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주의 오심을 준비하라
191222낮 (눅3:1-6)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아멘
교회 안보다 교회 밖에서 오히려 성탄분위기가 더 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대형 백화점이나 쇼핑몰은 상술로 이용 하느라 더욱 화려하게 성탄츄리를 수놓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을 쇼핑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반면에 교회는 성탄절에 대한 관심이 더 인색해 집니다. 성탄츄리 하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성탄절을 세상에 빼앗긴 기분입니다. 현대인의 삶은 뭔가 기대감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성도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삶이 녹녹치 않습니다. 사회 저변은 발전하고 삶의 질은 높아지고, 편리해졌는데, 마음은 자꾸 어두워지고 힘들어집니다.
제가 감리사 때 지방목사님들 모시고 이스라엘성지와 유럽을 돌아볼 때,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었던 프랑스파리, 몽마르뜨의 언덕... 이태리로마 그 낭만의 도시...그곳에 도착하여 만난 가이드들이 하는 첫마디가 낭만의 꿈을 확깨게 만들었는데....그게 뭔지 아십니까? ‘이곳은 날치기들이 많아서 가방을 절대로 뒤나 옆으로 매시면 안 됩니다. 반드시 앞으로 메고, 품에 꼭 안고 다니세요‘ 입니다. 동남아를 가도 마찬가지 소리를 듣습니다. 외국 손님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가이드들이 첫마디 주의 사항으로 한국은 소매치기와 강도가 많으니 절대로 가방을 뒤로 메지 마시고, 밤에는 절대로 숙소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아마도 우리 가이드들은 이런 안내를 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치안이 잘 유지되고, 국민들의 의식수준 또한 높아서 안전한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현재, 우리는 어느 나라에서도 누려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우리 조상들이 누려보지 못했던 부와 편리와 평화를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마음으로 느끼는 행복감은 그러지 못합니다. 지옥 같은 나라라고 외칩니다. 죽겠다고...살기 힘들다고 ...피곤하다고 아우성입니다. 물질의 풍요와 편리한 사회저변과 마음의 평안과 행복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나라가 지옥이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지옥이지요...만족과 감사를 모르고,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탐욕이 오늘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권력자들의 억압과 폭압정치가 우리를 억누르는 시대가 지나가고, 우리의 욕심과 탐욕, 경쟁심, 시기심, 일등, 일류여야만 성공이라는 잘못된 목표의식이 우리를 억압하고, 따스하고 정감 있는 인간애 대신 분노와 불만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괴물에 쫓기는 삶을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후에 거대한 사탄의 음모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지옥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좌파정권이 들어서고, 나라는 완전히 둘로 나뉘어 날마다 집회가 끊이지 않습니다. 키를 잡은 선장이 배를 자꾸 북쪽으로만 끌고 가려고 합니다. 나라를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 사람들의 일상도 오늘 우리처럼 힘겨웠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정했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그 때 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2)고 말합니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크게 요동쳤습니다.(마2:3) 이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대강절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정말 메시야가 오셔야 합니다. 베들레헴에 나셨던 예수님이 오셨던 시대나 지금의 시대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면서 주의 길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본문 4절은 누가가 이사야 40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이 70년의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래 뜻은 이사야 선지자가 외치던 그 시대에서 700여년 후에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선포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길을 예비한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이사야는 그의 사역을 예언한 것입니다. 누가는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여 '세례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였노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였듯이 우리들도 예수님의 오심을 잘 준비하여야 합니다. 누가는 세례요한이 이사야의 기록된 말씀대로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잘 준비 하였다고 사40장 1-5절의 말씀을 본문에 인용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의 자세에 대하여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가 인용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마음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에 은혜 받으시고,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잘 준비하여 성탄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절 한 절 말씀의 의미를 풀어보겠습니다.
1.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5절)
5절을 읽겠습니다.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본 절은 지형적인 형태를 가지고 요한의 사역을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골짜기나 산, 굽은 길과 험한 길과 같은 지형을 나타내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굴욕진 마음과 하나님을 향해서 대적하는 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요한이 선포하는 회개의 세례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됨으로 메워지고, 낮아지고, 평탄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5절 앞부분을 보면,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깊은 골짜기’를 메우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현대인들은 마음에 골이 패인 이들이 참 많습니다. 상처와 소외감과 절망과 패배감, 차별 등을 극복하지 못하여 마음의 골이 패어 힘들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에 골이 패어 골짜기가 생기면 심령이 어두워집니다. 심령이 어두워지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평안대신 두려움이 지배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마음에 골짜기가 생겨서 그렇습니다. 골짜기가 깊을수록 그림자도 길고, 어둠도 빨리 찾아옵니다.
골짜기가 무엇입니까? 산에 균열이생기면서 생긴 것이 골짜기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골짜기가 생긴 것은 마음이 균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균열이 생기면 두마음이 생깁니다. 두마음이 생기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는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평강이 없어지며 여유가 없어집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마음의 균열을 방치하면, 마음에 골짜기가 생기면 정말 회복하기 힘이 듭니다. 다시 메우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균열이 깊어서 골짜기가 되기 전에 마음을 메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심령이 어두우면 주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는 까닭에,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골짜기가 생긴 두 마음으로는 성탄의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골짜기마다 돋우어야 합니다. 기도가 부족하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이 부족하면 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헌신이 부족하면 시간과 정성을 다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노력이 부족하면 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인내가 부족하면 더 인내해야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더 잘 믿어야 합니다. 이렇듯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돋울 때 비로소 은혜의 길이 열립니다. 주님이 내 맘에 오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골짜기와 균열에 은혜를 부어 주셔서 채워지고 돋우어져서 평안과 기쁨이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싱크홀(Sinkhole)을 아시지요. 땅속이 무슨 연유로 비어 있어서 어느 순간에 지반이 꺼져서 내려 안는 것을 싱크홀(Sinkhole)이라 하잖아요. 요즈음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마음에 더 채워져 있어야 할 것들이 채워지지 않고 텅 비어 있으면 어느 날 작은 충격에도 마음에 싱크홀(Sinkhole)이 생깁니다. 우리의 마음에 싱크홀(Sinkhole)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마음을 단단하게 다져주는 재질들로 채워야 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 용서, 관용, 너그러움, 희망, 믿음 등입니다. 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고 했습니다. 골짜기를 평탄케 하려면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마음의 골짜기마다 메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5절)
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본문 5절에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라고 말씀합니다. 사40:4절에는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배척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왜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마음속에 있는 교만의 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는 산마다, 언덕마다 높은 것은 낮추어야 합니다. 마음의 교만이 크던 작던 낮아져야 합니다. 우월감의 산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명예, 자기 존중, 자기 우월에 빠지면 주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마음,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 교만의 산물들을 낮춰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최고가 아니라 최선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 마굿간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높은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늘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높은데 두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마굿간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를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섬기는 곳에 주님은 계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오지 않고 섬기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마10:28)
동방박사들은 먼 길을 찾아와 아기 예수님이 계신 마굿간에서 무릎을 조아려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주님보다 낮아져야 합니다. 주님 보다 높이 있어서야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다들 주님 보다 높이 계시니 주님을 만날 수가 없지요. 마음의 높은 산 뿐 아니라, 마음의 낮은 언덕까지도 더 낮추시기 바랍니다. 교만의 높은 산을 낮추어 겸손의 평지로 만들 때, 비로소 주님도 보이고, 진리도 보이고, 은혜도 임하게 됩니다. 모쪼록 높은 교만의 산을 낮추어 겸손과 낮은 심령에 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마음을 낮추세요... 산처럼 높은 마음을 낮추시고, 낮은 언덕처럼 아주 작은 교만까지도 낮추어 평지가 되게 합시다.... 그래야 마굿간에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메시야를 만나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는 깊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산이 높아지면 마음의 골짜기는 반대로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어두운 골짜기가 깊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만의 산과 언덕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5절)
5절을 다시 읽습니다.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사40:4절에는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다닐 수 없는 험한 곳이라도 평지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여기의 '험한 곳'은 거친 상태에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분노하는 마음, 화를 내는 마음, 시기, 질투, 원망으로 독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 할 수도 없고, 이런 마음에 구주가 오실 수도 없습니다.
여기의 '평탄케 된다'는 것은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의 사역은 광야의 길을 내거나 우묵한 곳을 메우며, 언덕을 깎으며, 굽은 길을 곧게 하는 정도의 보수가 아니라 전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돌이켜 완전히 변화되게 함으로써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즉 구부러진 마음, 비뚤어진 마음을 펴서 곧은 마음의 대로를 만들 때 비로소 주님을 맞이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은 구원과 심판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것입니다. 겸손하여 말씀에 순종하며 죄를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교만한 사람은 높은 산이 깎이어 나가듯이 넘어질 것이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나사렛 사람들은 편견과 왜곡의 구부러진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치 아니하고 도리어 배척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인물이 나겠냐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형제들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굽은 마음, 좁은 마음, 육신으로 보는 눈에 갇혀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굽은 마음은 곧게 피고, 좁은 마음은 넓은 마음으로 바꾸고, 까칠까칠한 마음과 거친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런 모든 구부러진 마음을 펴서 평탄한 마음으로 구주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길 축원합니다.
눅2:36-38절에 보면, 여선지자 ‘안나’는 오랜 기다림 속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안나’는 시므온과 달리 지파 명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과부 된지 84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이 굳이 ‘안나’의 나이를 말씀하는 이유는 그 여인이 예수의 오심을 위해서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오랜 세월동안 기다렸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 모든 백성들이 메시야가 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렸는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약속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여인이 84년 동안 수절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사람들이 약속이 있으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안나’처럼 주님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사모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축복은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나타납니다. 성령의 은혜도, 은사도, 천국도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하라, 두드리라,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나’는 84년 동안 주어진 약속을 믿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사모하는 동안 드디어 응답이 오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아기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기 예수님께 합당한 예물도 준비해야 합니다. 친구나 지인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도 우리는 빈손으로 가지 않고, 선물이나 꽃다발을 준비해 축하합니다. 하물며 우리의 생명의 구주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입니다. 마음에 준비가 꼭 있어야 합니다. 이 번 성탄절에는 예수님 오심을 잘 준비하여 여러분 마음에 꼭 예수님을 모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마음의 골짜기를 메우시기 바랍니다. 교만한 마음은 낮추고, 굽은 마음도 곧게 피고, 거친 마음을 말씀으로 다지고, 성령으로 녹여서 평탄한 마음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마굿간의 마리아와 요셉처럼, 동방박사들처럼, 목자들처럼 예수님 만나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