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도 불안도 망상 탓이다.
광명과 함께 좋고 나쁨은 사라진다.
인간은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일까?
어떤 것이 좋아지거나 어떤 것이 싫어지거나 하는 것은 어째서 일어날까?
어떤 식으로 이 분열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대는 좋고 싫어하는 이 마음의 구조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그것은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난 이 사람이 좋아, 저 사람은 싫어.“하고 말한다. 왜 그럴까?
어느 날 갑자기 이 사람은 싫어지고 저 사람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어째서 그럴까?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누가 누구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왜 그럴까?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그대의 자아를 강화시키는 일을 허락해주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스크린이 되어 자신이 꿈꾸는 것을 도와주면, 그대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자신이 보고 있는 꿈과 맞아떨어지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과 자신이 꾸고 있는 꿈과 맞지 않는다면, 자신이 꿈을 계속 꿀 수 있도록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
그 사람이 방해를 하고, 스크린 역할을 맡아 주지 않고,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 된다면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
그대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꿈을 보여 줄 듯한 수동적 스크린이다.
구제프의 수제자인 우스펜스키는 ‘기적을 찾아서’라는 자전을 ‘나의 꿈을 파괴한 분께’라는 헌사를 써서 스승에게 바쳤다.
누구든 자신의 꿈을 전부 파괴하려는 사람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우스펜스키 역시 구제프에게서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만년에는 구제프와 대면하지 않고 혼자서 활동했다. 그리고 눈을 감을 때는 구제프와 적이 되어 있었다.
바로 이 사람이 꿈을 파괴하는 자다, 하고 느낄 수 있었던 우스펜스키 같은 지혜로운 인물조차 그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은 그것을 느낄 수가 있다.
만약 누군가 진정으로 그대의 꿈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려고 애를 쓴다면, 그대는 그 사람을 적으로 느끼게 된다.
참된 스승은 언제나 적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판단기준이다.
사이비 스승은 늘, 인간이 꿈꾸는 것을 돕는다.
그들은 결코 꿈꾸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정신안정제를 준다.
그들은 인간을 듣기 좋은 소리로 달랜다.
그들의 가르침은 마치 훌륭한 자장가와 같다.
그들은 그대의 주위에서 노래를 불러 그대는 편안히 잠을 청할 수 있다 - 그뿐이다.
하지만 참된 스승은 위험하다.
그에게 다가가는 일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대가 꿈을 꾸도록 놓아두지 않고, 꿈꾸는 것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목적은 꿈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는 반드시 파괴한다. 그리고 꿈은 가슴에 바싹 다가가 있다.
인간은 꿈을 자신의 가슴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꿈이 파괴되면 인간은 자신이 파괴된 듯이 느낀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손에 의해 살해당하는 듯한 느낌이다.
힌두교도는 이런 점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참된 스승은 죽음과 같다고 말한다.
스승을 찾아갈 때, 인간은 죽으러 가는 것이다.
그대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누구나 죽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이 파괴 되었을 때 비로소 진리가 나타난다.
그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대의 에고를 도와 주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그 여자가 그대를 가리켜 완전한 남자라고 치켜 세우기 때문이다.
언젠가 두 연인이 나누는 말을 엿들은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파도가 밀려 왔다.
남자가 말했다.
“밀려 오거라, 파도야.
크게, 더 크게 춤을 추며.”
파도는 크게, 더 크게 밀려왔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대단해요, 자기!
바다가 자기 말을 알아들을 정도이니!”
이런 여자라면 그대는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에고를 원조해 준다면, 그대도 그 보답으로 상대의 에고를 원조할 용의가 있다.
무슨 일이든 척척 맞아 떨어지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그것은 서로 맺은 협정이다.
상대가 자기 자신이 되기를 고집한 순간, 무슨일이 딱 맞지 않거나, 그 사람이 완강해 양보하지 않거나, 그대에 대한 지배나 소유를 꾀하기 시작하거나, 그대의 에고를 손상시키기 시작한다면 갑자기 그대는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상대는 그대의 에고가 강해서 그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가 그대를 좋아하는 것은 상대의 에고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그대를 좋아하는 것은 두 사람의 자기 때문에, 그 사람의 에고 때문이다.
또 그대가 좋아하는 것도 그대의 자기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목적은 각기 다르다. 따라서 이런 협정이 영구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대들의 목적은 모두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다.
대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인데, 두 명이 서로 대장이 되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에는 아주 매끄럽다. 두 사람의 영역이 아직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흥분이 가라앉음에 따라 두 사람은 점점 완고해지고 독점적이 되고 지배적으로 변하면서 상대에 대해 차츰 공격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싫어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우월성을 끌어내리려고 애쓰는 자를 미워한다.
인간이 사랑하게 되는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자로 치켜세우는 자다.
에고는 끊임없이 열등감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어떤 남자는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수많은 여성을 사랑하고 싶어한다.
그는 탕아가 될지도 모른다. 여자는 언제나 시작만큼은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략이다, 여자의 전략이다. 시작만큼은 여자가 그대를 도와준다.
그러는 사이에 그대는 이미 달아날 수 없게 된다. 그 여자는 그대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남성은 많은 여성을 정복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최초 뿐이다.
모든 연애는 처음에는 아름다운 법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연애를 찾아내기란 정말 어렵다.
희귀한 일이다. 만약 그런 연애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대는 그때야 비로소 그것이 진짜 연애라고 깨닫게 된다.
끝이 증명하게 된다. 시작이 아니다.
시작은 어떤 연애든 아름답다. 하지만 진짜 최초뿐이다.
두 사람 모두 사교적이고, 두 사람 모두 상대에게 선한 모습을 내보여 유혹하고, 자신을 파는 데 몰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팔려 버리면 표정이 바뀐다. 진면목이 등장하게 된다. 공격적인 에고가 활동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찾아오는 것이 진짜 모습이다.
진짜는 늘 마지막에 온다. 결코 최초가 아니다.
왜냐하면 시작은 두 사람 모두 상대에게 다가가 친해지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일단 친해지게 되고 모든 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본성이 나타난다.
왜 그대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일까?
어째서 그대는 어떤 물건을 좋아하는 것일까?
인간은 일단 제쳐 두자. 그대는 왜 어떤 물건을 선호하는 것일까?
물건이라면 에고가 팔을 걷고 나선다.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 큰 차를 구입하면 그대는 좀더 큰 차를 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차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작은 차 쪽이 쾌적하고 복잡한 도로 사정을 생각하면 오히려 성가신 일이 적을지도 모른다.
큰 차는 손도 많이 가고 유지하는 데도 많은 돈을 치러야만 한다.
그래도 옆집에서 큰 차를 구입했다면 그보다 조금이라도 크고 비싼 차를 들여놓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대는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 그대는 왜 그렇게 하려는 것일까?
인간의 모든 선호사상은 에고에서 비롯된다. 큰 차에는 권위가 있다.
어느 날 물라 나스루딘이 사장의 호출을 받았다.
사장은 심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스루딘을 카펫 위에 세워 놓고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스루딘, 이번에는 너무 지나쳤어.
자네가 어젯밤 회사에서 파티를 끝낸 다음 손수레를 밀고 거리의 번화가를 활보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어.
그런 짓을 하면 회사 평판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자넨 모른단 말인가?“
나스루딘이 말했다.
“그런 것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 손수레 위에 사장님이 서 계셨으니까요.
두 사람 모두 술에 취해 있었고, 또 나쁜 평판을 들으리라고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비록 손수레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장님이 타고 계셨기 때문이죠. 또 그래서 번화가를 누비고 다닌 거구요.
사장님이나 저나 아주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평판.
인간은 술에 취했을 때만 평판을 잊어버린다. 그럴 때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한다.
그렇다면 평판이란 틀림없이 알콜 같은 것이다, 라고 이해하는 것은 멋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술에 취했을 때가 아니면 모두들 그것을 잊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때, 인간은 언제나 평판이라든가 존경이라든가 품행 같은 것에 꽁꽁 매여 있다.
인간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좋은 평판, 즉 얼굴을 세워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의 위신을 높여 주기 때문에 어떤 집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 집은 여러 모로 불편할는지 모른다.
요즘 사용하는 가구들을 보라. 전혀 편한 멋이 없다.
그러나 집안에 낡은 가구를 들여 놓고 싶어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현대식이 좋다.
예전에 쓰던 것보다 편리성은 뒤떨어지지만 어쨌든 좋다. 그것은 얼굴을 세워 준다.
무엇이 되었건 좋은 평판을 듣게 만드는 것은 알콜과 같다.
그것은 인간을 취하게 만든다. 그대에게 위대한 인물이 된 듯한 느낌을 안겨 준다.
어째서 그대들은 이토록 좋은 평판을 바라는 것일까?
기억해야 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한, 인간은 결코 진실에 다다르지 못한다.
이따금 권력을 추구해 신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엉뚱한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 문은 권력과 권력을 추구하는 게 미친 짓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깨달은 자에 한해서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에 대응해서 좋아하고 싫어하게 된다.
에고가 없으면 어디에 좋고 싫은 게 있을까? 그런 것은 그냥 사라져 버린다.
자기 자신에게 유유자적해지면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늘 무언가를 선택하는 분할사고 따위는 결코 지니지 않게 된다.
하지만 자아는 결코 자신을 평화롭게 놓아두지 않는다.
자아는 끊임없이 난동을 부리게 하는 원인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주변에 두루 마음을 써야만 하고, 그곳에는 수백만에 달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큰 차를 구입했다. 자아, 어떻게 한다?
누군가 어디에서 더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했다. 자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떤 이는 나보다 더 건강하다. 자아, 무슨 수를 써야 하지?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다. 자아, 어떻게 할 거야?
누구는 더 지적이다, 더 교활하다, 더 부자다. 이런 식으로 주위에는 수많은 인간이 있고 그 모든 사람과 경쟁을 벌인다.
인간은 미쳐 버린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대들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순간에 결코 다다르지 못한다. 어떻게 그대들이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황제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알렉산더가 벽에 걸려 있는 어떤 그림에 손을 뻗으려 했다.
그 그림이 비스듬하게 걸려 있기 때문에 제대로 걸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림에 손이 닿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키가 작았다. 그의 키는 고작 5피트 5인치밖에 되지 않았다.
경호원이 - 그 경호원의 키는 7피트나 되었다 -이 바로 손을 내뻗어 그 그림을 똑바로 했다.
알렉산더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감정이 상한 것이다.
경호원이 말했다.
“폐하, 이런 일은 언제든 말씀만 해주십시오.
큰 저희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나보다 크다고?
아냐! 몸이 길 뿐이지 큰 게 아니야!”
그리고 알렉산더는 키가 자기보다 큰 인간을 보면 - 많은 병사들이 그보다 키가 컸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늘 심한
모욕을 당한 것처럼 느꼈다.
전 세계를 손아귀에 넣었지만 어떤 거지가 자기보다 키가 클는지 모른다.
그것만으로 전 세계를 잃어버리고 자신은 하찮은 인간이 된다.
황제가 되었지만 어떤 거지가 자기보다 노래를 잘 부를는지 모른다.
인간은 무엇이든 전부를 소유할 수는 없다.
자신이 무엇을 지니고 있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욕망과 에고는 언제나 가득 차지 않는 것이다.
좋고 싫음도 자아 탓이다. 그리고 에고는 아주 심한 고통을 겪는다.
에고가 없으면 그것은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이 세상을 산들바람처럼 움직인다. 어디로 가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좋음도 싫음도 없다. 어디든 자연이 데려가는 곳으로 간다.
자연의 흐름이 북쪽을 향하면 바람은 북녘을 향해서 분다.
자연이 바뀌어 남쪽을 향해서 흐르면 바람은 남녘을 향해서 분다.
바람에게 자신의 선택 따위는 없다.
붓다에게 자신의 선택은 없다.
강물이 흘러가는 쪽으로 어디든 함께 흘러간다. 결코 강을 억압하거나 그것과 싸우거나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선택이 없다. 좋고 싫음도 없다.
이해하지 못해서 그에게도 좋고 싫음이 있는 듯이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대들은 이 구름이 북쪽을 향해 움직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구름이 스스로 선택해서, 스스로 북쪽을 향하기로 결정해서 북쪽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구름에는 어떤 선택도 없다.
구름은 어디로 가야만 할 일이 없다. 구름에게 숙명은 없다.
그것은 그저 자연 전체가 그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구름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 선택은 전체의 것이다.
좋고 싫음도 전체에 내맡긴다. 구름이 알 바 아니다. 구름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디든 다다른 곳이 목적지다. 미리 결정해 둔 목적지 같은 곳은 없다. 어디든 닿은 곳이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디에 있든 그곳에 만족이 있다.
하지만 마음은 그 자신의 법칙에 따라 계속 해석한다.
그대가 붓다와 같은 사람을 찾아가면 그에게도 좋고 싫음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대의 느낌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의 마음에 맞추어서 그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그가 북쪽을 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그가 선택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아니면 왜 북쪽으로 갔을까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그가 그대에게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누군가에게 기울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대는, 그가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어째서 그랬을까, 그러지 않을리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신에게 똑같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하고.
하지만 나는 그대들에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저 전체가 그것을 결정했을 뿐이다.
그는 이제 결정자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구름과 같은 존재다.
만약 그가 어떤 사람에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것은 다만 구름이 흘러가듯 그 주의가 그쪽으로 쏠린 데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 상대의 필요성이 컸을지도 모르고, 그 상대가 더 비어 있어 더 많은 주의를 끌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땅바닥에 구멍을 파면 그 구멍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이 좀더 명상적이면 붓다는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게 아니라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나 좋고 싫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붓다는 침묵의 메시지를 마하가섭에게 전했다. 그는 꽃 한 송이를 주었다.
그러자 누군가 “왜 마하가섭에게만 주시는 거죠? 왜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 겁니까?“하고 물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그 밖에도 더욱 존경을 받고 있는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리불도 그곳에 있었다. 그는 붓다의 십대제자 중에서도 가장 지혜로운 자였다. 나라 전체에 그 이름이 알려져 있고 그 역시 제자를 두고 있는 스승이었다.
그가 붓다에게 귀의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에는 5백명의 제자가 그를 따라왔다. 자신들의 스승이 귀의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 붓다에게 귀의한 것이다.
그는 유명한 학자였다.
붓다는 왜 그런 사리불에게 꽃을 주지 않았을까?
또 아난다에게는 왜 주지 않은 것일까?
그는 40여 년이란 세월을 한결 같이 붓다를 따르며 모든 면에서 하인처럼 그를 섬겼다. 또 그는 붓다의 사촌형제이기도 한 같은 왕족이었다. 왜 그런 아난다에게 꽃을 주지 않았을까?
똑 목건련에게는 왜 꽃을 주지 않았을까? 그 역시 수천 명에 달하는 제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저명한 학자가 아닌가?
그런데 하필이면 전혀 알려진 바 없는, 완전한 무명인사인 마하가섭일까?
누구 하나 그를 염두에 둔 바 없었고, 아무도 그에 대해서 이 사건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꽃 한 송이를 들고 와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침묵한 채 앉아서 꽃만 바라보고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웅성거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설법을 들으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마하가섭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붓다는 그를 불러 그 꽃을 건네주고 모두에게 말했다.
“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는 너희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지금 마하가섭에게 준다.“
이것이 마하가섭에 대해서 알려져 있는 유일한 에피소드다.
그 전에 그가 무얼 하던 자였고, 또 그 이후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왜 그런 마하가섭에게 꽃을 준 것일까?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선택이었다면 사리불이 그것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문제였다면 아난다가 그것을 차지했을 것이다.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그것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마하가섭 한 사람밖에 없었다.
오직 그만 침묵하고 이해한 것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설령 그가 웃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그를 찾아가 건넸을 것이다.
이곳에 모인 여러 사람들 중에서 오직 그만이 공허하고 텅 비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유명한 학자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자신의 학식으로 가득 차 있다.
아난다도 있다. 하지만 그는 나에 대한 너무도 많은 애정과 집착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마하가섭만은 텅 비어 있다. 비어 있는 집이다. 그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태도는 어땠었나?
그들은 그곳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왜 붓다는 저렇게 마하가섭에게 집착하는 걸까?
왜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들에게 주시지 않았을까?
왜 마하가섭을 가장 위대한 자로 만드신 걸까?“
기억해야 한다. 붓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란 그저 구름처럼 흐르는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좋고 싫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모두 꿈꾸는 마음, 꿈꾸는 에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