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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죽음

<라즈니쉬 명상건강> 안락사에 대해

작성자작약|작성시간12.06.04|조회수42 댓글 0

< 질문 : 다가오는 네덜란드 의회 선거의 주요 쟁점은 안락사입니다.

 

정치가들은 안락사의 입법화를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

 

 

 

 

안락사, 혹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자유는 모든 인간의 생존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제한을 둘 수도 있는데, 이를테면 75세 정도로 제한하는 것이다.

 

75세가 지나면 병원들은 자기 육체를 벗기 원하는 사람들을 도울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병원에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있어야 하고,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에겐 특별한 배려와 도움이 주어져야 한다.

 

그들은 아름답게 죽음을 맞아야 한다.

 

모든 병원에는 명상 교사를 배치해야 한다.

 

죽으려고 하는 사람에겐 한 달여의 기간이 주어져야 하고‥‥‥ 만일 마음이 바뀌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분으로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기분을 한 달 동안 유지할 수 없다.

 

기분은 순간적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 순간만 더 기다렸어도 결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자살은 분노나 질투나 증오로 인해 삶의 의의를 잃어버린 결과이다.

 

문제는, 정치가들이 안락사의 인정이 곧 자살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아니다. 그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자살은 여전히 범죄다.

 

안락사에는 병원 위원회의 승인이 따라야 할 것이다.

 

병원에서의 한 달 동안의 휴식-그 사람이 침착하고 고요해질 수 있도록 베풀어지는 온갖 종류의 배려-속에서

 

친구들이, 부인이, 아이들이 그를 찾아온다.

 

이제 그가 머나먼 여행을 떠나려 하기 때문이다. 그를 저지할 이유가 없다.

 

그는 오래 살았고, 이제 더 이상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으며, 그의 일은 끝났다.

 

이 한 달 동안 명상을 가르쳐서, 죽음이 다가올 때 명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죽음을 위해, 의학적 도움을 제공하여 죽음이 잠같이 오도록 해야 한다.

 

서서히, 서서히 명상과 더불어 잠이 깊어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깨달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엔 자살에 대한 염려는 없다. 그는 자살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살을 시도한다면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승인을 요구한다 병원 위원회의 승인을‥‥‥‥ 어느 때고 마음을 바꿀 수 있는 한 달 동안의 시간이 주어진다.

 

마지막 날에 그는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다. 그가 결정만 하면 된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현재 많은 나라에서 매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한다.

 

성공하면 좋지만 실패하면 법원에서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 일을 하다가 중간에 발각된 것이다.

 

이제 2년 동안 재판이 진행될 것이고 검사와 변호사는 이런저런 논쟁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그 사람은 다시 교수형을 당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처음에 하려고 했던 일이다. 스스로 말이다! 이 모든 난센스는 뭐란 말인가?

 

안락사는 점점 더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의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더 오래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천 년 전의 사람들 중에 마흔 살을 넘은 유골을 본 적이 없다.

 

5천 년 전에는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마흔 살이었고, 열 명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 중 아홉은 2년 안에 죽었다.

 

한 명만 살아남는다. 그래서 목숨은 말할 수 없이 값진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사들에게 머떤 상황에서라도 생명에게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는 선서를 하게 했다. 그는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선지자가 아니었다. 그는 열 명 중 열 명이 다 살아남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한 통찰력이 없었다.

 

현재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9할이 넘는 아이들이 생존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학이 사람들을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아흔 살이나 백 살도 드문 게 아니다- 돕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아흔 살이나 백 살 먹은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소련에는 백오십 살 먹은 사람들도 많고, 백팔십에 이른 사람들도 몇 천 명이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도 일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사는 것이 지겨워졌다. 한번 생각해 보라. 백팔십이 되어도 계속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힘도 녹슬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죽을 가망이 없다.

 

죽음은 아직 먼 것만 같다. 그들은 여전히 일하고 있으며, 여전히 건강하다.

 

미국에는 몸에 온갖 의료기기를 연결하고 그냥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공호흡기를 사용하고 있다.

 

사람이 스스로 숨을 쉴 수 없다면 그것이 사람인가?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굶주리며 죽어 가고 있는데, 나라 전체가 이 한 사람을 책임지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미국에서는 3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처도 식량도 의복도 없이 길거리에서 지내고 있는데,

 

수천 명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병원 침대와 의사와 간호사들을, 그들의 작업과 노력과 그 기기들을 독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이 얼마 안 있어 죽으리란 걸 알지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생명을 연장시키려 하고 있다.

 

그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들은 죽고 싶다고 외치지만 의사들은 도와 줄 수가 없다.

 

이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어떤 권리가 필요하다. 그들은 살도록 강요받고 있고, 그 강요는 온갖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나는 이 문제가 아주 합리적으로 풀렸으면 한다. 그 기한을 일흔다섯 살이나 여든 살로 정하라.

 

그러면 살만큼 산 것이다. 자식들은 자랐다‥‥‥‥

 

그대가 여든 살이면 자식들은 쉰 살이나 쉰다섯 살이 될 것이다. 자식들이 늙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은퇴했다. 이제 그대는 단순히 짐이 되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다.

 

노인들이 화를 잘 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에겐 일도 없고 존경도 받지 못하며 아무런 위엄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무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싸우고 화내고 소리를 지른다.

 

이런 행동들은 단지 그들의 좌절을 드러내 보일 따름이다. 진짜로는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한다. 죽음이란 개념은 비기독교적이고 비종교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죽음에 국한되어선 안된다.

 

그들에겐 죽는 법에 대해 한 달 동안 수련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그 수련에는 명상이 기본 항목이 되어야 하고, 몸에 대한 관리가 기본 항목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건강하고 전체적이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죽어야 한다.

 

그리하여 서서히 죽음으로 깊이 미끄러져 들어가야 한다. 명상이 잠과 연결된다면 그들은 깨달은 채 죽을 것이다.

 

그들은 육체만이 뒤에 남을 뿐이고 자신들은 영원의 부분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보다 낫다. 일반적인 죽음에서는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점점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죽음을 위한 병원이나 특수기관에서 죽는 것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즐겁고 환희에 찬 방식으로, 크나큰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며 삶을 떠날 수 있다.

 

나는 안락사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이와 같은 조건에서만 행해지기를 바란다.

 

 

 

-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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