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인 이야기/ '충실한 신앙인' 성 피델리스 신부 /선교사 순교자 (축일:04.24.) ♡
副題 :
이름으로도 실제로도 '충실한 신앙인' 식마링겐의 성 피델리스
* 원문을 보시려면 아래 글 주소를 크릭하세요 */ 옮긴이 : 한 아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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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신앙인]
-'Vir nomine et re Fidelis', 이는 ‘이름으로도 실제로도 충실한 신앙인’이라는 뜻이다.
베네딕토 14세 교황은
마르코 로이(식마링겐의 성 피델리스)를 이렇게 표현하면서 그를 카푸친의 새로운 성인으로 선포했다. 피델리스(Fidelis)는 ‘믿음’을 뜻하는 피데스(Fides)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따라서 피델리스라는 이름은 ‘충실하다’라는 뜻과 ‘신앙인’이라는 뜻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교황은 그 이름이 지닌 의미를 잘 짚어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름으로도 실제로도 충실한 신앙인이었던 피델리스는 지칠 줄 모르는 가톨릭 신앙의 열정적인 옹호자였습니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피델리스의 사랑]
-피델리스 형제는 순교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며칠 전, 마지막 강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오 가톨릭 신앙이여,
너는 얼마나 항구하며 견고한지,
또 얼마나 훌륭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또 얼마나 튼튼한 반석 위에 세워져 있는지!
하늘과 땅은 사라져 버릴 것이지만 너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처음부터 온 세상은 너를 거슬러 왔지만 너는 모든 것을 누르고 힘차게 승리했구나!”
“세상을 이기는 길은 우리의 신앙(믿음)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권세 높은 임금들을 그리스도의 법에 복종하게 하였고,
모든 민족들이 그리스도를 섬기게 했습니다.
신앙, 특히 부활에 관한 신앙이 아니라면,
거룩한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격렬한 투쟁과 고통을 감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살아있는 신앙이 아니었더라면,
무엇 때문에 은수자들이 쾌락을 멸시하고 명예와 재물을 등한시하며 고독 속에서 독신 생활을 영위했겠습니까?
오늘날의 참된 그리스도인들 또한 무엇 때문에 편안함과 즐거움을 버리고 고통과 수고를 스스로 감내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사랑으로 드러나는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죽기까지 충실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
-피델리스 형제는 카푸친에 입회하면서 스스로 피델리스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수호자는 이 새로운 수련자에게 성경을 인용하며 그 이름의 근거를 설명해주었다.
‘주님께서는 죽기까지 충실한 사람에게(fidelis) 생명의 화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묵시 1,10)
[뛰어난 변호사]
피델리스 형제는 1577년 독일 남부 '식마린겐(Sigmaringen)'이라는 고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마르코였다.
그의 아버지 요한 로이(Roy)과 어머니 제노베파는 경건하고 독실한 신자였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마르코는 베네딕토회에 맡겨졌다.
그는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겨우 만 16세에 프리부르크(Freiburg)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앞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는 법조계에서 출세하기를 원했고,
특히 가난한 이와 학대받는 이들의 변호사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 먼저 가정교사로 일했고,
6년간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페인 등지의 유명 대학을 순방하면서 견문을 넓히려 노력했다.
귀국 후 마르코는 엔지스하임(Ensisheim)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는 정직했으며 정의를 추구했다.
따라서 그는 뇌물 따위로 인해서 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었다.
그의 청렴은 곧바로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몹시 동정하였고,
행여 그들에게 악을 행사하면 가차 없이 그 사람들을 꾸짖었다.
뒤가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은 피델리스 형제를 몹시 두려워했다.
그들은 그를 모함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려 무진 애를 썼다.
[카푸친에 입회하다]
-그를 모함하는 사람들로 인해 피델리스 형제는 세속에 대한 염증과 증오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변호사를 그만두고 형 지오르지오를 따라 카푸친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청렴하고 학식이 깊은 그는 입회 전에 성품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수련기 동안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겸손함을 본받으려고 노력했고,
성찬례를 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 뜨거운 사랑에 사로잡혔다.
그는 세속에 있을 때의 자신의 지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설거지, 청소, 장작 패기 등등 그 어떤 일도 싫어하는 내색없이 열심히 했다.
그리고 서원을 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재산을 2등분하여 반은 빈민구제를 위해, 반은 가난한 신학생을 위해 썼다.
[지칠 줄 모르는 설교자]
-신학 공부를 마친 피델리스 형제는 주로 독일 남부와 스위스에서 개신교 신자들의 개종을 위해 밤낮으로 활약했다.
사도직 수행시 그는 오직 십자가와 성경, 성무일도와 수도회의 회칙과 회헌만 지니고 다녔다.
열심한 기도와 고행으로 설교를 준비했고,
바쁘게 곳곳을 돌아다니며 설교를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또 설교뿐만 아니라 피델리스 형제는 출판물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교회와 이교의 차이점을 명백히 밝힌 서적들과 팸플릿을 발간했다.
그러한 피델리스 형제의 노력 덕분에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회개하여 다시 가톨릭교회로 돌아왔다.
개신교의 지도자들은 피델리스 형제를 대단히 미워하였고, 온갖 수단을 써서 그를 방해하려 들었다.
[잔혹한 순교]
-1622년, 피델리스 형제는 포교의 임무를 맡아 8명의 카푸친 선교사들의 장상으로서 스위스 그라프분덴에 파견되었다.
그곳은 열혈 칼빈교도들이 들끓는 칼빈의 중심지였다.
살해 협박이 있었지만 피델리스는 이를 순교의 영광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곳으로 갔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좋은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그런 만큼 개신교도들은 그를 미워했고,
급기야 그들은 피델리스를 살해하려고 모의했다.
그들은 피델리스를 찾아가 그리스도 부활축일에 세뷔스(Sewis)로 와서 설교해 줄 것을 청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피델리스는 쾌히 승낙했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군중들에게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다’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를 향하여 총을 쌌다.
하지만 명중되지 않아서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단자들이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그에게 달려들어 창과 칼로 무자비하게 그를 찔러 죽였다.
그때가 1622년 4월 24일이었다.
피델리스 형제는 죽어가면서도 팔을 십자가 모양으로 벌리며 기도했다.
“오! 주님, 이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열정에 눈이 멀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느님의 어머니, 저를 도와주소서!”
-피델리스 형제의 이러한 행동은 이단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목격한 한 목사는
“아, 죽어가는데도 저러한 힘을 주는 종교야말로 참된 종교구나!” 하고
절규하며 그 자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746년 , 피델리스 형제는 교황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포교성성의 수호성인이면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이다.... .이상
카프친형제회 홈피에서 한 아타시 (ofs 서울루케치오)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