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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죽음

<라즈니쉬 명상건강> 자살 충동을 느끼는 제자에 대한 조언

작성자작약|작성시간12.06.04|조회수84 목록 댓글 0

< 질문 : 저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고, 죽음에 커다란 유혹을 느낍니다.

 

이 사실이 저를 괴롭게 하지만 동시에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그것은 멋진 일이다! 인간은 한 번밖에 자살할 수 없는데 그대는 몇 번씩이나 시도했는데도 아직 살아 있다

 

그 시도들은 진짜가 아니었고 다 가짜였다. 그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물라 나스루딘이 자살하고 싶어했다.

 

그는 머리가 뛰어나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여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권총을 들고 낭떠러지로 갔다.

 

바로 밑으론 깊은 강물이 바위투성이의 계곡을 위험하게 흐르고 있었다. 낭떠러지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는 밧줄도 가져갔다. 실수할 여지가 없도록 모든 경우를 계산에 넣었기 때문에 자살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것이었다.

 

그는 석유를 가득 채운 통도 들고 갔다.

 

그는 나무에 목을 매긴 했지만 그 밖에도 할 일이 너무 많아 땅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땅에서 발을 떼면 다른 일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목을 매고 땅에 서서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 온몸이 불길에 쉽싸였다.

 

그는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머리에 총알을 발사했다. 그러나 총알은 밧줄을 끊어서 그는 강으로 떨어졌고, 불은 꺼져 버렸다!

 

그는 자포자기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나를 만났다.

 

내가 물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했는데도 아직 살아 있는 건가?"

 

그가 말했다 "어떡합니까, 저는 헤엄을 칠 줄 알거든요."

 

 

죄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대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대는 자살을 원하지 않고, 그 생각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어떤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그것은 그대만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극히 일반적인 현상이다. 삶은 고문이며 짐이다. 고통이다.

 

사람들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삶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 고통, 실망, 절망, 무의미, 마누라, 남편, 아이들, 일을 모두 떨쳐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유혹이 생겨난다. 죽음이 그대의 모든 불행을 끝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동시에 그대를 끝내 버린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대는 사실은 살기를 원한다.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낙원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대는 지옥에서 살고 있다! 그대는 지옥을 없애고 싶어하지만 자기 자신은 없애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그대 자신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자살이 그대의 불행을 끝내 주기에 거기에 끌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것이 그대마저 끝낼 것이라는 커다란 두려움이 있다

 

불행을 끝내고 더 강렬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나는 어떤 자살은 그대에게 도움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 자살이 그대가 아니라 에고의 자살일 경우다. 에고를 죽이라. 그리고 그와 더불어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걸 보라.

 

그대는 기쁨과 축복으로 넘치고 매 순간 새로운 신비를 향한 새 문이 열린다. 매 순간이 발견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과정이 된다.

 

 

그대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나의 스타일로 자살을 감행하라!

 

어쨌든 그대는 하도 여러 번 실패를 해서 실패에는 도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살을 원치 않는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말이다.

 

아직 삶을 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마감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삶을 맛보지도 않았고, 삶의 그 다양한 아름다움과 기쁨과 축복이 발현되지도 않았다.

 

자연히 그대는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그대는 불행을 제거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 자살을 시도한다.

 

그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보인다. 그대는 분열된다. 그대 마음의 반쪽은 말한다.

 

"자살을 해서 이 모든 난센스들을 끝내 버려. 이제 더 이상은 안 돼."

 

다른 반쪽은 그대의 그런 노력을 방해하려고 애쓴다. 그 반쪽은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직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살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보다 많은 삶이, 보다 풍부한 삶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 에고를 죽이라.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는 걸 보라.

 

에고의 사라짐과 더불어 불행도 없고 고통도 없으며 자살할 필요도 없게 된다.

 

에고의 사라짐과 더불어 에고에 의해 닫혀 있던 모든 문이 갑자기 열리고 그대는 태양에게, 달에게, 별에게 개방된다.

 

그 일은 아주 쉽다. 에고를 죽이는 데에는 권총도, 석유도, 목맬 밧줄도, 불도 필요없고,

 

또 만일 모든 것이 실패해서 깊고 험악한 강으로 떨어질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필요없다.

 

에고는 단지 사회와 종교와 문화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에고는 그림자다. 그대는 그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에고는 없다.

 

명상은 에고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들여다 본 사람치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없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안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어떤 에고도 만나지 못했다.

 

이것이 에고의 자살이다.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고, 단지 눈을 조금 안으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일단 에고가 그곳에 없다는 걸 알면 그대가 짊어지고 다니던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

 

그것은 비실재적인 에고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제 설 땅을 잃는다.

 

그 모든 것은 세뇌와 외부의 입력에 의해 그대의 마음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사회가 그대에게 해 왔던 일이다. 우리는 추한 방식으로 전 역사를 살아왔다.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생각하는가? 그것은 단지 그대에게 주입된 관념이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관념이 그대에게 심어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 역시 입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입력되었다.

 

내가 그대에게 하는 작업은 그대의 입력을 푸는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것이 그대를 둔하고 멍청하게 만들고 자살이나 죽음에까지 유혹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기록을

 

그대에게 날마다, 끊임없이 보여 주고 있다

 

나의 종교는 이런 면에서 독특하다. 과거의 모든 종교는 사람들을 입력시켜 왔다.

 

나는 그대의 입력을 푼다. 그리하여 그대를 홀로, 그대 자체로 남겨 둔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철학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나의 교리이다' 하는 걸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독교의 교리문답서 같은 것을 주실 수는 없습니까?"

 

나에겐 그런 것이 없다. 그것은 다시금 그대에게 입력될 것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인이 기독교인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기독교인은 힌두교인으로 입력된 것을 풀어 그를 다시 기독교인으로 재입력시킨다.

 

거기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나의 시궁창에서 또 다른 시궁창으로 옮겨간 것이다.

 

아마 며칠 동안은 새로움이 그를 행복하게 하겠지만 곧 그는 다른 시궁창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그는 시궁창에 빠져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을 뿐이다. 무덤은 그가 빠질 마지막 시궁창이다.

 

나는 그대의 프로그램을 지우고는 다른 프로그램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홀로, 텅빈 채, 그냥 제로로 남겨 둔다. 그 제로 속에서 에고는 사라지고 모든 축복이 그대에게 쏟아진다

 

 

 

-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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