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온고창신

<유마경> 병의 원인과 공성에 대한 법문

작성자작약|작성시간15.03.24|조회수33 목록 댓글 0

 

 

 

보살의 문병

 

문수가 물었다.

“거사시여, 그대의 병은 어떤 것입니까?”

 

유마가 대답했다.

“모양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몸에서 생긴 것입니까? 마음에서 생긴 것입니까?”

 

“몸을 벗어났기에 몸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벗어났기에 마음에서 생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몸은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느 것에 탈이 난 것입니까?”

 

“중생이라는 요소 모두에게 탈이 있으니 결국 그것이 제 병의 원인인 셈입니다.

문수보살이이시여, 그렇다면 보살이 보살을 문병할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문수가 답했다.

“이 몸의 무상함을 들어 문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몸을 혐오하고 세속을 멀리하라는 투의 말로 위로를 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몸의 고통을 들어 문병해야 합니다.

하지만 열반만이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투의 말로 위로를 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몸에 내[我]가 없다는 점을 들어 문병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근기를 성숙하게 하는 일에는 기꺼이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몸의 공적(空寂)함을 들어 문병해야 합니다.

하지만 소승에서 말하는 극단적인 적멸주의(寂滅主義)에 빠져서는 곤란합니다.

지금까지 저지른 악행을 또렷이 상기시키는 것으로 문병해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참회로써 그 죄업이 모두 소멸하리라는 투의 말로 위로를 해서는 곤란합니다.

자신이 몸소 병을 앓아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아픔까지도 측은히 여기고 전생에 겪었던 고통을 상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배려할 줄 알며 스스로 선근을 쌓고 티 없이 청정하며 애욕을 끊고 늘 정진함으로써 마침내 모든 병을 치료하는 의왕(醫王)이 되리라는 말로 문병해야 합니다.

 

보살은 마땅히 다른 보살의 병을 이와 같이 문병해야만 하겠습니다.”

 

 

병을 꿰뚫어 봄

 

문수가 물었다.

“병에 걸린 보살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하겠습니까?”

 

유마가 답했다.

“문수보살이시여, 병에 걸린 보살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사실 병이란 과거 이래 실재와는 거리가 먼 뒤바뀐 업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헛된 분별로 인한 번뇌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진리에 비추어보면 그러한 병에 의해 고통 받는 존재가 실제로 있는지 도대체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몸은 4대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거기에는 정작 아무런 주재자도 창조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진리에 비추어보면 이 몸은 무아이므로 집착에 의한 헛된 나 이외에 병에 걸릴 만한 요소는 도대체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스스로 집착을 여의고 병의 근본을 바로 인식하라는 말과 같이 나에 대한 집착을 부추기는 관념을 떨쳐버리고 법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그것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실 이 몸은 갖가지 법이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써 이 몸이 생겨나는 것은 법이 생겨나는 것이요 몸이 멸하는 것은 법이 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 법은 서로의 존재를 안다거나 일체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일은 없으며 자신이 생겨날 때에도 내가 생겨난다고 생각하지 않고 멸할 때에도 내가 멸한다고 생각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병에 걸린 보살은 이 같은 법의 실체를 좀 더 똑똑하게 깨닫기 위하여 다시 다음과 같이 생각을 다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설령 내가 앞에서 말한 대로 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 역시 전도된 생각에 지나지 않으니 이야말로 큰 병이 아닐 수 없다.

반드시 그것을 벗어나야만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껏 정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렇다면 병을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일까요?

그것은 내가 있다는 생각과 나의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둘로 분별하는 일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둘로 분별하는 일을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일까요?

 

그것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아무런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아무런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일까요?

그것은 순수한 평등성에 입각하여 일체의 움직임도 혼란도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순수한 평등성이란 무엇을 말함일까요?

그것은 자아의 평등성을 바탕으로 열반의 평등성에까지 이르는 일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아도 열반도 모두가 공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개념에 의해 틀지어져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둘 다 실체로서 완성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평등성을 이와 같이 이해할 때 비로소 보살은 병 자체와 공성을 둘로 분별하지 않게 됩니다.

병이야말로 공성이기 때문입니다.

병에 의해 고통을 느끼는 경우도 정작 느낌의 대상이 없이 느낀다는 점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느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그 생각마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불법의 이치를 모두 깨닫고 나면 느끼는 자와 느낌의 대상도 모두 사라지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지옥 등의 악취(惡趣)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일체 중생을 위해 반드시 대자대비한 마음을 일으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 역시 마음을 바르게 꿰뚫어 보아 스스로 병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법을 일러줄 때에는 어떠한 법도 다시 덧붙이거나 덜어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병의 원인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법을 설해 주어야겠습니다.

 

 

병의 원인

 

그러한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대상을 좇는 것이 원인입니다.

무엇이든 좇는 것이 있는 한 병의 원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좇는 것일까요?

세상 모두가 그 대상입니다.

 

병의 원인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실천해야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좇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보지 않는다는 것은 대상을 좇지 않는다는 말이고 내 안의 주관과 외부의 객관으로부터 훌쩍 벗어난다는 말이니 그러기에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이시여, 병에 걸린 보살은 모름지기 이와 같이 생, 로, 병, 사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깊이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문수보살이시여, 모든 보살이 앓는 병이란 바로 이러한 것일진대 혹시 이와 다르다면 그 기나긴 수행은 아무런 보람도 없겠지요.

적을 무찌르고 나서야 용감하다고 불리듯 노, 병, 사의 고통을 극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살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린 보살은 자신의 병이 진실한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의 병 역시 진실한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그와 같이 꿰뚫어 알았을 때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킴에 있어 오직 공덕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곤란합니다.

 

밖으로부터 우연하게 얽혀드는 번뇌를 애써 벗어나고 중생을 위해 자비심을 일으키는 일은 공덕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곤란합니다.

밖으로부터 우연하게 얽혀드는 번뇌를 애써 벗어나고 중생을 위해 자비심을 일으키는 일은 공덕을 목적으로 하는 일과 분명히 성격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덕을 염두에 둔 자비심이라면 보살은 반드시 생사를 거듭하는 일에 금방 싫증을 느끼겠지요.

하지만 공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자비심이라면 보살은 윤회 가운데 거듭 태어나는 일은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보살이라면 공덕을 염두에 둔다거나 그것을 버릇처럼 지니 채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결코 그러한 생각에 빠지는 일 없이 생사를 거듭하는 까닭에 이야말로 해탈한 그대로의 태어남이고 해탈한 그대로의 일어남인 것입니다.

해탈한 그대로 태어나기 때문에 중생을 얽어매고 있는 고삐를 술술 풀어줄 수 있는 설법을 능히 행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세존께서는 "스스로 얽매여 있으면서 남을 고비로부터 풀어 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먼저 해탈한 다음 남까지 해탈시켜 주는 일은 도리에 맞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보살은 먼저 해탈을 이룬 다음 윤회 가운데 뛰어들어야 비로소 다시 속박당할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지혜와 방편

 

그러한 경우 보살에 있어 속박이란 무엇이고 해탈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적절한 방편을 무시한 채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보살에 있어 해탈이 아닌 속박입니다.

그와 반대로 방편을 지닌 채 윤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보살의 해탈입니다.

방편 없이 선정과 삼매와 명상 등에 탐닉하는 것은 보살의 속박이고, 방편과 함께 선정 및 삼매의 맛을 즐기는 것은 보살의 해탈입니다.

 

방편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혜는 속박이고, 방편이 뒷받침되는 지혜는 해탈입니다.

지혜가 뒷받침되지 않는 방편은 속박이고, 지혜가 뒷받침되는 방편은 해탈입니다.

 

방편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혜가 속박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공성(空性)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 등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지만 뛰어난 상호로써 자신의 몸을 꾸미는 일과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과 중생을 성숙케 하는 일에는 정작 아무런 관심도 없는 바로 그것이 방편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혜이고 속박인 것입니다.

 

방편이 뒷받침되는 지혜가 해탈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뛰어난 상호로써 자신의 몸을 꾸미는 일과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과 중생을 성숙케 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며 동시에 공성과 무상과 무원 등의 교의에 대해서 열심히 익히는 바로 그것이 방편이 뒷받침 되는 지혜이고 해탈인 것입니다.

 

지혜가 뒷받침되지 않는 방편이 속박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릇된 견해를 가지며 번뇌에 시달리며 잠에 젖어 있으며 집착하며 성내며 설령 선근을 쌓더라도 깨달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바로 그것이 지혜가 뒷받침되지 않은 방편이고 속박인 것입니다.

 

지혜가 뒷받침되는 방편이 해탈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릇된 견해와 번뇌와 수면과 집착과 성냄을 끊고 모든 선근을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위해 회향하며 이러한 일을 조금도 과시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 지혜가 뒷받침되는 방편이고 해탈인 것입니다.

 

 

병에 걸린 보살은 일체 법에 대하여 반드시 다음과 같이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병도 모두가 덧없고 고통이며 공이며 무아라고 이해하는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몸에 지닌 병을 굳이 피하지 않고 세상에 태어나며 기꺼이 윤회 가운데 뛰어들어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그것이 바로 방편이다.

또한 몸과 마음과 병 가운데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새롭다거나 더 낡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몸과 마음과 병이 생기는 것을 꺼리지 않고 적멸 가운데 안주하려 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방편이다.

 

문수보살이시여, 병에 걸린 보살은 자신의 마음을 반드시 이와 같이 꿰뚫어 알아볼 것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데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굳이 꿰뚫어 알아볼 것이 없는 데에 마음을 쓰면 그것은 곧 범부의 짓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굳이 꿰뚫어 알아볼 것이 있는 데에 마음을 쓰면 그것은 곧 성문의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꿰뚫어 알아보려는 일에도 그렇지 않은 일에도 마음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인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