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안 :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제라울 : 오호 질문이 예리하시네요 머리 좋아지는 약이라도 드시나요? 그런거 있음 나도 좀.(흐미 이 무신 욕심이라니)
백안 : 질문이 좋은 건가요?
제라울 : 예 사람을 왜 죽이면 안되는지는 내가 해야 할 것이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죽이기 위한게 아니라 자각시키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데 당연히 죽여선 안되죠.
백안 : 그건 제라울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요?
제라울 : 아뇨 내 삶의 의미라고 말했지만 나만은 아니라 백안님이나 다른 인간들 전체가 해당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부터 자각해야 하는 것이겠죠.
불교의 보살개념과 비슷하죠
백안 : 그럼 무엇을 자각해야 하나요?
제라울 : 오예~~ 사람을 흥분하게 질문이 쫙쫙 들어오네
자기가 존재한다는 그것을 우선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임을, 내가 나임을,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나였다는 것을,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그것이 첫번째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아는 그 순간이 바로 개쳔되는 때입니다. 오늘이 개천절이네요
하늘이 열려서 뭐가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한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뭘 하겠어요. 여자 꼬셔서 단군을 낳은게 뭐그리 대단한 것이겠어요. 그리스 신화에도 수시로 나오는 신의 인간여자 꼬시기와 다를게 없잖아요
곰이 여자 된다는 그런건 아직 어린아이라서 성숙도 되기전에 찜한거 아녀요?
영계를 탐하는 것이죠.
뭐 그게 그런 의미는 아닐거예요
하늘이 내려와 사람으로 재탄생되는 것인데 단군 장에서 자각을 이루니 자신은 인간이 하늘의 선택을 받은 거라고 거꾸로 부모를 재구성 시킨 것이기도 하죠.
왕이 되면 자기 아버지가 별볼일 없어도 태상왕으로 만들고 자기 탄생이나 어린시절을 신화적으로 꾸미는 것이죠.
즉 내가 자각하면 지금까지의 나는 없고 전혀 다른 내가 되어 내 과거는 다른 의미로 보여지게 됩니다.
한웅이야 씨앗부터 하늘종자라고 하지만 단군은 반인반신인데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곰이 여자되는 것처럼 나름의 수련과 치열한 시간을 거친 것이 되고 그것이 한웅이라는 거룩한 깨우침을 얻은 것인데 그게 뭐겠어요. 그저 자기를 발견하는 그것입니다.
내가 나를 보니 그것이 개천이어서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려서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라는 것이겠죠.
그저 이유없이 인간의 조상이 되는게 아니라 인간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그 인간의미를 발견한 거에요
백안 : 그럼 인간이 그러한 위대한 자각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는 것이군요
제라울 : 아 제가 말이 너무 빠졌군요 그렇게 정리 해주시니, 맞아요 안그런가요?
"나와 같다면" 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인간들도 고통을 안고 살고 살기위한 애씀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린 지금 그 자각하려는 시점에 다가가고 있는데 그것을 꺽는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합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그러한 기회가 있겠어요? 수백년 수천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다음 인간으로의 기회가요. 하지만 그런다고 자각의 기회가 오지는 않아요 언제 올지 그건 또 다릅니다. 그런 잔인한 것은 안됩니다.
백안 : 훔 그렇군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쓰러움이 있어요 불교의 각성처럼 어느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고 또 올 수 있는 것을 막거나 꺽는다면 그건 너무도 심한 것이겠죠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기회와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각이 될 기회가 너무도 어려운 것이라고 하는 군요
그럼 동물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라울 : 동물요.
사람보다 좀 어려워요 왜냐하면 동물도 죽이지 않았으면 해요 하지만 그러면서 식량으로 너무도 많이 죽이기도 하잖아요
난 동물을 죽이는 것은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강하게 그러한 의지를 가진건 아닌거죠. 이건 동물을 죽이고 먹는 것이 무조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건 아니에요
지나치게 즐기고 필요이상의 탐닉은 아니라고 보는데 식량으로서 먹는 것은 그렇게 반대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식량으로 하는 것에서 넘어 식탐이 되어가는 것인데 티비에서 먹거리나 음식에 대한 방송이 많은데 개인적으론 반대에요 먹는 것을 부추기고 먹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두려고까지 하는 것은 탐욕이 지나친 것이라서 정말 짜증나는 것 중에 하나죠.
극단적으로 채식하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외부대상이 생명이어서 동물이니까 사람이니까 그래서 먹으면 안된다거나 뭘 먹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보다 왜 먹으려고 하는지 그게 더 중요한다고 봐요
건강을 위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도 반대에요 건강의 기준도 모호해서 적당히 건강하면 되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필요는 없어요 건강도 무엇을 위한 건강이지 건강을 위한 건강은 의미가 없다고 보거든요
고기가 맛있어서 너무 좋아 한다면 줄이라고 해야겠죠. 음식은 맛있게 먹어야 하죠. 하지만 맛이 또다른 식욕을 자극하고 탐닉으로 간다면 그건 이미 지나친 것이죠. 과불급이 있어서 지나치고 모자란 그것의 조절이 필요한 것이죠.
맛을 위해서 먹으면 그건 나를 잃어버린거죠. 오감에 휘둘리는 것은 곤란합니다.
왜요? 그건 자기 삶의 의미를 위해서이고 자천을 위해서 입니다.
자천은 자기를 다루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 행동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감정은 어디로 흐르는지 봐야 하고 지나치거나 다른 것에 현혹되면 그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생이 자기의 욕심과 감각적인 자극과 하고 싶은 것과의 줄다리기 이고 참고 견디고 아퍼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행복하고 편하고 안락하고 기분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안됩니다. 이건 감각의 자극에 항복하는 것이죠. 무엇을 위한 행복이고 무엇을 위한 안락이고 이렇게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단순 행복은 동물인거죠 자기 신체나 위하는 정도의 지능이니까요
자천은 우선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감각이나 오감이나 그런 것을 위해선 곤란하고 더 광대한 더 의미잇는 목적을 위해서만 살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면 그냥 존재만 하거나 의미없는 시간의 흐름인거죠
그래서 동물을 먹는 것이냐 마는 것이냐 명확한 기준이 애매한 것인데, 그것도 나름의 자기 선택이죠.
끼니를 위한 것이 아닌 소일거리나 즐기기위한 것이나 할 일 없어서거나 쾌락을 위해서라면 줄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백안 : 제라울은 동물을 죽이는 것은 원칙적으론 반대이지만 식량차원에선 허용하는 편이고 지나친 식탐을 위한 것은 반대라는 것이군요
제라울 : 예 그렇죠
동물도 감정이 있어요 그들도 보고 느끼며 판단을 합니다.
그러니 함부로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언젠간 인간으로 태어날 거고 내가 동물인적이 있을 수도 있고 대개는 그럴겁니다.
그래서 동물로 어느정도 이상의 삶을 살아야 그들도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너무 빨리 죽는 것을 막아야 하고 고통을 주면서 인간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의약이나 다른 것을 위해 실험하는 것도 반대이구요.
차라리 실험하느니 그냥 죽여서 식량으로 하는게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그들이 한이나 안좋은 감정을 가지면서 죽게 되고 그후에 다시 동물이나 인간으로 태어나면 비정상적인 태생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곤란하잖아요 죽을 때도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야 하고 정성스럽게 죽여야 합니다.
정성스럽게 죽인다고 하니 이상할 것인데 죽이는 사람의 마음을 그들도 압니다. 그러니 명분있고 합당한 방법으로 한다면 그들도 수긍합니다. 그러한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엔 어느 민족이든 소를 죽이거나 짐승을 죽이거나 사냥할때도 마음의 정성을 다했는데 지금은 그러한 전통이 사라졌죠. 그만큼 인간은 이기적이고 무식하게 된 것입니다.
백안 : 정말 동물도 감정이 있나요?
제라울 : 예 있어요
그래서 전 동물 곁에 안가요 되도록이면요
애완 동물이나 그외 다른 동물이나 그들에게 다가가기가 꺼려져요
그들이 저에게 감정을 보내는데 그게 좀 불편하거든요
심리적인 교류죠 다른 분들은 동물과 교류하고 감정적인 교감이 일어나면 좋아할지는 몰라도 전 그게 별로더군요
내 마음에 동물의 마음이 들어오면 그게.......
백안 : 정말요 동물의 감정을 느낀다는 거에요?
제라울 : 예~ 예전에 남원에서 일할 때 거기 돼지를 키우는 곳에 갔는데 암컷이더군요 그 곁에서 일하고 있는데 마음에 어떤 움직임이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주위에 사람이 없었거든요. 혼자 발파하는 것을 진동 측정을 하는 것이라서 아무도 없었는데 그래서 뭔가 하고 살피니 그 돼지가 자꾸 날 보면서 눈을 껌뻑거려요. 그래서 안보이는 곳에서 숨어 있다가 측정이 끝나서 다시 가니 또 내가 있는 곳으로 따라 와서는 또 그 감정이 일어나고 눈짓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 돼지를 먹고 싶겠어요. 잊어야죠. 먹으려면, 근데 아직 안 잊어지는데요
그후에도 개한테도 이런 감정을 느꼈구요 그들 곁에 가면 어떤 식으로든 감정이 교류가 되요 좀 글쵸.
백안 : 그 감정이 뭔가요 그 돼지가 보낸거요
제라울 : 성욕요
백안 : 예? 그......그런일이
제라울 : 다르게 말해야 하나요? 사랑의 감정요
백안 : 음.......
동물도 그런 감정이 있다는 건가요?
제라울 : 있어요 느껴보세요
백안 : 아니요 전 좀........
제라울 : 그러니 동물이라고 무시하거나 죽이거나 하는 것에 무조건 찬성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지금의 세태를 부정하면서 난 절대 고기를 안먹는다고도 하지는 않아요
내가 해야 할 것이 있어서 우선 그것에 마음을 집중할 뿐이죠. 내가 해야 할 것이 고기를 안먹는 것이거나 동물에 대한 처우 개선이라면 해야겠죠.
고기를 안먹어도 되거나 안먹어야 하는 것이면 난 더 좋겠어요
먹는게 귀찮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이 그리 되나요
절에선 향신료를 먹지 말라고 하니 향신료를 대체할 만한 것으로 어떻게든 맛있게 음식을 만들기도 하는데 그건 자기기만일지도 모르죠
음식의 맛에 탐닉하면서 외부감각에 빠지지 말고 자기의 내면을 보라는 것인데 이런식이면 글쎄요 남의 것에 비판할 필욘 없겠죠.
다만 인간이 이거 하지 말라면 저거로 대체하며서 속임수를 쓰거나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채식하라고 하지는 않고 지나친 탐욕을 부리지 말라고 넓게 해야겠죠.
백안 : 절에서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어떤 욕망을 일으키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이 아닌가요?
제라울 : 예 그건 일차적인 것이고, 수행하는 사람이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해요. 물론 음식 이외에 일용사물의 무엇이든 그러한데 어떤 태도로 임하는지가 더 근본적인 거에요
그 마늘, 달래, 파, 흥거, 부추같은 것이 어떤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에 먹으면 수행에 방해된다거나 냄새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서라거나 선정에 방해 된다거나 이런 이유로 그러는데 이런건 초보자나 지키는 것이죠.
자기 감정을 적절히 다루고 긍정적으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에 우선 먹는 것을 막고 보는 것이죠.
그다음엔 감정을 자기의 삶이나 주(도)로서 다루고 이끌 수 있다면 먹든 말든 상관없죠 그런 사람의 음식 대하는 태도는 다르죠.
그저 금지하는 것을 지키는 것은 초보자이고 그이상의 의미를 각성했다면 다른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로 음식에 맛을 내고 맛을 위해 먹고 이러면 이미 수행은 아닙니다.
저것이 단순히 냄새나 음욕이나 그런 이유로 그러겠어요 그것으로 인한 음식의 맛을 탐하고 향신료에 집착하면 음식을 더 먹게 되고 입맛에 길들어지면서 수행에 방해되는 이유도 있는 것이고 이게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지금 우리의 새태를 보면 알지만 음식에 각종 맛을 내어서 어떻게든 더 먹으려고 하잖아요
그러니 어떤 것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도 있겠지만 음식 자체를 좀 줄이는 것부터 해야 겠지요.
깨달음이 있다면 맛을 내서 먹거나 뭘 하든 상관 없죠.
문제는 그자가 깨달아서 그러는지 속이는 것인지 그게 애매한 것이죠.
사실 애매하지 않은데 모르면 애매하고 알면 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