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랑과 조건
170402주일낮 (요21:1-17)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10.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아멘
<성지순례 중 일부 사진> 영상으로 띄우고 설명을 한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셔서 끌려간 가야바 대제사장뜰과 베드로통곡교회사진들(4장), 십자가의 길 재현 사진들(14장), 골고다언덕에서 못박히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과정의 사진7장), 사도바울의 감옥과 순교터 세분수교회(7장), 음악의 수호성녀 산타치실리아(1장)
1. 주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하는 말과 같이 극히 일부분 밖에 주님의 사랑을 말씀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과 성지를 돌아보고 느낀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내 죄를 대속하신 사랑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평안하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신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조롱과 저주와 침 뱉음과 십자가를 지심과 채찍에 맞으심과 가시면류관을 쓰심과 등가죽의 찢어짐과 손과 발에 대못을 박히심과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시고 피 한 방을 남김없이 다 쏟으신 고통중의 고통으로 신음하시면서 죽으신 죽으심입니다.
2) 찾아오시는 사랑입니다.
실패한 베드로, 죽는데 까지도 따라가겠다고 큰소리치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배신자가 된 베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면목이 없을 뿐 아니라 수치심에 도망치듯 다시 본업인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돌아갔던 베드로를 먼저 갈릴리 바다까지 찾아와 주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손 내밀어 주시고, 먼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3) 배반한자도 축복하시는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여섯 제자들과 함께 본업인 갈릴리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갔으나 밤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합니다. 허탕질만 하며 베드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예수님을 배반하니까 하나님이 저주하셔서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하게 하신다고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빈 그물을 걷어 올릴 때 마다 베드로는 별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라고 우리와 다르겠습니까?
우리도 물질의 손해를 보면 십일조를 안 해서 그러나? 하는 일마다 안 되면 요즈음 믿음생활을 제대로 안 해서 그러나? 자녀들이 다치거나 남편에게 문제가 생기면 엊그제 지은 죄가 생각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벌주시나? 별생각 다 들지 않습니까?
그런 베드로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 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6절)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이 잡혀 그물을 들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배반하고, 낙심했어도 찾아와 주셔서 축복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2. 주님의 조건(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조건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제자들과 조반을 잡수시면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양을 맡기는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 아가파스 메(άϒαπας με)”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피로 세(Φιλω σε)”
두 번 째 질문도 주님은 “아가파스 메(άϒαπας με)” 였고, 베드로의 대답은 “피로 세(Φιλω σε)” 였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이 세 번째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필레이스 메(Φιλεις με)”입니다. 네가 피로세의 사랑으 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근심하며 이르되 내가 “피로 세(Φιλω σε)”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세 번째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이 베드로에게 승천하시기전 주님의 양을 맡기시는데 원하셨던 조건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마지막 조건도 ‘사랑’(아가페, άϒαπε)이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나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원하셨던 사랑은 분명히 아가페의 사랑이었고, 베드로의 대답은 피로세(Φιλω σε)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고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답을 못 드렸는데도 주님은 어찌하여 귀한 사명을 베드로에게 맡기셨을까요? 이번 성지 순례 중에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하다 귀한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다 주를 버릴지언정 저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는데 까지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그날 밤 예수님이 로마군인들에게 체포 당하시고 대 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 당하실 때, 다른 주의 제자와 쫓아갔다가 거기서 주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잘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언정 자기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는 곳이라도 따라가겠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자기를 비교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 사랑이 커보여도 다른 사람과 비교된 사랑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 진정한 사랑은 주님과 나만이 존재하는 사랑입니다. 오직 주님과 오직 나와 만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사랑 같아도 세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다른 것들을 바라보고, 다른 것들이 보이고, 환경을 의식한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둘로 갈라진 마음으로 하는 사랑은 아무리 큰일을 해도 아무리 큰 희생을 해도 그것은 온전한 것이 못됩니다. 순전한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금방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큰소리로 외치는 사랑보다 자신의 진실 된 모습을 드러내놓고 부족함, 한없이 부족해서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랑, 그래서 피로세(Φιλω σε)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베드로였지만, 그래도 주님은 기꺼이 그 사랑을 받아 주시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지 다른 사람과 비교된 관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주변 환경은 어떻더라도 “나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 번 실패 후 자신을 찾아오셔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 앞에서 이제는 곁에 있는 다른 제자들을 보지도 않고,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모습 그대로 주님만 바라보고 고백을 합니다. 그 사랑이 비록 주님이 주신 사랑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 그대로 고백합니다. 진정으로 베드로는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힘으로는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누구와의 비교된 사랑이 아닌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드리는 고백이 비록 주님이 원하는 수준에 못 미치지만,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셨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순교함으로 주님이 원하셨던 아가페의 사랑을 주님께 보여 드린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믿음 생활하면서나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이 보이거나, 환경이 보이고, 비교가 된다면, 우린 아직 주님과 사랑을 시작하지도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예수님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네, 제가 주님을 사랑 합니다”라고 만 대답합니다.
젊은이들 말로 필이 꽂힌다고 하죠? 그 사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 옆에 아무리 멋진 남자가 있어도 전혀 눈에 보이지 않고 자기가 필이 꽂힌 남자만 보입니다. 옛날 사람들 말로는 눈에 콩깍지가 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환경이 보여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이 보여서도 안 되고, 물질이 보여서도 안 됩니다. 믿음생활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하면 실패합니다. 오직 주님과 나만의 관계 속에서 주님만 신뢰해야 합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위해서 죽었고, 바울도 복음을 위해서 순교했습니다. 로마 카타콤베에는 유대가 로마의 티토장군 에게 멸망당한 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로 노예로 끌려와 살게 되었는데, 그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다가 묻힌 지하 묘지이자 예배처소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산타 치실리아라는 여인의 무덤이 있습니다.(무덤설명) 그녀가 묻혔던 자리에 그녀의 시신이 그대로 썩지 않고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라가 된 시신은 박물관으로 옮기고, 그녀가 발견된 모습 그대로 석고를 만들어 그 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녀의 목에는 칼로 목이 베인 흔적을 그대로 표현해 놓았고, 죽으면서도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한 손가락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에 대한 일화를 들었습니다. 그녀가 로마로 끌려와 노예로 살면서 로만인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녀는 그 시집식구들을 모두 예수를 믿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발각이 되어 그녀를 처형하는데 목을 칼로 내리쳤는데 목이 떨어지지 않더랍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세 번이나 내리쳐도 목이 떨어지지 않자 망치로 머리를 대여섯 번 내리쳤는데도 죽지를 않고 계속 찬송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집에서 이틀을 더 살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음악의 수호성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으면서도 손가락을 세 개를 펼쳐서 무언가를 표시하고 죽었는데, 후대의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으라는 표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내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찿아 오시는 사랑입니다. 배반자도 축복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진실 되게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믿음의 사람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