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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말씀

창세기 강해 54.용서하기도 힘든데 사랑하라니요(창50:15-21)-190714낮

작성자소로(小路)|작성시간19.07.13|조회수1,265 목록 댓글 0

창세기 강해54)...........

                                         용서하기도 힘든데 사랑하라니요

190714낮                                                  (50:15-21) 

 

<15)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아멘

 


  오늘로써 창세기 강해를 마칩니다. 오늘은 창세기 마지막 장(50)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20182월에 창세기 6장부터 강해를 시작했는데...오늘 마지막으로 창세기의 말씀을 마치고 다음 주부터 출애굽기의 말씀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창세기 강해를 마치면서 창세기에 대한 개관을 다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창세기는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이며 모세오경(토라)의 첫 번째 책이기도 한 창세기의 기록자는 모세입니다.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1장은 흔히 원()역사(Primeval‎ history)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에는 만물과 인간의 창조와 언약,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 홍수 심판, 그리고 대홍수 이후에 시작되는 나라들의 기원 등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250장은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언약의 체결,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언약, 그리고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요셉을 통한 야곱가문의 애굽으로의 이주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시작을 보여 주는 책입니다. 본서의 이름도 창세기의 첫 단어 tyvioare ; 브레쉬트>가 그대로 사용되었는데, 그 뜻은 태초, 시작, 기원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는 한마디로 모든 것의 시작을 말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창조된 우주의 시작, 인류의 기원, 가정의 시작, 종족과 민족의 시작, 안식일의 시작과 죄의 기원, 그리고 선택된 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시작 등 모든 것의 기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작을 통해서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 주었는데, 그러한 계시의 하나가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형성을 위한 준비는 단순한 민족의 형성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준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 구절로 요약하면 창세기는 인류의 기원과 인간의 타락 그리고 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기록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50장은 1-14절까지 야곱의 장례, 그리고 오늘 본문은(15-21) 야곱의 죽음 이후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요셉에게 재차 용서를 구하고 요셉은 형들에 대하여 용서와 사랑을 거듭 약속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으로 22-26절에 요셉의 죽음이 기록됨으로 창세기가 끝이 납니다.

 

  오늘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15-21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본문으로<용서하기도 힘든데 사랑하라니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큰 은혜 되시길 축원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창세기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죄로 인한 타락으로부터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시는가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락이기도 합니다. 그 구속사의 최 정점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 값을 치루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을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의 사랑입니다. 창세기는 그 구속사(구원역사)의 시작에 대한 말씀이구요....

 

  그래서 창세기 곳곳에 예수그리스도의 표상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요셉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요셉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은 삼십에 팔렸듯이 요셉도 형들에 의해 팔렸고,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가 구원 받았듯이 요셉을 통해 요셉의 가문이 가뭄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듯이 요셉도 원수 된 형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요셉을 장차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경은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록이구요...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이와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야곱이 죽고 나자 요셉의 형들은 야곱의 보복이 두려웠습니다. 지난날 그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고, 애굽에 팔아넘긴 일 때문에 혹시 아버지가 죽은 후 요셉이 마음이 변하여 자기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심히 두려웠습니다. 그러니 죄 짓고는 못사는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5)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여기서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라고 말하고 있는데, “다 갚지나 아니할까를 직역하면 확실히 보복할 것이다입니다. 형들은 요셉이 아버지가 죽었으니 이제는 자기들이 저지른 악에 대하여 요셉이 확실히 보복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형들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래서 감히 요셉 앞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16-17절을 읽겠습니다.

<16)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리고 이 말을 전할 때 요셉이 울었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어 직접 요셉을 찾아와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18절입니다.

<18)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형들이 재차 요셉에게 용서를 빌 때에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9)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은 형들이 아무리 자신에게 잘못했어도 그들에게 대한 심판은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즉 복수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자신은 형들을 보복할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성숙한 신앙을 보게 됩니다. 요셉은 인간의 모든 운명, 특히 누구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자신이 대신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성도의 성숙한 신앙자세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뿐 이십니다. 그래서 롬12: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도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맙시다. 어떻게 보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내가 오히려 판단 받고 정죄 받아야할 죄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남의 눈에 티가 있으면 내 눈에는 들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7:1-5)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복수하거나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요,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냥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거품을 무는 자들이 있고, 습관처럼 그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라는 요셉의 이런 신앙이 형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면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형들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형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형들과 형들의 모든 자녀들까지 자기가 책임지고 잘 기르겠다고 말합니다.

 

  21절입니다.

<21)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용서를 넘어 사랑을 한 사람입니다. 남의 허물을 용서해줄 뿐 아니라 그 위에 더 큰 은혜와 위로를 베푸는 요셉의 마음에서 원수 된 인간을 위해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도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용서하기도 힘든데,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용서하고 다시는 얼굴 안보면 되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셉은 용서하기도 힘든데...사랑까지 했습니다.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요, 성경의 핵심이요, 기독교의 핵심사상이요...오늘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모습입니다.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에서 옥살이를 한 주인공 장발장은 어느 신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습니다. 밤중에 그 집에서 은잔을 훔쳐 도망갑니다. 도중에 형사 자베르에게 잡혀 교회에 끌려왔을 때, 밀리에르 신부는 하룻밤 재워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은잔을 훔쳐 가냐 이 나쁜 인간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은잔뿐 아니라 은촛대까지 주었는데 왜 은잔만 가지고 갔느냐고 오히려 반문했습니다. 여기서 장발장은 감동해 회개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작가는 기독교의 용서와 사랑의 정신을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35세 된 목사님이 사냥을 갔다가 멀리 노루 한 마리를 보고 조준하여 쐈는데 달려가 보니 노루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가 쏜 총에 죽은 것입니다. 법의 심판도 받아야 하지만,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지고 목사직을 사임해야만 하는 극심한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이제 내 인생은, 내 목회는 끝났구나!’ 생각했습니다. 교회와 언론이 들끓었습니다. 교인들은 사람을 죽인 목사가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느냐,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나가라고 난리가 났고. 교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중직들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 죽인 젊은 목사님을 어느 교회가 받아주겠습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목사님은 평생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목사님을 한번 용서합시다!” 이 한 사람의 용서의 제안을 온 교인들이 받아들이고, 믿어주고, 용서를 베풀어서 그분은 그 교회에서 계속 사역하게 되었고, 그 뒤로 목회 철학은 용서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설교할 때마다,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미국 최대의 교회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 목사님은 미국 침례교 총회장, 세계 침례교 총재를 지냈고, 54권의 저서를 쓴 크리스웰 목사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의 원리입니다. ‘옳고 그르다’, ‘맞고 틀리다는 법의 원리, 정의의 원리지만 기독교의 원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은혜의 원리입니다. 인간을 변화시키고 감동시키는 것은 율법의 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어다놓고 돌로 치리이까라고 질문할 때(8:3)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고 말씀하셨습니다. 외형적으로 나타난 죄의 모습보다는 근원적으로 모두가 죄의 속성을 가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셨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21).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빚진 자)를 사(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6:12)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반란사건 때,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용서하고 용서했을 뿐 아니라 양아들로 삼아 길러주고 목사까지 되게 하였습니다. 용서를 넘어 사랑을 실천한 목사님이십니다.

 

  우리는 원수를 어떻게든 용서하기 까지는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원수를 사랑까지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첫 목회를 시한부종말론에 연루된 교회로 부임해 갔습니다. 목회초년인 아무것도 모르는 전도사가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목회현장에 던져진 셈입니다. 자기들의 종말론을 공부해야 7년 대 환란을 면하고 그 종말론만 진리고, 교인들을 완전히 시한부종말론이라는 잘못된 사상으로 세뇌를 시켜 놓았습니다. 제 얘긴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기존 교회는 마귀소굴이요, 목회자는 마귀 왕이라고 가르쳐놓았으니 제 말이 들리겠습니까? 밤이면 밤마다 사택 문을 걷어차고 욕하고 당장꺼리라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어느 날은 술 먹고 와서 교회 기물을 부수고 저를 폭행합니다. 서너 시간을 폭행에 시달렸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참아야 교회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만약에 같이 폭행하거나 싸우면 교회는 끝장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 평생 겪을까 말까 하는 일들을 저는 첫 목회지 5년간 있는 동안에 다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후로 수치심과 상처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겠는 것입니다. 상처를 부둥켜 안고 몇 년을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상처가 너무 크면, 상대방에 대한 미움, 용서...이런 것 생각조차도 못합니다. 내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조차 힘든데...살아있는 것 자체가 힘든데...누구를 미워할 겨를, 용서할 생각조차 못하게 됩니다. 제주에 와서 하나님 앞에 20일 금식기도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치유 받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 기억들이 수치스럽지도 않고, 나를 아프게도 하지 못하게 됐구요...이 상처를 극복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능력으로 바꿔주시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5년 정도를 상처와 아픔에 고통당하다 그 아픔과 상처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후 5년 정도 더 흐른 후 그렇게 아픈 일이 있은 지 10여년 되었을 즈음...제가 제주에 개척하고 2년여가 흐른 후 바로 나를 폭행했던 그 집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 유00예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신다는 말 한마디 해주시면 다시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믿음생활 하겠습니다.” 잠시 침묵 후에 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이미 집사님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니 다시 교회에 나가시고 열심히 믿음생활하세요그동안 그도 많이 괴로웠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제가 상처로부터 치유 받은 것만 생각했지...용서에 대한 생각도, 상대방이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도 전혀 생각하지를 못했었습니다. 2년 전쯤인가요? 첫 목회지인 그 교회가 수해를 크게 입었다는 소식이 감리교 신문인 기독교타임즈에 났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학생들이었던 친구들이 집사도 되고, 사모도 되고 했는데...돈을 좀 모금해서 수해 복구 헌금을 들고 같이 그 교회를 찾아갔었습니다. 성전에 들어 가서보니 전교인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더라구요...농촌교회라 교인들 몇 안 되었지만...그 사진 속에 바로 나를 폭행했던 그 집사님이 있더라구요...제게 용서를 구한 이후 다시 교회 나가 열심히 믿음생활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용서한다는 한마디가 한 영혼을 주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위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서하는 것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요셉의 용서와 사랑에 대한 말씀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이요, 우리 또한 이렇게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원수가 네 집안에 있느니라여러분이 아시잖아요? 원수가 어디 멀리 있습니까? 원수가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자가 원수입니까? 아니잖아요? 자식이 원수가 되었고, 부모가 원수가 되었고, 형제가 원수가 되었고, 친구가 원수가 되었고, 성도들끼리 원수가 되었고, 사랑해서 부부가 되었다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그렇게 상처를 입히고, 배신감을 느끼게 한 남편과 아내를, 자식과 부모를, 친구를.... (: 00...전남편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

 
  여러분! 용서하세요! 여러분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용서하세요! 용서하다보면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벌써 꾀 되었죠? 대재벌 총수가 유서 세통 달랑 남겨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유서는 "대북 사업을 계속해 달라", "내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 달라"는 사뭇 사무적인 메시지, 그리고 그림자같이 따르던 심복에게 "당신 윙크하는 버릇 고치시오" 라는 허탈한 농담 외에 그가 남긴 가장 슬픈 메시지는 아들에게 남긴 유서였습니다. 그 내용은 "너하고 사랑을 많이 나누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 같았던 사람이 죽으면서 가장 가슴 아파한 것은 결국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후회였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일에 치중하느라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제대로 사랑할 시간을 가져보지 못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수십 년이 지나가 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데 거의 세월을 다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무수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배려하고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 아주 짧은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 드문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서로 사랑하기 위해 서로 관심을 기울이고 서로 배려해 주며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세리들과 식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과 판단이 무서워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향유를 붓고 머리털을 풀어 자기 발을 닦아드리며 발에 입 맞추는 여인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사랑이 진짜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진짜입니까?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적당히 선 긋고, 적당한 윤리도덕으로 포장한 그럴 듯하지만 가짜 사랑 말구요... 진짜 사랑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어린 소녀가 양손에 사과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의 엄마는 네가 두 개의 사과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 중에 하나는 엄마 줄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왼손의 사과를 한 입 베어 뭅니다. 그리고 엄마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번에는 오른쪽의 사과 마저도 베어 물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아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이기적인 아이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잠시 뒤에 왼손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거 드세요. 이게 더 달아요.” 이 아이는 욕심이 많은 이기적인 아이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눌 줄 아는 사랑이 가득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양쪽 사과를 베어 무는 아이에게 곧 바로 너는 왜 이렇게 이기적이니? 두 개 중에 엄마에게 하나 주는 것이 그렇게 아깝니?”라고 화를 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아이는 크게 실망하고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말하게 되면 그 자리에는 아픔과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서로 상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드리는 것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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