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연수 [桂延壽, ?~1920]
한국의 사학자.
호 운초·일시당
국적 한국
출생지 평북 선천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운초(雲樵)·일시당(一始堂)이다. 한말에 민중계몽운동을 한 이기(李沂)의 문인으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이상룡(李相龍)의 지휘 아래 참획군정을 맡기도 하였다.단군사상을 연구하고 역사의식 회복을 위해 이기와 나철(羅喆)이 창설한 단학회(檀學會)의 2대 회장을 지낸 뒤 홍범도(洪範圖)·오동진(吳東振)의 지원을 받아 1911년에 《한단고기(桓檀古記)》 30권을 편찬하였다.
《한단고기》는 신라의 승려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역사를 서술한 〈삼성기(三聖記)〉, 고려시대의 문신 이암(李喦)이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단군세기(檀君世記)〉, 고려 말의 학자 범장(范樟)이 북부여의 역사를 서술한 〈북부여기(北夫餘紀)〉, 조선시대의 학자 이맥(李陌)이 한국(桓國)·신시시대·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룬 〈태백일사(太白逸史)〉등을 한데 묶은 역사책이다.
단군조선을 대통일 민족국가로 서술한 《한단고기》의 편저자인 그는 만주(滿洲:지금의 중국 둥베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일본 밀정에게 살해되었다. 제자 이유립(李裕岦)에게 다음 경신년인 1980년에 《한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유립은 1979년에 이 책을 영인하였다.
한단고기 [桓檀古記]
한국 상고의 단군조선을 대통일 민족국가로 서술한 역사책.
구분 역사책
저자 계연수 편집
시대 1911년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桂延壽)가 1911년 초기에 편집하였다. 계연수로부터 1980년에 공개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제자 이유립(李裕岦)이 1979년에 영인하였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鹿島昇]이다.내용은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대 한국의 역사, 신앙, 풍습, 정치, 경제, 예술, 철학 등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담겨 있다.
상하 2편으로 이루어진 〈삼성기(三聖記)〉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와 행적을 알 수 없는 원동중(元董仲)이 쓴 것이다.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중심으로 민족의 기원부터 단군조선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였는데, 1421년에 세조가 전국에 수집 명령을 내린 〈삼성기〉와 책명이 일치한다. 한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단군세기〉는 1363년(공민왕 12) 문정공 이암(李喦)이 전한 내용으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칭한 단군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대 단군 왕검부터 47대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에 걸친 단군 조선의 시기별 역사를 편년체로 싣고 있다.
〈북부여기〉는 고려 말의 학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전한 것으로, 상·하·가섭원부여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조 해모수에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단군세기〉의 속편이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했는데, 한국(桓國)·신시시대·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중심으로 한 천지만물의 생성으로부터 단군과 광명숭배, 3조선, 단군 경전, 민족을 드높인 고구려·발해·고려의 대외관계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단군 이래의 기층문화에 뿌리를 둔 고유신앙을 정신적 기반으로 민족의 자주성과 위대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다. 또한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태백일사〉에는 1923년에 중국 뤄양[洛陽]에서 천남생(泉男生) 묘지가 발견된 후에야 알려진 연개소문 조부의 이름 자유(子游)가 실려 있다. 나아가 해방 이후에 이루어진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영향까지 받고 있는 점을 근거로 이 책을 계승했다는 이유립이 편찬자이며 40년대 후반에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천부경 [天符經]
대종교(大倧敎)의 기본 경전.
구분 경전
대종교의 설명에 의하면 한배하느님께서 환웅을 통해 백두천산에 내려와 천하만민에게 직접 가르친 것으로서, 교화를 끝내고 어천(御天:승천)하면서 내렸다고 하는 《삼일신고》와 더불어 교훈경전에 속한다.
태백산에 있는 단군전비(檀君篆碑)를 최치원(崔致遠)이 번역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의 것은 묘향산에서 10년간 수도한 계연수(桂延壽)가 1916년에 암벽에 새겨진 내용을 발견하여 이듬해 대종교에 전하였다고 하는데, 1975년 교단의 교무회의에서 경전으로 공인하였으며 1983년의 《대종교요감》에 처음 경전으로 수록되었다. 3장 81자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의 연역이 360자로 이루어진 《삼일신고》이고 《삼일신고》의 귀납은 다시 이 경전이 된다고 한다. 천지장(天之章)은 대우주 생성의 원리를 다루었고, 지지장(地之章)은 만물의 생성을 다루었고, 인지장(人之章)은 인간 궁극의 문제를 다루었다. 1에서 10까지의 숫자가 지닌 원리를 통해 천(天) ·지(地) ·인(人)의 삼극(三極)이 태어나[生] 자라고[長] 늙으며[老] 병들고[病] 죽는[死] 것을 끝없이 반복하는 경위를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천 ·지 ·인이 한배하느님을 뜻하는 일(一)로 귀일(歸一) 또는 통일된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는 우주의 근본이요 만유의 비롯되는 수이니 하나보다 먼저 비롯됨은 없으며, 그것을 분석하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삼극이지만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의 통일이나 인류의 세계일가(世界一家) 건설도, 천지 만유가 하나에서 비롯하여 하나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필연을 설명한 이 경전의 우주 원리에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후로 이름만이 전하던 것으로서, 위작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삼일신고 [三一神誥]
단군이 한울·한얼·한울집·누리·참이치 등 다섯 가지를 삼천단부(三千團部)에게 가르쳤다고 하는 말.
이것을 신지(神誌)가 써 둔 고문(古文)과 왕수긍(王受兢)이 번역한 은문(殷文)은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고구려 때 번역하고, 발해 때 해석한 한문으로 된 것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단기고사 [檀奇古史]
719년 대야발(大野勃)이 썼다고 전해지는 단군조선·기자조선의 연대기.
구분 연대기
저자 대야발
시대 고조선
발해의 시조 고왕(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719년(무왕 1)에 썼다고 전해진다. 본래는 발해문으로 씌어졌는데, 약 300년 뒤 황조복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1905년 정해박(鄭海珀)이 한문본을 국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전한다. 구성은 서문, 제1편 전단군조선, 제2편 후단군조선, 제3편 기자조선으로 되어 있고 이경직(李庚稙)과 신채호(申采浩)의 중간서(重刊序)가 붙어 있다. 최초의 《단기고사》가 전하지 않으므로 현존하는 것이 최초의 것과 같은지는 의심스럽지만 다른 상고사서와 비교할 때 기본 틀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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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편집자 계연수에 대하여...
환단고기는 계연수 선생 약 13종의 고대사서를 한데 묶어 환인이하 단군조선의 역사를 편집한 역사서이다. 일전의 기고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눈을 피해 국민정신 계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고 독립투사들에게 정신적 지주를 세워주기 위함이었다. 환단이란 뜻은 환인과 단군을 이름한 것이다. 우리역사의 출발이 하늘민족에서 출발했다는 천손사상이 근간이 되어 환인으로부터 출발한 사서인 삼성밀기를 가장 처음 장에 실었다.
고기를 붙힌 이유는 일연이 쓴 삼국유사 단군신화 기술부분에 “고기에 이르기를” 이란 구절을 본따 삼국유사에서 지칭한 고기가 바로 환인과 단군조선의 사서가 실재함을 증거로 삼기 위해서였다. 계연수 선생은 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역사정신의 회복으로부터 시작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지사였다. 특히 이기선생과의 교분을 통해 단군사상을 부흥하는 것 만이 우리민족의 살길임을 직시했다. 그래서 이기 선생과 함께 일본의 신교와 서양종교를 대신할 태백교를 창교했다. 나중에 태백교도들은 모두 나철 선생의 대종교로 통합되고 나철 선생과 이기 선생은 역사의식 회복을 위해 단학회를 창설하여 역사발굴과 계몽운동에 매진하였다. 계연수 선생은 이기 선생이 일제에 항거하여 단식끝에 운명하시자 이기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2대 단학회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선생에게 자금지원을 받아 1912년에 환단고기 30권을 편찬하였다.
이렇게 하여 환단고기가 바로 구한말 암울했던 우리 역사의 하나의 태풍으로 부상한 것이다. 30권의 환단고기를 대부분 일제에 의해 압수당해 불태워 졌고 몇권은 남아 독립운동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계연수 선생은 만주에 건너가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하여 정신적, 사상적 계몽에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 일제의 눈을 피해 가명을 사용하였으므로 구체적 업적을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 후 1923년 계연수 선생은 일본인들의 지독한 추적과 감시망에 걸려들어 붙잡히게 되었는데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일본인 스파이에 의하여 붙잡혀 처형되었다고 한다. 일인들은 계연수 선생을 처형한 뒤 머리와 사지를 절단한 후 머리는 대동강에 몸통과 사지는 압록강에 버린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계연수 선생의 서거 이후 단학회와 환단고기는 독립군 천마대(天摩隊)대장 최시흥(崔始興)선생에게 이어졌고 다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함께 혁혁한 무공을 세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장군에에 이어졌으나 이덕수 선생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단학회도 침체되고 환단고기도 유실되었다.
내용출처 : http://www.koreananews.com/2xx/22x/220/220k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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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 "위서 아니다" - 박 현 - 고대 사학과 졸, 동대학원 한국사 전공
한단고기가 위서인지 아닌지는 많은 논란이 있기에 여기 위서가 아니라는 주장을 올려봅니다.
1)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진실을 알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임의로 조작된 책이나 내용이 사실과 어긋나는 책은 독서의 본래 목적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 가운데서 집필 시기나 필자 및 형식 등이 조작된 것을 위서(僞書)라고 한다. 그리고 형식과 상관없이 내용이 불순하거나 기록된 내용이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것은 곡서(曲書)라고 부른다. 형식에서 거짓을 보이는 위서는 내용 면에서도 곡서인 경우가 많고, 곡서 또한 위서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물론 이 두 측면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서일 경우 일단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위서를 판별하는 일은 학문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어 왔다.
일찍이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 ~ 1928)는 "중국역사 연구법(中國 歷史 硏究法)"을 지어 위서를 판별하는 표준적인 사례를 밝혔으며, 버나드 칼그렌(Bernard Karlgren)도 "중국고적 변위법(中國古籍 辨僞法, The Authenticity of Ancient Chinese Texts)에서 위서 판별의 방법을 밝혔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대부분 그 이전의 중국 문헌학에서 이미 전통적으로 다루어오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론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서에 대한 판별은 해당 책자에 따라 방법론이 조금씩이나마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의 상고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몇 종류의 책이 이러한 위서 시비에 휘말려 있다. "환단고기"가 그 대표격이다.
"환단고기"는 과거에 여러 사람들이 지은 것을 모아서 계연수(桂延壽)라는 사람이 다시 편찬한 뒤 1911년에 처음 간행했던 기록인데 그 구성은 대개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단군시대 이전을 다루는 "삼성기(三聖記)이고, 둘째는 단군시대의 연대기인 "단군세기(檀君世記)"이며, 셋째는 단군계의 한 갈래인 북부여의 연대기인 "북부여기(北夫餘記)"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단군시대 이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평론적 연대기를 기록하고 있는 "태백일사(太白逸史)"이다. 이들 책이 위서 시비에 말려든 것은 우리 상고사가 공백지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기록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담고 있는 내용은 중국의 "사기"나 "상서"에서 보이는 내용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연대기와 함께 중국 한족에 대한 조선족의 우월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속민취급하듯)
그 결과 동양사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상황에서, 이 책들은 곧 위서 시비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상당한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 위서라는 판결 쪽이 현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문헌을 두루 그리고 깊이 연구하지 못한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그런 입장이 정설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필자는 같은 젊은이로서 가끔 "환단고기"를 이용하여 상고사를 설명하는 처지인지라 그 진위 문제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아니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서는 더 이상 이 작업을 진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이고 복잡한 방법을 들추어 시비를 밝히는 것은 이 책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다만 그것을 위서로 규정하는 학자들의 표준적인 견해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참과 거짓을 판별해 보고자 한다.
2)
한국 역사 연구회 고대사 분과에서 지은 "한국 고대사 산책"의 다섯번째 주제는 "환단고기 믿을 수 있나"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서적이 위서임을 주장하는 표준적인 견해들이 두루 나타나고 있다.
첫째,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남생(南生 : 연개소문의 아들)의 묘지명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환단고기"에 나오는데 그것은 "환단고기"가 1923년 이후에 지어진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1923년 이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주장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만약 남생의 묘지명이 1980년도에 발견되었다면 환단고기는 1980년 이후에나 지어진 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환단고기가 1949년에 조작되었다고 하는 주장도 틀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같은 사례가 있다.
대진국(대진국 : 발해는 자기 스스로를 발해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항상 대진국이라고 불렀다)의 문제(文帝: 중국측 사서에서는 문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문제라고 하는 것이 옳다)인 대흠무(大欽武)연호가 대흥(大興)이었는데 이 사실은 정효(貞孝)공주의 묘비가 발견된 1980년 이후에야 알려졌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이미 대흠무의 연호가 대흥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태백일사"는 1980년 이후에 조작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환단고기가 다른 기록들과 달리 독자적으로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증명할 따름이다.
실제로 1920년에 간행된 책 가운데도 계연수라는 사람이 편찬 발간한 "환단고기"에 들어 있는 천부경을 인용한 경우가 있다.
[돋보기]
"정신철학 통편"
1920년 북경 정신철학사에서 전병훈이 펴낸 책으로 원래 제목은 "정신심리도덕정치철학통편"이었다. 이책에는 계연수가 천부경을 입수한 경위가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즉, 계연수가 1916년 묘향산 동굴 석벽에서 천부경을 보고 1917년 탁본을 뜬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책에서는 그가 약초를 캐내기 위해 영변의 백산(白山)으로 들어갔다가 천부경을 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묘향산과 백산이 같은 곳임은 "영변군지"가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의 차이는 문자의 차이일 뿐이다.
전병훈이라는 분이 저술한 "정신철학 통편(精神哲學 通編, 1920년 간행)인데 명문당에서 근래(1983년)에 영인본으로 간행한 적도 있다.물론 이것은 1949년 조작설을 전면 부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둘째, "문화"라는 말이 Culture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은 근래의 일인데, "환단고기"에서 쓰이는 문화라는 개념이 그와 같기 때문에 위서라고 규정짓는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문화라는 표현이 과거에도 "문치교화(文治敎化)라는 개념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과거에도 문화라는 말이 실제로 오늘날의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되어 쓰인 것은 아니었다. 그와같이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한 경우는 골수 성리학자들과 그들이 편찬한 문헌에 지나지 않았다. 또 "전세계" 라든가 "민중"이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말이지 근대에 들어 만들어진 말은 아니다. 심지어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 ~ 846)는 자신의 시제목으로 "상인처세계(上人處世界)"라는 말을 썼고,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국어(國語) 월어(越語)"에서도 "민중"이라는 용어가 인민대중의 약자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의 시조와 관련된 영고탑(寧古塔)이란 지명이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위서 시비의 좋은 빌미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단 하나 밖에 없다는 선입견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동일한 지명이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낙양(洛陽)이라는 지명만 하더라도 하나가 아니다. 황하의 중류에 있는 중국의 고도 가운데도 낙양이 있으며, 경상도 상주도 그 옛 이름이 낙양이었음을 구태여 예로 들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아울러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요사(遼史)"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비판자들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환단고기"의 경우 몇몇 부분은 명백히 편찬자인 계연수가 추가로 서술한 곳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부분은 독립운동가이며 단재 신채호 등과도 친밀했던 계연수의 입장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단재 신채호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부분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며, 용어를 자신의 시대에 맞추어 개작했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단고기를 위서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위서라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 기록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조대기(朝代記)"등의 문헌이 전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희귀한 책들을 찾아 모으라고 명령을 내린 조선 세조 때나 성종 때, 명령에 따라 수집한 희귀본 20여종 가운데 "조대기"라는 책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들이 그 당시에는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성종 이후 이름을 감추고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리학에 의한 학문 세계의 순화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이나 세조가 불교를 숭배한다고 목숨까지 내걸고 반대하던 성리학의 천박한 추종자들이 성리학 이외의 기록과 그 기록의 내용을 배타적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흔히 "도가의 역사서"라고 불리는 이 같은 기록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라지거나 개인 소장가의 장농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이론적 라이벌이었던 윤휴(尹휴, 1617 ~ 1680)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정치파동의 계기가 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주자와 소중화사상을 배격하고 단군 시대의 역사를 서술한 이들 기록이야 어찌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고대사 산책"의 해당 주제 필자는 특별히 숨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반문한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나찌의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지하활동을 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게 "너희들은 어째서 숨어서 활동을 하느냐?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무모함이 이 비판자의 주장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지나칠 수 없다.
(민족사서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빨갱이 색출보다 훨씬 심했다)
사실상 현재 제기된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주장은 가상의 논리를 가지고 시비를 붙자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적 자료와 고문헌을 엄밀히 검토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다. 이미 고인이 된 송찬식(전 국민대)씨는 대종교의 교리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위서 시비를 걸었고, 박광용(성심여대)씨는 기독교 사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시비를 걸었으며, 이기백(한림대)씨는 청동기 시대 국가이론을 근거로 시비를 걸었다. 아직도 위서를 주장하는 견해에는 이런 개념 싸움에 그치는 유치함이 가시지 않고 있다.
어떤 문헌을 위서라고 비판하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엄청난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지 않다면, 이런 류의 시비는 그만두고, 역사적 자료를 중심으로 깊이 있고 분명한 근거를 내걸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박광용씨의 경우 기마종족 연맹의 과거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내용이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 옹호와 연결된다고 하는 주장["역사비평" 10] 까지 내걸고 있으니 이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경우, 모든 기마종족을 같은 동포라고 하는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며, 실제 그 시대의 현실이 그와 같았으므로 외형상 대동아 공영권과 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등의 내용은 평등한 민족(종족)연맹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어느 종족의 패권주의적 식민체제를 가리키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의 지식이 역사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연결되는 순간이다.
그런 논쟁이라면 어떤 비판에도 이 기록의 진실됨이 손상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과 함께 나름대로 엄밀한 분석을 거쳐 필자는 이 기록을 사용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현실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것을 사실 규명의 주요한 자료로 채택하는 바이다.
내용출처 : http://www.khaan.net/gogi/handangogi/parkhye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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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사서인가 소설인가 아니면 경전인가- (한의 뿌리와 미래(근간) 발췌)
현재 우리나라에서, 남북한 지리적 분단, 오히려 그것보다도 먼저 역사의식의 단절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민족과제의 우선 순위이라 볼 때,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단군과 고조선으로 대표되는 상고사 연구와 이해는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단군과 고조선은 우리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자 할 때 항상 먼저 떠올려 왔고 민족사의 출발점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단일민족으로서의 존재근거였습니다. 그리고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굳건한 신념은 수천 년 세월동안 동방겨레를 동포애로서 끈끈하게 묶어 주었습니다. 만일 우리들 중에 "단군이 국조냐? 실존인물이었냐?"고 따져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진짜 우리 할아버지인지 따지고 드는 참으로 불경한 질문이며 그렇게 따져 묻는 분도 단군의 자손입니다.
최근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단군 임금이 중국의 요임금 때와 비슷한 무렵에 고조선을 개국했다는 것에 동의하는 학자들이 점차 늘고있습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고조선 건국과정은 비록 신화(神話)로 채색되어 있지만 단군 임금이 실존했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신화라는 것이 뭡니까?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이 고대인의 원시적 관념과 결합하여 신비적 표현으로 재구성된 것이죠. 신화도 역사의 산물입니다. 신화라는 포장지를 뜯어내면 그 속에는 역사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화다 아니다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소모적인 논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신화든 전설이든 간에 역사적 사실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있느냐가 우리 추구해야 할 문제의 관건이라 할 수 있으며 진정 역사가가 해야할 일은 신화인지 전설인지 구분하는 것, 즉 사실이냐 허구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역사의 본모습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학자적 양심과 책임을 내팽개친 일제의 어용학자들은 고조선 건국사와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의 건국사까지도 모두 신화라고 우기면서 우리 역사가 일본 역사보다도 늦은 3세기경에나 시작되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짜놓은 상고사 해석 공식은 패망해 물러간 후에도 이 땅에 그대로 남게 되어 반세기 넘도록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휘감아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앞에서는 반만년 역사와 배달민족을 강조하면서도, 돌아서면 단군신화를 운운하는 조잡한 역사인식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열강이 밀려들던 지난 19세기말, 근대화 물결에 휩쓸리게 된 중국인들은 낡아빠진 봉건적 유산들을 청산하기에 분주했습니다. 신문명을 접하게 된 중국의 학자들을 오직 서구문물과 서구적 역사관을 중시하고 중국의 고전에 남아있는 중국고대역사기록을 송두리째 부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은허(殷墟)에서 상(商)나라 유적이 발굴되어 쏟아지자 은나라까지를 마지못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하(夏)나라 유적이 발굴되자 하나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아예 요순시대를 넘어 삼황(三皇)시대까지 역사적 사실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단군 임금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문헌고증과 고고학적 조사를 통한 연구성과가 축적되면서 단군신화를 고수해온 우리 학계도 지난날 역사연구방법에 문제점이 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사학계는 단군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다는 긍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학자들과 많은 대중들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신화는 곧 허구'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단군을 바라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실존여부에 대한 오해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이 문제에 책임이 있는 역사학계는 분명한 입장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신화라고 하는 명칭에 대해서 학계와 일반의 인식차이가 현격하므로 일본인들이 붙인 단군신화라는 호칭을 단군사화(檀君史話)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습니다. 최근에 개정된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이 단군의 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명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향은 과거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는 역사의 뿌리가 끊어진 기존의 문헌사료만을 고집하고 무미건조한 단편적인 설화해석과 몇 점의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안주하면서 사료부족이라는 해묵은 구실로 실질적인 사적(史蹟)조사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구체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겨레 역사는 겨우 2천여 년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역사학의 특수한 현실을 감안할 때 무엇보다도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고대사 복원의 단초를 제공할 상세한 문헌사료의 확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료이며 그것이 전하는 파천황적인 사실들은 기존에 통용되어온 고대사체계를 뒤흔들며 한국사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해야 된다는 주장을 각계각층으로부터 불러일으킨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개된 지 20년이 넘도록 대학강단의 대다수 학자들은 사료적 신뢰성의 문제를 지적하며 {환단고기}를 상고사연구의 기본사료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환단고기}의 사료채택 여부를 놓고 세 가지 엇갈린 주장으로 분파 되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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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
첫째는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보는 시각으로 대체로 강단사학의 입장입니다.
둘째, {환단고기}가 정통사서라고 보는 견해로 재야사학과 소수의 강단학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셋째,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중도적 입장이다.
이 가운데 {환단고기}에 대해 위서론은 제기하는 역사가들은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에서 모순되는 연대기록과 국제관계 기술이 발견되고, 국가·문화·인류·세계 등 근대적 용어 사용, 그리고 삼신일체론(三神一體論)·천지창조 개념이 기독교 교리와 유사한 점등으로 비추어 기독교 사상에 익숙한 근대의 인물이 위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것은 한마디로 한민족사의 역사관의 기반인 신교문화의 정신세계를 전혀 볼 줄 모르는 철학 없는 위인들의 소견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현존자료를 놓고도 그 진실성과 의미를 밝히려 한다기보다는 지엽적 헛점만 찾아 부각시키고 핵심적 내용까지 모두 부정하려드는 것입니다. 이 책을 엮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나 감수자 해학 이기 선생, 출간한 이유립 옹 모두 20세기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안 할 때 근대적 언어가 가미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필된 사료를 위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필된 사료를 위작이라고 한다면 지구상에 위작 아닌 사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일부 술어와 연대상의 고증문제가 제기될 수는 있으나 민족사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시원사와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한(韓)문화 뿌리의 심층구조와 대세를 보는 데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음을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하의 내용은 몇 년 전 단군학회에서 주최한 1999년 전반기 학술회의에 오간 토론내용과 그 밖의 논고를 중심으로 엮은 것입니다.
1) 위서론
대부분의 우리 역사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위서임을 입증하는 근거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 {환단고기}가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편찬된 해(1911년)로부터 약 70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점인데 계연수와 이유립이 이 책의 공개를 늦추었던 동기가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의혹이 제기된다는 점입니다.
둘째, 이 책에 기록된 관직과 인명, 지명, 용어 등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교육기관인 경당이나 그 관직인 욕살(褥薩) 등이 단군조선 때도 그대로 등장하고 있고 '원시국가', '문화(文化)', '남녀평권(男女平權)', '부권(父權)' 등을 비롯한 근대적 용어가 등장하는 점입니다.
셋째, {환단고기}에서 인용한 사서들은 현존하지 않거나 서명(書名)만 남아있으므로 그 이름만 도용해서 위작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넷째, 위서라고 낙인된 {단기고사}와 그 유사한 내용들이 나타나는 점을 위서론의 증거가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위서론으로 제기된 네 가지 가운데 강단사학이 집중적으로 거론해온 것은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용어들의 문제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제시해온 것은 [단군세기]의 기록에 청나라 때 사용된 지명(영고탑(寧古塔), 장춘(長春))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조인성 교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전설과 관련하여 생긴 지명이므로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성립 이전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기록을 들어 영고탑은 중국 청(淸)나라의 조상 여섯 형제가 이곳 언덕에 자리잡고 산 데서 생긴 지명인데 청나라 때 생긴 이 지명이 청(淸)나라 이전의 단군조선 시대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토대로 {환단고기}를 청나라 건국 이후에 조작된 위작으로 단정한 바 있습니다. 또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와 {단군세기}에 나오는 상춘(常春)은 장춘(長春)의 오기(誤寫)로 보고 장춘이 청 가경(嘉慶) 연간(1796∼1820)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므로 {태백일사}와 {단군세기}가 위작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단군세기}의 [서문]에서
나라가 형(形)이라면 역사는 혼(魂)이다. 형이 혼을 잃고 보존될 수 있는가.라고 한 부분은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1915)에 나오는 대개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다. 지금 한국은 형은 허물어졌으나 신만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인가.라고 한 것과 비슷하며, 또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는데 성(姓)은 연씨(淵氏)이다. 그 선조는 봉성인(鳳城人)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祚)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고 하며 증조는 광(廣)이라고 한다. 모두가 막리지(莫離支)였다.라는 기록은 [조대기]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인성 교수는 '자유'와 '태조'는 1923년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묘지(泉南生墓誌)가 발견됨으로써 알려진 것이므로 {태백일사}가 1923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며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2) 진서론
현재 전하고 있는 {환단고기}는 1949년 이유립이 오형기로 하여금 정서(正書)시킨 것인데, 원본과 인쇄본, 필사본 등이 사라지게 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손을 거치면서, 저술된 시대와 다른 근대적 용어가 사용되고 비전문가로서 역사가에 의하지 않은 인쇄와 필사 등을 통하고 보니 본문(本文)과 주해(註解)가 혼동되어 진실성에 의구심이 확대되고 결국 위서 논쟁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진서론임을 주장해온 송호수, 박성수, 임승국 등은 강단 사학계의 위서론은 {환단고기}에 대한 충분한 내용 검토 없이 몇 개의 자구에만 얽매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반론의 근거들을 제시하였습니다.
특히 위서론에서 제기되어 온 용어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반론하였는데 영고탑의 문제에 대해서는 반론의 근거로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영고탑(寧古塔)에 대한 기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寧古)'이며 자리는 '특(特)'으로 '영고탑(寧古塔)'이 청(淸)나라의 시조와 관련되고 있다는 학설은 와전된 것으로 주장합니다. 즉, 구설(舊說)로서 지명이 아니므로 청나라 시조 운운하는 {만주원류고}의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라는 것이죠. 상춘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춘(常春)이라는 본래의 지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청나라 가경제 때 지명을 장춘으로 바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조대기]에 나오는 '연개소문'의 父인 '太祚'와 조부인 '子遊'의 문제에 대해서는 도리어 이 부분이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북경 낙양에는 중국식 발음 표기인 '천(泉)씨'로 되어 있지만, {환단고기}에는 '연씨(淵氏)'로 되어 있고, 선조가 봉성인이라는 사실과 증조부의 이름이 '광(廣)'이라는 사실까지 상세히 나와 있으므로 이것을 다 위작이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강단사학이 지적해온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근대적 용어의 문제에 대해서,
송호수 박사는 위서론자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문화', '산업' 같은 용어는 {한비자(韓非子)}와 류향(劉向, B.C77∼6)의 {설원(說苑)} 등에도 나오는 용어로 근대 이후에 사용된 단어가 아니라고 반론하였고 이희근은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근대적 용어 등은 후세에 가필되었다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이 책의 모든 내용이 후세에 창작 조작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고 {환단고기} 서문에서 20세기에 편집했음을 스스로 밝힌 책에 '20세기 용어들이 사용되었다'고 위서라고 비판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며 계연수가 기존 책들을 재편찬할 때에 자신의 지식을 첨가하여 가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비난하는 데 쓸 역량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데 도움되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또 한 가지, 강단사학이 {환단고기}에서 인용한 사서들이 현존하지 않거나 서명(書名)만 남아있다고 해서 이름만 도용해서 쓴 위작이라고 단정지은 주장에 대해 진서론자들은 일제시대 총독부가 우리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사서들을 압수하여 파기하거나 은닉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성수 교수는 단군학회 1999년 전반기 학술회의 지정토론에서 조선사편수회의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이 태종실록과 세조실록에 나오는 고기(古記)들이 고려왕실의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음을 시인한 바 있다고 밝히고 또 이병도가 쓴 진단학보 창간사에 현재 3종의 고조선비사 이본(異本)이 있다는 기록을 들어 일제 시대 1920년대까지 상고시대를 밝혀줄 고서들이 남아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서론자들 가운데는 독특한 방법으로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발굴해낸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환단고기} 내용에 나오는 기록과 중국사서와 발굴유물을 비교 검토하여 {환단고기}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는 사실들을 찾아냈다. 이것은 {환단고기}가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된 책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문학 교수인 박창범, 라대일은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의 천문기록에 주목하였습니다. 두 문헌에는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현상'이 기록되어 있고 일식 현상이 10건, 큰 썰물이 1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기록된 고조선시대의 천문기록】
시 기 기록내용
B.C.2183년 2세 단군 부루 58년 日蝕
B.C.1733년 13세 단군 흘달 50년 五星聚婁
B.C.1533년 17세 단군 여을 20년 여름 日蝕
B.C.935년 29세 단군 마휴 9년 南海潮水退三倜
B.C.918년 6세 기자 2년 7월 七月 日蝕
B.C.837년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 三月 日蝕
B.C.765년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 四月 日蝕
B.C.579년 19세 기자 1년 봄 日蝕
B.C.423년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 二月 日蝕
B.C.258년 47세 단군 고열가 48년 10월 十月 朔日 日蝕
B.C.241년 36세 기자 인한 35년 日蝕
수퍼 컴퓨터를 동원한 조사결과 오행성 결집현상 부분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단군세기} 13대 흘달단군 50년, 즉 B.C.1733년에 다섯 개의 별이 婁星 근처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1년 전인 B.C.1734년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 해 7월 13일 저녁 다섯 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였습니다. B.C.1733년을 기점으로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 밖에 없었죠. 박교수는 1년 정도 오차가 발생한 점에 대해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현재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기록에 대해 누군가 중국문헌의 천문현상이나 혹은 컴퓨터를 동원해 측정한 기록, 또는 무작위로 {단군세기}에 기술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국문헌에 나타난 천문현상의 기록은 훨씬 늦은 기원전 776년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내놓은 1979년 이전에 이러한 기술을 동원하여 위작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작위로 천문기록을 기술했다해도 맞을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결과 0.007%에 불과하므로 거의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은 제29세 마휴 단제 9년(B.C.935년)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있는데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결과 전후 2백 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있었던 것은 4년 후였다. 누군가 작위로 기술해서 맞을 확률은 0.04%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식현상의 기록입니다. 일식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므로 일식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 때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뿐이므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기록이 주나라 때인 B.C.776년인데 비해, 2세 부루 단군 때인 B.C.2183년의 일식 기록은 중국의 기록보다 무려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 그리고 10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 중 두 개는 해 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창범은 밝혔습니다.
⑶ 중도론
학자들 가운데는 {환단고기}의 진위성을 가리는데 있어서 신중한 태도를 강조하며 일방적인 비판도 추종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한때 조인성 교수와 더불어 {환단고기}의 진실성에 의혹을 제기해왔던 이도학 교수는 {환단고기}를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도 문제가 있음을 시인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환단고기}를 전면 부정하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남아있다. 그 이유는 {환단고기}가운데 사서로서의 성격이 가장 두드러진 {태백일사}에서 발견하게 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사의 광배명(光背銘)에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은 '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壬子年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卽位年 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같은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의 묘지(墓誌)에서는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밖에 {태백일사}에는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의 '타이'라고 하는 아유타국(阿踰 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 이는 백제의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시사 받을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환단고기}가 지닌 사료가치도 1911년에 {환단고기}가 편집되었다는 전제하에서만이 가능함을 명백히 해 둔다. {환단고기}는 역사연구의 개별적인 사료로서보다는 그 속에 담긴 사상이나 사학사적인 의의가 더욱 값질 것으로 믿어진다. 각기 다른 4권의 책을 하나로 엮은 {환단고기}는 현존하지 않는 기존 문헌들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다. {환단고기}가 인용하고 있는 문헌들을 통해 우리 나라의 사상사나 사학사적인 체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 일조(一助)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되풀이해서 이야기 하지만, 이것 또한 {환단고기}의 출간 내력이 서지학적인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환단고기}를 사료뿐만 아니라 사학사적인 측면에서도 이용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환단고기}에 나타난 이른 바 '대조선주의'가 관념의 산물이었는지의 여부를 앞으로의 고고학적 성과에 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 고대문화와 밀접히 관련된 중국 요녕성 객좌현(喀左縣)에서 5천년 전의 대형 제단(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 빗살무늬 토기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사실을 부기(附記)하면서 끝맺는다.
윤내현 교수는 단군조선의 역대 임금을 논하면서 {환단고기}에 나오는 47대 단군 임금을 소개하고 있는데 역시 서지학적 검토가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중도론적 견해는 {환단고기}가 사료적 진실성이 있다는 점에 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서지학적 검토 없이 활용하는 데에는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현 역사학계의 주류는 대체로 위서론이거나 유보적 입장이기 때문에 {환단고기}를 토대로 한 역사연구는 제도권 안에서는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 재야학계에서만 진행되고 있는데 과학적 검증 절차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죠.
대체로 중도론적 견해는 {환단고기}가 사료적 진실성이 있다는 점에 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지학적 검토 없이 활용하는 데에는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환단고기}의 진실성 여부를 둘러싼 학계의 쟁점토론의 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환단고기}가 가필된 점은 있을지언정 위서는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졌습니다.
얼마 전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환단고기]에서는 진서론을 앞에 소개하고 위서론으로 뒤집는 바람에 시청자들에게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만일 위서론을 먼저 소개하고 진서론으로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입증했다면 결론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환단고기} 내용 중 몇몇 가필된 부분은 대일 항전과정을 치르던 복잡한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또는 이유립 선생이 태전(太田)에 거주하면서 가필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위서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이유립 선생이 단학회의 창시자 이기 선생으로부터 여러 손을 거쳐 전수 받았음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은 이유립 선생의 부인이 단단학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 역사 찾기를 평생 소원했던 이유립 옹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으며, {환단고기}와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평주}(이유립의 {환단고기} 번역본)는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 번역 출간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이 {환단고기 평주}는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것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이유립 선생은 운명하셨죠. 1979년에 펴낸 {환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는데 정오표는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으로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 선생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환단고기}가 적어도 이전부터 존재했던 책이며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부분 가필한 점 역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건이 일어난 당대에 저술된 1차 사료가 아니라면 가필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한 문헌사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고대사서를 대표하는 {서경(書經)}, {죽서기년(竹書紀年)}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문헌들이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대량으로 가필이 가해졌음은 이미 청나라 고증가(考證家)에 의해 밝혀진 역사학의 상식이다. 그러나 가필이 좀 있다고 사료적 가치까지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물론 사료는 신빙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연구에 앞서 서지학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학계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환단고기}의 사료 채택을 무기한 유보시키는 구실로 오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은 이미 우리 현대사의 큰 흐름이 되어버린 상고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도외시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서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여 역사학계 스스로가 설자리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참조 : http://jsd.snu.ac.kr/jsd/forum/special/whatishwanda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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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에 나오는 증거사료
환단고기의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에는 다양한 천문현상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오성취루 현상이다.오성취루란 목성과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 나란히 늘어선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장관이 단군조선 때 나타났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최초로 이 기록에 주목한 사람은 서울대 천문학과의 박창범 교수.
그는 단군조선 시대의 천문현상을 과학적으로 검증한 논문을 발표했다.천문현상을 추적해가면 그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는 물론 관측자의 위치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연대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오성취루 현상은 서기전 1733년에 나타난다.
천문관측 프로그램에 입력해본 결과, 일 년 전인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다섯 개의 별이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1년의 오차가 나지만 천문학계에서는 거의 정확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환단고기의 기록을 토대로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의 전지역과 한반도 전체를 포함한다.
한 시대의 영토를 추정하는 방법 중에는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과 함께 그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참고로 추정하는 방법이 있다.
이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로,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지역을 살펴보면 고조선의 영역도 좀 더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파형동검 출토지역 현재까지 이 비파형동검은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됐다.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과 환단고기의 고조선 기록을 비교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 한반도 전체를 포함하고 있어 상당부분이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적인 가치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근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단서는 바로 수서령이다.
수서령이란 조선시대 세조와 예종, 성종 때 8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옛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지금 이 서적들은 전하지 않지만, 우리 역사의 자부심을 담고있는 책들로 추정된다.그런데 이러한 수서령이 내려진 책들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과 제목이 일치하는 것이 발견된다.
[안함로, 원동중] 삼성기 발생
삼성기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당시 이러한 책들은 왜 거두어들였을까.
수서령의 대상이었던 책들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 제목이 나타나는 것은 1911년,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펴낼 당시,옛부터 전해지는 책들을 있었고 그것을 참고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