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39)----------
형통한 사람
190210낮 (창39:1-6)
<1)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아멘
성경은 인간이 잘 나가고, 성공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큰 부자가 되었을 때에만 형통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실패하고, 절망스런 환경에 처하게 되고, 가난하게 되고,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졌을 때에도 형통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에굽의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형통한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강간범으로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요셉을 가리켜 형통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환경의 좋고 나쁨이 기준이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가 형통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 <형통한>은 ‘찰라흐(הלצ)’로 쓰였는데, 잘되어가다, 번영하다, 평탄하다란 뜻이 있지만, 특히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자에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요셉이 무엇보다도 형통하다고 성경이 표현하는 것은 요셉은 하나님의 영이 늘 함게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요셉의 신분과 지위는 가장 낮은 노예였지만, 그런 생활 중에서도 요셉은 형통하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뢰받고 사랑 받는 자가 되었고(4-6절), 다른 사람에게 복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5절) 요셉 때문에 오히려 그 주인의 집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와 신분을 뛰어 넘어 생활하며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무게 있는 존재, 즉 존재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을 이렇게 형통한자가 되었다고 거듭 말씀하고 있는데, 형통한 사람에 대하여 말씀을 드릴 때, 큰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은 높이시기 전에 낮추시는 일을 먼저 하십니다.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건물을 높이 올리려면 그만큼 지하로 깊이 팝니다. 지하를 얼마나 깊이 파느냐를 보면 이 건물이 얼마나 높이 올라갈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시련이 깊고,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고 잘 이겨내야 합니다. 더욱 낮아지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더욱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낮아지는 만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인생을 꿈과는 정반대로 낮추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진 사람은 마귀의 방해도 많습니다. 430년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셨으나 그는 먼저 나일강에 던졌고, 애굽 왕자의 신분에서 살인자가 되어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태어났으나 헤롯은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다 죽였고,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 10년 넘도록 찬이슬을 맞으며 방랑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후에도 한동안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싸웠습니다.
요셉도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구덩이에 빠지고, 상인들에게 팔려가 노예가 되었고, 유혹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빠졌습니다. 마귀가 죽이려고 하는 것은 요셉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요셉의 꿈이었습니다. 요셉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습니다. 마귀는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안타까움은 마귀의 전략에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꿈이 있고, 그 꿈을 나를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시는데, 마귀의 방해를 이겨내지 못하여서 그 하나님의 꿈의 성취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13년간의 내려감의 과정을 통해서 요셉은 총리가 되는 연단을 받았고,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보복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노예요, 감옥의 죄수요, 얽매인 자요, 불행한 자였지만, 그는 장차 꿈을 이룰 총리가 됩니다. 자기 민족을 구하고 애굽을 구했습니다. 마귀는 시련을 통해서 요셉의 꿈을 죽이고 망가뜨리려 했지만,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낸 요셉에게는 그것이 연단하는 환경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간증거리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기 전에 먼저 낮추시는 연단부터 하시는데, 그것을 잘 이겨내는 자가 형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형통한 사람은 환경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형통이란 무엇이든 잘 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노예로 팔려간 사람이 형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종살이를 하는데 무슨 형통입니까? 외적으로 보면 형통이 아니라 불평 할 만 한 불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이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뜻은 ‘그가 이긴다’입니다. 이름의 뜻대로 요셉은 잘 이깁니다. 문화적인 충격을 이기고, 인간관계의 충격을 이기고, 삶의 질(Quality)의 충격을 이깁니다. 그 많은 형제들에게 억울하게 팔려도 이기고, 종살이에도 이기고, 유혹도 이기고, 억울하게 감옥에 가도 이기고, 잘 이깁니다. 감옥살이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요셉은 그 어렵고 힘든 감옥살이를 한두 달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 나이가 28세이니 종살이와 옥살이를 11년간 한 것입니다. 앞으로 2년간 더 옥살이를 해야 됩니다. 그 장구한 세월을 이기는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일을 만나도 이기고 또 이깁니다.
그러면 요셉이 어떻게 이깁니까? 그의 이름이 ‘요셉(그가 이긴다)’이어서 이깁니까? 이름대로 다 됩니까? 아닙니다. 예수 이름에만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이름의 뜻대로 왜 이기고 또 이깁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이기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걸인들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한강 다리 밑에 갔는데, 어른들은 다 밥을 얻으러 나가고 한 작은 아이만 양지바른 곳에 앉아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얘야, 네 이름이 뭐니?”
“김백억입니다.”
“백억? 네 이름을 누가 지었니?”
“몰라요. 아버지가 나보고 김백억이래요.”
요즘도 백억이면 큰 돈인데,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백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가난이 서러운 아버지가 아들은 거부가 되라고 이름을 백억이라고 지었나 봅니다. 이름이 백억이라도 다리 밑에서 거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름대로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이름이 좋아서 이긴 것이 아니라 요셉이 이기고 또 이긴 것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하신 것인 줄로 믿습니다.
본문 20, 21절에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라 말씀하시고, 23절에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크고 좋은 집에서 좋은 자동차를 굴리며 사랑하는 가족끼리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 옥중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사람이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 당시 애굽에 왕이 있었고, 왕자와 공주가 있었고, 수많은 백성이 있었지만, 그들이 복 있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복이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과 동생, 열한 명이 자유롭게 살았지만 그 열한 형제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옥에 있는 요셉이 복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놀라운 복을 받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그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오늘도 예배의 자리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지 않으시면 우리도 주일에 낚시하러 가고, 골프하러 가고, 세상에 나가서 방탕할 수도 있고, 방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교회로 이끄시고,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신 줄로 믿습니다.
삶은 생존 경쟁이자 영적인 전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점점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시작은 창대하게 해도 결국은 초라하게 만들고 꺾어 버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별똥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점점 빛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명예롭게 하시고 세워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어떤 일을 만나도, 그 문제가 나를 죽이려 해도, 그 파도가 나를 휩쓸어 가려 해도 밀려가면 안 됩니다. 오히려 밀어붙이면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나 혼자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잠언 18장 14절에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24장 10절에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존경쟁도 하지만 지금 악한 마귀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환난을 당했다, 병에 걸렸다, 부도를 만났다, 해고를 당했다, 자식이 잘못 되었다.’ 할 때 우리가 낙심하면 힘의 미약함을 보여서 마귀에게 타깃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와도, 환난이 와도, 병이 와도, 가정에 좋지 않은 일이 와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기게 하신다.’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기게 하십니다. 말씀이 이기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이기게 하십니다. 은혜는 이기게 하십니다. 형통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있음을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은 성실해야 합니다.
형통은 성실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4)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4절 말씀을 보면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히브리어의 원 뜻은 ‘눈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인정받았다는 것이지요. 보디발이 요셉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일하는 모습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을 다하는구나, 정말 최선을 다하는구나, 저 사람이라면 내가 일을 맡길 수 있겠구나’라고 해서 가정총무의 직무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2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했다”라고 말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최선을 다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요셉에게 일을 맡기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선을 다한 삶의 결과입니다. 최선은 사람에게 인정받습니다. 최선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17-18살에 끌려왔습니다. 감옥에서 2년 살고 나왔을 때 30살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보디발의 집에서 생활한 시간은 10여년이었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인정한 것은 10여년이라고 하는 시간의 열매였습니다. 처음에 딱 보자마자 ‘너 잘하게 생겼어!’하면서 총무로 맡긴 것이 아닙니다. 10여 년 동안 시간의 열매를 통해서 총무라고 하는 직분을 맡긴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람에게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과정을 통과한 존재, 그가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한탕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어떤 중학교 선생님이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만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부모님으로부터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건물하나 물려받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건물 하나 물려받아서 임대료 받으면서 그냥 놀고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부모님이 부자여서 무엇 하나 물려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한탕주의입니다.
요셉은 성실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일에 성실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한순간에 보디발의 눈에 들게 하시고, 간수장이의 맘에 들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어떤 환경에 처했든지 환경 탓하면서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 주워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보디발이 몇 년을 지켜봐도, 간수장이가 오랫동안 지켜봐도 요셉은 한결 같았습니다. 성실했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일을 맡겨도 될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한탕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끈질긴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베풀되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128:2) 뿌릴 때가 있어야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축복의 씨앗을 뿌려야 자녀들이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갈 때도, 간통자로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형통을 말씀하실 때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옥에 갇혔을 때입니다. 보디발의 집의 노에로 팔렸을 때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는 십 수 년 후였습니다. 그 십 수 년 동안 요셉은 한탕주의를 꿈꾸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했으니 되겠지 하며 놀고먹은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높이시기 전에 먼저 낮추시는 일부터 하신다는 것을, 형통의 복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형통은 성실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형통의 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