학금으로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다가(1927년~1928년) 모교인 고등학교의 교사 제의를 거절하고 독일의 뮌헨 대학에 가서 연구를 계속했다(1928년~1929년).


유럽에 머물던 시기에 캠벨은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 파블로 피카소, 폴 클레,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과 같은 거장들을 만났으며 그들의 예술과 통찰력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모든 신화는 인간 정신의 창조적 산물이며, 예술가들은 신화 창조자들이며, 신화는 정신적, 사회적, 우주적, 영적인 현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욕망이 만들어내는 창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29년 8월에 유럽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평생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교직을 구하기 어려웠고 그로부터 2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들과 오랜 지인들을 만나고 독서하고 글을 쓰면서 보냈다. 1931년 후반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거나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결국 당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는 국토횡단여행을 하면서 '아메리카의 영혼'을 경험하며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자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원서로 읽기 위해 러시아어를 공부하다가 1932년 1월 그곳을 떠나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며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전혀 관련이 없는 주제들을 무턱대고 연구하는 데는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것 같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중략)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길을 헤매고 있는 듯하다. (중략) 교수가 될 생각을 하면 몸이 근질거린다. 나 자신과 학생들에게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책 속에 있다고 믿게 하면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니!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책 속에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은 여행에 있는 것도 아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것도 아니다. 뉴욕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얻은 수확이 있다면 내 경력에서 인류학을 제외시킨 것이다. 문득 원시와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흥미를 살려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을 제외하고는 어떤 분야도 여기저기 무작정 헤매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과학은 나를 내리누를 것이다. 아마 과학보다는 문학에서 더 중요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나의 존재를 정당화하기를 원하고 계속 인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리고 만일 내가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갖춘다면, 현대의 가치들에 대해 올바른 비판을 하는 일은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인류를 구원하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크리슈나의 격언으로 돌아간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다시 남쪽의 퍼시픽그로브로 갔는데 그곳에서 존 스타인벡 부부와 해양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자주 만났다. 그 시기에 그는 글을 쓰면서 로빈슨 제퍼스의 시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읽었다. 70여 곳의 칼리지와 대학에 지원서를 냈으나 직장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이스트코스트의 캔터베리스쿨에서 사감으로 일하며 불행한 한 해를 보냈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있었다면 그의 첫 단편 소설 [순수하게 플라토닉한] 이 리버티 잡지에 실린 것 뿐이었다.


1933년 뉴욕의 우드스탁으로 가서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오두막에서 지내며 독서를 하고 글을 쓰면서 일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1934년에 새러로렌스 대학의 문학부 교수로 부임해서 30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1938년에는 그의 학생이었던 진 에드먼과 결혼했다. 에드먼은 후에 새로 떠오르는 분야였던 현대 무용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사 그레이엄이 신설한 무용단의 스타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무용단을 창단하고 무용수이자 안무가가 되었다.


캠벨은 교수로 계속 재임했지만 그의 삶은 우연에 의해 외연을 넓혀갔다. 1940년 스와미 니킬라난다를 소개받고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의 새로운 번역에 참여했다. 뒤이어 니킬라난다는 그를 인도학자 하인리히 침머에게 소개했고, 침머는 다시 그를 폴과 매리 멜론 부부가 '인문 과학을 포함한 전반적인 문화적 공헌에서 교육과 연구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한 볼링겐 재단의 편집자에게 소개했다. 캠벨은 볼링겐에서 의욕적으로 출판을 시작한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두 형제가 아버지에게 간 곳 : 나바호 전쟁 의식]의 서문과 해설을 썼다.


1943년 침머가 52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미망인 크리스티아나와 메리 멜론은 캠벨에게 침머의 유작을 출판해줄 것을 부탁했다. 캠벨은 침머가 쓴 [인도 예술과 문화의 신화와 상징], [왕과 시신], [인도 철학], [인도의 아시아 예술] 2부작을 편집 출간했다.


한편으로는 다시 볼링겐 시리즈의 [그림 형제의 동화]에 '민속학 해설'을 썼고, 또한 헨리 모튼 로빈슨과의 공저로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최초로 연구 분석한 [피네간의 경야 주해]를 집필했다.


그가 처음 단독으로 집필한 작품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작가 최고의 영예인 국립예술원 창작문화상을 수상했다. 캠벨은 모든 문화의 영웅 신화에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패턴으로 나타나는 원질신화(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빌려온 용어)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또한 신화의 기본 주기를 설명하면서 영웅 여정의 공통적인 변환을 개인의 삶 뿐 아니라 문화에서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저술은 창조적 예술가들에게 -1950년대의 추상적 표현주의자들로부터 현대의 영화감독들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시간이 지나면서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캠벨은 계속해서 [신의 가면]5부작, [야생 수거위의 비행], [삶을 인도하는 신화], [신화의 이미지], [은유로서의 신화와 종교], [세계 신화의 역사지도]2부작 등, 수십편의 논문과 다수의 저서를 발표했다.


왕성한 집필 활동에도 불구하고 캠벨의 이름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강연을 통해서였다. 1940년 라마크리슈나 비베카난다 센터에서 [스리 라마크리슈나가 서양에 전하는 메세지]라는 제목으로 처음 시작한 강연은 박학다식하고 기지 넘치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 뒤로 여기저기 연사로 초대를 받아 다양한 주제로 강연을 했다. 1956년에는 국무부 외교연구원의 초청으로 원고 없이 이틀 연속으로 강연을 해서 큰 호평을 받았고, 그 후 17년에 걸쳐 매년 그곳에서 강연을 했다. 1950년대 중반 뉴욕시 쿠퍼유니언 대학에서 진행한 공개강의 역시 점차 폭넓고 다양한 청중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정기적인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캠벨은 1965년 에설런 연구소에서 첫 강연을 한 이후로 해마다 빅서에 가서 최근의 생각과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해가 갈수록 자신이 '태평양 연안의 천국'이라고 부른 그곳에서 체류하는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1972년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새러로렌스 대학의 교수직에서 은퇴했지만 매년 에설런 연구소에서 두 달에 걸쳐 하는 강연은 빠트리지 않았다. 1985년 그에게 국립예술클럽의 문학부문 금메달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제임스 힐먼은 말했다.


"캠벨은 우리 세기의 어느 누구보다 -프로이트, 토마스 만, 레비스트로스 등등- 세상의 신비감과 그 영원한 형상들을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 속으로 다시 가져왔다."


조지프 캠벨은 1987년 잠시 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988년 미국의 공영교육기관인 PBS 방송국에서 빌 모이어스와 7년 여에 걸쳐 나눈 대화를 녹음한 여섯 시간 분량의 [신화의 힘]이 방영되면서 그의 사상이 널리 알려졌다. 그가 죽었을 때 뉴스위크 잡지는 "캠벨은 대중문화가 포용한 진지한 사상가로 미국 역사에서 가장 진귀한 지성인의 한 사람이었다." 고 평가했다.


그는 말년에 쇼펜하우어가 [개인의 운명에서 보이는 의도에 대해]라는 에세이에서 한 말을 즐겨 인용했다. 우리는 각자 인생의 소설을 쓰는 작가이며 인생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지나고 보면 어떤 줄거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조지프 캠벨의 삶 자체가 쇼펜하우어가 한 말을 그대로 입증해주는 듯하다.





*출처 : 책 블리스, 내 인생의 신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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