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53)-----------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예언과 축복(2)
190623낮 (창49:16-28)
<16)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9)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20)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21)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22)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27)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28)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아멘
야곱의 노년은 만나는 사람마다 축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49장은 야곱이 임종하기 직전 자기 아들들을 모아놓고 한 예언과 축복입니다. 지난 시간은 야곱의 12아들들 중에 특별히 첫째부인 레아를 통하여 낳은 여섯 아들들에 대한 예언과 축복을 기록한 1-15절까지의 본문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항상 가정과 교회와 이웃과 나라와 세계를 축복하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참고적으로 이 야곱의 축복의 특징이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나이순이 아니라 모계에 따라서 축복이 주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레아의 아들들. 실바, 빌하, 라헬의 아들로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속이 아주 중요합니다. 같은 야곱의 아들이지만 어느 어머니에게 속했느냐 따라 구분하여 축복했듯이 예수 믿어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어느 교회에 속했느냐도 아주 중요합니다. 마지막 말세에는 더욱 결코 무시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씨스템이 잘되어 있고, 그렇지 못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시설이 잘 갖추어졌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세속적인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해 있느냐? 입니다. 주님이 주인 되시고, 성령님이 이끄시는 교회이냐? 입니다. 단언컨대 우리교회는 그런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발버둥 치며 기도합니다.
둘째특징은 아들들의 행위에 따라 각기 저주와 축복이 주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상급은 충성함으로 받는다는 말이 맞습니다. 게으른 종과 충성된 종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죠? 그게 좋게 보이죠? 예배만 달랑 드리고 편안하게 믿는 것이 좋아 보이죠? 교회 때문에 눈물을 흘려보지 않아도 되고, 찬양대나 교회학교교사, 주방봉사 남녀선교회... 궂이 이런 거 하면서 피곤하거나 싫은 소리 듣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이 마지막이라면 저부터가 그렇게 살 것입니다. 저부터가 그렇게 신앙생활 할 것입니다. 굿이 목사로 목회할 필요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간이요 다음세상은 영원입니다. 야곱이 아들들에 대하여 축복을 그들의 행위대로 한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충성했느냐? 얼마나 순종하고 헌신했느냐? 에 따라 상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상급은 충성과 헌신으로 받는 것입니다.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셋째특징은 이 축복이 운율을 가진 시 형식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축복 받느냐 저주 받느냐는 하나님의 기쁨이냐 슬픔이냐를 가름할 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넷째특징은 이 축복은 야곱의 감정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 속에서 예언적으로 선포되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믿음대로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름다운 믿음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기억해야할 것은 이 축복은 언약 백성들에게 한 축복이기 때문에 결코 한 개인이나 가문에 그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전 인류를 향한 축복이라는 점입니다. 즉 야곱의 12아들들은 조만간 12지파로 발전하고 이는 신약시대의 12사도로 이어지며 마침내는 하나님 나라의 12기초석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12아들들의 수는 결국 구원 받을 영적 이스라엘의 완전한 수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7장4절의 144,000은 구약의 12지파 곱하기 신약의 12사도 곱하기 충만수 1,000을 곱한 수로서 신구약의 모든 구원 받은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즉 이 예언은 우리와도 관계가 있는 귀한 예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아들들의 행위에 기초하여 발해졌다는 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어떻게 믿음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실바, 빌하, 라헬이 낳은 여섯 아들에 대한 야곱의 예언과 축복의 말씀을 기록한 본문을 가지고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예언과 축복(2)>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1. 단에 대한 예언
16-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6)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에게는 독사가 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단이 받은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입니다. 독사 같은 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여기 독사는 모래 색깔의 보호색을 띤 맹독성 뱀으로 근동의 황무지에 사는 ‘살모사’를 가리킵니다. 낙타 같은 큰 짐승도 이 뱀에 물리면 즉사할 정도로 맹독성이 있습니다. 단지파가 사탄을 상징하는 뱀, 독사로 비유된 것은 그들이 사탄의 하수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볼 수 있고, 이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단지파의 성읍이 이스라엘 최초로 우상숭배가 들어온 근원지가 되었고,(삿18:1-37) 한편 초대교회 교부들은 궁극적으로 적그리스도가 단 지파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그 이유는 계시록에 나타난 구원의 인 맞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에 단지파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계7:4-8절입니다.
<계7:4-8, 4)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그래서 야곱은 단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우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라고 기도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 되었던 자가 독사 같은 자가 되어야 되겠습니까? 타락하여 사탄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때가 되면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 했는지를 각 사람마다 그 공력을 불로서 시험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른 믿음에 서 있지 못하면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시험이 찾아올 때, 낙심치 말고 자기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2. 갓에 대한 예언과 축복
1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9)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갓은 군병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이 말씀은 갓 지파의 호전성과 용맹성에 대한 예언입니다. 갓 지파는 가나안 땅 점령 후 가나안의 서안이 아니라 외지인 요단 동편에 기업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지파에 비해서 자주 외적의 침입을 당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기업을 지키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승리함으로써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대상5:11-18, 12:8-15).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에게 주시는 십자가 군병의 축복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군사로서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 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 하셨는데 이것은 방해를 이기는 적극적인 믿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은혜 생활하려면 이 전사의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사의 믿음은 환경에 굴하지 않습니다. 힘들다고 도망치지 않습니다. 전사의 믿음은 맞서 싸워서 이기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갓 지파에게 준 축복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의 축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귀를 이기고 나니까 능력 받은 간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는데 시험을 이기니까 능력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축복이 오는 전조현상입니다. 시험을 이겨야 축복이 옵니다. 이것은 능력 받고 축복받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런 갓 지파와 같은 군병의 신앙을 갖길 축원합니다.
3. 아셀에 대한 예언과 축복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0)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아셀은 왕을 공궤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아셀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은 지중해 해변가 갈멜의 낮은 평야지대로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해서 밀과 기름 등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 식물은 왕궁의 식량으로 조달되었습니다. 솔로몬도 원목을 공급한 두로왕 히람에게 이곳에서 소출되는 식량을 제공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씨를 심으면서도 김을 매면서도 거름을 하면서도 수확을 하면서도 수확한 것을 가공하면서도 항상 머리에 떠나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왕을 섬기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양질미를 생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하든지 매사에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최선을 다 할 때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로 갚아주십니다.
이 원리는 가정에서도(엡5:22) 이웃에게도 동일합니다. 이웃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7-40)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주님을 왕을 섬기듯이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과 교우와 가족도 주님을 섬기듯이 해야 합니다. 이제는 이 왕으로 섬기는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철저히 순복하고 겸손해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4. 베냐민에 대한 예언과 축복
2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7)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베냐민에 대한 예언은 한 마디로 이리가 되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냐민 지파는 대단히 호전적인 지파요 용감한 지파였습니다.(삿3장, 20장, 삼상11장) 그런데 야곱의 예언은 싸움 잘하는 그 기질보다 이리의 식성에 핵심이 있습니다. 먹고도 또 먹으려 하고 또 먹고도 또 돌아보며 또 먹으려고 하는 것이 이리의 식성입니다. 이 식성이 우리의 영적 생활의 요소에서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정상적인 영적생활을 유지하려면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먹고도 또 먹고 싶고 먹고도 또 달라하고 먹고도 으르렁거리며 빼앗아 먹고도 부족해 감추어 놓고 또 밤에 나누어 먹을 만큼 그런 사모하는 심정입니다. 먹고도 또 돌아보고 먹고도 또 돌아보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은 약 두 가지입니다.
먼저, 개인적인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27절 상반 절에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그랬습니다. 다윗을 보세요. 다윗이 영적으로 부족한 사람입니까? 영적으로 심히 풍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를 보세요. 시42:1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119:97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그리고 시119:131에는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시로서 시편 84편이 아주 유명하지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10)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을 팔복에서 첫 번째로 하셨습니다.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 받고도 또 사모하고 더 사모하는 마음, 우리 주님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늑대의 식욕과 같은 마음입니다.
27절 하반 절에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우리로 치면 자기가 얻은 말씀들을 다른 무리와 같이 나누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나눔은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가장 많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들도 이리처럼 평소에는 개인 혹은 가족 단위로 살다가 필요시에는 여러 가족들이 한데 모여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예배입니다.
이리처럼 사모하되 함께 모여 말씀 듣고 기도하며 공동적인 사모함이 없이는 우리 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나 혼자 예배하고 나 혼자 성경연구하고 나 혼자 하겠다고 하는 사람, 가령 무교회주의 같은 사람들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혹시 보이는 교회의 부정적인 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초대교회가 보여준 그 모임과 교회의 직책과 제도를 송두리 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주시는 풍성한 축복과 우리에게 맡기신 역동적 교육과 선교사역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장작개비도 모아놓아야 타지요? 그러나 흩어놓으면 다 꺼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항상 교회에서 살아서는 안 되지만 모이되 이리의 식성과 같이 모이고 또 모이고 또 모이고 싶어 하세요. 주일예배 한 번으로 만족하십니까? 우리 영혼의 특성 상 주일예배 한 번으로는 그 갈망을 다 채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삼일기도회도 필요하고 그런데 삼일기도회만 나오면 다 끝납니까? 삼일기도회 나와도 새벽기도회 나오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삼일기도회와 주일 사이에 간격이 넓으니까 그 사이 속회도 드립니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기를 “온 세계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인데 왜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만 예배해야 합니까? 산과 들에 나가서도 그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예배하세요.” 했다가 교인들이 너도나도 주일날 산과 들로 다 놀러가서 결국은 세상사람 다 되더랍니다. 대단히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공동의 예배를 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굶주린 이리와도 같이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다윗과 같이 주님을 사모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채우십니다. 우리 모두 개인적으로 은혜 받고 공동으로 은혜 받아 충만한 영적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끝으로, 2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8)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12아들들을 축복한 야곱의 축복을 결론적으로 말씀한 대목이 28절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 하였더라” 준비된 그릇 만큼 축복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담을 그릇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문제가 아닙니다. 복을 받을 내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량 그 이상을 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복의 분량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하는 내용을 보면, 날 때는(出生) 서열이 정해져 나왔지만, 축복은 날 때의 서열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되리라” 꼭 먼저 믿었다고, 믿은 지 오래 됐다고 축복을 먼저 받고, 많이 받는 것은 아닙니다. 행한 대로, 헌신하고, 충성한대로, 그릇을 준비한대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 교회 오셔서 처음보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까? 줄었습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까? 줄었습니까? 봉사하고, 헌신하고, 교회를 찾는 횟수가 더 많아졌습니까? 줄었습니까? 처음 결단하고 마음먹었던, 하나님과 약속했던 대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런저런 핑계만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면 여러분 각인의 분량은 어느 정도 될까요? 분발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