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4)---------
하나님이 함께 함을 보여줘라
180603낮 (창21:22-34)
<22)○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서 행하여 보이라 24)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아 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7)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30)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1)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33)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아멘
지난 주일에 우리는 창 21:1-7절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게 해주신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상고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난 주일의 말씀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원래부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식을 못 낳는 여인이었고,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나이가 많아(100세, 90세) 생물학적으로도 자식을 낳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사라를 임신케 하시고 약속하신지 25년 만에 그의 몸에서 자식을 낳게 하셨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약속을 기다리는 인내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요구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자신이 이삭을 낳았다고 큰 소리 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식을 못 낳는 여자임을 알았고, 성경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증언하는데, 사라는 자기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낳았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 가정에 분란이 일어나고 공동체가 깨지는 불행이 찾아옴을 보았습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내가” 라는 자기 공로를 내세우게 되면 그 공동체는 깨지고, 누군가의 눈에는 눈물 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절대로 나의 공로를 내세우면 안 됨을 알았습니다. 또한 이스마엘과 이삭이 아브라함의 자식인데.......이삭은 약속의 자녀로 하나님이 주셨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으로 첩을 통해서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이삭은 특별은총을 받은 자고, 이스마엘은 일반은총을 받은 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나 여러분은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특별은총을 받은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삭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웃음 그 자체,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도 '웃음'입니다. 우리는 이삭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기쁨이요, 웃음이 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삭의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이스마엘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삭이면서도 이스마엘로 살아가는 이삭이 너무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약속의 자녀 이삭이 되신 여러분! 이삭으로 특별한 은총을 누리며 하나님의 기쁨이요 웃음이 되는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 되고, 하나님의 위엄이 선포되는 실제적인 현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아비멜렉은 전에(20:1-18)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했던 그랄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화친을 요청했습니다. 지난날 잘못한 것을 말하자 사과까지 합니다.(21:25-26)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이 땅에 들어와 그 땅의 왕과 군대장관을 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제주 땅에 살면서 우상숭배 하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저 사람들 사는 것 보면, 하나님이 있긴 뭐가 있어 그러지는 않을까요?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나그네로 들어와 거주하면서 그 땅 주민과 그 땅의 왕과 군대 장관에게 자신들이 사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여 주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불신자들 틈에서 살아야 하는 가를 보여주는 모범답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보여줍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 가정과 함께 하여 주셔서 믿지 않는 가족과 괜당들이 보게 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도 이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신앙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신앙입니다.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까?
1. 아브라함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100세, 사라90세에 이삭을 낳는데, 아비멜렉과 그 지역 사람들이 턱밑에서 이것을 본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을 눈으로 본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이 안가는 기적,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 하나님의 산 역사가 여러분을 통해서도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창21:2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22)○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21:22,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뻬콜 아쉐르 앗타 오세)” .....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엘로힘 임메카)
‘네가 하고 있는 모든 일 안에’(in everything you do)란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던 아비멜렉의 눈에도 아브라함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전반적인 모든 삶 가 운데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만 하나님을 믿는 자같이 행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자처럼 생활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마음 가운데 항상 성령을 모시고 살아간다면(고전3:16, 엡2:22) 우리가 무슨 일을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2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3)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서 행하여 보이라>
지리적인 의미로 “여기에” 시간적인 의미로 “지금(이제)” 아베멜렉이 유사한 뜻을 가진 부사를 두 번 반복한 것은 아브라함과의 조약은 조금도 미룰 수 없는 것이며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긴박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랄 왕 아비멜랙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동맥 맺기를 얼마나 서두르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 당대 뿐 아니라 일가친척 자자손손 그 동맹이 유효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3절,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그런 아브라함과 자신 당대 뿐 아니라 자자손손 효력 있는 동맹을 맺자고 매달립니까?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서 나그네에 불과한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오히려 그 땅의 왕이 찾아와 이러한 동맹을 맺자고 사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멀리 있는 사람은 존경하기 쉬워도 가까이 있는 사람은 존경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가까우면 결점도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우거하는 동안 그곳 사람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조석으로 상봉하는 사람들로부터 그것도 좀처럼 호의를 보아주려고 하지 않는 원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생각이며, 말이며, 처사가 매사가 정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활을 보고 사람이 이렇게 매사가 정당하고 공정할 수 있는 것은 필경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답을 그랄 사람들은 얻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지배를 받는 자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종종 세상으로부터 조소를 받는 것은 우리의 처사가 저들만큼도 도덕적이거나 양심적인 것으로 보여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언행심사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고, 정당할 때 저들은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로 인해 사람들이 화를 입어서도 안 되지만, 남들로 인해 내가 화를 입게 되어도 좋지는 않습니다. 가장 바람직 한 것은 내가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로만 가능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우거하는 동안 아브라함은 누구에게도 가해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아브라함에게 해를 입히는 가해자도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막고 서서 그를 보호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실 예로 아비멜렉이 사라를 후궁으로 취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사라를 취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셨음을 보았지 않습니까?(창20:1-7)
아브라함에게 무의식중에라도 해를 입히려 한다면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라도 상대방에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자라고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에게 속해 있는 자나 재산을 건드리면 큰 코 닥치는 구나!
성도 개인은 세상적으로 볼 때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여 어떠한 대적도 능히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성도들이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악한 세력들에 의해 우겨쌈을 당하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안전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천군천사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4:8)
비록 세상이 여러분을 위협할지라도 염려하지 말고 담대히 행하십시오. 그 누구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여러분을 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여러분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하나님께서 기적 같은 역사를 이루어 주시죠!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시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죠! 이런 것을 옆에서 확실하게 보게 되니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라고 인정 안할 수가 없는 거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런 축복과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4. 성도는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잘 못에 대해 오래 참아야 합니다.
25절과 2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5)아 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5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화친조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아베멜렉의 종들이 자신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26절의 아베멜렉의 말을 빌리면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의 늑탈행위에 대하여 그동안 아비멜렉에게 항의하거나 보복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이 두려워서 아브라함이 참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온유함으로 아비멜렉의 종들의 잘못에 대해서 오래 참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이나 이웃의 잘못에 대해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죄인들을 즉각 보응하지 않고 회개하기까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합당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결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잘 못한 사람은 본문의 아비멜렉과 같이 스스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쫓으라”(살전5:5)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한 탈영병이 체포되어 사령관인 장군 앞으로 끌려 왔습니다.
그 병사가 탈영하다 체포된 것은 벌써 5번째였습니다. 전투 중 탈영은 당시 군법으로 사형이었습니다. 하지만 병사를 자식처럼 아끼는 장군은 계속해서 그 병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는 작은 처벌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장군은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비통한 마음으로 병사에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병사로 만들기 위해 가르치고, 정신과 육체를 단련시켰다. 그리고 수차례의 탈영을 저질렀지만, 처벌을 미루고 온갖 방법으로 마음을 바꾸려 노력했는데도 또다시 조국을 배신하고 말았다. 이에 죄를 물어 엄정한 군법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병사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장교 한 명이 장군에게 말했습니다.
"장군님은 저 병사를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고 하셨지만 아직 한 가지 해보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장군은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바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장군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는 것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장교의 말에 장군은 탈영병을 조건 없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는 병사는 다음 전투 때 선두에 서는 용감한 병사가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벌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분노를 어두운 마음으로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속 분노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존심까지 내려놓아야 합니다. 당연히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진심어린 용서는, 어떤 가혹한 처벌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파울 뵈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용서는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넓혀준다.”
아브라함처럼,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하는 사람’ 임을 세상 사람에게 보여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