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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구성학

[스크랩] 정약용이 고민한 진국(발해)의 서경압록부 위치

작성자교수|작성시간17.10.05|조회수506 목록 댓글 0

정약용은 발해의 서경 위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아래는 그의 저서 <강역고/발해고>에 있는 그 고민의 일단입니다. 


요의 녹주는 곧 발해의 압록주인데, 신주에 치소를 두었다. <당서/지리지>에는 환도성에서 동북쪽으로 200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에 이르고, 400 리를 육지로 가면 현주 중경에 이른다고 했다. 그러니 이른바 신주 서경은 마땅히 지금의 우예자성 북쪽 강 건너 땅에 있었을 것이다.

...중략...

봉황성이 만일 동경이라면, 중경은 마땅히 지금의 우장과 해성 사이에 있었을 것이고, 남경 남해부는 금주.여순 어귀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동.서.남.북의 이론과 실제가 서로 맞을 것인데, 여기에는 그렇지 않다. 이른바 서경 압록부는 동경 동쪽 몇백 리 밖에 있다. 속말의 서생이 아무리 배운 것이 적더라도 동쪽을 가리켜 서쪽이라 하고 북쪽을 남쪽이라 하여 이처럼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추정지도 - 1830 년 대 청나라 역사지리가들과 정약용 등 조선 선학들이 인식한 지리




위 추정지도와 같은 지리를 인식하였던 정약용은 당시로부터 약 1000 년 전의 고대국 震진 곧 발해의 상.중.동.서.남경 등을 청국 시기의 봉천성 곧 요동과 길림성 길림부를 벗어나 훨씬 동쪽 지역인 영고탑이 있는 길림성 영안부 지역 중심으로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학계에서는 명.청 시기의 요하를 지금의 요하였다고 단정하기 때문에 정약용 등이 인식한 진의 5 경 위치도 지금의 길림과 지금의 압록강 주위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약용 등 조선 선학들을 명백하게 욕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아이들이 꼭두각시국 만주국을 세우고 1934 년에 만주국지도를 만들면서 위 추정지도에 적색으로 표시된 난수.란하를 지도에서 지우고 그 이름을 동쪽으로 옮겨 원래의 요하 위치에 란하라고 표시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 선학들이 인식한 요하는 현대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지금의 요하일 수가 없고 지금의 란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신채호가 <조선상고사> 등에서 고대의 요수는 란하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청국이 멸망하는 1911 년 당시 난수.란하를 비롯하여 그 동쪽에 아무 문제없이 약 2100 여년 동안 흐르고 있었던 대릉하.요하.압록강.살수.대동강.소양강 등도 차례대로 동쪽으로 약 2000 여리 씩 이동되어 지금의 대릉하.지금의 요하.지금의 압록강.지금의 청천강.지금의 대동강.지금의 소양강이 된 것입니다.



고지도 - 1751 년 조선 영조 26 년 제도된 것으로 알려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원본 2 부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웹지도검색


주)               산해관                            요하      심양  흥경압록강 길림부           백두산영고탑(길림성영안부)     

 

추정도- 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가 묘사한 범위

 

                              

주)     산해관                       요하              압록강 송화강 백두산(장백산)토문강 호이합하 경박호  오소리강   흑룡강



고지도 - 1621 년 명나라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


주)   바다(灣.요하하류) 압록강 고려서경대동강                        조선-개성                       소양강          바다(지금의 요하)


추정도 - 위 조선도가 묘사한 범위





하지만 정약용의 진국 5 경 비정은 그리 정확한 것이 아니였다고 판단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진국은 요동 지역을 거의 차지하였고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에 주석된 염난수 곧 진.발해 시기의 구려하.서압록강이 발원하여 전.후한 시기 요동군 서안평현을 경유하는 지역 부근에 서경 압록부를, 요동군 요양.요수현 남쪽인 청 시기 해성현 지역에 남경 남해부를 설치하였었고 중경은 왕검조선의 태백산 아사달 지역에, 상경.동경은 숙신.읍루 지역인 청 시기 길림성 쌍성부와 영안부에 설치하여 당시의 철리.월희.흑수말갈을 통령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정약용은 진국이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국이 멸망하고 약 200 여년이 흐른 후 편찬된<삼국유사>에서 당시의 요하를 압록강.안민강이라고도 하였다는 설명과 같이 거란.요국 및 고려 시기의 요하는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명백하게 <한서/지리지>의 염난수일 수 밖에 없는데 이 염난수는 <한서/지리지> 기록 직후 그 이름이 잊혀졌고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곧 진국이 건국한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압록수가 동남쪽에 따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압록수.구려하.안민강 등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진국은 한 시기의 현토.요동 전지역인 거란.요국의 동경요양부 전체와 서쪽으로 더 나아가 상경 임황부 동쪽 지역까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국의 압록수인 전한 시기의 염난수는 고구려의 국내성 남쪽을 흐르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압록수와는 전혀 다른 압록수로 고구려 압록수의 서북쪽 지역에서 대략 정남류하였으며 그 발원지는 <통전/동이하/고구려> 기록과 같이 말갈 지역의 백산 곧 <청사고/지리지> 기록과 같이 청 시기 봉천성 창도부 요원주에 있는 고열눌와집이였고 청 시기 요하의 동쪽 상류인 동요하.혁이소하였습니다.


이 동요하는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에 주석된 마자수로 청 시기 서요하.신요하로 명시된 물길과 합쳐서 요하가 되었으며 전한 시기의 염난수인데 대략 정남쪽으로 흘러내리다가 요동군 서안평현을 경유한 물길이였고 당 시기 두우가 편찬한 <통전> 설명과 같이 고구려가 차지한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며 고구려 땅 중앙을 흘러내리는 압록수 곧 동압록과 합쳐진후 안평현을 지나 바다를 들어갔던 것입니다. 


아마도 요동군 서안평현은 고구려의 안평현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왕망이 북안평으로 개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쨋든 전한 시기의 염난수이며 진국의 서압록은 거란족이 진국을 꺽고 굴기한 이후에서야 요하로 개칭되었으니 <삼국유사>에서 요하는 압록강.안민강이라고도 하였다는 설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당 시기 <통전><신당서> 등에서는 진국의 서압록과 고구려의 동압록수를 혼동하여 영주에서 진국으로 향하는 이정을 동압록을 경유하는 신주.서경압록부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진국의 서경압록부는 고구려의 국내성 남쪽을 흐르는 압록수 부근이 아니라 전한 시기의 염난수 곧 요동군 서안평현 부근에 설치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추정도 - 백랑수가 추정하는 진국 5 경 위치와 삼한을 통일한 신라 강역




한편 조선에서 제작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일본아이들이 지금의 대한반도를 덧붙쳐 아래와 같은 변조.조작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를 만들어내었고 현 한국사학계는 1980 년에 한국보물 1537?호로 지정하였습니다.



변조.조작도 - 보물 1537호로 지정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위 조작서북도에 표시된 백두산의 좌향은 조선 시기 이익.이중환 등이 그들의 저서인 <성호사설>이나 <택리지> 등에 지관들의 말이라며 인용한 백두산 좌향인 해좌사향과도 맞지 않습니다. 즉 조작서북도에 표시된 백두산의 좌는 `丑`이나 `寅` 곧 시계 시침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기준지인 한양.서울에서 2 시 방향에 위치한 셈이니 원본 서북도면 백두산 북쪽에 표시된 `亥`방향 곧 11 시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또한 원본 서북도면에 정북 표시가 있는 곳은 청.조선 시기의 흑룡강의 동류 끝 지점 곧 지금의 서요하와 동요하가 만나는 지점인데 조작 서북도면에 표시된 흑룡강 하구 역시 정북에서 동쪽으로 기울어진 `丑` 방향에 있으니 보물로 지정된 서북도는 조선 선학들이나 지관들의 말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1910 년 대한제국이 일본놈들에게 강제병합될 당시의 강역은 아래와 같았던 것입니다.



고지도 - 1720 년 네덜란드에서 간행된 인도.중국지도에 묘사된 조선 강역

            출처 ;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조작도 - 일본 참모본부에서 축소.조작한 1875 년 당시의 조선 국경선

             출처 ;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하지만 일본놈들이 모든 지도를 변조.조작할 수는 없었는지 아래와 같이 1894 년 당시의 역사사실과 일치하는 지도도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고지도 - 일로청한진경지도(日露清韓真景地圖)

            일본, 다나카 센노스케(田中仙之助), 1894년, 72.3×52.0㎝

            출처;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이 지도는 민간지도이지만 한반도와 만주의 주요지에 대해 상세히 그려진 지도다. 청일전쟁이 시작된 1894년에 작성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러시아군인의 모습이 그려진 것을 보면 러일전쟁까지 시야에 넣고 작성된 지도로 보인다. 일본군인과 러시아군인의 모습이 지도 가장자리에 그려져 있다.


즉 지금의 요서와 요동 및 길림 일부 지역에도 대한반도에 적색으로 묘사된 방어진 표시가 똑같이 묘사되어 있는 것은 지금의 요서.요동 및 길림의 일부 지역이 1894 년 당시 조선의 강역이였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 500 년 동안 조선의 서북 경계선인 압록강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끝 너머 하북성 지역에 흐르는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지금의 청룡하였고 조선의 백두산은 지금의 백두산이 아니라 중국 요녕성 서쪽 지역에 있는 노로아호산 부근이였으니 두만강이나 간도 역시 지금의 중국 요녕성 북표.부신 부근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약용.김부식 등을 위시한 모든 고려.조선 선학들이 인식한 평양성.개성도 지금의 란하 동쪽이였으니 낙랑군이 설치된 곳도 당연히 지금의 대릉하 서쪽 상류 지역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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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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