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45)-----------
요셉의 상처와 치유
190324낮 (창41:51-52)
<51)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1)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차남의 이름을 2)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과거 없는 사람 없고, 아픔과 상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만의 과거와 상처가 있고 아픔과 눈물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과거가 있고, 상처와 아픔이 있다는 자체는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서,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여, 본인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력을 끼치는 경우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인천여성인력개발센터 남상인 관장님은 그의 칼럼에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생애전체를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2010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톱뉴스를 장식했던 김길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예비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후 잡혔는데...일말의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가 중학교 때 자신이 어린 시절 버려진 아이였고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충격과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데서부터 삐뚤어짐과 일탈이 시작되었고 결국은 살인마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이 사이코패스적인 살인과 묻지마 폭행, 반사회적인 적대감을 갖게 되거나 반대로 심한우울증이나 자살의 이면에는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결정짓는 요소들에는 생각, 가치관, 기질, 성격, 감정 등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우리의 행동이 나옵니다. 그런데 가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행동이나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마음의 상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겪은 부정적인 사건이 내 마음 속에 각인되어서, 그것이 나의 삶에 역기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우리 속에 생깁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상실했을 때, 마음에 상처가 생깁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실패로 끝났을 때, 내가 사랑 받기를 원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그리고 남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자존심이 짓밟혔을 때, 우리 마음속에 상처로 남게 됩니다.
한빛감리교회 김태원목사님의 <성처의 치유>라는 칼럼에서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것은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이 천국생활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에 모이는 신자는 사람이지 천사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은혜 받았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하지만, 상처 받았다는 말도 그에 못지않게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신자들이 상처받았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상처를 많이 받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20세기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빈센트 반 고흐는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려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그림을 통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려는 마음으로 화가가 되었는데요,... 그는 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하여 고민이 많았던 화가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 2층 창가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다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됩니다. 어느 여인이 당시에 화물 포장제로 쓰였던 천조가리를 붙여서 만든 옷을 입고 자나가는데...화물 포장제로 쓰던 천이라 그곳에 ‘취급주의!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는 천조가리로 옷을 해 입어서 옷에 그대로 취급주의! 깨지기 쉬움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옷을 입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그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의 물음에 영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깨지기 쉬운 존재! 그러므로 취급주의! 즉 조심해서 다루어야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인간이 강한 것 같지만, 참으로 깨지기 쉬운 존재, 상처입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조심히 다뤄야 할 존재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야베스’라는 이름도 고통이란 뜻인데, 우리의 인생이 고해(苦海)이고 아픔의 삶입니다. 그래서 아픔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인간은 다 상처를 갖고 있고 마음의 병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간에게 죄가 들어 온 후부터 인간은 죽음과 질병과 상처를 받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 역시도 과거의 아픔이 있었고, 사람에 대한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요셉을 바라봐도 요셉이 엄청난 상처에 직면했었고, 또 그 상처 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었을 수 있다고 짐작 할수 있을 만큼 요셉이 당한 일들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친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어머니 라헬이 죽었습니다. 다른 어머니들의 구박, 배다른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 결국은 그 형들에게 구덩이에 던져져 죽을 고비를 넘기고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가고, 애굽의 노예시장에서 보디발의 노예로 팔리고,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댓가로 강간범으로 몰려 감옥생활을 2년이나 하게 되고, 그곳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 해몽을 잘 해줘서 그가 복직 후에 그를 꺼내 줄줄 알고 기대했지만, 감옥에서 나가자마자 자기 같은 노예를 잊어버리고 외면당하는 배신감..... 어릴 때부터 요셉에게 불어 닥친 이런 환경들은 요셉으로 큰 상처를 입히고, 요셉의 성격이나 인격형성에도 악영향을 미쳐야 함에도 성경은 그런 요셉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상처가 없었을까요? 그가 상처가 없었다면 인간이 아니죠? 오늘 본문의 짧은 두 절에서 우리는 요셉의 상처를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본문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51)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1)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차남의 이름을 2)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이 짧은 구절, 요셉의 말에서 우리는 그동안 요셉이 얼마나 힘들었고,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왔는지, 외로운 이국땅에서 혈혈단신으로 살면서 힘들게 고난들을 이겨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고 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고 이름을 ‘므낫세’로 지으면서 ‘하나님이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요셉이 자기 집안의 일, 엄마가 어릴 때 죽고, 배다른 형들의 미움 그리고 그들의 인신매매로 애굽에 팔려 노예생활을 십 수 년 하게 되었던 모든 일들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잊게 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짓고 하나님이 내 수고에 복을 주셔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말 속에서 요셉이 얼마나 힘들고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 왔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이 이렇게 엄청난 고난과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잊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그 상처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가지거나 성격이 포악해지거나 복수심으로 불타 자기 할 일을 못하는 폐인이 되지 아니하고, 그 상처와 아픔 때문에 결코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 상처와 아픔을 딛고, 더욱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사람이 된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그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여 하루하루가 고통스럽습니다. 때로는 견디지 못하여 자살합니다. 때로는 인격 장애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힘들게 합니다. 오늘은 요셉이 과연 이런 엄청난 상처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성공하는 인생의 모델이 될 수 있었을까? 요셉처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상처를 치유 받고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 제대로 된 내 삶을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을까? 요셉의 상처치유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자신의 상처를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의사가 제일 힘들어하는 환자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자신이 환자인 것을 인정 안하는 사람입니다. 치료의 시작은 자신이 어떤 질병이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상처를 알고 인정해야 치유가 가능해집니다. 감춘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끄럽고, 더 큰 상처가 될까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상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상처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간의 본성이 그런지 사람은 내가 준 상처는 잊고 살지만 받은 상처는 계속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내가 받은 상처가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내 안에 상처가 있는지를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 마음에 미움과 증오가 있으면 상처가 많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괜히 미운 생각이 들면 상처가 많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피하고 싶으면 마음에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마음속에 분노가 축적되어 있으면 상처가 많은 것입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있다면 상처가 깊은 것입니다. “누구든 하나 잘못 걸려봐라...가만히 안둘 거다” 하면서 괜히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역시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려 할까요? 후자의 사람입니다. 사회에서 인정을 못 받았기 때문에 인정에 대한 목마름과 상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교회에서 인정받으려 합니다. 이런 경우 교회 안에서 순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역기능을 합니다.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교회에서 중직을 맡으면 안 됩니다. 자기 의견에 따르지 않으면 다 자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고, 목회자를 힘들게 하고, 교인들 힘들게 합니다. 또한 비교의식이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남보다 잘나면, 교만해지게 만들고, 남보다 못하면 시기와 질투가 생깁니다. 자기가 못나서 문제가 아니라 남이 나보다 더 잘나서 문제입니다. 자기가 못살아서가 문제가 아니라 남이 잘 살아서 문제입니다.
「백설공주」라는 동화에 보면 왕비는 천하절색의 미녀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불쾌했습니다. 이 비교의식으로 인하여 왕비는 백설공주에게 해를 가하고, 마침내 자기도 파멸하고 맙니다. 비교하는 인생을 살지 않았다면,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살았을 왕비가 그만 비교하다가 불행하게 인생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못생겼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비교하는 데서 나옵니다. 내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동료가 자기보다 더 지혜로워서 화가 납니다. 여러분의 내면에 이런 모습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런 감정들이 통제가 안 되고 곁으로 표출이 된다면 상처가 심각하다는 것으로 진단해야 합니다.
둘째,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항상 그 상처받은 시점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무슨 일이 나면 그 상처받은 시점으로 돌아가게 되고, 결국 별것 아닌데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상처가 깊을수록 아주 사소한 것에 시험을 받습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가난해서 운동화 제대로 사 신지 못했습니다. 학교 가면 운동화가 헐어서 늘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운동화 제대로 신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 운동화와 구두를 사는 것이 이 분의 취미입니다. 하루는 이 분의 친구가 아무런 생각 없이 구두를 닦고 다니라고 했는데, 그 말에 갑자기 멱살을 잡고 싸웠습니다. 이 분은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픈 부위를 건드리면 예전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치유되지 못하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생활 하는 성도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사실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듣고, 예배가 은혜로워도 은혜 받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돌짝밭 같은 강퍅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은혜를 못 받고, 설교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신자는 상처가 치유되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그 따르는 사람이 위험합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사울은 평생 다윗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늘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런 노력 속에서 마지막에는 판단력도 잃고 결국 무리한 전쟁 속에서 부하들을 다 전사시키고 본인은 자살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비극적인 인생입니까?
모차르트의 이야기를 다룬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가 보여주는 교훈 중의 하나가 열등감은 인생을 파멸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궁중악사였던 안토니오 살리에리. 이 사람은 훌륭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를 발견하고, 그 순간부터 질투의 감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인생이 무너져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질투가 그를 사로잡자 더 이상의 그의 재능과 은사가 계발되지 못하고 그의 인생은 비극적인 퇴락을 시작합니다. 상처는 반드시 치유되어야 합니다.
제가 1988년 9월에 첫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조그마한 농촌마을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농촌이 그렇지만, 농사도 힘들고, 삶이 힘드니까 술 드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술 드시면 조용히 집에 가서 주무시면 좋은데....꼭 교회 와서 주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주정하고, 행패부리는 사람들을 대하는 제 자신한테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술 취한 사람들을 대면할 기회가 없어서 몰랐는데... 목회 나가서 술주정하는 사람들을 대면하게 되니까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술주정 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들에 대하여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너그럽게 타이르고 술 취해서 그러거니 해야 되는데... 목회자인 제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입니다. 주체를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해버리고 싶어집니다. 교회 와서 술주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그럴 때 마다 제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로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이러지? 제 스스로가 저한테 당황할 정도였습니다.(나같이 맘 착한 사람이 ㅎ) 하나님! 제가 왜 이러죠? 왜 술주정하는 사람만 보면 분노가 끓어오르고, 어떻게 해버리고 싶어지는 이 감정을 컨트롤이 안 될까요? 이 문제를 붙들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의 어릴 때 모습을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어릴 때, 우리 할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셨는데, 이분이 술만 드시면 우리 할머니를 죽여 버린다고! “배지 갈라 죽인다” 낫 들고 쫓아다니고... 우리 할머니는 도망 다니고...어린 나는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어머니 치맛자락 붙들고 뒤로 숨고... 그런 내 어릴 적 모습을 떠오르게 하시는 거예요... 성인이 될 때까지 잊고 있었는데요...술주정하는 사람을 만나니까...그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되니까... 분노로 표출이 되는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치유해 달라고...그런 사람들을 만나도 목회자답게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지금은 그런 분들 만나도 많이 너그러워졌지만, 제가 일부러 맞닥트리지 않고 피하죠.....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도 모르는 상처들이 우리 내면 깊숙이 먼지가 쌓인 채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상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비슷한 환경을 만나고 상처를 만났을 때...그것이 내면 밖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이런 상처들까지도 우리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제대로 쓰임 받을 수 없고, 우리가 가진 달란트가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을 제대로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인격형성에도 해가 됩니다.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고, 인간관계도 제대로 맺지 못합니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하게 되면 결혼 생활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원수가 되고 맙니다. 최근의 상처나 오래 묵어 내면에 가라앉아 먼지가 쌓인 상처까지도 치유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요셉은 어떻게 치유 받았을까요?
요셉처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치유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세월이 약일 될 때도 있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망각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요셉이 한순간에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외치며, 기도했다고 단번에 상처와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도 연약한 사람이기에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상처와 아픔을 본격적으로 치유하시고 회복케 하시는 일을 시작한 때는,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시점에서 2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때였습니다. 많은 경우,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가라앉고, 문제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는 긴 세월 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들에게로부터 배신이라는 아픔과 상처를 받은 요셉을 22년이라는 시간동안 그의 상처와 아픔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아물 수 있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기도하고 작정했다고 과거에 받았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일은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정리를 하고, 그 상처와 아픔의 문제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시간을 주시고, 때를 기다리십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과거에 받았던 상처와 아픔 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신 분들이 있으십니까? 성경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치유케 하신다. 회복케 하신다 라고 약속하고 있는데, 그 약속이 내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시험과 낙심을 경험하십니까? 조금 더 기다리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을 아시기에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라는 싸인을 주시는 것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 상처와 아픔에 대해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시기에, 좀 더 개관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까지, 하나님도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상처에 대하여 극복하고 힘을 낼 수 있도록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합니다. 조급하게 다그치면, 더 깊은 상처와 무력감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상처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치유되는 것들입니다.
2. 바쁘게 사는 것도 치유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할 일이 많게 하셨습니다. 즉 바쁘게 살도록 일감을 많이 주셨습니다.
사람이 바쁘면, 자기의 상처와 아픔에 집중할 시간이 적어집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그 곳의 제반 업무를 모두 맡아서 감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총리가 되어서는 애굽 전역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일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이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상처와 아픔에 너무 집중하다보면, 손에 일이 잡히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을 때려 치고, 가정까지 내팽겨 치기도 합니다. 과거의 일 때문에, 현재를 포기하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과거의 일은 이미 벌어졌고, 다시 되돌아가거나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 때문에 현재와 앞으로 내게 남겨진 책임과 기회들을 헛되이 날려버려서는 안됩니다. 바쁘게 일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의 상처와 아픔이 무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중 하나가 망각이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망각하는 것은 안 되지만, 내가 경험했던 아픔을 잊어버리고, 상처를 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상처가 되고 아픔이 크면 절망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의 유혹에 빠집니다. 그러면 더 큰 상처와 수렁에 빠져서 그 때는 정말로 그 아픔과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그럴수록 더 바쁘게 일해야 합니다. 돈 벌라고 발버둥 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되 보람되게 일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요셉도 열심히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면서, 요셉은 늘 섬기는 자세로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그리고 총리가 되어서도 요셉은 사람들을 섬기는 태도를 유지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을 때 뿐 만 아니라,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에도, 나라를 섬기고, 백성을 섬기는 일을 요셉은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까? 그 상처와 아픔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할 때, 섬기는 자세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합니다. 자기가 어떻게 상처를 극복하고, 우울증을 극복했는지를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면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의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생겼던 마음의 분노와 화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치유해 주셔야합니다.
사람의 위로와 치유는 한계가 있습니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다. 아무리 바쁘게 살면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본문 다시 읽겠습니다.
<51)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1)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차남의 이름을 2)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마8: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모든 병을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병’은 ‘질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약한 것’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아스테네이아’라고 하는데, 상처, 약함, 겁, 소심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다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통해 우리의 상처가 치유된 줄 믿습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다 짊어지셨기에 우리는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치유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원망불평을 해대는 지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진중에 불뱀을 보내서 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이때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라 하시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불뱀에 물린 상처가 낫고 살았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상처가 치유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 53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제가 첫 목회를 나간 곳이 시한부 종말론에 연루된 교회였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시한부종말론에 쇠뇌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이단 문제를 해결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밤12시만 되면 술 먹고 와서 사택 문을 걷어차면서 당장 꺼지라고 욕을 퍼붓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어느 날 술 먹고 교회 와서 차를 부수고 기물을 부습니다. 그것을 말리는 저를 폭행합니다. 쇠파이프를 휘두릅니다. 서너 시간을 그러는데,,, 그곳에 햇수로 5년 정도 있었는데... 다행이 하나님 은혜로 종말론 문제는 해결되었고, 교회는 정상을 되찾았지만, 저는 그 상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회는 물론이고, 사는 것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제주도로 왔습니다. 결국 제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20일을 금식했습니다. 그런데 20일 금식을 마쳤을 때에 하나님은 놀랍도록 저의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 그 기억들이 상처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간증거리가 되었습니다. 상처를 치유 받고 나니까 그 모든 상처를 능력으로 바꿔주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그렇게 폭행했던 사람도 용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주 땅에 보내셔서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게 하시려고 나를 강하게 하시려 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주에 와서 개척하고 3년쯤 지났을 때인가요? 어느 날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나를 폭행했던 그 집사였습니다. 그분이 목사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용서만 해주신다면 다시 교회 나가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겠습니다! 그때는 이미 제가 그 상처를 하나님으로부터 치유 받았을 때고 마음으로 그를 용서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저는 용서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신앙생활하시고 하나님 잘 섬기세요... 몇 년 전 그 교회가 큰 수해를 입어서 방문했었는데...그분이 신앙생활 잘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요셉의 상처를 다 치유해 주신 후 형들을 만나게 하시고, 형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시고,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게 하셨습니다. 상처의 완전한 치유는 용서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이나 상처를 받은 사람이나 모두를 그 상처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은 용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처를 받지도 않고 상처를 주지도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단 한군데입니다. 바로 공동묘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어쩌면 일상입니다. 세월이 지나도 치유가 되지 않고, 바쁘게 살면서 잊으려 해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으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바로 여러분의 그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가시면류관에 찔리셔서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창에 찔려 쏟아지는 옆구리의 선혈을, 양팔과 두 발에 박힌 못 자국에서 흐르는 피를....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상처 받은 나의 영혼을 바라보시며 흘리시는 주님의 눈물을 보십시오.... 상처를 부둥켜안고 밤새우고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통곡하는 여러분 곁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는 성령님을 보십시오....................................................................... ;;;
이 시간 치유의 영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