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에게서 감사를 배우다
161120낮 (눅17:11-19)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아멘
오래 전에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세계적인 종으로서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증거 하시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런 목사님의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는데 그때 목사님이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했다고 합니다. '우리 딸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목숨 잃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우리 딸이 두 다리를 다 잃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왼쪽 다리만 잃고, 오른쪽 다리가 남았으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부인을 향하여 '여보! 우리 딸에게 성한 두 팔과 이목구비가 있지 않소, 우리 잃어버린 것은 헤아리지 말고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합시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슐러 목사님의 딸이 병원에 누워있을 때 많은 성도들이 문병을 가서 여자가 한쪽 다리가 잘려 한쪽 발로 걸어야 되는데...어떻게 하느냐고? 불쌍하게 여기고 걱정하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얘기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걷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걷느냐가 중요합니다” 비록 한쪽 발로 걸어도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 중요하다는 고백입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신앙인의 고백입니까? 사실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과 없는 것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리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라는 말은 '생각한다.'에서 나온 말로써 '깊이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니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우리교회가 추수감사 축제예배로 드리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엘리베이타를 허락하셔서 공사를 마치고 준공감사도 겸해서 감사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떤 한 촌에 들어 가셨습니다. 거기서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습니다. 여러 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서로 접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 환자들은 다 같이 불행한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불행한 가운데 서로 동정 하면서 유대 사람이나 사마리아사람 할 것 없이 같이 지냈던 모양입니다. 병에 걸리고 보니까 출신성분이 아무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거지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맞습니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죽을 둥 하고 부여잡고 내 세웠던 것들이 죽음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둥병자가 되고 보니 아홉 명의 유대인들이 건강할 때는 상종도 안했던 사마리아인 한명을 품고 의지하며 지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문둥병은 죽음과 같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이 병에 걸리면 격리시켰습니다. 사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병에 걸린 사람들끼리 모여 지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이 있는 곳 가까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들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직접 뵙게 되니 너무 감격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향하여 절실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 환자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이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아무런 느낌도 변화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병에서 깨끗해져라고 하시면 온몸이 불덩어리 같이 뜨거워지든지, 감당할 수 없는 경련을 일으키든지,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하든지, 어떤 체험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체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사람들은 기대하는 바와는 달랐지만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릅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직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없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들이 병 고침을 위하여 다 함께 예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다함께 완전히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열 사람이 간구했는데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주님께 찬양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아홉 사람은 왜 주님께 감사드리지 못했습니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특징은 감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감사가 넘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회입니다. 지금 이사회가 최순실게이트로 엄청난 혼란속 에 빠졌습니다. 온 사회가 원망뿐입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 국민이 감사할 조건을 찾고 감사할 수 있다면 희망이 있을 것인데...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이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 버렸는데 이상하게도 전부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인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인이 아닙니까? 이 유대인들은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여러 선지자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매 안식일이면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은 전 부가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으례히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감사를 많이 해야 할 사람이 감사를 못하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살후2:13, “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마땅히 하나님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감사라는 것입니다. 이 마땅한 감사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알아보며 은혜를 받고 다음 주일 추수감사축제일에 우리 모두가 즐거움과 행복한 마음으로 넘치는 감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합니까? 본문의 이방인에게서 배워 봅시다.
1. 감사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면서 감사를 조건으로 걸고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렇게 와서 감사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면서 돌아와 감사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섭섭해 하시는 겁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를 조건으로 병을 고쳐주신 것은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와서 감사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야 마땅하지 않느냐? 그것이 오늘 성경에 나타난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뭐, 그 사람들 감사 안했다고 해서 병이 다시 재발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너 감사하지 않았으니 영원히 너는 문둥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예수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슬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아홉에 대한 이야기가 늘 궁금해요.
'그 아홉의 변명' 이라고 하는 작자 미상의 글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만합니다.
한 사람은 '의사와 제사장에게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 겠다' 해서 갔다는 겁니다. '이게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는지.' 아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지' 그래서 가버렸어요.
두 번째 사람은 혹, '재발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런고로 며칠 두고 봐야겠다.' 이거, 신중론이요. 이거 나았다고 하는데 꿈같은 얘기라서 정말 나았는지 좀 기다려 봐야겠다는 거예요.
세 번째 사람은 '내 병은 본래 문둥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였던가 보다.' 이건 회의론자입니다.
또 그 다음 사람은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았을 거야.' 이건 자연현상으로 보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일들이 많잖아요. 어떤 병 걸렸다가 나았을 때, "어떻게 나았어?" "그저 뭐, 약도 좀 쓰고 병원에도 가긴 했지만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나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또 하나는 병 걸리기 전에 가졌던 밭과 재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이게 궁금해요, 이제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그걸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버렸어요.
또 한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수절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요. 그래서 가버렸다.
또 한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해준 것이 없잖아.' 안수를 해준 것도 아니고, 어루만져준 것도 아니고, 안찰을 한 것도 아니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아, 그저 "가서 보여라" 한 말씀 밖에 안했는데 아, 뭐 예수님이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란 말이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유명한 랍비들도 이런 것은 아마 가능할는지 몰라.' 예수님의 능력을 상대화 해버렸단 말이죠.
또 한사람은 '이 모습대로 갈 수는 없잖아. 가서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께 가야지.' 그래서 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아홉 사람이 어떤 변명으로 감사하지 않았을까를 상상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 한사람은 이 모습 이대로.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문둥병자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습니다. 그 더러워진 거, 그 붕대감고 있는 거, 이 모습 이대로, 이대로라면 어떠냐? '예수님이 벌써 우리를 환영해주시고 사랑해 주셨는데, 이 모습 이 추한 모습이면 어떠냐?' 이 모습 이대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이방인 한사람 사마리아인은 감사를 우선했습니다. 많은 이유와 핑계거리가 있었지만, 만사를 제쳐두고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하는 것을 최우선했습니다. 감사가 우선순위가 되어야만 제대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감사가 우선순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지금 감사절에 감사해야 합니다.
R. A. Toray 라고 하는 목사님께서 쓰신 책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미시간 주에 풍랑이 일어나서 배 한 척이 파손이 되었었습니다. 그때 한 수영선수가 목숨을 걸고 뛰어 들어가서 무려 스물세명이나 구조를 했습니다. 그것이 신문에 나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요. 아주 오랜 후에 토레이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미시간호에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 청년 하나가 23명의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습니다' 하는 그런 설교를 했더니 설교가 끝났을 때쯤 해서 한 노인이 하는 말이 "제가 바로 그때 그 청년입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23명의 목숨을 건진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예배 후에 내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들어와서 차를 나누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당신이 그때 겪었던 일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노인이 하는 말이 "한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도 온 일이 없습니다." 아무도 감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이렇게 감사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까? 감사한일이 생겼을 때 바로 그 시간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하기가 힘들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루만 지나도 몇 시간만 지나도 생각이 바뀝니다. 오늘 이 아홉 사람의 변명처럼 말입니다. 감사 못할 이야기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요. 그래서 못하게 되어버리고 말아요. 바로 이 시간 감사하지 않으면 영영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 년에 두 번의 감사절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늘 감사를 잊고 살아갑니다. 감사절기만이라도 감사할 조건을 떠올리며 감사할 수 있으니 감사한일이지요? 감사절마저 없으면 일 년 내내 감사를 잊고 살아가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감사절만이라도 그간 잊었던 감사의 제목들을 헤아리며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러면 다음 주 추수감사절에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1) 넘치는 감사를 헤야 합니다.
골2:7절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넘치는 감사를 하라고 말씀 했습니다. 인색한 감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풍성한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신16:14-15절에서는 절기를 지킬 때, 잔치하며 즐겁게 지키라고 합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宴樂)하여 잔치를 배설하라'고 했습니다. 온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감사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절기 때는 물질도 풍성하게 드려야 하지만, 온 가족과 이웃도 함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주일 혼자 나와 드리는 감사보다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즐거움과 기쁨의 감사절기가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2) 말로 감사해야 합니다.
엡5:4절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고 말씀합니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많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입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3) 입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골3: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4) 가장 소중한 것으로 풍성하게 감사해야 합니다.
출23:15절,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3:9-10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의 상징인 첫 열매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는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정신인데, 신앙생활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봉헌생활'입니다. 나의 순전한 마음을 드림으로써 봉헌하고, 나의 소중한 시간을 드림으로써 예배하고, 나의 소중한 것을 드리고 봉헌하되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봉헌의 정신입니다. 이번 추수감사주일에는 어느 해 보다도 소중하고 풍성하게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5) 하나님 앞에 예배드림으로써 감사해야 합니다.
시50:14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했습니다. 감사절기에는 꼭 성전에 나아와 감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한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감사절에는 내가 직접나아와 하나님 앞에 감사의 표현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23:14-17에 이스라엘 모든 사람은 일 년에 세 번, 즉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을 지키되 "그때에 모든 사람이 나 여호와께 나타나 보일지니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신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기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와 하나님께 그 모습을 보이라고 말씀합니다. 절기 때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 것이 감사의 기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절 예배에 몸으로 꼭 참석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보임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절기 때마다 빠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절기는 날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쁘고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있어도, 어떤 인간관계속에서도, 미리미리 그날은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년 11월 넷째 주에 추수감사주일을 축제예배로 드립니다. 모든 부서가 참석하여 하나님께 찬양으로, 몸짓으로, 우리의 감사를 기쁘게 표현해 드리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연습하고 준비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6) 깨닫는 감사를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이 주는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주어지는가 하면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깨닫게 될 때 거기서 힘이 나오고, 거기서 자발적인 동기가 발생되고, 기쁨과 감사한 마음이 자리 잡게 됩니다.
본문의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 문둥병자는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했습니다. 그렇게도 무시를 받고, 죄인 취급을 받고, 짐승 취급을 받고 살던 그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만 다시 찾아와서 정중하게 감사함을 표현했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모두 양반처럼 행세하며 교만하게 살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문화인이고, 누가 도리를 아는 사람이고, 누가 깨닫는 사람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모두 어디 갔느냐?' 그래서 깨닫는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값은 이같이 은혜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도리를 알고 느끼고 갚는 데 있습니다.
맹장 수술 받아보셨어요? 저도 한번 맹장 수술을 급히 받아본 적이 있는데, 이런 수술을 받은 다음에 의사와 환자가 같이 기다리는 것이 가스가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나올 때까지 밥도 못 먹고, 끝까지 않나오면 재수술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가스가 나오면 아, 살았다고, 서로 기뻐하고 감사해 합니다. 아마 방귀 꼈다고 그렇게 고마워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냄새가 고약하다고 방귀 낀 사람 옆에는 앉지도 않지만, 방귀뀔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런 것이 바로 깨닫는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추수감사절은 깨닫는 감사가 많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몇 년 전에 브라질에 있는 유명한 아마존 숲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는 나무꼭대기에 지은 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40m나 되는 아주 큰 나무 꼭대기 나뭇가지 사이에다가 꼭 까치집처럼 지은 방이 있는데, 그 호텔에서 그 방이 제일 비싼 방이랍니다. 사다리를 타고 한참 올라가야 되는데, 그런 방에서 며칠을 유숙하는데, 밤에 자는 동안에 지붕 위에 원숭이들이 모여가지고 얼마나 시끄럽게 하는지 정신이 없고요,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면 문 앞에 원숭이들이 있다가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막 달려듭니다. 그런데 그 호텔에 사장님 되시는 분하고 사귈 일이 있어서 이분하고 같이 숲을 걸을 때, 그 사장님이 바나나를 한바구니 들고 가면서 특별히 어린 원숭이들이 올 때 하나씩 주더래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을 받아갈 때 탁 잡아가지고 가로채가지고 도망을 가더랍니다. 빼앗듯이. 매일같이 그렇게 준다는데도 좀 공 손하게 받지를 않고, 받자마자 탁 잡아채고는 막 도망을 간답니다. '저놈들이 왜 저럴까?' 물어보았더니 "이것이 동물과 사람이 다른 점입니다." . 동물은 내가 한평생 바나나를 이렇게 주어도 고마운 줄 모릅니다. 이게 특징입니다. '왜 저렇게 도망가느냐?' 그것은 불신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을 주고 자기를 붙잡을까봐 그저 이것만 받아가지고는 도망을 간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보고 이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쉬울 때만 달라고 기도 하고, 주시면 얼른 받아 채기 바쁘고, 받고 돌아서면 감사 할 줄 모르고, 더 이상 기도하지도 않는 우리가 아닌가요? 이런 모습으로 늘 반복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6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절) 주님은 이방인의 감사보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감사하지 않는 유대인의 모습에 더 슬퍼하시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불신자는 감사하는데, 우리 믿는 자들은 감사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불신자보다 감사할 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열사람 중에 아홉 명이나 감사하지 않았다고 아홉 사람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열사람 중에 단 한사람이 감사했어도 그 한사람이 옳은 것입니다. 모두가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나 한사람만이라도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