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 어제 강의에서 당신은, 과학이 다섯 번째의 영체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시고는
네 번째 신체의 차원에서 과학이 갖는 가능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다섯번째 신체의 차원에서 갖는 과학의 가능성에 대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육체(physical body)라고 부르는 것과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서로 동떨어진 두 개의 실체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 어떤 연결 고리가 형성되어 있다.
항상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념이 종교와 과학을 나누었다.
종교는 육체가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한다고 여겨졌으며,
과학은 영혼을 제외하고 육체의 모든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이 서로를 부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학은 육체에 몰입했다. 과학은 '육체만이 실체다. 영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하고 말했다.
반면, 종교는 영혼이라고 불리는 내적인 실체를 추구했으며 '영혼이 실체다. 육체는 환상일 뿐이다.'하고 말했다.
종교는 육체를 마야(maya),환상으로 묘사했으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종교는 아트만(atman)을 실체로 보고 육체를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학은 아트만을 부정하고 '영혼이라는 개념은 허구다. 그것은 거짓이다. 육체가 전부다.'하고 선언했다.
이런 오류는 육체와 아트만을 두 개의 상반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나는 일곱 개의 신체에 대해 말했다. 첫 번째 신체가 물질적이라면 마지막 신체는 영적이다.
이때 그 중간의 다섯 가지 신체를 고려하지 않으면 첫 번째 신체와 마지막 신체를 잇는 다리가 사라진다.
이것은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 사람이 첫 번째 칸과 마지막 칸사이의 모든 칸을 없애 버리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첫 번째 칸과 마지막 칸 사이의 연결이 사라진다.
만일 사다리 전체를 본다면 그대는 첫 번째 칸과 마지막 칸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사다리를 좀더 면밀하게 관찰하면 마지막 칸은 첫번째 칸의 마지막 부분이요,
첫 번째 칸은 마지막 칸의 첫 번째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곱 가지 신체 전부를 한꺼번에 놓고 본다면 우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신체 사이에 연결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신체는 육체고, 두 번째 신체는 에텔체, 감정적 신체다.
에텔체는 물질적 육체의 미묘한 형태(form)지만 비물질은 아니다.
이 에텔체는 너무나 미묘해서 물질적 수단으로는 충분히 파악하기가 힘들뿐이다.
이제 과학자들은 물질을 파헤칠수록 점점 더 비물질적인 미묘한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현대 과학은 물질을 분석하면 궁극적으로 전자가 도출된다고 말한다.
이 전자는 물질 아니라 전기의 입자다. 결국 물질적 실체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에너지가 남을 뿐이다.
지난 삼십 년 동안 과학은 경이적인 발견을 이룩했다. 과학은 물질을 실체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과학은 물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에너지만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과학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에너지에 의해 물질이라는 환상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풍기가 빠른 속도로 돌고 있을 때 우리는 세 개의 날개를 분리시켜서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계속해서 돌아가는 하나의 원이다. 날개을 사이의 공간이 꽉 채워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날개가 너무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서 한 날개에 대한 잔영이 사라지기도 전에
두 번째 날개가 이미 그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속한 움직임이 계속되기 때문에 우리는 날개들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을 보지 못한다.
이런 속도로 날개를 돌리고 그대가 그 위에 앉아 있다면 그대는 밑에서 아무것도 움직인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두 날개 사이의 공간이 신속하게 채워진다.
하나의 날개가 그대 밑을 지나가는 즉시 다른 날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때 그대는 비어 있는 공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속도의 문제다.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회전할 때 그 에너지는 물질처럼 보인다.
현대에서 과학적 연구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원자 에너지의 결코 시각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에너지에 의해 나타나는 효과는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텔체를 원자체(atomic body)로 본다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는 효과를 볼 뿐 에텔체 자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이 효과를 보고 우리는 에텔체 존재를 인정한다. 이 두 번째 신체는 첫 번째 신체의 미묘한 형태다.
그러므로 이 둘이 연관되는 데 어려움은 없다.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육체는 거칠기 때문에 눈에 보인다. 그러나 에텔체는 미묘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에텔체를 넘어선 곳에 아스트랄체가 있다. 아스트랄체는 에텔체보다 더 미묘하다.
과학은 아직 아스트랄체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물질을 분석하면 궁극적으로 에너지가 남는다는 결론에는 도달했다. 이 에너지를 에테르(ether)로 부를 수 있다.
에테르를 더 미세한 성분으로 나누면 아스트랄이 남는다. 이 아스트랄은 에테르보다 더 미묘하다.
아직까지 과학은 아스트랄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차원에 도달할 것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과학은 물질만 인정하고 원자의 존재를 부정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과학은 물질이 고형 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은 고형적인 실체는 없으며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고 말한다.
이제 그들은 고형체로 보이는 벽도 사실은 그렇게 고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냈다.
벽에는 기공이 있으며, 그 기공을 통해 많은 것이 들락거린다.
우리는 '최소한 그 기공의 주변은 고형 적이다.'하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고형체가 아니다.
원자 하나하나가 기공과 같다.
하나의 원자를 지구 만한 크기로 확대한다면 우리는 원자의 두원소 사이에 지구와 달 또는 지구와 태양만큼의 거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최소한 두 원소의 말단 부분은 고형 체가 아니겠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 또한 고형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기의 입자다.
이제 과학은 '입자'라는 단어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단어와 더불어 물질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입자는 물질의 부분은 의미한다. 그러나 원자의 구성 요소는 물질이 아니다.
물질은 고형 적인 것이며 그 형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원소들은 끊임없이 형태를 변화시킨다.
그들은 입자가 아니라 파장이다. 그들은 물결과 같다.
물 속에 하나의 물결이 일면 그대가 '이것은 물결이다.' 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형태가 변한다.
물결은 끊임없이 오고가는 것이다.
그러나 물결 또한 물질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과학은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퀀타(quanta)'하는 단어다. 이 단어에 대응하는 힌디어를 찾는 것은 매우 힘들다.
이것은 많은 힌디어가 그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를 갖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브라흐만'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나의 단어가 형성되는 것은 어떤 내용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브라흐만'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그러나 서양은 이런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브라흐만'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이런 단어를 만들어 낼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적 용어가 영어에서 마땅한 단어를 갖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가령, '옴(aum)'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번역될 수 없다.
이 단어는 깊은 영적 체험의 표현이다.
그런데 서양은 이런 체험이 없다. 따라서 이런 경험을 표현하는 단어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퀀타'라는 단어는 최고의 과학적 경지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다.
따라서 어떤 언어에도 이에 상응하는 단어가 없다.
퀀타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단어가 입자와 파장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퀀타는 때로는 입자처럼 행동하고 때로는 파장처럼 행동한다.
그 행동 자체를 점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는 물질이 가장 믿을 만한 것이었다. 물질에는 어떤 확실성이 있었다.
그러나 물질을 궁극까지 파헤쳐서 발견된 원자 에너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원자 에너지의 행동 양식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 과학은 물질의 확실성을 근거로 확고한 기반을 다질 수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과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고수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이 확실성이 매우 표피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부에는 엄청난 불확실성이 있다.
이 불확실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불확실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의식(consciousness)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확실성이 존재할 수 없다.
불확실성은 의식의 일부다. 그러나 확실성은 물질의 일부다.
방안의 특정한 장소에 의자가 정확하게 똑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방안에 아이를 두고 나가면 우리는 똑같은 장소에서 아이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어느 곳에 있을지, 무엇을 하고 있을지 항상 의심과 불확실성이 있다.
우리는 물질에 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의식에 관해서는 결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과학이 원자의 행동 양식에 관해 불확실성을 인정했다는 것은, 물질에 있어서 의식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과 같다.
불확실성은 의식의 특성이다. 그러나 물질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 될 수 없다.
불이 타오르기로 선택했을 때를 타오르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았을 때는 타오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물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아무 방향으로나 흘러가지 않는다. 자신이 원한다고 아무 온도에서나 끓어오르지 않는다.
물질의 작용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물질의 내부로 파고들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이해해 보라.
봄베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는지 아는 것은 가능하다.
만일 봄베이의 인구가 천만 명이라면 우리는 1년의 사망 인구를 계산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루에 몇 명이나 죽는지 대략 알 수 잇다. 이것은 거의 정확한 숙자가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9억 명이라는 이 나라 전체의 사망률을 계산하면 하루에 죽는 사람의 숫자를 더 정확하게 유추할 수 잇다.
그리고 세계 전체의 사망 인구를 계산하면 더 확실한 숫자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사망률을 유추한다면 우리의 계산은 가장 불확실해질 것이다.
군중이 많을수록 더 구체적이고 물질적이 된다. 개인적인 현상이 두드러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의식을 발견한다.
사실, 하나의 물질은 수많은 원자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에 관해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원자 안으로 뚫고 들어가 전자를 포착하면 우리는 그것이 개체적인 것임을 발견한다.
그 활동 과정을 점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자는 마치 자신의 의도대로 작용하는 것 같다.
견고한 바위에 대해서는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다른 곳에 갔다가 돌아와도 바위가 여전히 같은 장소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바위 내부의 개인적인 원자 구조는 시종일관 똑같지 않다.
우리가 바위로 다시 돌아왔을 때쯤이면 바위 내부의 모든 원자가 그 위치를 바꾸고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했을 것이다.
물질의 내부로 깊이 들어갔을 때 불확실성이 시작된다. 과학이 그들의 입장을 확실성에서 가능성으로 바꾼 이유가 그것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이것은 이러저러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보다는 이것이 더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한다.
이제 과학은 '이것이 그것이다.'하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과거에 과학의 모든 주장은 확실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과학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단정적인 것이었다.
과학의 탐구가 깊어지면서 이전의 모든 개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과학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의 영역에서 에텔체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물질의 영역에서 에테르의 차원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까지 과학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과학은 물질의 두 번째 차원, 즉 에테르의 차원에 도달했다. 이런 현상은 나름대로 많은 가능성을 갖는다.
첫 번째 신체와 두 번째 신체 사이에 간격은 없다. 세 번째 신체인 아스트랄체는 더 미묘하다.
이 신체는 말할 수 없이 미묘하다 안일 우리가 에테르를 원자로 쪼갠다면......,지금 이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물질적 차원의 원자를 밝히는 단계에도 겨우 도달했다.
그러므로 에테르의 차원을 연구하려면 좀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에테르의 원자가 알려진다면 우리는 이 원자들이 다음 차원의 신체,
이름하여 아스트랄체라고 불리는 신체의 입자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물질적 원자를 쪼갰을 때 그 가장 미세한 입자들은 에테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테르의 원자를 쪼개면 그 가장 미세한 입자들은 아스트랄체의 차원에 속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 세가지 신체 사이의 상관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신체들은 서로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령을 사진으로 찍는 데 성공한 이유가 그것이다. 유령에게는 물질적 신체가 없다. 유령은 에텔체부터 시작한다.
유령을 사진으로 찍는 것이 가능하다. 에텔체가 농축되면 민감한 사진기는 그 영상을 포착할 수 있다.
우리의 두 번째 신체인 에텔체는 육체보다 마음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는다. 육체도 마음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신체가 미묘한 차원으로 들어갈수록 마음과 더 가까워진다.
아스트랄체는 마음에 의해 영향받는 정도가 에텔체보다 훨씬 더하다.
아스트랄체의 여행이 가능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방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아스트랄체를 갖고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대는 동시에 두세 장소에 모습을 나타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의 육체와 아스트랄체가 서로 다른 곳에 있다. 이것은 약간 훈련만 되는 문제다. 얼마든지 이런 일이 가능하다.
우리가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마음의 함은 점점 더 증가한다. 그리고 우리가 밖으로 나갈수록 그 힘은 분산된다.
외부로 나간다는 것은, 등불을 밝혀 놓고 그 불꽃을 유리로 덮는 것과 같다.
하나의 유리를 덮어놓은 뒤에는 불꽃이 예전처럼 밝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유리를 덮으면 불꽃이 더 희미해진다.
이런 식으로 일곱 개의 덮개를 씌워 놓으면 불빛은 아주 침침하고 어두워질 것이다.
불빛이 일곱 개의 층을 모두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생명 에너지도 물질적 신체에 도달할 때쯤이면 아주 희미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육체에 대해 별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내면으로 여행을 시작한 사람은 육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한다.
이 능력은 그의 여행이 깊어지는 정도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육체의 가장 미묘한 형태는 에텔체며, 에텔체의 가장 미묘한 부분은 아스트랄체다.
그 다음에 네 번째 신체인 멘탈체가 온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과 물질을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해 왔다.
우리는 마음과 물질을 두 개의 독립된 실체로 생각해 왔다. 사실, 이 둘을 정의할 방법조차 없었다.
'마음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받았다면 우리는 '물질이 아닌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 반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물질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받았다면 '마음이 아닌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외에 다른 정의가 없었다. 이렇게 항상 우리는 마음과 물질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마음이 물질의 미묘한 형태라는 것을 안다.
거꾸로 뒤집어 보면, 물질은 마음의 가장 농축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아스트랄체의 원자들이 쪼개지면 그것은 사념의 파장이 된다. 퀀타와 사념의 파장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념이 물리적 실체를 갖는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대 주변의 진동에 변화가 일어난다.
생각뿐만 아니라 말 또한 특정한 진동을 갖는다. 이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유리판 위에 모래를 깔아 놓고 '옴'소리를 크게 되뇌어 보라.
모래에 나타나는 무늬의 패턴이 '라마'를 되뇌었을 때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만일 지독한 상소리를 뱉으면 무늬가 다시 변하다.
지독한 욕설을 내뱉을수록 더 흉한 무늬가 형성되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아름다운 말을 할수록 더 아름다운 무늬가 형성된다.
욕설은 혼란스러운 무늬를 나타낼 것이고, 아름다운 말들은 잘 정돈되고 균형 잡힌 무늬를 나타낼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진동을 창조하는 말을 찾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연구가 행해졌으며,
그 말은 가슴에 영향을 줄만큼 강력한 힘을 갖는 것으로 여겨졌다.
말은 겉으로 드러난 생각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말 또한 파장을 갖는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주변에 특정한 파장과 진동이 형성된다.
간혹 그대가 어떤 사람의 주변에 다가갔을 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슬픔을 느끼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는 한 마디의 부정적인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와 만난 것을 즐거워하며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슬픔이 내부로부터 그대를 사로잡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대는 갑자기 유쾌함을 느낀다.
어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대는 내면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성스럽거나 사악한 느낌이 그대를 사로잡는다.
어떤 순간에 그대는 평화와 고요함을 느끼지만 다른 순간에는 갑자기 불안감을 느낀다.
그대는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매우 평화로웠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불안감이 떠오르는 것일까?' 하고
의심한다. 그대의 주변에는 사념의 파장이 에워싸고 있다. 이 파장이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그대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최근에 프랑스의 한 과학자가 사념의 파장을 포착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다.
어떤 사람이 접근하자마자 이 기계는 그의 내면에 들어 있는 생각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
이 기계가 사념의 파장을 포착하기 시작한다.
만일 바보 천치를 이 기계 앞에 세우면 거의 아무 파장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바보는 거의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적인 사람을 앞에 세우면 이 기계는 그 사람의 사념이 만들어 내는 진동을 활발하게 그려낸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아스트랄체의 미묘한 형태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미묘한 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과학은 에텔체에 도달했다.
그러나 지금 과학은 그것을 '원자적 차원' 또는 '원자 에너지의 차원' 으로 부르기를 고집하고 있다.
어쨌든 과학은 물질의 두 번째 차원에 도달했다. 세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필연적으로 세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제 네 번째 차원에 대해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마음은 육체와 분리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제 일부 과학자들은 오로지 마음에 대해서만 연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전도체다. 우리의 사념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도 나의 생각은 그대에게 가 닿는다.
지금 러시아에서는 텔레파시 분야에 대해 상당한 연구가 진척되고 있다.
파야데프(fayadev)라는 과학자는 무전을 치듯이 수천 마일밖에 있는 사람에게 사념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특정한 방향으로 생각을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주의를 집중하면 생각이 그곳에 도달한다.
그 순간에 상대방 또한 메시지를 전달받을 준비를 하고 그 방향으로 의식을 집중하면 생각이 그에게 수신된다.
집에서 간단한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사념의 파장을 매우 신속하게 포착한다.
그들은 감지력이 아주 예민하다. 어린아이를 어두운 방구석에 앉히고, 5분 동안 그대에게 집중하라고 말하라.
'내가 침묵으로 무엇인가 말을 할 테니 그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 봐라.' 하고 말하라.
만일 아이가 무엇인가 들으면, 그 들은 내용을 반복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대는 하나의 단어를 선택하라.
이제 아이에게 정신을 집중하고 그 단어를 마음속으로 반복하라. 그 단어가 안에서 울려 퍼질 때까지 계속하라.
입 밖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2, 3일 후에 그대는 아이가 그 단어를 알아맞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반대의 실험 또한 행할 수 있다. 일단 실험이 한 번 성공한 뒤에는 더 쉬워질 것이다.
이제 그대에게 정신을 집중하라고 아이에게 말하라.
아이가 마음속으로 한 단어를 생각하며 그 단어를 그대쪽으로 던져야 한다.
첫 번째 실험에서 아이가 단어를 알아맞혔을 때 그대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대가 아이의 단어를 알아맞히는 쪽에 서서 실험을 행하라.
이 실험이 성공했을 때 그대의 의심이 깨끗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대와 아이 사이에는 물질적인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사념은 그 내용상 기본적으로 물질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적인 매개체에 전달될 수 없다.
마하비라(karma)가 행동마저 물질로 정의했다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가 화가 나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하나의 행동이다.
마하비라는 이 행동의 미묘한 원자들이 찌꺼기처럼 그대에게 들러붙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행동 또한 물질적이다.
행동은 물질처럼 그대에게 들러붙는다.
마하비라는 이 행동의 축적된 오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니르자라(nirjara)'라고 불렀다.
그대 주변에 모여 있는 행동의 모든 원자들을 털어 내야 한다.
이것을 모두 털어 내는 날, 그대에게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것만 남을 것이다.
'니르자나'는 행동의 원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화가 났을 때 그것은 하나의 행동이다.
이 분노는 원자의 형태가 되어서 항상 그대에게 남는다. 육체가 죽어도 이 원자들은 해체되지 않는다.
이 원자들은 매우 미세하기 때문이다. 이 원자들은 그대의 다음 생까지 따라간다.
멘탈체는 아스트랄체의 미묘한 형태다. 그대가 알 수 잇듯이, 이 네 가지 신체 사이에는 갭(gap)이 없다.
각각의 신체가 선행하는 신체의 더 미묘한 형태다.
멘탈체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제 과학은 심리학 분야, 특히 초심리학(parapsychology)분야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멘탈 에너지의 불가사의한 법칙들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종교는 오래 전에 이 법칙들을 밝혀 놓았다. 이제는 많은 것들이 과학의 세계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몬테 카를로(monte carlo)에는 주사위 게임에서 절대로 패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주사위를 던져도 자기가 원하는 숫자를 내놓는다.
처음에는 이 주사위가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래서 주사위를 바꾸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주사위는 정확하게 이 사람들이 원하는 숫자를 보여 주었다. 여러 번 주사위를 바꾸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심지어 눈을 가려도 이 사람들은 주사위를 던져 정확한 숫자를 내놓았다.
이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그 이유를 밝히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숫자를 얻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주사위를 던졌다.
생각의 파장이 그 숫자가 위로 올라오도록 주사위를 조종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사념의 파장이 주사위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이 파장 또한 물질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한 가지 작은 실험을 해 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실험을 언급하는 것은 그대가 과학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컵에 물을 채우고 표면에 얇은 막이 형성되도록 글리세린(glycerine)이나 다른 기름기 있는 액체를 약간 부어라.
그런 다음이 기름막 위에 핀 하나를 띄워라. 문과 창문을 닫아라.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펴고 핀에 정신을 집중하라. 5분 동안 핀을 응시하면서 집중하라.
그런 다음 왼쪽으로 돌라고 말하면 핀이 왼쪽으로 돌 것이다. 오른쪽으로 돌라고 말하면 핀이 오른쪽으로 돌 것이다.
멈추라고 하면 멈출 것이고, 움직이라고 하면 움직일 것이다.
이렇게 사념이 핀을 움직일 수 있다면 큰산을 움직이는 것 또한 가능하다.
크기의 문제가 다를 뿐, 기본적인 원리는 똑같다. 핀을 움직일 능력이 있다면 이미 기본적인 원리는 입증된 셈이다.
산이 움직이기에 너무 큰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움직일 수 있다.
사념의 파장이 물질을 건드려 변형을 일으킨다.
그대의 손수건만 갖고도 그대를 직접 본 것처럼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손수건이 그대 사념의 파장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이 파장은 극히 미묘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손수건이 남아 있다면 이 손수건은 아직도 그의 인격(personality) 에 대해 많은 사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 파장은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에 그 물질로부터 사라지려면 수백만 년이 걸린다.
무덤과 사마디(samadhi)가 지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제 나는 인도에 화장풍습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산야신(sannyasin) 들의 시체는 태우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의 시체를 태우는 것은 그의 영혼이 육체 주변을 배회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다.
그러나 산야신들의 시체는 화장되지 않는다.
그의 영혼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육체 주변을 배회하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영혼이 육체에 집착할까 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의 육체를 보존하기를 원한다.
신성을 체험한 사람의 육체는 수천 년 동안 똑같은 사념의 파장을 내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매장지는 깊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 장소는 많은 효과를 낳을 것이다.
육체는 죽었다. 그러나 이 육체는 그의 영혼과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의 영혼에서 퍼져 나온 상당량의 진동이 이 육체에 흡수되어 있다.
사념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모든 사념이 물질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그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심하라. 미묘한 사념의 파장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그대에게 남을 것이다.
이 파장의 수명에 비교한다면 그대의 육체적 수명은 아주 짧다.
이제 과학자들은 가까운 장래에 예수나 크리슈나 같은 사람들의 사념 파장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크리슈나에게서 나온 사념의 파장은 지금도 이 우주 공간에 살아 있다.
이것은 바다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바다에 떨어진 돌은 파문을 일으킨다. 돌은 표면에 오래 떠 있을 수 없다.
물에 닿자마자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그 충격으로 인해 형성된 파문을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끝도 없이 퍼져 나간다.
그 파문을 수평선 너머까지 계속된다. 얼마나 멀리 떨어진 해안에 그 파문이 도달할 지 누가 아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사념은 언제 태어났느냐에 상관없이 우주 속으로 퍼져 나간다 끝도 없이 퍼져 나간다.
겉으로 표현된 생각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 사념의 파장을 포착하는 것이 가능하다.
과학이 크게 발달하고 인간이 더 진보하면 어느 날엔가 우리는 그 소리들을 다시 한번 듣게 될 것이다.
델리에서 오는 라디오 뉴스가 봄베이가 도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소리가 전달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봄베이에 도착할 무렵, 그 소리는 더 이상 델리에 있지 않다.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인도에서 우리가 텔레비젼을 통해 뉴욕에 있는 사람을 본다고 가정해 보자.
뉴욕에서 그의 영상이 형성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영상이 형성되고 그 영상이 우리에게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그 틈에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그는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파장과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나오는 사념의 파장은 무수한 행성으로 퍼져 나간다.
만일 우리가 앞질러 가서 이 파장을 포착한다면, 이 파장은 아직까지 살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죽지만 그의 사념은 그렇게 빨리 죽지 않는다. 인간의 수명은 짧지만 사념의 수명은 매우 길다.
우리가 표현한 사념보다 표현하지 않은 사념이 더 오래 간다는 것 또한 기억하라.
표현되지 않은 사념이 더 미묘하기 때문이다. 미묘한 것일수록 수명이 길다. 그리고 거친 것일수록 수명이 짧다.
사념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물질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이 사념의 효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이제 생물학자들은 식물에 포근하고 지겨운 음악을 들려주면 제철이 와도 꽃이 피지 않는다.
음악의 진동이 꽃을 건드린다.
젖소에게 특정한 음악을 들려주면 우유를 더 많이 생산하고, 다른 종류의 음악을 들려주면 젖이 말라 버린다.
사념은 더 미묘한 에테르를 낳고, 이 에테르는 파문의 오라(aura)를 낳는다.
인간 개개인은 주변에 자기의 사념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세계에서 나온 파장이 끝도 없이 퍼져 나간다.
이 사념의 파장 또한 물리적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알고 있는 것은 물리적 에너지의 미묘한 형태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이런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파장은 연구와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까지도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깊게 잠자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다.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는 장비를 갖고 있다.
맥박을 측정하는 기계가 있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잠을 측정하는 기계를 갖고 있다.
밤중에 특수한 장치를 머리에 고정시키고 거기에 나타나는 그래프를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의 잠이 언제 깊어졌는지, 그가 얼마 동안 잠을 잤으며 얼마 동안 꿈을 꾸었는지, 좋은 꿈을 꾼 시기는 언제고
나쁜 꿈을 꾼 시기는 언제인지. 그 꿈이 얼마동안 지속되었는지, 그것이 성적인 꿈이었는지 아닌지......
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래프에 나타난다.
미국에는 사람들의 잠을 정밀하게 조사하는 연구소가 열 개 가량 있다.
우리는 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이것은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다.
삶의 삼 분의 일은 잠으로 소비된다. 잠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60년을 산다면 그 중의 20년은 잠으로 지나간다.
이 20년이라는 기간이 미지로 남으면 그는 자신의 삶 중에 삼 분의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 20년동안 잠을 자지 않는다면 그는 40년 동안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잠은 필수적인 것이다. 60년 동안 깨어나지 않고 잠잘 수는 있지만, 잠자지 않고 살수는 없다.
잠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잠 속에서 우리는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다. 마음이 다른 곳에가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측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제 어떤 사람이 잠 속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 아는 것이 가능하다.
꿈을 꾸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꿈꾸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꿈은 밤새도록 지속된다. 그대는 하나나 두 개의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기계 장비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꿈은 밤새도록 일어난다. 다만 그대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기 때문에 기억의 능력이 부재한다.
그대가 기억하는 꿈은 잠이 거의 끝나갈 무렵 꾼 마지막 꿈이다. 마지막 꿈이 그대의 생각 속에 남는다.
그대가 깨어 일어났을 때 꿈의 희미한 메아리가 아직 내면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대는 깊은 잠속에서 꾼 꿈 전부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이제 깊은 잠 속에서 어떤 꿈을 꾸었는지 조사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깊은 잠 속에 일어난 꿈은 그 사람의 진짜 퍼스낼러티(personality)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깨어 있을 때 우리는 진실하지 못하다. 흔히 우리는 '꿈속에 뭐가 있단 말인가? 꿈은 그냥 꿈이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꿈은 우리 자신에 대해 깨어 있는 상태보다 더 많은 진실을 말해 준다. 깨어 있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위장한다.
만일 인간의 머리에 생각 전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을 만들어 놓는다면 인간의 마지막 자유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 때 인간은 꿈꿀 자유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꿈꾸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도덕성이라는 경찰관이 보초를 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찰관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꿈은 좋지 않다. 지금 너는 나쁜 꿈을 꾸고 있다. "
현재 인간은 이런 자유를 갖고 있다. 인간은 잠 속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이 자유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잠의 세계에 대한 침입이 이미 시작되었다.
가령, 러시아는 이미 '수면 교육'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수면 중의 교육에 대해 상당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 가르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가 저항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무엇인가 가르치는 것은 어렵다.
기본적으로 그는 배우는 것을 거부한다. 사실, 모든 인간이 배우는 것을 거부한다.
모든 인간은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아이 또한 '당신이 무엇을 가르친단 말인가?'하고 말하면서 거부한다. 그는 배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본 후에 상장이나 금메달을 주면서 아이를 매수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에게 야망을 심어 주어야 한다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그를 계속 강요해야 한다.
이런 마찰 때문에 교육에 긴 시간이 걸린다.
아이가 단 두 시간이면 배울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두 달에 걸쳐 그에게 주입시켜야 한다.
그래서 수면 교육이라는 방법이 개발되었으며, 아이가 잠 속에서 훨씬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잠 속에는 저항이 없기 때문이다. 잠자는 아이 옆에 녹음 테이프를 틀어 놓고 주입시킨다.
'2 더하기 2는 4. 2더하기 2는 4......' 이런 식으로 테이프가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아침에 아이가 일어났을 때 물으면 그는 '2더하기 2는 4' 라고 대답할 것이다.
잠 속에서 이런 생각이 주입될 수 있는 것처럼 사념의 파장에 의해서도 마음속에 생각을 주입시킬 수 있다.
과거에는 몰랐지만 이제 우리는 사념의 파장에 대해서 안다. 전축의 레코드판에는 언어 자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디스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소리의 파장이다.
바늘이 디스크의 홈을 건드리면 똑같은 파장이 반복되면서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대가 '옴'을 영창 하면 모래 위에 특정한 패턴이 형성될 것이다. 이 패턴 자체가 '옴'은 아니다.
그러나 '옴'소리에 의해 이렇게 특정한 패턴이 형성되는 것을 알면
어느 날엔가 이 패턴을 다시 '옴'소리로 환원시킬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패턴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옴'소리가 있어야 한다. 이 패턴과 '옴'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전축의 레코드판에는 언어가 없다. 다만 소리의 충격에 의해 홈이 파여 있을 뿐이다.
이 홈이 바늘과 접촉하면 그에 상응하는 소리로 환원된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생각의 기록 장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념의 충격파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것을 기록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때는 정말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 전체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만일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장차 생각할 내용을 알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의 사념에서 일어나는 충격파 전체가 기계에 의해 포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잠, 꿈, 무의식에 대해 철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이제는 마음의 과학적인 가능성이 베일을 벗고 있다.
이 가능성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화가 난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재래식 관념에 따르면 우리는 그에게 '분노에 휩싸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 '하고 충고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충고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만일 이 사람이 '그렇다. 나는 지옥에 가도 좋다.' 고 말한다면 우리는 손 쓸 도리가 없다.
이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일 이 사람이 더 나아가서 '나는 지옥에 가기를 열망한다.'고 말한다면
이 때 우리의 도덕적인 규율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그가 지옥을 두려워해야만 우리가 그를 조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와 더불어 우리의 도덕률도 무너진다.
이젠 아무도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지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하고 비웃는다.
그래서 모든 도덕룰이 종말을 고한다. 도덕률이 기초하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과학자들은 도덕률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과학은 육체의 특정한 분비 작용을 중단시키는 데 기반을 둔 다른 방법을 개발했다.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는 육체 안에서 특정한 화학 반응이 일어난다. 분노 자체가 물리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분노가 있을 때는 반드시 육체 안에 특정한 화학 물질이 분비된다.
그러므로 이 분비 작용을 중단시키면 분노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 생각하는 방식이다. 이 때는 직접 분노를 없애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분비액이 중단되면 인간은 화를 내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섹스를 금하고 금욕 수행을 하라고 충고해도 그들은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 때 과학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 효과도 없는 충고는 집어치워라!
우리가 어떤 분비선의 성장을 제어하면, 그들은 스물 다섯 살 전에는 성적인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마음이 과학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순간 인간은 그 지식을 남용하기 시작한다.
과학은 혁명적인 사람과 정통적인 사람의 화학 성분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 발견은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 화학 성분이 알려지면 우리는 혁명적인 사람을 순종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정통적인 사람을 혁명가로 만들 수도 있다.
도둑질과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화학 성분이 밝혀지면 감옥이나 집행 제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이런 충동을 제거하는 수술이나 조치가 취해지면 된다.
문제가 되는 화학 성분을 제거하거나, 이 성분을 중화시키는 다른 화학 성분을 주입할 수 있다.
최근에 이런 연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과학이 네 번째 신체에 도달하는 데 더 이상 많은 어려움이 없음을 보여 준다.
유일한 문제는, 상당 부분의 과학이 전쟁을 목적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분야에 대한 탐구는 일차적인 목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저 부수적인 문제로 여겨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야에 대해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졌으며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미라(meera)나 카비르(kabir)에게 일어났던 체험이 주사 한 대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참으로 무모한 주장이다.
마하비라는 한 달 동안 단식하고 마음이 고요해졌다. 단식은 물리적인 행동이다.
만일 물리적 행동에 의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면 이 마음 또한 물리적인 현상이다.
한 달 동안 단식하면 온 몸의 화학 구조가 변한다. 영양 공급이 중단되고, 몸에 축적되어 있던 모든 것이 사용된다.
지방질이 용해된다.
필수적이지 않은 요소는 파괴되고, 필수적인 요소는 보존된다.
이런 식으로 육체의 화학 구조 전체가 완전히 바뀐다.
과학은 이렇게 말한다.
"한 달 동안 그렇게 어려운 고난을 통과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특수한 처방에 의하면 화학적 비율은 지금 당장 바뀔 수도 있다."
과학에 의해 이런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면 그대는 마하비라가 한 달간의 단식 끝에 체험했던 평화를 지금 당장 느낄 수도 있다.
한 달간의 단식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다이나믹 명상중에 격렬하고 빠른 호흡을 하라고 말한다.
삼십 분 동안 격렬한 호흡을 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안의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율이 바뀐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외부적인 수단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삼십 분 동안 애 쓸 필요가 없다.
이 방안의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율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면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평화와 고요함,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이렇듯 과학은 다방면에서 네 번째 신체의 차원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더 깊이 뚫고 들어가는 중이다.
명상 중에는 다양한 체험이 일어난다.
그대는 생소한 향기를 맡고 생소한 색채를 본다. 이런 모든 일이 명상을 통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과학은 그대가 이런 체험을 하는 동안 두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 알아냈다.
만일 그대가 아름다운 색채를 보는 동안 두뇌의 뒷부분이 자극 받는다면
과학적인 연구는 정확하게 어떤 부분이 활성화되는지, 어떤 파장이 생성되는지 보여 줄 것이다.
그대는 명상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전기 장치의 도움을 받아 그대 안에 똑같은 진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똑같은 색채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에 위험이 있다. 인간의 내부로 뚫고 들어가는 새로운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 위험성도 증가한다.
예를 들어, 이제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은 더 이상 자연의 수중에 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지금 유럽과 미국에서는 죽음의 침상 위에 누워 목숨을 이어 가는 수천 명의 노인들이
자유의지에 따라 죽을 권리를 부르짖고 있다. 그들은 산소를 주입 받으며 목숨을 연명한다.
아흔 살 먹은 노인이 제발 죽게 내버려두라고 애원하지만
의사는 '우리는 그런 일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하고 말한다.
설령 이 노인의 아들이 '아버님이 너무 고통받고 있다. 이제 그가 죽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느낀다 해도
그는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아 있게 만드는 기계 장비가 있다.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목숨을 이어 간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법은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아무 장비도 없던 시절에 만들어졌다.
이제 이런 법은 개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죽어 가는 사람을 억지로 살아 있게 만든다.
오랜 기간 불가항력으로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사람은 '이것은 폭력이다. 이것은 너무 잔인한 짓이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도대체 당신들은 내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하고 느낄지도 모른다.
범죄자를 교수형 시키던 시대가 있었다.
이제는 죽음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처벌을 가하는 시대가 온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런 처벌은 교수형보다 더 악랄한 처벌이 될 것이다.
죽는 것은 몇 초간의 문제지만 억지로 살아 있는 것은 몇 십 년에 걸친 문제기 때문이다.
내면 세계에서 어떤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은 그 발견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혜택을 입을 수도 있다.
어떤 힘이 올 때마다 그 힘은 항상 양면을 갖는다.
과학은 네 번째 신체의 차원에 도달했다.
앞으로 오십년 안에, 아니면 삼십 년 안에 과학은 네 번째 신체 안으로 더 깊이 뚫고 들어갈 것이다.
그대는 모를 수도 있지만, 특정한 세기에 행해진 모든 일은 그 세기의 끝 무렵에 절정에 달한다.
특정한 세기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이 그 세기의 끝 무렵에 완결된다.
이 세기는 많은 일을 해 왔다. 그 일들이 앞으로 삼십 년 안에 완결될 것이다.
이 세기의 가장 큰 과제는 인간의 프쉬케(psyche)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 과제는 곧 완결될 것이다.
* 프쉬케(psyche) : 영혼으로 변역되는 라틴어가 바로 '프쉬케'[psyche]이다. 이 프쉬케는 심리, 정신, 영혼을 의미
다섯 번째의 영체는 네 번째 신체보다 더 미묘하다. 이 차원에는 사념의 진동뿐만 아니라 존재의 진동이 있다.
내가 내면에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절대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으면 이 때 나의 존재가 어떤 진동을 창조한다.
이때 그대가 내 옆으로 가까이 온다면 그대는 내 진동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념의 진동보다 존재의 진동이 더 강하고 침투력이 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매우 강력해진다. 이 힘의 효과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다.
존재의 진동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신체의 에너지 진동은 인간이 아는 가장 미묘한 형태의 에너지다.
마하비라의 경우에 보듯이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다. 마하비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아주 조금만 말하거나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냥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와서 그의 앞에 앉았으며, 그들은 마하비라를 이해하고 돌아갔다.
그 당시에는 이런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 지금은 이런 일이 매우 어렵다.
그대 자신이 무념의 상태로 들어가야만 영체의 깊은 진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사념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이 미묘한 진동을 놓칠 것이다.
이 진동이 그대를 그냥 스쳐 지나가고 그대는 그것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두 사람 모두가 무념의 상태에 있고 존재의 진동이 포착되면, 그 때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이 때는 아주 친밀한 차원에서 교류가 일어난다. 이 교류는 곧장 가슴을 치고 들어간다. 이 때는 아무 설명도 없다.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경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안다.
인간만 다섯 번째 신체의 진동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마하비라의 삶에 경이적인 현상이 있었다.
동물들까지 그의 모임에 참석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자이나 교 승려들은 이런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동물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존재의 언어를 잘 이해한다.
만일 내가 무념의 상태로 고양이 옆에 앉아 있으면...... 고양이는 이미 무념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말을 해야 한다.
그대를 고양이와 같은 무념의 상태로 데려가는 것은 참으로 긴 여행이다
동물과 식물, 심지어 돌멩이까지도 영체에서 시작되는 진동을 이해한다. 거기엔 아무 어려움이 없다.
이 영체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네 번째 신체를 통과한 다음에나 가능하다.
이제 과학은 여러 방면에서 네 번째 신체의 차원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과학은 영체의 차원까지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어려움이 생긴다.
다섯 번째 신체의 차원까지는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차원부터 어려움이 시작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잘 들여다보면, 과학은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 작업이다.
과학은 특정한 분야에 대한 선택이다.
과학은 가능한 한 협소한 분야에 연구를 제한하고 이 분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자 할 때 비로소 깊이 파고들 수 있다.
과학의 목적은 더 협소한 것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의 양면성이다.
과학은 가능한 한 작은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자 한다.
과학은 연구 주제를 가능한 한 협소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킨다.
옛날에 의사들은 몸 전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의사는 그렇지 않다.
이제는 일반의를 거의 보기 힘들다. 현대 세계에서 그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그는 더 이상 믿을 만하지 않다.
그는 너무 많은 것에 대해서 안다. 그러므로 그는 한 가지도 충분히 알 수 없다.
이제는 안과 전문의가 따로 있고, 귀에 대한 전문의가 따로 있다. 그들은 믿을 만하다.
그들은 특정 분야에 대해 최대한의 지식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눈에 대한 문헌만 해도 평생 읽어도 모자랄 만큼 방대하다.
그러므로 가까운 장래에는 왼쪽 눈만 전문으로 하는 의사, 동공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
망막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생길 수도 있다.
지식의 양이 증가할수록 특수 연구를 위해 눈이 여러 부분으로 나뉠 것이다. 각 부분 하나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학의 목적은 가장 협소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서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과학은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과학은 다섯 번째 차원까지 도달할 것이다.
다섯 번째 차원까지는 개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초점을 개체에 맞추고 뚫고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차원부터는 우주적인 것(the cosmic)이 시작된다. 이것은 과학의 초점을 벗어난다.
코스믹체는 전체를 의미한다. 과학은 이 전체의 차원으로 진입할 수 없다.
과학은 작은 것에서 더 작은 것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오직 개체를 포착할 뿐이다.
과학이 우주적인 것을 포착하기는 매우 어렵다. 종교만이 우주적인 것을 포착할 수 있다.
아트만(atman)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아무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브라흐만에서부터 어려움이 시작된다.
나는 과학이 브라흐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 브라흐만을 이해하려면 과학이 전문화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문화를 버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그 때는 종교처럼 보편적이고 막연한 것이 될 것이다.
과학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다섯 번째 신체짜지만 여행할 수 있다. 여섯 번째 차원부터는 과학이 실종될 것이다.
그리고 과학에 있어서 일곱 번째 차원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과학의 모든 탐구는 오로지 삶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병을 줄이고 더 건강해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더 오래 살기를 바란다. 더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원한다.
과학의 목적은 삶을 저 행복하고, 더 만족스럽고, 더 건강하고, 더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일곱 번째 차원은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궁극적인 죽음이다.
여기에서 구도자는 삶에 대한 추구를 넘어서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음 또한 알고 싶다. 나는 존재의 신비를 알았다. 이제는 비존재를 알고 싶다."
이 차원에서 과학은 아무 의미가 없다.
프로이트(freud)같은 과학자는 이것을 죽음에 대한 욕구하고 부를 것이다.
그는 '이것은 건강한 마음 상태가 아니다. 이것은 자살에 대한 충동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해탈과 열반은 삶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개념은 그대가 죽음을 원한다는 증거다.
그는 '당신은 죽음을 원한다. 당신은 병에 걸렸다.' 고 말한다.
과학자는 죽음에 대한 욕구를 반대한다.
과학은 살고자 하는 의지, 삶을 팽창시키고자 하는 욕구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죽기를 원하는 순간이 되도 그는 여전히 건강한 사람이다.
만일 이런 순간이 오기도 전에 죽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병든 상태다.
그러나 삶에는 죽음 자체를 목적으로 죽기를 원하는 순간이 온다.
어떤 사람은 깨어 있는 것이 건강한 상태고, 잠자는 것은 병든 상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밤보다 낮에 점점 더 많은 자리를 내 주고 있다.
옛날에는 오후 여섯 시부터 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벽 두시부터 밤이 시작된다.
우리는 밤의 시간을 낮에게 주었다.
현대의 일부 사상가들은 '인간의 삶에서 밤을 완전히 없애 버리면 삶의 상당 부분이 낭비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잠잘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잠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깨어 있는 동안에 즐거움이 있듯이 잠에도 즐거움이 있다.
깨어 있으려는 욕망이 자연스럽고 건강하듯이 잠자고자 하는 욕망도 자연스럽고 건강하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순간에도 살아남기를 열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원하는 사람 또한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만일 어린아이가 죽음을 열망한다면 그는 정상이 아니다. 그는 병들었다. 그는 치료받아야 한다.
그리고 늙은 사람이 더 살아 남기를 열망한다면 그 또한 치료받아야 한다. 그는 병들었다.
삶과 죽음은 두 다리와 같다. 한 쪽 다리만 받아들이면 그대는 불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쪽 다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그대는 불구를 면치 못할 것이다. 두 다리 모두 중요하다.
존재와 비존재 둘 다 중요하다. 존재와 비존재를 둘 다 받아들이고 포옹하는 사람이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이다.
그는 '나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았다. 이제는 비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비존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곱 번째 차원은 오로지 용기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삶을 알고 이제 죽음을 알고자 열망하는 사람들, 죽음을 탐험하고자 하는 사람들, 소멸의 상태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열망한다.
소멸이 무엇인지, 비존재가 무엇인지 알기를 열망한다. 그들은 삶의 맛을 알았다. 이제는 죽음을 맛보고 싶어한다.
여기에서 그대는 죽음이 일곱 번째 차원에서 내려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죽음'으로 알고 있는 것은 일곱 번째 차원에서 온다.
그리고 우리가 '삶'으로 알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차원에서 온다. 탄생은 물질과 더불어 시작된다.
탄생은 물질의 출발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물질적 육체가 엄마의 자궁 속에 제일 먼저 들어오고 다른 신체들이 나중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첫 번째 신체가 삶의 출발점이며, 마지막 신체인 열반체에서 죽음이 온다.
물질적 육체에 집착하는 사람은 죽음을 크게 두려워한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일곱 번째 신체를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점차 벗어날 때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다. 그 때 우리는 앎에 도달한다.
죽음을 아는 사람은 해탈의 자유를 얻는다. 삶과 죽음이 똑같은 하나의 두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삶과 죽음 둘다 초월한다.
그러므로 과학이 여섯 번째 신체까지 도달할 가능성은 있지만 일곱 번째 신체에 도달할 회망은 없다.
과학은 네 번째 신체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이제 과학이 다섯 번째 신체 까지 도달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과학적인 마음과 종교적인 가슴을 겸비한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출현하면 다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화는 매우 힘들다.
과학적인 훈련은 그대가 종교적으로 되는 것을 방해하고, 종교적인 훈련은 그대가 과학적으로 되는 것을 방해한다.
이 두 가지 훈련 방식은 공통 분모가 없다. 이것이 큰 어려움을 낳는다. 그러나 간혹 이런 조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조화가 일어날 때마다 최절정에 달한 새로운 지식이 탄생한다.
예를 들어, 파탄잘리 같은 사람이 있다. 그는 과학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종교에 귀의했다.
그는 요가(yoga)를 가장 높은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지금까지도 이 경지를 능가하기 어렵다.
파탄잘리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그 후로도 이 분야에 대해 많은 연구가 행해졌지만 파탄잘리만큼 과학적인 지성과 영적 수행의 내면 세계를 겸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파탄잘리보다 높은 여가의 경지로 올라가지 못했다.
스리 오로빈도가 시도하긴 했지만 파탄잘리를 능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스리 오로빈도는 과학적인 마음의 소유자였다. 아마 파탄잘리보다 더 과학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양에서 교육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고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그를 외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성인이 될 때까지 인도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임종을 맞고 있을 때, 다른 가족들은 오로빈도를 불러들이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로빈도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죽기 전에 그를 보지 못해도 나는 상관없다.
그는 서양의 문화를 완전히 흡수해야 한다. 동양의 그림자가 그를 덮지 못하게 하라.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알리지 마라."
그는 참으로 용기 있는 아버지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오로빈도는 서양의 문화에 깊이 심취할 수 있었다.
만일 진정으로 '서양인'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있었다면 오로빈도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로 돌아온 후에 모국어를 다시 배워야 할 정도로 서양문화에 빠져 있었다.
그는 완벽한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종교는 나중에 이식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종교를 심도 있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파탄잘리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을 것이다.
깊이 뿌리박힌 서양적인 사고 방식이 장애물이었다. 그의 사고 방식은 철저하게 과학적이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종교에 도입했다. 그는 서양에서 가져온 사고방식을 종교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종교에 관해 아무 통찰력이 없었다.
그 결과, 그는 방대한 과학적 저술을 남겼지만 이 저술에서 종교는 매우 표피적인 차원에 머문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차원의 신비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과학적인 지성과 종교적인 마음이 균형을 이룰 때마다 높은 경지가 이룩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동양은 과학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마저 잃어버렸다. 오히려 서양이 가능성이 더 많다.
서양에서는 과학이 극단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시계추가 극단에 도달하면 다른 쪽 극단으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서양의 탁월한 지성인들이 기타(gita)를 관심 있게 읽는 이유다. 인도의 어디에서도 이런 관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처음으로 기타를 읽었을 때 이 책을 머리 위에 이고 춤추며 흥겨워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왜 이렇게 미친 것 같은 행동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책은 단순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 위에 올려놓고 춤출 가치가 있다.
나는 세상에 이런 식으로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내가 언어로 옮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 책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인도에서 기타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춤추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다.
기타를 기차 좌석에 놓고 깔고 앉는 사람들이 보일 뿐이다.
금세기 말에 인류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시대적 요구가 생기면 세상에 있는 많은 힘들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죽기 전에 종교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과학자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삶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과학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한 말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는 미쳐 있었다. "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말은 의미 심장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상에 관해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알아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무한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과학으로 세상의 신비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수학적인 등식으로 환원시켰다.
그러자 그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었다. 오히려 수학적인 문제만 점점 커져 갔을 뿐이다.
세상의 신비를 풀기는커녕 수학적인 문제 자체가 신비가 되었다.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현대 과학의 정상에 오른 소수의 사람들은 종교에 접근했다. 이젠 과학에서도 그런 가능성이 일어나고 있다.
과학은 두 번째 신체를 지나 세 번째 신체에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신체에 가까워졌을 때 종교의 메아리를 듣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과학은 자진해서 불확실성과 개연성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언젠가 과학은 미지의 세계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과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비가시적인 것이 존재한다. 귀로들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백년 전만 해도 우리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과학은 다르게 말한다.
이제 그들은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영역은 아주 협소하고, 만질 수 없는 영역은 무한하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무한함에 비한다면 눈에 보이는 세계는 먼지처럼 작다.
실제로 우리의 눈이 보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의 눈은 특정한 파장만 포착한다.
우리의 귀 역시 특정한 파장만 감지한다. 이 파장의 위와 아래에 다른 파장들이 무수하게 많다.
간혹 이런 파장이 우리의 감각 기관에 포착되는 일이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 산에서 추락하여 귀를 다쳤다. 그런데 그의 귀는 그 도시에서 방송되는 라디오 주파수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병원에 있었으며 큰 어려움에 처했다.
처음에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미쳐 가는가 보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하고 생각했다.
그가 의사에게 불만을 늘어놓았다.
"이 병실에 라디오가 있습니까?"
의사가 말했다.
"왜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여기에 라디오는 없습니다. "
그러나 그는 뉴스 소리가 들린다고 주장하면서 자기가 들은 내용을 설명했다.
의사가 사무실로 달려가 라디오를 들었다. 놀랍게도 환자가 말한 것과 똑같은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모든 일이 분명해졌다. 그의 귀가 뉴스 전파를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산에서 추락하면서 귀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귀속에 작은 기계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전파를 직접 잡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우리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는 무한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우리의 가청범위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큰 소리도 듣지 못한다. 우리는 귀의 가청 대역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나의 별이 떨어지면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만일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귀머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 몸의 체온은 대략 화씨 98도에서 110도 사이에 위치한다.
체온이 화씨 98도 이하로 떨어지거나 110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우리는 죽는다.
우리 생명의 불꽃은 불과 10도나 12도 사이에서 깜박거리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계밖에 있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이 한계밖에도 분명히 무엇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이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런 것들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이 알려질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과학이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