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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치료

<성병훈> 자기 최면 사례

작성자작약|작성시간12.06.19|조회수99 목록 댓글 0

3. 자기 최면의 사례

 

 

3.1. 나의 어린시절

 

나는 어린시절이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외롭고 잔인하게 보낸 기억으로 남아있다. 물론 유복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나의 아픈 경험들은 좋았던 시절을 모두 덮어버리고 만다.

 

나는 마포 공덕동에 있던 XX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나는 정치에 매우 관심이 깊었고, 매사에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을 지녔다. 방과후 학교를 내려오면서(학교는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으므로) 나는 늘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의 150%를 달성하고야 말겠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근원은 나의 시골인,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야당리 할아버지댁의 사랑방 다락에 쳐박혀 있던 낡아서 다 떨어진 최면술 책을 탐독한 후에 습관적으로 가지게 된 나의 사고방식이었다. 사실 모든 일은 대부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가 뜻한대로 이루어지는 신기함을 나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온 중학교 시절이었다. 이는 자기최면의 극치이다.

 

그 후, 나는 타인최면을 거는 실험을 별도로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기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완벽한 타인최면이 아닌 반은 자기최면, 반은 타인최면을 이루는 기법이다. 항상 내가 고난에 처했어도 나를 구원해주는 행운이 다가오는 것은 바로 최면술의 덕택이었다.

 

내가 XX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나는 1년도 채 못다니고 중퇴를 해야만 했다. 나는 그 당시 통일정책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북한체제를 인정해야 통일이 된다고 주장한 것이 반공법에 걸려서 약 한달반은 고생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서대문구치소(지금은 독립공원이 되었지만)에서 있었는데, 그 안에서 나는 신념이 강하면 꿈에도 이룰 수 있고 결국은 현실화 된다는 강한 결론을 얻었다. 나는 사상범이라는 이유로 독방에 갇혀 있었고, 내가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성경책을 보는 일과 사색하는 일 뿐이었다. 8시면 불이 꺼지고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명상하는 것이었다.

 

그 때 내가 얻은 최고의 경험은, 강한 자기 암시는 곧 실현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으로 "나는 여기서 나가야 한다. 아직도 나는 할 일이 많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나는 여기서 반드시 나갈 것이다." 이렇게 암시를 할 때면 나는 더욱 더 강해지고, 결국에는 내가 뜻하는대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아주 강한 암시가 이루어지던 다음날 아침 나는 비로소 밝은 햇빛을 보았다.

 

그후에 나는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학업을 중도에 포기했으니 남보다 더 열심히 해야하지 않겠는가? 이듬해 8월에 있을 고졸 검정고시에 대비해서 학원에 등록해서 다니다가 친구와 같이 한달만에 나왔다. 홀로서기를 하기로 한 것이다. 풍문여고 뒤에 있는 정독도서관에 다니기로 하고 그 다음날부터 새벽에 1등으로 표를 끊어 굉장한 각오를 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4월에 합격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검정고시는 1년에 두 번 치러지는데 4월, 8월에 있었다. 2월부터 두 달간 공부해서 나는 4월에 합격하고야 말았다. 그때 내가 특별히 공부하는 비법은 없었다. 그저 꼭 합격해야겠다는 신념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그해에 나는 예비고사를 거쳐 K대에 들어갔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배수진을 친 병사는 승리한다는 고사와 같이 나는 절벽에 다다른 심정으로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한 자기암시, 자기최면이었던 것이다.

 

 

3.2. 병을 고치는 암시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잎새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것은 아주 훌륭한 최면술의 사례이다. 모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면서 단순한 비타민을 주고는 "당신은 틀림없이 나을 것입니다. 제 처방은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라고 암시를 주었더니 치료가 되었다. 이를 훗날 플래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최면술은 플래시보 효과를 응용한 것이기도 하다.

 

나의 고모 이야기를 예로 들겠다. 고모는 딸을 넷을 둔 평범한 주부였다. 지금은 고모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홀로 되셨지만 건강하게 지내고 계신다. 고모는 예전에 자궁암 3기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모두들 죽는 줄 알고 그것도 의료시설이 별로 발달되지 않은 1976년도였다. 하지만 고모는 자궁암을 100% 완치하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셨다. 물론 신앙심과 의지로 이겨냈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플래시보 효과였다. 딸 넷을 두고 이만 살아야지 하고 포기하는 어머니가 어디 있을까? 포천의 기도원에도 가보고 별의 별 약도 다 썼지만, 역시 고모는 믿음을 갖은 것이 주효라고 말한다. 지금은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계신다. 그런데 3년 후 고모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고모부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셨고, 좋지 않은 화투 습관을 가지셔서 더욱 더 악화가 되었던 것 같고, 고모보다는 의지가 약했던 모양이다. 그때 고모부도 강한 의지만 있었더라면 살아나지 않으셨을까 회고도 해본다. 종교인들이 반대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종교적 신앙심도 결국은 자기 최면술이 아닐까?

 

 

3.3. 담배를 끊을 수 있는 비법

 

요즈음 담배를 피는 사람들의 설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물론 개개인의 인격은 존중되어야겠지만 다수인을 위한 조치로 금연구역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통제조치보다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담배를 끊는 사람들 또한 늘고 있다. 담배는 백해무익이라고 말한다. 간혹 정신과 의사들은 담배가 유익한 부분도 한가지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 부분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특별한 부분을 제외하고 담배는 백해무익하다고 보아야 한다.

 

담배를 끊는 방법은 많다. 시중에 나돌고 있는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첫째, 금연패치를 붙인다. 둘째, 담배를 사지 않는다. 셋째, 금연침을 맞는다. 넷째, 주변사람들이 담배를 피지 못하도록 관심을 쏟아준다 등 많은 방법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이다. "담배를 피면 내가 죽는다.", "담배를 피면 나의 폐가 까맣게 타버린다.", "담배를 피면 명이 짧아지거나 치매에 걸려 고통스럽게 살게 된다." 등 등의 암시를 주면 절대로 피지 못한다. 자신이 아닌 남(부인 혹은 친구 기타 주변사람)이 이런 암시를 부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다.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이 스스로 자기최면을 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금연패치를 안사도 되고 주변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도 피할 수 있게 된다.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금연법이다.

 

처음에 제시한 자기최면 요령대로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잠자리에 들기 전에 눈을 지긋이 감고 밝은 원을 그려 나가면서 아주 환한 원을 그렸을 때, 자신의 의지를 써넣거나 담배를 피워서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담배를 끊고 건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그려넣는다. 이렇게 매일 같이 하면,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못할 것이다. 자기 스스로 담배를 멀리하게 된다. 피우면 안된다는 강력한 암시는 그 사람의 중추신경을 완전히 통제한다. 자기최면에 의한 담배끊기 반드시 성공한다.

 

 

3.4. 미래를 내다보는 비법

 

무슨 아닌 밤에 홍두깨 같은 소리냐구요? 사람이라면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단지 미래를 개척해가거나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한 미래를 자신이 만들어 간다면 결국은 자신의 미래는 자기 손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최면에 의한 자기 미래의 설계와 암시는 곧 자신의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게 될 것이다. 즉, 자기 최면에 의한 미래의 청사진이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가 잘되기를 바라지 나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침에 까치가 울었더니 반가운 손님이 왔구나 하는 것은 일종의 풍습이기 이전에 어느정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한다. 까치의 습성에 의한 특이한 현상이라고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최면술도 과학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자기 최면도 자신의 능력에 맞게 실현 가능한 암시를 하게 되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초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가히 이정도면 초능력(ESP)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매우 강한 암시는 강한 염력을 발휘하게 되고, 자신이 모르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도덕적인 투명성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을 초능력에 끌어들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초능력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많다. 단지 불가사의한 일로 생각하기보다는 인간 능력의 최대한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누구에게나 권해보고 싶은 부분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부분의 뇌를 사용한 사람은 아인쉬타인이라고 한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아인쉬타인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두 분은 모두 인간 능력의 최대 사용이라는 공통점을 같고 있다. 인류과학사에 크게 공헌한 아인쉬타인은 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굉장히 많은 능력을 소유했던 위대한 과학자요, 발명가요, 예술가이다.

 

 

누구나 아인쉬타인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될 수 있다.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두사람은 외계에서 날아온 슈퍼맨이 아니다. 우리도 이제 강한 능력, 초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의지 싸움이다.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공사장 막노동을 하면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간 청년의 기사를 읽어보았으리라. 사람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 청년은 강한 자기 암시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자기 의지가 약해서는 그런 일을 해낼 수 없다. 그 사람의 일을 남들은 초능력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것뿐이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다. 그들은 모두 초능력자인 셈이다. 보통사람의 능력 이상이므로 초능력이라고 해야 옳겠다. 엄밀히 말하면 초능력은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것이지 능력 범위를 벗어나서 이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타인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점쟁이들이 할 일이며,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자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미래를 보면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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