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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말씀

고난의 의미와 고난에 대처(임)하는 자세(창41:9-16/욥23:10)-171112낮

작성자소로(小路)|작성시간17.11.10|조회수514 목록 댓글 0


                                           고난의 의미와 임하는 자세

171112                                       (41:9-16/23:10)

 

<9)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0)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12)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14)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15)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41:9-16)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요셉이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요셉의 해석대로 그는 단 3일 만에 감옥에서 나갔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복직으로 요셉은 금방 석방될 줄 알았지만, 그는 무려 2년 동안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제 곧 감옥에서 나가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요셉에게 2년이라는 기간은 매우 길었을 것입니다. 그때 요셉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처음부터 금방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더라면 덜 했을 텐데, 기대했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고 지내는 2년은 20년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더구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온 감옥이니 그의 2년은 자기 인생에서 빼버리고 싶은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고난에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무의미하리라 생각했던 그 시간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을 통하여 고난의 두 가지 의미와 고난에 처했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배우려고 합니다. 큰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내적차원과 외적차원입니다.

 


1. 내적 차원의 의미

  내적 차원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 동안 요셉의 믿음을 순금화 하셨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만일 고난을 제대로 다룰 줄만 안다면 고난만큼 인생에 유익을 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한 평생을 산 사람에게 당신의 인생가운데서 가장 유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라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내가 고난당할 그때에 내 인생이 깊어졌고 내적으로 성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국민일보에 역경의 열매라는 연재시리즈가 있습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나 열매를 거둔 과정에 대해 여러 가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는 코너인데, 제목대로 역경 속에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역경을 극복하고 나니까 열매를 거두게 되고 성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3-4,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사람은 역경과 고난을 격을 때 비로소 성숙해집니다.

 

  고난하면 요셉뿐 아니라 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고난당할 때 욥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도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응답해주십시오

 

  욥은 애타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23:3,8-9, “3)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8)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은 하나님이 한 말씀이라도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이 상황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 좀 해주세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세요. 내 삶 가운데 함께 계시다면 나를 만져주세요.”

 

  여러분!

  하지만 우리가 고난당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찾고 찾았는데도 하나님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십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한마디라도 대답을 해주시면 속이 시원하고, 이 고난을 잘 이겨낼 것 같은데 말이죠...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하나님, 내게 왜 이런 고난이 있습니까?”

이 고난은 언제까지입니까?”

  그런데, 욥은 그에게 당한 깊은 고난 가운데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이 고난 중에 깨달은 이 말씀에서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하나님) 아시나니....“

 

  욥은 고난당할 때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왔는지?, 이 고난이 언제까지일지 그것을 자신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고난당할 때도 주제는 자신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깊어지면서 자신이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내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내 자신이 아니며 내가 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것 같고, 우리 입술의 고백 역시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지만, 사실 언제나 내가 내 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고난은 이 주도권이 바뀌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인생길을 전부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알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십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순금같이 만드는데 지름길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련이 필요합니다.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순금처럼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체가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셋째, 결국 내가 순금이 되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이 단련을 받은 후 내면의 믿음이 자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단련 받고 나서 억만 장자가 되리라, 내가 단련 받은 이후에 잃은 것을 다 돌려받으리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련을 다 받고 난 다음 내가 순금같이 나오리라 하는 고백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내 자신의 변화, 나의 내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이 고난을 통해서 깨달은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술 맡은 관원장이 그를 잊은 지 2년 동안 감옥에서 바로 이 과정, 내적으로 믿음의 순금화 작업을 통해 변화되는 준비과정을 마쳤기 때문에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난 다음 형들을 만나고, 보디발도 만나고, 아마 보디발의 아내까지 만났더라도 부작용 없이 모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요셉의 믿음이 변화되고 성숙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추측이지만,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최고의 권력이 주어진다면 과거에 자기에게 해코지 한 사람들, 강간범으로 누명을 뒤집어씌운 보디말의 아내나, 부인의 말을 듣고 자기를 감옥에 가둔 보디발이나, 또 고향에서 자기를 애굽 상인에게 팔아넘긴 형들을 만났을 때에 그 형들에게 보복하려들지 않았겠습니까? 오히려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에게 있어서 2년간의 감옥생활의 고난은 요셉의 믿음을 얼마나 순금처럼 만들었는지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의 성숙된 모습을 요셉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요셉의 고난은 요셉으로 하여금 내적인 성숙함을 가져 왔습니다.


 

2. 외적 차원의 의미

  우리가 고난의 기간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옥 안에 있는 요셉 자신의 환경이 2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는 늘 똑같은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에 처했을 때,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그날이 그날이고, 변화의 조짐조차 없을 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더욱 무의미하고 공허한 세월을 보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서 2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무의미해 보이는 세월을 2년 동안 보내고, 그의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그렇다면 요셉에게 그 2년이라는 세월이 그냥 흘러만 간 허송의 시간이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셉이 2년 동안 감옥 안에 있는 시간에 감옥 밖에서는 하나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일단 바로 왕을 움직이셨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게 하셨고, 그 꿈에 대해 번민케 만드셨습니다.

 

  41:8,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될 텐데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일단 하나님께서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뿐 아니라 용의주도한 바로 왕이 꿈을 해석해 놓고 기다리기만 하라고 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해석만 하면 누가 못하겠습니까? 그는 꿈을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대로 행동에 옮기도록 요구했을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하여 목숨을 내놔야 했을 것이니 어느 누구도 섣불리 나서서 해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에게도 꿈을 해석하고 나자 책임자로 애굽 전국총리를 시켰습니다. 결국 꿈을 해석한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 맡겨본 셈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 바로 왕에게 꿈을 꾸게 만들고, 그 꿈 때문에 번민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을 전부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우리인간에게는 행동주의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만있으면 세상에서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줄로 압니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이 세상은 잘 굴러갑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안에서도 자기가 관여하지 않으면 교회가 안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도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섭섭하면 교회 안 나오고, 다른 곳으로 떠나면서 내가 없으면 이교회 되나 보자 그러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 우리교회 말로 저 육지에 ......

  가정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남편이 전권을 꽉 움켜쥐고 자기가 다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좀 맡겨줘도 가정은 더 잘 굴러갈 수 있는데도 말이죠.... 반대로 그러는 경우도 있구요....

반면에 자신이 움직인다고 세상이 변화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사실 세상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세상의 운명을 바꾸는 건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아멘? 그런데도 흔히 우리가 감옥에 있고 내가 아무것도 안하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안하면 안 되는 것 같은 것은 순전히 자기 느낌입니다. 교만이자 우상숭배입니다.

 “내가 없으면 무너질걸, 내가 없는데 잘되나 봐라

그런데 사실, 잘됩니다. 더 잘됩니다. 그것을 본인만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성실함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요셉이 비록 감옥 안에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계속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또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2년 후에 술 맡은 관원장에게 요셉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41:9,12, “9)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2)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요셉이 감옥에서 억울한 누명을 쓴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은 감옥 밖에서 계속해서 요셉을 위하여 일하고 계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난에 처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그래서 그 고난의 세월이 길어져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져있을 때에도 나를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맞춰서 하나님은 일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을 위해서 감옥 밖에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일하고 계셨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저 요셉은 감옥에 갇힌 지 2년 후 감옥에서 나와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주고,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앉기만 하면 되도록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서 완벽하게 일하고 셋팅해 놓고 계셨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옛날에 영심이라는 만화가 인기가 있었는데, 그중에 퀴즈대회편이 있는데, 어느 날 영심이가 퀴즈대회에 나갔습니다. 영심이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퀴즈대회에 나온 아이들은 아주 똑똑해 보이는 친구들입니다. 똑똑한 친구들끼리 서로 맞추겠다고 벨을 누르고 틀려서 점수도 깎기고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점수가 다 비슷해졌습니다. 그때 마지막 문제가 출제 되었습니다. 그 순간 영심이가 벨을 잘못 누르고 말았습니다. 답을 모르니 말할 수도 없고, 땀을 뻘뻘 흘리다 쭈뼛쭈뼛하면서 몰라요라고 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퀴즈대회 진행자가 , 맞습니다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는 답을 몰라서 몰라요라고 했는데, 그게 정답이랍니다. 문제는 어떤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답이 작자 미상이었고, 그러니까 모른다는 답이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우승을 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뭘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다 잘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일을 망쳐도 됩니다. 얼떨결에 모른다고 한 말이 정답일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내가 잘 맞춰야 우승할 수 있고, 전부 내가 잘해야 된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지금 감옥 안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는 요셉에게, 그리고 감옥 밖에서 자기를 위해서 탄원서를 제출해주고, 남의 나라에 홀로 팔려 와서 친인척도 없고 노예 신분이었던 요셉을 위해서 대신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고 구명해주는 사람도 없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입니다.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내가하면 되지?”

  이 경험이 요셉에게 얼마나 중요한 경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총리가 된 다음에도 지나치게 앞서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일하셨고 앞서 행하셨는데, 내가 기도하고 내가 하나님께만 능력을 구해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리라 믿는 것이야 말로 중요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요셉은 고난을 통하여 귀한 믿음의 자세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분주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차분하게 무릎 꿇고 엎드려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능력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3. 고난에 대처(임)하는 자세

  그렇다면 요셉은 2년간 감옥에 있을 때 어떤 자세로 있었을까요? 사실 우리가 요셉에게서 배워야할 점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자세로 대처해야 하는지? 살아내야 하는지.....그것이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실질적인 해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감옥에 있었을 때, 어떤 자세로 감옥에 있었는지 성경은 정확히 기록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에게 감옥에서 나가서 임금께 은혜를 입어 복직하게 되면 자기의 누명을 벗겨달라고 했지만, 그 기대를 저버리고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2년 동안 잊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이 창40장의 마지막 절입니다. 그리고 41장 시작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41;1,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강가에 서 있는데

 

  그러니까 성경은 2년 동안 요셉이 감옥에서 어떤 자세로 보냈는지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셉이 꿈을 해석하기 위해 바로 앞에 서서 하는 말들과 태도를 보면 요셉이 지난 2년 동안 어떤 신앙자세로 생활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물었습니다.

  41:15,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바로는 요셉에게 네가 꿈을 잘 해석하는 전문가라고 하던데 그럼 어디 내 꿈을 한번 해석해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저는 답을 아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실 것입니다.”

 

  41: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우리가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 사람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몇 마디만 대화를 나누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 첫 번째 한 말, 대화의 내용을 보면 요셉이 그동안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그래서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 첫 번째로 한 말은 상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은 지 2년 동안, 사람을 의지했다가 철저히 배신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아마도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려고 다짐하고, 철저히 하나님께만 고정된 눈을 가지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하는 첫마디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것도 일국의 바로왕 앞에서 조금도 굴함이나 망설임도 없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요셉은 바로와 대화하면서 하나님만 증거하고 하나님만 강조했습니다. 계속해서 꿈을 해석하며 하나님 한분만 강조합니다. 요셉이 하는 말의 주어(主語)를 보세요. 그의 말의 주어는 항상 하나님입니다.

 

  41:25,28,32, “25)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8)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32)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가운데도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요셉처럼 고난 가운데서 나의 눈, 나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고정되어 있으면 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하소연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고난 중에 무엇을 묵상했다는 말입니까? 자신의 문제, 자기 고난을 더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 이후에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2년간의 감옥 생활이 그냥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쳇말로 썩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의 눈,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2년의 감옥에 갇히는 고난이 오히려 그의 믿음과 마음이 순금처럼 변화되고, 빛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풀려나 바로 앞에 섰을 때나, 그 뒤 여러 사람들을 만나 나눈 대화 가운데 분노에 찬 말이 있습니까? 한마디도 없습니다. 원망의 말이 있습니까? 보복의 말이 있습니까?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지금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까? 혹시 고난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고난은 무서운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난을 계속 당하다 보면, 심성이 다 파괴 되고, 인격이 완전히 다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계속되면 악 밖에 남은 것이 없다.” 라고 말들 하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를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것입니다. 잘 이겨 냈어도 어느덧 자기 심성과 인격이 다 파괴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난 가운데서도 심령이 썩지 않고, 믿음의 능력 가운데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고정된 눈, 고정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이것 하나만 붙들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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