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어떤 사람이 비존재를 알며, 무슨 근거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틀렸다. 이런 질문은 제기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비존재를 아는가?'라는 질문은
배후에 '어떤 사람'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비존재가 아니다.
<질문: 그렇다면 비존재에 대한 앎이 어떻게 전달됩니까?>
전달(reporting)은 없다. 예를 들어, 그대가 밤에 잠잘 때... 그대는 깨어 있는 동안에 생긴 일들만 의식한다.
일단 잠이 들면 그대의 주변 환경을 망각한다.
그대는 깨어 있는 시간에 관해서만 보고할 수 있다. 잠들기 전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만 보고가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대는 정반대로 말한다. 그대는 '나는 여덟 시에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그대는 '나는 여덟 시까지 깨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대는 잠을 보고할 수 없다.
그대가 잠들었는데 누가 보고할 것인가? 보고는 다른 측면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여덟 시까지 깨어 있었다. 여덟 시전까지 나는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여덟 시 이후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 다음에 나는 아침 여섯 시에 깨어났다는 것을 안다.
밤 여덟 시부터 아침 여섯 시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 동안에 나는 잠들어 있었다. "
이것이 본보기다. 그대는 여섯 번째 신체까지 무엇이 있는지 알 것이다.
그대는 일곱 번째 신체로 들어갔다가 다시 여섯 번째 신체로 나와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비존재를 체험했다. "
이런 설명은 오직 여섯 번째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한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왜 말하겠는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아주 소중한 말들을 남겼다. 그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말해 질 수 없는 것이 말해져서는 안 된다.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했다. 이것이 우리를 어려움으로 밀어 넣는다.
그들은 또한 '그것은 말해질 수 없다. '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은 부정적 방법을 통한 보고가 된다.
이것은 마지막 경계선에서 전해진 소식이다.
"나는 그 지점에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지점 이후로는 알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알 자도 없었다. 보고도 없고 보고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내가 존재했던 특정한 경계선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이 경계선이 여섯 번째 신체의 경계선이다.
베다. 바이블, 우파니샤드, 기타는 여섯 번째 차원까지 도달한다. 일곱 번째 차원은 표현될 수 없다.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섯 번째 신체까지는 표현하기가 매우 쉽다. 여섯 번째 신체까지도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일곱 번째 차원에는 아는 자도 없고 앎도 없다. 우리가 '남아 있는 자'로 암시하는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이 텅빈 차원에 대해 말하려면 부정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베다와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묻지 말라. 우리는 거기에 없었던 것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거기엔 아버지도 없고, 아내도 없고, 문제도 없고, 경험도 없고, 앎도 없다. '나'또한 없었다. 에고가 없었다.
거기엔 세상도 없고 이 세상을 만든 자도 없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
이런 말이 여섯 번째 신체의 경계선이다. 그 경계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설명이 불가능하다.
브라흐만에 대한 소식은 보고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너머의 차원에 대해 전달하려면 부정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붓다의 경우가 그렇다. 붓다는 일곱 번째 차원을 설명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을 통해 전달했다. 따라서 이 나라 사람들은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브라흐만에 대한 앎은 긍정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브라흐만은 '사트-치트-아난다(sat-chit-ananda)'로 표현되며, 이 긍정적인 표현은 잘 이해된다.
브라흐만에 대해서는 '이것이 존재한다. 저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는 일곱 번째 차원을 알리려고 열심히 노력한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이 나라는 붓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차원은 뿌리도 없고, 형상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최소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을 보여 달라."
그러나 붓다는 '그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은 붓다를 버렸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보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붓다와 마하비라는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붓다보다
마하비라를 더 잘 이해했다. 마하비라는 다섯 번째 차원까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섯 번째 차원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과학적인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섯 번째 차원을 설명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말이 애매모호하고 비논리적으로 되는 것을 느꼈다.
다섯 번째 차원까지는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 '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섯 번째 차원까지는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유사한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바다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떠 있고, 그 섬에 단 한 종류의 꽃이 자라난다고 한다.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은 섬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 어느 날 지나가던 배가 주민 중 한 명을 육지로 데려간다.
육지에서 그는 다양한 종류의 꽃을 본다. 그에게 있어서 '꽃'이란 말은 섬에 자라는 한 가지 꽃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육지에 도착한 후에 '꽃'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었다.
그는 '꽃' 이라는 단어가 한 가지 꽃이 아니라 수천 가지 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장미, 백합, 연꽃, 자스민 등의 꽃을 보았다.
이제 그는 염려스럽다. 섬으로 돌아가면 '꽃'이라는 말이 한 가지 꽃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꽃들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의 섬에는 한 가지 꽃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이름이 없다.
그저 '꽃'일 뿐이다. 이제 그는 백합과 자스민 꽃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지 염려스럽다.
그가 섬으로 돌아간다. 어렵기는 하지만 방법이 있다. 최소한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한 가지 꽃은 있다.
이제 그는 이 한 가지 꽃에 대해 상세하게 말하면서 다양한 색채와 모양, 향기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가 발견한 다른 꽃들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 이 꽃이 하얀 색인 것처럼 빨강, 분홍, 노란 색 등의 다른 꽃들이 있다.
여기 작은 꽃이 있듯이 연꽃처럼 큰 꽃도 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전달할 수 있다. 섬에는 이미 한 가지 꽃이 있다.
이 꽃이 다른 꽃들에 대해 무엇인가 암시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육지가 아니라 달에 갔다고 가장해 보자 꽃은커녕 아무 식물도 없고, 환경도 생소하고 기압도 다르다.
이제 이 사람이 섬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달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으면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최소한 본보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에는 달에서의 경험을 보고할 수 있는 단어도 없고 상징도 없다.
다섯 번째 차원까지 우리는 설명 가능한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한 가지 꽃과 수천 가지 다른 꽃들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섯 번째 차원부터 언어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꽃과 수천 가지 다른 꽃들 사이의 차이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설명이 매우 어렵다. 하지만 부정이나 전체성(totality)의 언어를 사용하면 어떤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다. 그 곳은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경계에 익숙하다. 그러므로 이런 지식을 이용하면 '거기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모호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는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많은 혼란이 일어난다. 우리는 거기에 경계선이 없다는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계선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우리의 모든 경험은 경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경계 없는 차원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섬 주민들이
'그렇다. 우리는 이해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꽃'이다.'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수많은 꽃을 보고 돌아온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그 꽃을 표준으로 삼지 말라. 그 '꽃'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응답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말하는 것들이 이 꽃과 같지 않다면 왜 그것들을 꽃이라고 부르는가? 여기에 있는 것이 유일한 꽃이다. "
우리는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신은 무한하다. 한계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알았다. 우리는 이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오직 한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한계'라는 단어뿐 우리는 이 단어에 '무'자 하나만 더해 놓고 무한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거기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한계가 없는 것을 상상하려고 시도해 보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아무리 무한을 그려보아도 여전히 한계는 남는다. 그대는 수억, 수천 억 광년 동안 달려간다.
그러나 그대가 멈추자마자 즉각 한계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한'의 의미는 엄청나게 확장한 한계에 불과하다.
아무리 확장된 한계라 할지라도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이 때 우리는 핵심을 놓친다.
여섯 번째 차원에 대해 무엇인가 말해지는 것이 가능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일곱 번째 차원으로 접어들면 '우리는 이해했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차원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불가능하다.
누군가 그것을 말하려고 시도하면 즉각 우리는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가?'하고 반박할 것이다.
그래서 일곱 번째 차원을 암시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말이 사용되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 무의미한 말이 사용되었다.
'옴(aum)' 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단어는 아무 의미도 없다 무의미한 단어다. 그런데 우리는 일곱 번째 신체와 연관지어 이 단어를 사용해 왔다.
다섯 번째 신체까지는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곱 번째 신체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하면 우리는 '옴'이라고 말한다.
경전이 '옴 샨티(aum shanti)'라는 말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대는 이 의미를 아는가? 이 말은 이제 일곱 번째 차원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일곱 번째 차원이 나타나자마자 경전은 끝난다. 일곱 번째 차원의 시작이 곧 경전의 끝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전의 마지막 부분에 '끝'이라고 쓰는 대신 '옴 샨티'라고 쓴다.
'옴'이 일곱 번째 차원이 상징이다. 이 단어는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이 단어는 고요함과 평화에 잠기도록 우리를 촉구하다.
우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 아무 모티브(motive)도 없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만일 거기에 어떤 모티브가 있다면 이 단어는 쓸모가 없게 된다.
우리는 모든 모티브가 사라진 세계를 상징하기 위해 이 단어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모티브가 없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세상의 어떤 언어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옴'이란 단어의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여러가지 실험이 행해졌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아무 의미 가없다. 기독교인은 기도를 끝내면서 '아멘(amen)'이라고 말한다.
그는 '충분하다! 이젠 끝났다. 이후로는 평화가 있을 뿐이다. 이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옴'과 상응하지 않는다. 옴은 번역될 수 없다.
옴은 일곱 번째 차원을 상징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단어다.
사원에 이 '옴'이 새겨진 것은 우리에게 여섯 번째 차원에 머물지 말도록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일곱 번째 차원이 있다. 라마(rama)와 크리슈나의 초상화를 보면 그들 중간에 이 '옴'이 위치한다.
이것은 '옴'이 그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크리슈나가 이 '옴'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옴이 크리슈나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 옴은 광대하다. 모든 것이 옴으로부터 나와 옴으로 녹아 들어간다.
세상의 어느 것도 옴과 견줄 수 없다.
옴은 세상에서 가장 신성하다. 옴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차원이다. 옴 안에서 모든 것이 실종된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차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고될 수 없다.
다만 '이것은 이렇지 않다. 이것은 저렇지 않다.......'식으로 부정적인 언어에 의해서만 묘사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말 또한 여섯 번째 차원까지만 의미를 갖는다.
많은 선지자들이 일곱 번째 차원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이것을 말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말로 설명하는 도중에도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해야 했다.
그들은 청중들에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에 대해서 는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다.'고
반복해서 경고해야 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들은 왜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그들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일곱 번째 차원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우리에게 그것을 묘사할 수 있는 마땅한 언어가 없을 뿐이다."
세상에서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말로 설명이 가능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는 말로 전달할 방법이 없다. 이것이 난점이다.
그것을 아는 것은 가능하지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창한 언어를 구사하던 사람들,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할 수 있던 사람들이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온 후에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리는 까닭이 그것이다.
이들이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버렸을 때, 이 침묵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요하게 침묵하는 그들의 눈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지금 그대가 묻는 것과 같은 문제에 관하여 붓다 는 이런 질문을 하지 말라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질문은 하지 말라. 이런 질문은 옳지 않다. 이런 문제가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주제는 정의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런 주제가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붓다는 말했다.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글을 남기라고 요구하지 말라. 내가 무엇을 쓰건 그것은 거짓이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떤 글을 쓰건 그것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말년까지 그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강요에 못 이겨 작은 책자를 남기면서 첫 문장에 이렇게 썼다.
'표현된 진리는 거짓이 된다.' 이것이 일곱 번째 차원의 진리다. 여섯 번째 차원에서 그것은 거짓이 되지 않는다.
다만 애매모호해질 뿐이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는 분명하고 확실한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면서 그 표현이 불가능해진다.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우리의 말과 언어가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들 또한 우리와 더불어 사라진다.
-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