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네프로제(신장실질내 세뇨관인 네프론의 퇴행변성에 의해 생기는 일종의 신장병) 증후군을 앓는 여성이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나를 만나러 왔다.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요."
얘기인즉, 자기는 난치병에 걸려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죽을 때만은 웃으면서 죽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것이다.
참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끔찍이도 어두웠다. 함께 있기만 해도 주위 사람들까지 착 가라앉게 만들 정도 였다. 먼 곳에서 찾아온 상담자한테 너무 쌀쌀한 대답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느낀 점을 말했다.
"안됐지만, 소원을 이루긴 어려울 것 같군요."
그녀는 의외였던지, 샐쭉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째서요?"
"글쎄, 지금 웃지 못하면 죽을 때도 웃지 못해서요."
"하지만, 죽을 때 웃을 수 있으면 되잖아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웃도록 하시지요."
"지금은 괴로워서 도저히 웃을 심정이 아녀요. 그러니까 이렇게 선생님께서 어쩌면 좋을지를....."
"그러니까, 난 지금부터 웃으시라고 하잖아요. 지금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내일도 못 웃어요. 더군다나 내일 살아있을지 어떨지 보장도 없구요."
"이렇게 매정한 분인 줄은 몰랐어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간을 소유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다. 그녀는 죽을때라는 목표를 미래에 설정하고 대화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 미래라는 것도 현실적으로 마주치면 역시 '지금'이다. 그래서 지금 웃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웃지 못한다. 그녀한테는 그 점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사람은 지금 이순간 밖에 살 수 없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야 할 시간은 '지금'이다. 확실히 지금 병우로 신음하는 사람한테 '자, 웃으세요'한다고 해서 '네 그럴게요'하며 웃을 수 있으리리고는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괴로운 것은 비단 병든 사람만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도 일이 잘 안 풀린다든가 부부사이가 험악하다든가 등등 가지가지 괴로움을 안고 산다. 그런 뜻에서 난치병을 앓는 사람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런 우화가 있다. 하는 일마다 번번이 실패하는 사내가 있었다. 세상을 비관한 그는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그것마져 실패한다. 사내는 더이상 살아갈 방도가 없어 다리 위에서 하느님께 소원을 빌었다.
"제발 제게 행복한 인생과 건강을 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이 나타나 '옳지 그러마'고 응답하셨다. 이때부터 사내의 인생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조롭게 풀려 돈도 건강도 다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인간이란 으레 그렇듯이 얼마 안 가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더러는 실패도 하고 고통도 맛보고 싶어 이것저것 엉뚱한 일에 손을 대 보지만 하는 족족 성공, 성공뿐이었다. 전에는 그토록 성공을 소원하던 그도 이제는 다 귀찮기만 했다. 정말이지 산다는 것이 이토록 지겨울 줄이야. 사내는 또다시 자살을 시도하나 죽는 일조차 마음대로 안된다.
"아아 그야말로 산 지옥이구나. 하느님, 절 좀 제발 어떻게 해주세요!"
다시 하느님이 나타나서 "알았다"고 대답하는 순간, 사내는 눈을 번쩍 떴다. 일장춘몽. 한낱 꿈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병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건강'타령을 하다가도, 막상 건강해지면 '병도 안나다니'하고 투정을 할는지도 모른다. 직장 일을 쉴 수 없는 사람들 중에는 '더러 아프기라도 하면 좋으련만'하고 엉뚱한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네프로제 증후군을 앓는 그 여성도 그렇다. 웃기를 원하면서도, 지금 웃는 것은 완강히 거부한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이 소원을 들어주려 해도 들어줄 방법이 없다. 하느님조차 들어줄 수 없는 목표를 마음대로 정해 놓고 원한다는 자체가 애당초 순 어거지이다.
'지금 불만이면, 설사 온 세계를 손에 넣는다 해도 역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는 말도 있다. 그 말 뜻을 하루 속히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