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5) --------------
부름 받은 자의 사명
180311낮 (창12:4-10,13:7-9)
창12:4-10,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아멘
창13:7-9,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아멘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복을 주시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든 기득권를 내려놓고,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복의 전달자가 되게 하시며, 네 편이 되어주시는 복을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부름 받은 자의 복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렸고, 오늘은 “부름 받은 자의 사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큰 은혜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는 어떤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1.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12;4, 10-20절)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이 혼자라면, 그리고 젊다면 쉽게 떠나는 길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은 홀로 단신이 아닙니다. 가족과 수많은 가축 떼를 이끌고 있습니다. 나이도 많습니다. 75세나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히11:8), 오직 말씀을 따라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발걸음을 내 딛는 행동, 이것이 생명력 있는 신앙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수3장)는 우기 철이라 요단강이 범람할 정도로 물이 많을 때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멘 제사장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넘치는 요단강에 발을 내 딛었을 때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밤새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눅5:4-6,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아브라함은 실수도 많았지만, 하나님 말씀은 무조건 따랐습니다.(12장, 17장, 22장...)
창12장에서는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에 따랐구요..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창17장에서는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집에서 난 자나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나 막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라”는 말씀에 당일에 할례를 시행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 때입니다.창22장에서는 하나님이 약속으로 준 아들 이삭, “아브라함 백세 때 얻은 이삭을 삼일 길을 가서 한산 내가 지시하는 그곳에서 네 독자 네가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도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이성적으로 계산해 보고, 이해타산을 따져보고 망설이는 현대의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믿음입니다.
그러나, 창12장 4절에서 말씀을 따라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가나안땅) 갔던 아브라함이 그 땅에 기근이 들므로 그곳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창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여기에서 “내려가다”는 단어는 “내려가다”(야라드/דרי)를 사용 했습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낮은 지대로 위치를 옮기는 것을 뜻하나 상징적으로는 지위가 낮아지거나 도덕성이 내려감(삿14:1)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할 때는 단순히 “가다(얄라크/ךלי)”를 사용했으나(창12:1,4,5) 본문 창12:10에서는 의도적으로 (야라드/דרי)라는 단어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에는 신앙적 결단으로 행했으나 애굽으로 내려 갈 때는 단순히 육신적인 문제를 기준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말씀을 쫓아 가나안에 이르렀으나 그곳에 기근이 심하니까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다 부인을 빼앗기고 그것이 들통이나 큰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눅10:25-37절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강도 만난 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강도 만난 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룻기에 보면,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에 살다 흉년을 피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집이라는 뜻이 있는 베들레헴을 떠나 우상 숭배하는 이방 땅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이 죽는 비극을 당하는 나오미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려가는 신앙이란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 환경과 조건을 쫓아가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지만, 환경과 조건을 쫓아가는 사람의 결국은 수치와 부끄러움뿐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환경과 세상적인 조건을 따라 살지 말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철저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창12:7, 8, 13:4, 18)
창12:7,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12:8,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3: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은 예배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유목민으로서 이곳저곳 초지와 물을 찾아 이동하는 생활 가운데서도 새로운 지역에 당도했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께 예배부터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좋은 일 있을 때나 좋지 않는 일을 당할 때나 예배생활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배생활에 그의 인생을 걸었다고 할 만큼 예배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도록 복 내려 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예배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 위에서 드려지는 수많은 예배를 찾으시는 것이 아 니라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수많은 회중 사이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당만 밟고 가는 것(사 1:12)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12장8절과 13장4절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12: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3: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 한 시간 예배 드린 것으로 만족하고 가십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십니까? 하나님을 임재를 느끼기 위해 간절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찾으시는지요? 이 자리에 나와 있지만, 예배의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잡다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고, 세상 살아가면서 가지게 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 받기 위한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는 않는지요?
예배의 자리에 참석한 자입니까? 아니면 예배하는 예배자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예배의 자리에 참석한 자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원하십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예수님을 찾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눅2장 4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눅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부모님과 친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마치고 함께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부모들은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하루를 걸어온 길을 사흘에 걸쳐 찾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아들을 찾기 위해 찾을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곳을 이 잡듯 샅샅이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한 부모들은 거기에서 율법을 가르치던 선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신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고 그 어머니가 예수님께 한 이야기가 눅2:48절입니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여기에서 사용된 ‘찾았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제테오(zeteo)’인데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하셨을 때 사용하셨던 ‘찾았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로 쓰였습니다. 영어의 seek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심정으로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루면 갈 길을 사흘이나 걸리면서 온 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심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대하16:9) 예배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출처,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작성자 헤세드123)
하나님께 부름 받은 여러분!
예배의 시간에 참석하는 자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철저히 예배 하는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창13:7-9)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고아나 마찬가지였던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납니다. 그런데 이들의 소유가 많아지자 초지도 부족하고, 물도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초지와 물을 가지고 다투는 일이 잦았습니다. 이 때, 가족의 장래와 재산의 사활이 걸린 목초지 선택 문제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희생적이고도 신앙적인 결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숙부로서 먼저 선택할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카 롯에게 모든 것을 먼저 양보하는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창13장 8-9절입니다.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다투지 않고 화평을 선택하게 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골육지친간인데, 불신자들도(7절, 가나안사람과 브리스 사람들도 함께 기거) 보는데 서로 다투지 말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이득과 기득권과 자존심을 앞세운 다툼보다, 희생하더라도, 손해를 보더라도 화평을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만약에 예배생활은 철저하게 잘하면서 다른 사람과 다투기를 좋아하고, 원수 맺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원 근원이 되는 축복을 허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조상이 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것은 성도의 직분입니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말씀도 많이 알고, 예배생활도 잘하는데, 성도의 삶이 안 되면 복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게 됩니다.
마5:23-24,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와 화평하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화평하려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일상의 삶'이 서로 일치하지 못 하고 그저 예배만 잘 하는 교인이 많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는 자는 많아도 예배하는 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령과 진리 대신에 위선과 맹신이 난무합니다. 그래서 삶은 없고 종교만 남았습니다. 예배 잘 드리고 나서 교인들끼리 다툽니다. 조금도 양보하지 못하고 서로 얼굴 붉힙니다. 그리고 예배 잘 드리고 나가서 이웃을 미워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렇게 미워하는 대상이 많습니까?
참된 예배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교회당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거룩한 예배는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며 진정한 예배입니다.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아브라함은 예배와 삶이 일치했습니다. 그는 옮기는 곳마다 제일 먼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배가 우선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카 롯과 기거하는 토지가 좁아 종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롯에게 먼저 선택할 권리를 양보합니다. 우리는 골육지친이니 다투지 말자고 합니다. 이곳은 우리만 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도 사는데, 서로 다투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부름 받은 자는 아브라함처럼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저는 <부름 받은 자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환경과 여건에 지배 받는 삶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는 자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모든 자로 더불어 화평 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 되셔서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