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44)-------------------
“없어진 하나”의 위대함
190317낮 (창42:1-13)
<1)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3)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5)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6)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7)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9)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0)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12)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3)그 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아멘
오늘 본문이 있는 42장부터 45장까지 4장에 걸친 내용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의 지위를 가지고 애굽과 그 주변국 전역에 걸친 대 기근을 넘길 식량을 구입하러 온 변방의 초라한 유목민 집단에 불과한 지위의 형들과 재회하여 그들을 용서하고 화해한 후 그 아버지와 형제 일가 모두를 애굽으로 초청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요셉의 형제들과의 재회와 애굽 초청기사는 세부적으로 두 차례에 걸친 형제들의 식량구입을 위한 애굽 방문과 역시 두 차례에 걸친 요셉의 형제들에 대한 시험, 그리고 형제들의 진심을 확인한 요셉이 비로소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히고 용서하며 서로 화해의 감격을 누리는 장면, 그리고 이제 요셉이 자신의 일가 전체를 애굽으로 초청하자 형제들이 귀향하여 그 아버지 야곱에게 이를 고하는 과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 과정을 아주 세세한 내용과 섬세한 심리적인 묘사까지 기록함으로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요셉과 형제들 사이의 과거의 모든 긴장과 회한이 요셉의 관용과 사랑으로 일시에 사라지고, 다만 모두가 재회의 기쁨에 서로 얼싸안는 벅찬 감격에 동참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42장에는 야곱의 아들들이 곡식을 사기 위한 1차 애굽 여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 지 살펴보며 주시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1. 관망하는 자는 자와 하나님을 인식하며 성실한자의 차이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지금 야곱과 요셉의 형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에도 기근으로 인하여 먹을 식량이 다 떨어져 식량을 구하지 못하며 모두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애굽에 곡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고도 관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서로에게 미루기만 하고, 어렵고 힘든 일에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런 아들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애굽에는 곡식이 풍부하다고 하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바라보고만 있느냐? 가서 식량을 구해 와야 식구들이 먹고 살 것이 아니냐?’ 라고 책망합니다.
집안에 이런 어려운 문제가 생겼는데도, 서로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집안은 잘 될 수도 없고, 이런 사람은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나, 아니면 큰일을 하려할 때도 교인들이 관망즉 구경만 하고 있으면 교회는 더욱 어려워 질 것이고, 큰일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해결책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애굽의 요셉입니다. 구속사의 주인공들인 가나안을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큰 흉년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이미 애굽에 요셉을 준비 해 놓으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관망만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계속해서 관망만 했다면, 하나님께서 해결책으로 준비해 놓으신 요셉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희생하더라도 앞장서는 자에게만, 해결책이 주어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야곱이 책망할 때까지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도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던 원인을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이 열한 아들들의 불성실한 태도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실히 일하는 요셉의 삶과는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잠언18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敗家) 의 형제니라”(잠18:9)
하나님을 인식하며 성실하게 산 요셉은 어떻습니까? 처음 시작은 같았을지라도, 아니면 더 어려웠더라도, 하나님을 늘 인식하고 매사에 성실하게 산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 온 땅의 주인이 되었고, 하나님을 잊고 산 형들은 요셉에게 생명을 의탁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양식을 꾸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잘 섬기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결과는 이렇게 비교도 할 수 없이 차이가 나는 법입니다.
요셉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근에 죽지 않고 생명을 보전 했습니까? 하나님을 인식하며 성실하게 살아온 요셉 때문에 형제들과 애굽 백성들이 다 기근을 피할 수 있었잖습니까? 하나님을 인식하는 신앙생활은 많은 손해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식하며 매사를 성실하게 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결말을 기대하며 요셉처럼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선조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차이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2)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창12장10-20절과 창16장 1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은 흉년이 들었을 때, 가족을 이끌고 직접 가나안을 떠나 이방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들은 흉년이 들었다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므로 얼마나 큰 수치를 당합니까? 아브라함, 이삭이 동일하게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하다가 결국 그 땅의 왕에게 부인을 팔아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 싫어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무리 어려워도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으려는 노력과 의도가 이 구절에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가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초청으로 불가피하게 애굽으로 이주하게 될 때,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 뜻을 확인한 후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46: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아브라함과 이삭은 환경을 따라 가나안을 떠났지만, 야곱은 아무리 극한 기근이 들어도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 땅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때 야곱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 말씀대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를 합니다.
스스로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환경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났던 아브라함과 이삭은 부인을 팔아먹는 큰 수치를 당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났던 야곱은 기근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게 됩니다. 환경을 쫓아 사는 사람과 약속의 말씀을 쫓아 사는 사람의 차이는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 것입니다.
3. 나에게 닥치는 환경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6)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나아와 절했다는 것은 일찍이 20년 전에 요셉이 꿈꾸던 꿈이 이제 성취되는 것입니다.(창37:6-11)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절하매’에 해당되는 ‘솨하(התשׁ)’는 창37:7,9,10절의 요셉의 꿈 이야기에 나오는 ‘절 하더이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절하다’(43:28)는 뜻이 동사로 ‘카다드(דדק)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솨하(התשׁ를 사용한 것은 형제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셨던 꿈을 철저하게 이루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요셉의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성취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과 계시는 인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잊혀 진 것 같지만 하나님은 가장 적합한 때에 당신의 뜻을 성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절망적이게 보이고 어두운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으며 반드시 그의 때에 성취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야곱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자 야곱은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어 양식을 구해 오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섬기는 사람에게 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어려움이 찾아옵니까? 세상 사람들도 조롱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이것 때문에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애굽 뿐 아니라 가나안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이 어려움 당하는 것을 내버려 둬서 그럴까요? 아니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네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분명히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을 모르는 척 하지 않으십니다. 이유 없이 곤경에 빠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애굽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약속의 땅을 굳게 지키며 살아온 야곱이 있는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과 요셉을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존을 위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요셉과 야곱의 아들들, 즉 요셉은 그의 형들을 만납니다. 이처럼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든 것은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과 요셉을 만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러한 내막을 알지 못하고 단지 생존을 위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셉의 형들은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가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갔는지도 모릅니다. 기근이라는 환경을 원망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칠년의 풍년과 칠년의 흉년은 분명 하나님의 의도가 숨겨진 환경이었습니다. 생각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이 생존을 위해 갔지만 배후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을 만나도 그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실패가 있으실 수 없고, 모든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불꽃같은 눈으로 머리털까지 헤아리시는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현재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위기의 상황일찌라도 하나님의 개입 없이 우연히 된 것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주님의 뜻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아니해도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내가 불편하다든가, 감당키 어렵다든가 좋다든가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계획하신 대로 일하시는 현상입니다 성도라면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아닌, 하나님 뜻대로 반드시 이뤄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환경을 변화시켜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이 환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23편에서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드는 환경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해도 두려움과 불평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4. ‘없어진 하나’의 위대함
13절 읽어봅시다.
<13)그 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의 형들은 지금 요셉에 대하여 “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중요성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내가 싫으면 없어져야 하고, 죽는 대상이 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없어진 하나’(13절) 그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미워하고, 싫어서 없어졌으면 했던 그 하나, 그들에게는 없어졌으면 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 그래서 죽이려고 했던 존재,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먹은 요셉, 그 하나가 지금 20년이 지난 후 그들 앞에 애굽의 총리로 그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존재로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비록 미워하고, 죽이려 해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내가 선 자리,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꿈, 소원,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9절). 한번 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적 사명, 역사의 흐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없어진 하나’(13절) 같은 존재,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 존재중 하나인 요셉이 역사의 현장에서 ‘통치자’(6절)로서 사람들을 살리고, 그의 가족을 살리고, 또한 가뭄과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이집트와 나라들을 살리는 인재가 되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는 ‘없어진 그 한사람’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 지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하찮게 여기고, 미워서 차라리 없어졌으면 했던 그 ‘없어진 존재 하나’가 얼마나 귀한 존재가 되었는지? 얼마나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시고, 사랑하시는지? 사용하고 계시는지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존재가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