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웨슬리의 회심
170521낮(웨슬리회심기념주일) (행9:1-5)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아멘
오늘은 요한웨슬리회심 279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칼빈이 장로교 창시자라면,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 창시자입니다.
대부분 사람을 기념할 때는 그 사람의 생일이나, 그 사람이 죽은 날을 기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 웨슬리를 기념하는 것은 그의 생일도 아니요, 그의 죽은 날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웨슬리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그의 회심 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를 위대하게 한 것은 그의 출생이나 그의 사망일이 아닙니다. 웨슬리를 위대하게 한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뜨거운 성령 체험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인줄로 믿습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웨슬리의 회심사건은 웨슬리로 하여금 그의 신앙과 사랑이 개인적인 삶을 넘어서 영국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웨슬리가 이 땅에서 세운 수많은 업적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웨슬리가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능력에 압도된 회심의 날이 웨슬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웨슬리의 모든 것이 이날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웨슬리에게는 그가 뜨거운 성령을 경험한 회심의 날이 그의 인생에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날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난 날이 그날이요, 성령을 체험한 날이 그날입니다. 그리고 아직 성령체험을 하고 회심의 경험이 없는 분들에게는 요한웨슬리에게 임하셨던 성령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요한 웨슬리 회심주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그날 일어났던 그 회개의 은혜를 기억하고 자 함입니다. 함창교회 하덕규목사님이 웨슬리의 일생에 대하여 잘 정리를 하셨는데, 그 자료를 토대로 웨슬리에 대한 삶을 장리해 보았습니다. 웨슬리의 삶을 통하여 함께 은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 웨슬리의 출생과 어린 시절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 웹어트 교구목사 사무엘 웨슬리와 수산나의 15번째의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가정학교를 만들어 열아홉 명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쳤습니다. 수산나는 자신이 자란 청교도 교육방식대로 자녀들에게 늘 아침과 저녁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등 시간표를 짜주고 이를 철저히 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
1707년 2월 7일, 5살 때 웨슬리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웨슬리는 화염에 휩싸인 집에 홀로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뛰어 올라갔으나 사나운 불길에 쫓겨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한 농부가 불구덩이가 된 목사관으로 뛰어 들어가 웨슬리를 구해내 오자 지붕이 곧 무너졌습니다.
이 사건을 들어 항상 웨슬리는 자신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 낸 부지깽이’(슥3:2)라고 불렀습니다.
스가랴3: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웨슬리는 이 경험을 통하여 진정한 구원은 “죄악의 불구덩이에서 죽게 된 죄인을 끌어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후 웨슬리는 평생토록 불타는 열정의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차터 하우스에 입학하게 됩니다. 차터 하우스의 6년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시골교회 목사의 아들을 부요한 학생들은 무시했습니다.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식사 때는 고기를 힘센 학생들에게 빼앗겼습니다. 만만치 않은 학교생활이었지만, 웨슬리의 믿음은 한결같았습니다. 웨슬리는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량하지 않고, 신앙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2. 웨슬리의 젊은(대학) 시절
1725년 22세 때 옥스퍼드대학을 다니던 웨슬리는 마침내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웨슬리는 그의 동생과 친구들이 조직한 신성클럽(Holy Club)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신성클럽의 회원들은 기도시간과 성경공부를 위해 함께 모이는 시간을 따로 정해 놓았을 뿐 아니라 가난한 가정에 나누어 줄 양식을 모으는 시간과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문할 시간 그리고 아이들에게 읽기를 가르쳐줄 시간 등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금식하면서 자선 사업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학생들이 조롱하며 붙여준 별명이 “규칙주의자들”(Methodists) 이었습니다. 감리교란 이름도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감리교회를 메소디스트 처치(Mothdist Church)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웨슬리 자신도 미국 죠지아 선교에 실패하고 난 후, 옥스퍼드 대학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때 자신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었고, 진정한 아들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3. 실패한 선교사로서의 웨슬리
1735년 10월 18일 웨슬리는 옥스퍼드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가는 시몬주호를 탔습니다. 미국의 인디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웨슬리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학식과 경력이라면 인디언 선교에 충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착각이었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동안 웨슬리는 여러 차례 풍랑을 겪었는데 그 때마다 웨슬리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동승한 모라비안 교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폭풍이 지난 후 웨슬리는 모라비아교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폭풍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만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때, 웨슬리는 자신에게 진정한 믿음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열심히 하면 성공하겠지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웨슬리는 사바나에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활동하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의 목회에는 엄격한 경건의 규칙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국 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성찬과 장례도 허락지 않았습니다. 또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성령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라는 성경에 비출 때 이는 명백한 오만과 편견이었습니다.
또한 빈틈없는 규칙으로 꽉 짜여진 웨슬리의 목회방침에 일반 신도들은 지쳐갔습니다. 급기야는 그와 때를 같이해 생긴 불행한 연애사건으로 웨슬리의 조지아 선교사업은 파국을 맞이하고 맙니다.
웨슬리는 사바나 식민지 장관의 딸 소피아와 사랑했지만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웨슬리가 성만찬을 집례 하는데 옛 애인이 신랑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웨슬리는 이 신혼부부에게 성찬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남편은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 웨슬리를 고소하였습니다. 이 불명예스런 고소에 신도들의 누적된 불만이 더해져 웨슬리는 조지아선교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교사 웨슬리는 철저하게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의 진정한 영성은 미국 조지아선교에 실패한 후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웨슬리에게는 이런 실패의 경험이 오히려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영국으로 돌아온 후 모라비아 신도들과 신앙교제를 했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실력과 열심어린 노력이 실패한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조지아선교는 웨슬리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자 가장 큰 실패였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인들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풍랑 속에서도 두려움 없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그들의 믿음은 어떻게 죽음을 이길 수 있었을까? 몹시 궁금했습니다.
모라비아 교인들은 웨슬리의 의문에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영을 통하여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 하십니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당신은 예수님이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알고 계십니까?”
웨슬리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질문을 받고, 어물어물 대답은 했지만 집에 돌아와 자신의 대답이 혹 빈말이 아니었나 하여 크게 두려워했었다.“
4. 올더스게이트의 회심사건 이후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었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진정한 회심을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그 날 8시 45분 경 어느 한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 가운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 하시며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구절을 읽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일으키는 거룩한 변화임을 알았습니다.
모라비안 교인들에게 있었지만 자신에게 없었던 것, 아무리 열심히 목회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그는 이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죄악과 인생을 다 맡기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심한지 18일 만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하여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유명한 설교는 종전의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주제에서 벗어나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느냐”는 복음의 본질과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였습니다.
5. 웨슬리의 회심과 감리교회가 영국사회에 끼친 영향
당시 영국교회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매우 무능력했습니다. 산업혁명의 악영향으로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돈이면, 재산도 권력도 쾌락도 다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진리와 경건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당시 돈을 벌기 위해 노동자들은 하루 18시간이 넘도록 일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식비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적었습니다. 그마저도 벌면 술과 도박으로 탕진했습니다. 병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을 잃어버린 가정은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일해야 했지만 배려나 긍휼은 없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냉정했습니다. 경제지수는 폭발적으로 올라갔지만 갈수록 사회는 범죄가 성행했고, 백성들은 사나와지고 난폭해졌고, 감옥은 늘 만원이었습니다.
웨슬리는 타락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각 개인의 회심과 교회의 갱신이 간절히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가복음 1장 15절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을 190여 회나 본문으로 삼아 “회개와 거듭남”으로 말미암는 회심체험에 관하여 설교를 하였습니다.
엄격한 의식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리는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어디든지 어느 때든지 상관하지 않는 열정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탄광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2만 명이 넘는 광부들이 석탄 채적장에 모였습니다. 시커먼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험상궂은 몰골의 광부들에게 비가 쏟아졌습니다.
웨슬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교했습니다. 놀랍게도 광부들도 움직이지 않고 웨슬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회개하고 거룩한 구원의 삶을 살라는 촉구 앞에서 광부들은 죽처럼 질척이는 석탄 채적장에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날 웨슬리의 친구는 이날의 풍경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날 수만 명의 광부들은 비속에서도 불타는 웨슬리를 신기한 듯 구경하다 자신들도 불타올랐다.’
하지만 영국국교는 웨슬리를 의식을 깨뜨리는 자로 간주, 그를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런던에 있는 교회들도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향 웹�m에서도 교회사용을 거절당하여 웨슬리는 부친의 묘석 위에 올라서서 밤마다 집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웨슬리는 개의치 않고 이때부터 야외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웨슬리는 말을 타고 다니며, 시장이든 거리이든 탄광이든 장소를 불문하고 성령의 능력, 곧 인간생활에 들어와 그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수천, 수 만 명의 광부들이 모여들었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며 이때부터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리가 전한 설교의 핵심은 “성화”에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죄인이 거룩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회개하고 정결하게 된 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부어져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부분적인 성화가 아닌 완전한 성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회개와 믿음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면 완전한 성화의 순간적인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 완전 성화의 본질을 “온전한 사랑,” 이라 했습니다. 웨슬리는 기독교의 핵심과 목적이 사랑에 있다고 주장하고 가르쳤습니다. 사랑은 모든 말씀의 목적이고 율법의 완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웨슬리가 주장한 감리교의 핵심적인 교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지만 오직 사랑을 낳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사랑이야말로 사람이 거룩해 질수 있는 유일하고 모든 것 된 방법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초기 감리교인들의 경건 생활을 가장 잘 나타내는 유명한 표어가 있었습니다.
'칭의, 성화, 일주일에 일페니'.
일주일의 일 페니는 감리교인들이 있는 곳에는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굶는 사람이 없게 하자는 웨슬리의 설교에 감동하여 시작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최소한의 헌금이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항시 분주한 여행 중에도 어느 지역에서든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 방문하여 돌보는 일을 일생 계속했습니다.
웨슬리가 82세 되던 해 1785년 1월에 쓴 일기내용입니다.
“이 때쯤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가난한 신도들에게 석탄과 빵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식량과 의복이 더욱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약 4일간 시내로 들어가 걸어 다니면서 200파운드를 모금하여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입히고 먹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거리가 녹아내리는 눈으로 덮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녹는 눈 속에 발이 빠지면서 이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대로 잘해냈으나 결국 나는 심한 이질로 다음날 아침까지 눕게 되었습니다.”
또한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절대로 불친절하게 대하지 말 것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친절한 말이라도 해주십시오. 불친절한 시선을 보내거나 가슴 아픈 말을 하지 마십시오. 빈손으로 돌려보낼 때에도 그들이 기쁜 맘으로 당신을 다시 찾아올 수 있게 하십시오. 당신들이 그들의 처지가 되었다고 여기면서,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해주시기를 원하는 것처럼 당신들도 그들에게 행하십시오.”
존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복음과 사랑을 주는 것을 가장 기쁜 일로 여겼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요 형제요 아버지로 살았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에 “나는 할 수 있는 한 모두 저축했고, 할 수 있는 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었다고 확신하면서 만족 한다” 고 고백했습니다.
웨슬리가 죽은 뒤에 남긴 소유물은 그가 입었던 성의(robes) 뿐이었습니다.
웨슬리는 6명의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무덤에로 운구 되어 묻혔고, 그는 그 사람들에게 각각 1파운드씩의 돈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소유한 모든 물품을 자신을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고 갔는데, 후에 웨슬리 기념관을 만들 때 웨슬리의 유품이 줄지어 기증되었습니다. 웨슬리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물품이 유품인 것을 알고 사람들은 팔지 않고 간직했던 것입니다. 웨슬리를 존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개인적인 선행으로만 그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어떻게 사랑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하여 세상을 변화시킬지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속회였습니다. 1742년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처음 속회를 조직했습니다. 속회는 대략 12명이 한 팀으로 일주일에 한번 씩 간증과 성경공부 모임을 가졌습니다. 웨슬리는 평신도 훈련의 일환으로 각 소그룹 모임 시마다 다섯 가지 사실, 즉 죄 사함을 받은 사실, 하나님의 영에 의한 증거, 내적 혹은 외적인 죄에 의한 지배의 유무, 죄 고백, 그리고 속마음의 점검 가능성 여부에 대하여 질의 및 응답을 하게하고, 바로 이어서 지난 모임 이후 죄를 지은 적이 있는가?, 죄에 대한 유혹을 받은 적이 있는가?, 어떻게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동석한 회원들 상호간에 준비된 질문과 응답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속회는 신앙훈련에만 그치지 않고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까지 노력했습니다.
웨슬리의 목회지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공장지대와 탄광지대였습니다.
감리교인들은 "너희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로 가라"는 웨슬리의 말에 따라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초기감리교회는 대부분이 노동자 계층으로 구성된 공동체였습니다.
노동자들이 모인 속회에서 대두된 삶의 문제는 언제나 노동현장과 관련되었습니다.
임금을 체불당하고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감리교인이었습니다.
사랑의 조직체였던 감리교 속회는 노동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북부 산업지대의 초기감리교회들은 거의 다 노동조합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주도하게 됩니다. 단순히 노동자들을 돕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감리교회는 노동자들의 자녀들에게 초등교육을 시켰고, 글을 가르쳐 성경과 고전을 읽게 하고 경건한 삶의 태도를 가르쳤습니다.
감리교역사학자 가든은 영국 공교육의 출발은 감리교회의 주일학교라고 주장했습니다. 교육의 필요성은 성인들에게도 동일했습니다. 어른들도 글을 읽지 못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감리교회는 평생교육의 현장이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쳐 성화를 훈련하는 감리교인들은 누구보다 성실했고 정직했습니다. 감리교인들을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고용자들도 좋아했습니다. 감리교회는 노사 양쪽에서 인정받았습니다. 고용주와 노동자들이 같은 교회 교인이거나 심지어는 같은 속회원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파업이 벌어지면 감리교인들이 지도자가 되어 주도했습니다. 노사양쪽의 신뢰를 함께 받는 사람들은 감리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인들이 노동운동을 이끌지 않는 곳에서는 파괴적인 폭력투쟁이 일어났으나, 감리교 노동운동가들은 기독교적이고 감리교적인 방식과 태도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대륙의 노동 운동은 주로 칼 맑스(Marx)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영국에서는 맑스 보다는 감리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면서 발전하였습니다. 적어도 2차 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노동조합 지도자들 중 절반 이상이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이었고, 노동조합의 구성도 감리교의 속회(Class)와 반회(Band) 그리고 구역회(Circuit)의 형태와 규칙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습니다.
엘리 할레비(Elie Halevy)와 렉키(W. E. H. Lecky)는 같은 시대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자주 일어났던 민중의 폭력적 혁명과 공산주의의 발호가 왜 영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영국 역사를 연구하다가 그 대답을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웨슬리안 감리교 부흥운동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웨슬리안 복음 운동이 당시의 영국의 가난한 노동자 계급과 중산층에게 청교도적 경건주의의 실천을 통한 비폭력적 개혁의 수단을 가르쳐 주어서 민중의 폭력적 혁명을 피하게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개인의 회심으로 시작된 거룩케 하는 사랑의 힘을 속회로 조직화 하여 영국사회 전반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초창기부터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함께 이루어 나가는 교단이 된 것입니다.
1790년 10월 웨슬리는 수섹스주 윈첼시교회 뜰에서 마지막 야외설교를 했습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은 ‘만날만한 때 주를 찾으며 가까이 계실 때 부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한 열로 앓기 시작했습니다.
1791년 3월 2일.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웨슬리는 소천 했습니다. 그의 나이 88세였습니다.
웨슬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주셔서 당신의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사랑에 평생 압도당하여 그 자신도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바쳐 평생토록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개인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조직화 하여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영국사회가 산업혁명의 성과로 인해 모두 물질에 현혹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갈 때, 웨슬리는 영국에 명예혁명을 일으켜 영국을 구원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회심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감리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자랑스런 역사입니다. 이 위대한 감리교회가 일제치하에 있던 대한민국에 처음 들어와서 한 일 또한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백범 김구, 유관순 열사, 이회영, 이시영, 주시경, 이동녕, 남궁 억, 최용신, 윤치호 등등 위대한 독립 운동가들이 한국 감리교회의 자랑스런 선배들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기적적으로 3개월 만에 총선거를 치르고 제헌국회를 열었을 때, 정동감리교회 장로였던 이승만대통령은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형 국회의원에게 대표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렇게 감리교인의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어떻게 버리시며 포기하시겠습니까?
6. 맺는 말씀
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의 경험이 있을 때,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이루고, 귀하게 쓰임 받게 되는지 웨슬리에게서 보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회심 사건은 바울 자신을 변화 시켰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럽과 아시아에 전해지고, 인류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하였고,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진정으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바울을 변화시키고, 요한 웨슬리를 변화시켰던 성령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심령을 뜨겁게 하셔서 이 시대에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 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