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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

<OSHO> 정신적 고통 VS 육체적 고통

작성자작약|작성시간20.07.14|조회수127 목록 댓글 0






질문 : 저는 제가 어떤 질병이나 죽음에 이르게 되는 노년의 고통만큼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쇼 : 정신적인 고통은 없앨 수 있다. 사실은 오직 정신적인 고통만 없앨 수 있다. 그 외에 육체적인 고통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속한다. 그래서 그걸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통은 결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관찰해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그것을 '생각할 때'에만 문제가 존재한다.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두려워진다. 하지만 노인들은 떨지 않는다. 질병을 생각하면 두려워진다. 하지만 질병은 이미 생겨났기에 두려움도 없고 문제도 없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진짜 문제는 언제나 정신적인 고통이다. 육체적 고통은 삶의 일부분이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것은 전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으로 변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두려움이 생긴다. 그러나 죽음이 실제로 일어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두려움은 늘 미래에 언젠가 일어날 뭔가에 대해서 생기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에서는 결코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대가 전쟁터에 나가게 되면 두려워질 것이다. 걱정이 생겨날 것이다. 두려움에 떨게 되고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밤마다 악몽이 그대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일단 전쟁터에 나가게 되면 -군인들에게 물어보라- 그런 두려움에 대해서는 모두 잊게 된다. 총탄이 머리 위를 날아가도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할 수 있게 되고, 포탄이 떨어져도 카드놀이를 즐겁게 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은 결코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다름아닌 '현실에 대한 생각들'이다. 정신적인 고통을 없앨 수 있다면 문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을 우선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순간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정신적인 고통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것이지 결코 현재에 대한 것이 아니다. 마음은 결코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에는 현실이 존재하지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마음과 현실은 결코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다. 그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현실은 마음에게 미지의 상태로 남고, 마음은 현실에게 미지의 상태로 남는다.



아주 오래된 우화가 생각난다.


'어둠'이 신을 찾아가서 말했다.


"이제 저도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당신의 태양이 계속 저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군요. 저는 쉴 틈도 없습니다. 제가 어딜 가더라도 태양이 저를 찾아 쫓아오니 제가 또 도망쳐야 합니다. 저는 태양에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부당한 일입니다! 저는 신께서 정의를 바로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옳은 말이었다. 불만을 토로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신이 태양을 불러 이렇게 물었다.


"너는 왜 이 불쌍한 어둠을 계속 쫓아다니는 거냐? 어둠이 너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느냐?"


태양이 대답했다.


"저는 어둠을 전혀 모릅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둠을 제 앞에 데려다주세요. 그래야만 저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둠에게 잘못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어둠을 모르고, 우리 둘이 아는 사이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저를 서로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없으니 저희 둘은 서로 알지도 못합니다. 제가 이 어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들은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둠을 제 앞에 데려다 주세요!"



지금까지도 신이 어둠을 태양 앞에 데려오지 못했기 때무에 그 사건은 아직 보류 중이다. 태양과 어둠은 함께 존재할 수 없으면 서로를 마주칠 수도 없다. 어둠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태양이 존재할 수 없고, 태양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둠이 존재할 수가 없다.


마음과 실체의 관계도 그것과 똑같다. 심리가 문제이지 실체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대가 정신적 문제들을 해결하면 된다. 그 모든 문제의 중심인 에고를 해결하고 나면 문제들은 사라진다. 그대가 존재계와 자신이 서로 분리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이슬방울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저절로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냥 사라져 버리고 만다.


육체적 고통은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결코 그 누구에게도 전혀 문제가 된 적은 없다고 말하는 바이다. 다리가 부러지면 부러지는 것이다. 그게 꼭 '문제'는 아니다. 문제란 오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내 다리가 부러지면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그걸 피하지? 다리가 부러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이제 그런 문제들로 겁을 내게 되면, 그대는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고 목이 부러질 수도 있고 눈이 멀 수도 있고 온갖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만가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문제가 반드시 일어날 것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대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다. 암이 생기거나 결핵이 걸리거나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모든 게 가능하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길에 나가서 차에 치어 죽을 수도 있다.


나는 길에 나가지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방 안에 앉아있어도 지붕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침대에 누워있을 수 있다. 그런데 97퍼센트의 사람들이 침대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거긴 제일 위험한 곳이다! 가능한 한 그곳을 피하라. 97퍼센트의 인간이 거기서 죽음을 맞이하므로 그곳을 피하라.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것조차도 그렇게까지는 위험하지 않다. 침대에 있는 게 가장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명심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밤에 죽는다. 그러니 계속해서 벌벌 떨며 살아가라!


눈이 먼 사람이 길을 아주 잘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눈이 멀었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다리가 없거나 손이 없는 거지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서로 웃고 떠든다. 여자들과 이야기도 하고 논쟁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삶을 유심히 관찰해보라. 삶은 결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삶이라는 것에 적응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래에 적응하는 능력은 전혀 없다. 자기 자신을 미래에 보호하고 안전을 꾀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대는 큰 혼란과 곤경에 빠질 것이다. 그대는 분열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온갖 문제가 생겨난다. 그대는 자살조차 할 수 없다. 독이라 해도 적절한 독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거기에 뭔가를 섞어서 그게 전혀 독이 아닐 수 있다. 그 독을 먹고 누워서 죽음을 기다려도 죽음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문제가 된다.



물라 나스루딘이 자살을 하려던 중이다. 그가 길에서 점쟁이를 우연히 마주쳤고, 그 점쟁이가 이렇게 말했다.


"물라, 잠시만. 당신 손을 좀 봅시다."


물라가 말했다.


"지금 내가 왜 점을 봐야 하죠? 난 자살을 할 거에요! 필요 없어요. 이제 나에겐 미래가 없으니까요."


점쟁이가 말했다.


"잠깐만. 당신의 자살이 성공할지 말지를 봐줄 테니까요."



미래는 늘 남는다. 성공하지 못하고 경찰에 제지를 당할 수도 있고, 총을 오발할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해서는 확신하는 게 불가능하다. 죽음이나 자살에 대해서도 그런데, 삶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삶은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가능하며,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두려워진다면, 이것은 그저 그대의 심리일 뿐이다. 그대의 마음에 뭔가가 일어났다. 그대가 나를 옳게 이해한다면, '명상'이란 '마음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현실을 바라보려는 노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으리라. 그것이 현실과 실체를 바라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존재하는 한, 마음은 현실을 왜곡하고 무너뜨린다. 마음을 버리고 실체를 직시하라.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그 누구에도 현실 자체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 있고 그대도 여기에 있다. 나에겐 어떤 문제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병이 들면, 병이 드는 것이다. 무슨 걱정을 해야 한단 말인가? 왜 그것에 난리를 피우는가? 내가 죽으면 죽는 것이다.



문제라는 것은 공간이 필요하다. 현재의 순간에는 아무런 공간이 없다. 그저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에 그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대는 과거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래와 과거는 우리가 걱정할 공간을 부여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공간이 많을수록 걱정도 늘어난다.



인도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은 걱정이 더 많다. 그들은 다음 세상, 내세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음 생은 어떻게 될까?'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를 전혀 모를 때,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음 생에는 내가 어떤 업보를 갖고 태어나게 될까?'


이제 그는 걱정이 더 많아진다. 인도 같은 문화권의 사람에게는 여지가 많다. 그가 어떻게 그 많은 공간을 채울 것인가? 그는 그것을 더 많은 문제로 채울 것이다. 미래의 텅 빈 공간을 채우는 하나의 방법이 바로 근심, 걱정이다.



육체적인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고통이 생기면 생기는 것이다. 그런 고통이 없으면 없는 것이다. 뭔가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대가 그걸 바랄 때, 혹은 뭔가가 존재하는데 그대가 그걸 바라지 않을 때 문제가 생겨난다. 그런 문제들은 언제나 심리적인 것이다.


"왜 이런 고통이 생긴 거지?"


이 모든 건 정신적인 것이다. 그게 왜 있냐고 누가 말해주겠는가? 아무도 대답해줄 사람은 없다. 설명은 가능하겠지만, 그건 진정한 답이 아니다.



설명은 간단하다. 그건 아주 단순하다. 쾌락이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쾌락은 존재할 수 없다. 고통이 전혀 없는 삶을 원한다면, 그대는 쾌락도 전혀 없는 삶을 살야야만 할 것이다. 그 둘은 서로 다른게 아니라 하나이다. 서로 다르고 서로 분리된 게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이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의 온갖 쾌락만을 누리면서 고통이 없는 분리된 삶을 살려고 안간힘을 써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쾌락을 더 많이 누릴수록 더 많은 고통이 따른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는 더 깊은 법이다. 골짜기가 없는 봉우리만을 원하는가? 그런 봉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골짜기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골짜기는 봉우리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인 상황이다. 그 둘은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대는 쾌락만 원하고 고통은 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자. 상대방과 함께 있을 때, 그대는 행복하다. 그런데 그대는 상대방과 함께 있을 때마다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떠나가도 그대는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대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행복하다면 , 그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 이별의 고통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 사람을 그리워할 것이고, 그 사람이 떠나고 없다는 걸 느낄 것이다. 이별은 고통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면, 모든 쾌락을 버려야 한다. 그러면 연인이 생겨도 행복함을 느끼지 말고 그저 슬퍼하고 불행해하라. 그래야 연인이 떠나가도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대에게 인사를 하면 그대는 행복해한다. 누군가가 그대를 욕하면 그대는 기분이 상한다. 이런 속임수는 이미 시도되어 왔다.


이것은 이른바 종교인들 모두가 시도했던 가장 기본적인 속임수 가운데 하나이다.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면, 쾌락을 피하라. 그런데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죽음을 회피하고 싶다면, 삶을 회피하라.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대는 죽고 말 것이다. 죽음이 오기도 전에 그대는 죽게 될 것이다. 완벽하게 안전한 상태를 원한다면, 묘지에 들어가서 누워라. 그러면 완벽하게 안전할 것이다! 숨도 쉬지 말라. 숨을 쉬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온갖 병균과 질병이 그대 주변에 있다. 어떻게 숨을 쉬겠는가? 대기는 오염되어서 위험하다. 그러니 숨도 쉬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 아예 그냥 살지 말라. 자살을 하라. 그러면 고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왜 그걸 추구하는가? 고통 없이 쾌락만 바라는가? 그대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2 더하기 2가 4가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대는 4가 아닌 5나 6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답은 4이다. 그대가 제아무리 자신과 타인을 모두 속여도 정답은 4이다.



고통과 쾌락은 낮과 밤, 탄생과 죽음, 사랑과 증오처럼 늘 함께 간다. 더욱 발달된 언어를 사용하는 세상이 온다면, 우리는 증오와 사랑, 분노와 자비, 낮과 밤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두가지를 한데 묶은 '애증', '주야', '생사', '고락' 같은 단어들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될 것이다.


언어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언어로 보면, 고통은 쾌락과 분리되어 있다. 사전에서 '고통'을 찾아보려면, '고통'을 찾아봐야 한다. '쾌락'은 따로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고통과 쾌락이 왼손과 오른손, 새의 양쪽 날개처럼 함께 존재한다. 사전은 환상을 만들어내고, 언어는 모든 환상의 원천이다. 언어로 '사랑'을 말하면, 그대는 '증오'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는 증오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러나 사랑은 증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나서 그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다.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지 말라. 사랑하면 증오도 하는 것이다. 증오가 정점에 도달할 때가 있고, 사랑이 정점에 오를 때가 있다. 그걸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대는 열기가 전혀 없이 냉기만 있는 세상을 바라거나 냉기가 없이 열기만 있는 세상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열기와 냉기는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대가 그것을 뭐라고 부르느냐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두 개의 양동이에 물을 채워 넣는데, 하나에는 펄펄 끓는 온수를 넣고, 다른 하나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수를 넣는다. 잠시 뒤에 양 손을 두 개의 양동이에 각각 넣고 느껴보라. 두가지 감각이 느껴지는가? 아니면 하나로 느껴지는가? 하나는 차갑고 또 하나는 뜨겁다. 그리고 거기에 가만히 담가 두어라. 점차 뜨거운 물은 식어가고, 차가운 물은 덜 차가워짐을 느낄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나면 '두 곳의 물이 똑같다.' 라고 말할 것이다. 혹은 하나의 양동이에 물을 넣어서 실험해볼 수도 있다. 한 손은 따뜻하게 해서, 다른 손은 차갑게 해서 넣는다. 그리고 하나의 양동이에 동시에 넣고 느껴보라. 한 손은 그 것을 차갑다고 느끼고, 다른 손은 그것을 뜨겁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똑같은 온도의 물이다.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것이 그대에게는 쾌락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처럼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대가 한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그대는 그것을 큰 쾌락이라고 여긴다. 수도승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그는 펄쩍 놀랄 것이다.


'지금 뭐라는 건가? 당신은 미쳤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을 은밀한 곳에서 나누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놀리며 비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누는 모든 행위가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다. 마음이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는 거의 만취한 것과 같다.


화가 나면 그대는 뭔가를 한다.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이 그대에게 쾌감을 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분노는 엄청난 쾌감, 힘, 권능의 느낌을 부여해준다. 그러나 분노가 사라지고 나면, 그대는 후회와 자괴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대는 그것이 좋지 않았다고 느끼기 시작하며 이제 그것은 고통이 된다. 분노가 일어날 땐 강력해지는 쾌감을 느꼈다. 이제 열기가 식은 상태에서 그대는 다시 본다. 그대는 이제 냉정하게 정신을 차린 상태이다. 이제 그것은 고통스러워 보인다. 어떤 한 가지가 쾌락이 될 수도 있고 고통이 될 수도 있다. 동일한 것이 그대에겐 쾌락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이 된다. 쾌락과 고통은 함께 간다.



나는 이렇게 제안하는 바이다. 고통이 있을 때,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그 안으로 깊게 들어가라. 열린 자세로 그것을 받아들여라. 최대한 예민하게 받아들여라. 고통의 화살이 그대를 뚫고 그대의 중심으로 파고들게 하라. 그것을 생생하게 겪어라. 그리고 쾌락이 오면 그것도 그대의 핵심에 도달하게 하라. 그것에 맞춰 춤을 춰라.


고통이 있을 땐 고통과 함께 하고, 쾌락이 있을 땐 쾌락과 함께 하라. 고통과 쾌락이 찾아오는 매순간이 위대한 모험이 되도록 최대한 예민하게 받아들여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대는 고통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되리라. 그것은 쾌락만큼이나 아름답다. 고통 역시 그대의 존재를 예리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대의 존재에 자각을 일깨워준다. 때로는 쾌락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쾌락은 무디게 만든다. 그래서 나태함에 빠져 사는 사람들의 깊이가 얕은 것이다. 그들에게서 어떠한 깊이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고통을 전혀 몰랐다. 그들은 오직 표면적인 삶, 이런 쾌락에서 저런 쾌락으로 이어지는 삶만을 살아왔다. 플레이보이들은 고통이 뭔지를 모른다.



고통은 주의 깊게 만들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연민과 감성을 키워준다. 고통은 그대를 크고 깊게 만들어준다. 가슴은 고통으로 인해서 성장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자기만의 미덕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고통을 추구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고통이 있을 때, 그것마저도 즐기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존재계의 선물이며 그 안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 고통을 거부하지 말고 그것도 즐겨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맞이하고 그것과 함께 하라. 처음에는 어렵고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점차 그대는 그 맛을 알게 될 것이다.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때, 그대는 그 맛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런데 고통의 맛은 쓰지만, 일단 그걸 배우고 나면, 그대는 거기에서 예리함과 명쾌함을 얻게 된다. 그것은 그대의 모든 잡념, 무감각, 수면 상태를 뒤흔들어 놓는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대가 마음을 챙기도록 도와준다. 쾌락보다 고통 속에서 그대는 더 명상에 가까워진다. 쾌락은 정신을 더 빼놓는다. 쾌락은 일종의 망각 상태이다. 그에 반해서 고통은 기억이다. 그대는 고통을 잊지 못한다.


고통은 매우 창조적인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명상이 될 수 있고 자각이 될 수 있다.


고통이 있을 때 그것을 자각, 명상, 그리고 영혼을 예리하게 일깨우는 방도로 활용하라. 그리고 쾌락이 있을 때, 그것을 망각의 도구로 활용하라.


두가지 모두 그대가 마음의 고향에 도달하기 위한 방식이다. 하나는 자신을 전체적으로 기억하는 방식, 또 하나는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방식이다. 고통과 쾌락은 모두 활용 가능하지만, 그대는 매우 현명하게 그 둘을 활용해야 한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방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현명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을 위해서 가르친다.


존재계가 그대에게 무얼 주더라도, 자신의 창조적 성장을 위한 방식으로 그것의 활용 방도를 찾도록 노력하라.



* 책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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